사상과 서정의 정점을 향하여 (1) -이념에서 철학까지-
장성진(창원대 교수)
1. 조선 전기 시조의 지향 두 가닥
조선 전기 시가 문학의 흐름을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악장(樂章)을 잠시 들여다보고 가야 한다. 그것은 악장이 양식상이나 사상면에서 시가문학의 전개에 큰 구실을 했다든가 창작의 본보기로서 영향을 많이 끼쳐서가 아니라, 문학적 관습 면에서 간섭을 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가 아니라 반성의 계기로서 그러하였다. 다시 말해서 악장의 묵시적 권력성을 극복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다른 시가 양식의 발전에 전제되었다는 뜻이다. 조선조 시가 양식의 양대 주류인 시조와 가사, 그 중 가창을 필수 요건으로 삼는 시조는 더욱 그러하다. 악장의 중요한 속성은 극단적 효용론이다. 현실적으로는 왕조를 세우고, 그 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관료와 백성들을 거기에 맞추어 순치시키는 것이 악장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그 방향을 달리한다. 백성들이 모두 원하여, 그 백성들의 염원이 말로 나타나고, 그것을 수용하여 왕조를 세우고, 확인과 다짐으로 악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이상적 상태를 내보이는 시와 음악은 가장 정통성이 있으면서도 가장 새로워야 한다.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역대의 치란(治亂)을 꿰뚫어야 하고, 새로움을 위해서는 전무후무한 사실이 시의 내용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둘은 완전히 합치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효용이란 오직 이상적 인물의 이상적 정치로 한정되며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확신으로 표출된다. 이것을 실현시키거나 증명하기 위한 악장의 두 번째 속성은 배타성이다. 문학면에서도 음악면에서도 절대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다른 갈래와 상대적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으며, 쉽게 넘나들어서도 안 된다. 기존의 다른 갈래는 이 악장을 위한 재료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완성을 주장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민요이다. 실제로 민요가 악장으로 편입되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적절하지도 용이하지도 않지만, 오로지 백성들의 삶이 녹아 있다는 이유에서 악장의 재료로 활용된 것이다. 악장의 영원한 전범인 시경에서부터 민요를 앞세웠는데, 이는 하늘의 뜻이 백성을 통해서 드러나며,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치가 민요라고 하는 관념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악장에 민요를 수용한 것은 조선조 송축가가 아니라 고려의 속가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극구 배척한 속가가 수용된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악장을 제작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당위에 속하는 일이지만, “악(樂)”이 갖추어야 할 시, 악곡, 무용, 악기, 악공(樂工) 등 여러 분야는 상당한 시일을 요구하였으므로, 부득이 전대의 악장을 활용한 것이다. 이때 가장 간편하면서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은 가사를 정리하는 일이다. 기존의 노래 중에서 유학자들의 안목으로 보아 악장으로서 적합한 작품은 수용하였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남녀상열”, “비속” 같은 평가를 하여 노랫말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의 가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러 편의 속악이 왕실의 악장으로서만이 아니라 고급 관료가 주관하는 의식은 몰론 심지어 민가에서도 부모를 위한 모임에서 활용하였다. 이런 때는 새로 바꾼 유교적 가사가 아니라 원래의 노랫말을 썼으므로 서정성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악장의 효용론과 배타성은 간접적으로 동시대의 다른 시가 장르에 대한 논의나 작품집을 간행하는 데 제약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국가의 정책이 집중된 장르 이외의 고유시를 문자로 남기는 것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흔히 시조의 형성 시기를 논할 때 16세기 초반 이전의 시조가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이 늘 문제시되는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 가령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이현보가 <어보가>의 개찬 경위를 말하면서 “성현의 경전에 근거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한 대목이나, 주세붕이 경기체가를 지어 제례에 활용하면서 공격을 받자 “모두 성현의 말씀을 옮겨둔 것이지 감히 창작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것도 이러한 사정을 드러내는 예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정성과 이념성을 적절히 결합시킨 작품이 시조의 한 양식으로 나왔는데, 그것이 맹사성의 <강호사시가>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사실 설명 차원에서 최초의 연시조라든가, 강호가도라든가, 악장의 잔재라든가 하는 평가가 주어지지만, 시조사의 측면에서 보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성격이나 작품의 짜임새 양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자인 맹사성(孟思誠)은 이 시기 학자이자 관료로서 전형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말인 1360년(공민왕 9)에서 조선초인 1438년(세종 20)까지 생존하면서 주로 조선조에 활동하였는데, 80세 가까이 살면서 만년의 짧은 은거 시기를 제외하면 일생을 관직에 있었다. 고려의 관료 집안에서 생장하였기 때문에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요직을 맡았으며, 조선 건국 후에도 주로 내직에 종사하였다. 관료로서 성공은 만년에 10년 가까운 기간을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보낸 점이지만, 업적으로서의 성공은 음악 분야라고 하겠다. 이미 50대에 접어든 1411년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도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또 음악에 조예가 있어서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고도 하였다. 이런 사실은 그가 조선초 음악계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이다.
江湖에 봄이드니 미친興이 졀노난다 濁醪溪邊에 錦鱗魚 安酒ㅣ로다 이몸이 閑暇옴도 亦君恩 이샷다
江湖에 녀름이드니 草堂에 일이업다 有信 江波 보내니 람이로다 이몸이 서옴도 亦君恩 이샷다
<강호사시가>의 봄과 여름에 해당하는 두 수이다. 작자의 생애와 관련시켜 보면 아마 만년의 은퇴 후에 지은 작품인 듯하다. 맹사성과 관련된 설화에는 낚시와 관련된 것이 유독 많아서, 관직 생활 중 어느 때 귀향하여 쉬면서 지었을 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년에 가까운 때일 것이니, 창작 시기는 15세기 전반쯤으로 볼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초기 시조로서 몇 가지 중요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우선 단수 단위로 보면, 형식적 정제나 각장의 구조적 관계가 잘 이루어졌다. 초장과 중장이 충분히 유기적 대조를 이루며, 종장은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초장과 중장에서 보이는 자연 속에서의 탈속적 분위기가 종장의 충성심으로 급전되는 데는 분명히 괴리가 있지만, “한가함”이나 “서늘함” 같은 소박한 자연의 향수는 정치와 관련이 적으므로 “역군은”의 정서적 부담을 어느 정도 줄여 준다. 그렇지만 연속된 네 작품 전체를 두고 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구문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연시조의 각편으로서보다는 연장체의 속가나 악장의 한 연이 가지는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이 주제를 직접 드러내기 때문에 각편의 “역군은”이 가지는 소박함은 상투적 발언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분명한 연시조 작품이며, 중요한 시대적 의의를 지닌다. 자연 속에서 누리는 탈속적 생활은 매우 서정적이다. 그러나 그대로 끝나지 않고 군은을 끌어들여야 완성이 되니 이것은 이념의 압박이다.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두 세계의 결합은 이후 당분간 지속적으로 추구될 시조의 강력한 두 갈래 주제를 예고하는 점에서 중요하다.
2. 새로운 이념의 선명한 투영
1) 정난과 사화
조선 전기는 매우 주류 집약적 사회가 강화되는 때였다. 신분, 교육, 윤리, 관직, 문화 등 여러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에 편입된 사람들의 이념은 원칙적으로 동일하였다. 문제는 이념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아니라 이념과 현실의 괴리였다. 조선조 건국 자체가 유학자들의 꿈을 이룬 성과였지만 동시에 그들이 체험한 것은 꿈의 파괴였다. 왕조 성립 초기인 15세기는 한마디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때였다.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는 왕실은 부자, 형제, 친척, 인척간에 살육과 패륜을 예사로 저질렀으며, 또 한 축인 엘리트 관료들 역시 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살륙과 축출에 주저하지 않고 가담하였다. 이러한 광기의 사이에 세종과 그의 시대가 있었다는 건 차라리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세종조를 정점으로 하여 악장 제작은 사실상 종료되었으며, 시가 장르 재편 과정에서 유학 사상이 심도 있게 추구될 수 있었다. 세종 스스로 악장을 정리하면서, 앞 시기의 태조나 태종과는 달리 재위하고 있는 군왕을 칭송하지 말고 역대의 치란을 중요하게 다루라고 기준을 제시할 정도로 성숙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꼭 선각자의 희망대로 되어가는 것은 아니다. 세종 사후 불어닥친 광풍은 오히려 전대의 왕실 내부 갈등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 이른바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전후한 일련의 사건이 그것이다. 1452년 10대 초반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숙부인 수양대군이 황보인이나 김종서 같은 원로 정치인을 제거하고 승자의 편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고급스러운 이름을 붙인다. 급속히 인물을 규합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3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을 퇴위시키고 즉위한다. 이듬해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중심이 되고 원로 관료, 무장, 단종왕비의 측근 등이 합세하여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 하였으나 일이 어긋나 실패하고, 100 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거나 혹형을 받았다. 이번에는 패자인 선비들에게 관심을 두고 병자사화(丙子士禍)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일은 단순한 정변이 아니라 이념의 갈등이다. 세조 스스로 자신은 왕의 아들이요 아우이니 왕위에 오른 것이 부당하지 않다는 항변은 권력의 이동이란 관점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상왕이 양위 형식을 취했으니 신하들로서는 극단적 저항을 하지 않더라도 불충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양쪽은 이토록 처절했을까? 세조는 정치적 반발의 우려를 몇 배나 넘게까지 사람을 해쳤으며, 선비들은 마지막까지 명분을 내세워 저항하다가 죽었다. 그 접점에는 “꿈”이 있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세종이 설계한 너무나 원대한 꿈을 실현할 차세대 차차세대의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에게 왕위는 그 꿈을 실현하는 하나의 동력이었다. 반면에 세조는 그 꿈을 바꾸어야 했다. 이 극단적 이념의 대립이 시조의 한 경향을 만들었다.
2) 사육신의 시조
사육신의 시조는 모두 8편이 전한다. 박팽년과 성삼문의 작품이 각 2수이고, 나머지 네 사람은 한 수씩이다. 물론 그들의 문집이나 당대인들의 기록에 의한 것은 없고, 18세기 이후 가곡집에 수록된 작품들이기 때문에, 과연 그들의 작품 그대로인가 하는 근본 질문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나아가 사육신으로서 시조를 남기지 않은 이는 없으며, 그렇다고 누구도 세 수 이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마치 골고루 배정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가 하면 생육신은 원호(元昊) 한 사람이 한 수를 보이고 나머지 다섯 사람에게서는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사육신이란 이름은 그다지 필연적으로 붙여진 게 아니다. 병자사화 때 죽은 많은 사람들 중, 그때는 어렸지만 나중에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남겼으며, 스스로도 생육신 중 하나가 된 남효온(南孝溫)이 <육신전(六臣傳)>이란 제목 아래 여섯 사람의 간략한 전기를 쓴 데서 유래하였다. 생육신 또한 조려(趙旅)의 후손인 조기영(趙基永)이 <생육신합집(生六臣合集)>을 엮은 데서 유래하였다. 이런 사실을 참고해 보면 사육신의 시조가 그렇게 배정된 것은 후대인의 소망적 사고가 크게 작용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몸이 죽어가셔 무어시 될고니 蓬萊山 第一峰에 落落長松 되야이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리라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의 작품이다. 고시조 전체를 통해서도 대표적으로 잘 알려졌으며, 그만큼 하나의 전형이자 원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개인으로서 성삼문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초장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아니면 죽음을 각오한 사람으로서의 태도가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죽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문제삼는다. 중장은 하나의 심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래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 그 위에 홀로 우뚝 선 소나무. 수식어를 동반하지 않아도 모든 수식을 갖추고 있다. 종장은 의지와 신념을 아우르고 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일 때 홀로 푸르게 서 있으리라는 것은 의지이며, 천지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신념이다. 이렇게 견고하게 작가의 삶과 결부되어 있지만, 결코 개인에게 얽매이지는 않는다. 중장과 종장의 몇몇 단어를 바꾸어 넣으면 언제 누구에게나 그렇게 잘 어울린다. 그만큼 패러디에 자유롭게 열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소망을 담아 노래할 수 있는 하나의 틀, 그것은 세밀한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념의 차원에서 공감하기 때문이다. 누가,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누구나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사고는 이념의 특성이다.
首陽山 라보며 夷齊을 恨노라 주려 죽을진들 採薇도 것가 아모리 프엣거신들 긔뉘희 낫더니
제재와 작자의 태도에서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서 친숙하게 공감을 얻는다면, 이 작품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으로 충격을 준다. 독자는 작자에게 친근감이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을 가진다. 유학자로서 금기를 거침없이 깨뜨렸기 때문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개인을 넘어선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도 유학의 영원한 이상인 왕도정치(王道政治)의 모델이다. 공자, 맹자, 사마천, 한유, 주자를 거치면서 거듭 확인되었으며, “깨끗함”의 측면에서 성인(聖人)으로 칭송된 인물이다. 그리고 그 결정적 행위가 “採薇”와 “굶주려 죽음”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무시한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높은 태도를 요구한다. 그냥 굶어 죽어야 옳은데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었으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고사리는 곡식이 아니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닿은 산은 주나라의 영토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인을 비판하는 것은 유학계의 금기이고, 다른 누군가가 이런 작품을 썼다면 불경스럽거나 허튼소리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나 사육신인 작자,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은 사람에게만 이런 발언권이 인정된다. 삶과 죽음마저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며, 독자는 그 이념의 견고함에 승복한다.
金生麗水ㅣ라 들 물마다 金이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랴 아모리 女必從夫들 님마다 랴
박팽년(朴彭年)의 작품이다. 성삼문에게서도 확인되었지만, 사육신의 시조가 이념에 편중되었다고 해서 이념을 묵수하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강판 비판과 저항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이념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초장의 “금생려수”와 중장의 “옥출곤강”은 초학자의 입문서인 천자문에 나오는 구절이며, 종장의 “여필종부”는 기본적 윤리 규범이다. 그런데 작자는 이러한 권위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진리와 가치를 내세우면서 지식과 의지를 통합한다. 물에서 금이 나온다거나 산에서 옥이 난다는 상식의 함정을 넘어서서 진정한 금과 옥이 나오는 물과 산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이며, 여필종부라는 관념을 넘어서서 따를 만한 임을 따르는 것이 올바른 의지라는 뜻이다. 박팽년은 성삼문보다 한 살 위이며, 집현전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글씨가 모두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인품이 침중하고 실천하는 데 과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지적 태도는 나머지 한 편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가마괴 눈비마자 희는듯 검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임向한 一片丹心잇 變이 이시랴
옥중에서 고문을 당할 때 세조가 사육신들에게 술을 따르며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하여가’를 읊어 시험하자,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는데 그때 지은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꼭 사실을 말한 것은 아니다. 초장에서는 검은 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잠시 흰 듯하지만 곧장 검은 본색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중장에서는 반대로 원래 밝은 명월은 어두운 밤에도 제 밝은 본성을 발휘한다고 하였다. 바깥의 우주가 다 그렇듯 사람의 마음 속에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 변할 리 없다고 하였다. 강한 신념이 이념으로 표출되었다.
3. 사상적 심화와 윤리 의식
1) 16세기 지식인의 성찰
조선조 왕실과 엘리트 관료들이 저지른 자기 부정의 모순인 계유정난과 병자사화는 정치적 폭력성을 드러내었지만, 문학적으로는 견고한 이념을 표출하는 시가를 양산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이후 젊은 군주 성종의 과감한 개혁 정책과 이에 호응한 사림(士林)의 진출로 학문과 정치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듯했으나, 잠재해 있던 폭력성이 다시 나타났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면서 사화(士禍)가 연이어 일어난 것이다. 사림파의 급진 개혁에 위기를 느낀 훈구파가 김종직의 글을 문제 삼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파를 몰아내고, 그들의 복귀를 우려하여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무력해진 사림들을 죽이거나,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향촌으로 숨어들게 하였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젊은 사림들이 잠시 기회를 잡는 듯했으나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왕도를 향한 꿈은 정치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념 과잉의 꿈을 깬 자리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반성이 일어났다. 오로지 왕권을 정점으로 한 권력 지향과, 엘리트 지상주의 거대담론이 실패한 뒤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위로만 향하던 시선을 내려 사방을 돌아보는 일이고, 엘리트들만 보이던 시선에 일상을 살아가는 말 그대로의 온갖 사람(百姓)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모색하였고, 그 결과 재발견한 것이 보편적 윤리인 오륜이다. 한국 시조사에서 교훈성이 강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시기는 16세기 중엽이며, 대표적 작품은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오륜가(五倫歌)>이다. 이 무렵 송순(宋純:1493-1582)도 <오륜가>를 지었다. 이 작품은 원형을 볼 수 없지만 한시로 번역되어 그의 문집에 실려 있으며, 정철의 <훈민가> 중 오륜가와 내용이 일치한다. 뒤이어 김상용, 박인로, 박선장 등 많은 학자들이 오륜가를 지어서 한 계열을 이루니, 주세붕은 그 선구자이다.
2) 오륜가의 휴머니즘
오륜가는 당연히 교술적(敎述的)이다. 사람을 가르치려 들고, 가르치려니 권위 있는 무엇엔가 근거를 두어야 한다.
사 사마다 이말 들어라 이말 아니면 사이오 사아니 이말 닛디말오 호고야 마로리이다.
주세붕의 <오륜가> 첫 작품이니 서사격이다. 문예적 측면에서는 시조로서 아주 허술하다. 시어의 잦은 중첩이라든가 지나친 계몽성의 노출이 그러하다. 불과 석 줄, 다 해야 열두 음보 시에서 “사람”이 네 음보, “말씀”이 세 을보를 차지해 버렸으며, 여기에다 “듣고”, “배우고”도 그 뜻이 중복되니, “사람마다 이 말씀을 꼭 배우자.”라는 단문 하나를 세 개 연(聯)에 해당되는 시로 펼쳐 놓은 셈이다. 작가의 역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메시지를 강하게 하려는 의도가 지나쳐서 그렇다. 왜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이 사람들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초장의 사람은 말 그대로 “이런 사람과 저런 사람”이다. 이렇게 중복된 배열에서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항대립을 떠올린다. 높은 이와 낮은 이,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등등. 중장의 사람은 자질로서의 “사람다움”이다. 사람의 행색과 외적 요건을 가졌더라도 사람다운 심성이나 가치를 가지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말을 바꾸면 겉치장을 못 했더라도 좋은 속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시대를 감안해 보자. 앞선 시기까지 문학의 주체와 대상은 오로지 엘리트들이었고,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고 배울 주체로 떠올랐으니 사람을 재발견한 것이다. 상하귀천 모두가 대상이 되고, 이 말씀만 듣고 배우면 모두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으니, 다시 말하면 상하귀천 누구든 이 말씀을 듣고 배우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하려니 중복이 불가피하며, 계몽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무엇일까?
아바님 랄나시고 어마님 랄기시니 父母옷 아니시면 내모미 업슬랏다 이덕을 갑려니 하이 업스샷다
<오륜가>이니 당연히 부자유친(父子有親)으로 시작한다. 줄곧 임금만 노래하던 관습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앞세운 것은 주체와 대상의 범위를 극대화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여 심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래서 작품 바깥에서 권위를 빌어온다. 알고 보면 이 작품은 시경(詩經)의 한 편을 통째로 가져와서 형식을 재편한 것이다. 초장과 종장은 <육아(蓼莪)>편 제 4연의 처음과 끝을 그대로 옮겨 놓았고, 중장은 제 3연의 일부를 다소 바꾸어 놓았다. 문학성과 교훈성의 절대적 표준으로 인정받는 시경을 활용하여 창작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작자 주세붕은 당대의 학자이자 관료이며, 교육자이자 문학자이다. 어떻게 보면 16세기의 전형적 엘리트이다. 그는 그다지 현달하지 못한 향촌 사림의 가문에서 태어나 진지한 학문 수업과 철저한 수신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20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곧장 관직에 오르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도 가졌다. 그가 특히 목민과 교육에 열중한 것은 40대 후반부터이다. 47세 되던 1541년에 풍기(豐基) 군수로 나가 마을마다 오륜(五倫)의 방도를 게시하여 ≪소학(小學)≫을 가르치고,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의 구두(句讀)를 직접 바로잡았으며, 유생(儒生)들을 권장하고 일깨워 문학과 기예를 배우도록 하였다. 옛 흥주(興州) 백운동(白雲洞)에다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냄과 아울러 백가(百家)의 서적을 비치해놓고 학전(學田)을 마련하는 등 고등교육 종합 프로그램을 추진하였으니 이것이 곧 한국 서원의 효시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과 운영이다. 55세 되던 1549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서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적게 내고 농업에 힘쓰도록 하는가 하면 효제(孝悌)의 의리를 거듭 강조하여 풍속과 교화를 독실히 하였다. 해주에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사당을 세워 학문의 제도를 한결같이 백운동(白雲洞)처럼 제정해 놓았다. 그의 경력을 살펴보면 가장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성공하기도 했던 분야가 교학(敎學)이다. 그가 오륜가를 지은 시기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해주에 수양서원을 경연하던 55세 무렵이다. 그런데 그는 이보다 앞서 풍기군수를 지내던 49세 무렵 이미 한시가 아닌 고유시 경기체가(景幾體歌)를 창작하고, 이를 중대한 의식(儀式)에 사용하는 과감한 실험을 하였다. 백운동서원의 전신인 회헌사(晦軒祠)를 건립하고, 여기서 안향 등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자작 한시의 일종인 <죽계사(竹溪辭)>와 경기체가인 <도동곡(道東曲)>을 부르게 하였다. 이를 두고 사대부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주세붕은 자신의 노래는 다 성현의 말씀을 옮겨둔 것이지 감히 창작을 한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여기서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교화의 목적으로 시를 선택한 주세붕은 거친 비판과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누구도 감히 시비를 할 수 없는 성현의 글에 기댄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노래를 “사람 사람마다”에게 돌려주려고 하였다. 그가 즐겨 활용한 또 한 가지 방식은 용사(用事)이다. 흥미와 교훈을 동시에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지아비 받갈라간 밥고리 이고가 반상을 들오 눈섭의 마초이다 친코도 고마오시니 손이시나 다실가
부부유별(夫婦有別) 덕목을 노래한 작품이다. 양반들에게는 잘 알려졌지만 서민들에게는 생소한 양홍(梁鴻)과 맹광(孟光) 부부의 고사를 활용하였다. 그러나 경전을 활용할 때와는 상당히 다른 창작 의도가 보인다. 원래 고사에서 후한(後漢)의 양홍은 은일사(隱逸士)로서 가난하였지만 기절(氣節)이 있었고, 모든 서적을 섭렵하여 지식을 갖추었으며, 산림에 숨어 농사 짓고 살면서 황제가 불러도 나아가지 않다. 맹광은 외모가 추하게 생겼지만 스스로 고집하여 양홍과 혼인한 특이한 인물이다. 이런 뛰어난 인물들의 고사를 주세붕은 보통 사람들에게 돌려주었다. 지아비는 밭 갈러 나가고 지어미는 점심밥을 지어 고리에 담아 이고 간다. 세상에 나가면 하찮은 필부필부 농사꾼이지만, 부부유별의 품위를 갖춤으로써 귀한 반열에 참여한다.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이 말씀으로 인하여 인품이 고양되니 여기서 휴머니즘이 느껴진다. 주세붕의 시조 창작 태도는 오륜가에만 갇혀 있지는 않았다. 경서를 폭넓게 읽고, 그것을 응용하는 방법 삼아 지은 시조도 몇 편 있다. 이들 작품은 오륜가보다도 이른 시기, 즉 풍기군수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호고 닛디마애 먼벋 즐거오니 내게옷 이시면 미아 아나마나 富貴 浮雲티 보고 曲肱而枕오
전편이 전고로 이루어졌다. 심하게 말하면 논어의 구절들을 연결시켜 놓았다. 제목부터 논어의 편명인 <학이(學而)>이다. 모름지기 이렇게 공부하라는 뜻이다. 초장은 논어의 앞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배우고 때맞춰 익히며(學而時習之)”,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有朋自遠方來)” 그것이 즐겁다는 내용이다. 이 둘을 묘하게 연결하여 학문을 같이 하는 벗이야말로 멀리서도 찾아오고, 그러면 참으로 즐겁다고 하였다. 중장은 군자다운 태도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랴(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고 되묻는다. 종장은 “거친 밥을 먹고 물이나 마시고 팔 꼬부려 벨지언정(飯疏食飮水曲肱而枕之)”, “옳지 않은 부귀는 뜬구름으로 여기는(不義而富且貴如浮雲)” 경지를 진정한 학문의 태도라고 역설하였다. 원전에서 꼭 학문에 관계되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이런 대목을 적절히 뽑아다 연결함으로써 주제를 살리는 재능을 보였다. 16세기 중엽의 교훈가들, 특히 주세붕의 오륜가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습작 같은 표현으로 거칠게 다가오는 시대에 대응한다는 의의를 지닌다. 권력을 향하여 나아갈 때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이고, 그들에게도 윤리적 가치의 주체이자 대상으로서 자리를 가지게 하고, 성인이 밝혀둔 절대불변의 진리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해주는, 그래서 그들이 끊임없이 자각하여 노래부르게 하려는 새로운 엘리트상을 발견하는 휴머니즘,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4. 철학적 심화
1) 퇴계의 시가관
16세기가 이룩한 최고의 성취는 철학의 심화이다. 그것은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서의 철학만이 아니라, 세상을 철학으로 규정하고 살아가자는 삶의 태도 곧 철학의 전체성이다. 물론 성리철학은 한문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것의 문학적 적통은 당연히 한시이지만, 이것이 시조로 표출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발전이다. 흔히 고유시는 유학자들의 여기(餘技)였다거나, 한문학에 대한 소양이 적은 사람들이 주로 향수하였다고 하는 피상적 평가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일이다. 더구나 당대는 물론 중세 최고의 학자인 퇴계나 율곡 같은 이들이 시조를 공들여 창작하였다는 점은 민족 문학의 큰 성취이다. 퇴계 이황(李滉)은 고유시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을 표출하였으며, 그 대안으로서 시조를 내세웠다. 그가 66세에 쓴 도산십이곡 발문(陶山十二曲跋文)에는 시가관이 집약되어 있다. 그것을 요약해보면 몇 가지 사실이 두드러진다. 첫째, 효용론적 시가관이다. 그는 이전까지 우리 가곡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특히 <한림별곡>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지적하기까지 하였다.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 한림학자들이 지은 노래라고 명기되어 있다. 퇴계는 조선을 건국하고도 무려 170년이나 지난 뒤에 이 글을 썼으니, 굳이 고려의 시가를 나무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 삼은 것은 <한림별곡>이란 작품이 아니라 “한림별곡 같은 종류들(翰林別曲之類)”이다. 다시 말해서 한림별곡에서 비롯된 경기체가(景幾體歌)이다. 한림별곡이 경기체가의 대명사인 듯이 말하지만, 실은 경기체가는 조선초 악장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왕조의 체제와 기구를 한껏 칭송하기에 알맞은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퇴계가 비판한 것은 청산해야 할 고려의 노래 유산을 더 극성스럽게 즐기는 조선의 행태였던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고, 참으로 온유돈후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퇴계의 진심이었다. 둘째, 곡조와 시형에 대한 고민이다. 새로운 노래에 담을 주제와 사상 같은 것이야 퇴계로서는 이미 평소에 정해 두었을 것이며, 이런 시를 쓰는 일이야 퇴계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또 성정에 느끼는 바가 있으면 한시로 쓰곤 했다고 직접 언급도 하고 있다. 문제는 노래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고유시를 모색한 것이다. 퇴계의 창작 목적은 교육이다. 상대는 풍류를 즐기는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수준과 취향에 맞게 음악을 갖추고 무용을 곁들여 일상 생활에서 부담 없이 부를 수 있게 한 것이다. 정성을 기울여 가다듬어서 마침내 바람직한 노래를 완성시켰다. 셋째, 원만한 유통이다. 문학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충분한 검토를 거쳐 완성시키고도, 전파에 대해서는 주저하면서 “살아온 길이 자못 어긋난 게 많아서”, “혹시 무슨 시끄러운 꼬투리나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우선은 갈무려 둔다고 하였다. 왜일까? 퇴계는 후대인의 평가에서뿐 아니라, 생존 당시에도 인품과 학문 등 어느 분야에서나 조야의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은 사람이다. 살아온 길이 어긋난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며, 무슨 일이 일어날 꼬투리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용이나 음악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만든다는 사실 그 자체로 오해를 살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만큼 음악은 정치 사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고 여겨졌다. 유사 악장이라는 모함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지나 그런 오해의 시대가 아닌 때가 되면 이 노래가 가지는 교화의 기능이 극대화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퇴계의 <도산십이곡>은 음악적으로 새로운 시도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2) 도산십이곡의 깊이
<도산십이곡>은 두 주제를 합한 연시조이다. 그 중 앞쪽에 배열한 여섯 편은 ‘언지(言志)’라 하였고, 뒤에 배치한 여섯 편은 ‘언학(言學)’이라고 하였다. ‘지(志)’는 성정의 올바름을 지키는 마음가짐이고, ‘학(學)’은 이치를 궁구하고 배우는 태도를 뜻한다.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마음가짐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배우는 일, 이것이야말로 퇴계가 제시한 유학자적 삶의 전부이다. 퇴계는 관직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일관되게 학문과 교육에 매진한 인물이다. 중년 이후에는 현실 정치에 나아가기를 매우 꺼리고 거부하면서, 정치를 포함한 삶의 원리에 대한 저술에 매진했으니 스스로 현재와 미래의 이상사회를 설계한 셈이다. 만년에 집중된 일이지만 왕에게 경서와 성현의 글을 진강하고,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올린 것은 곧장 왕도정치 실현에 한 걸음 나아가려는 뜻이었으며, 향약을 정리하고 서당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고, 노래를 지어 소년들을 깨우친 것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따라서 <도산십이곡>에는 그의 일관된 철학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져 있다.
煙霞로 지블삼고 風月로 버들사마 太平聖代에 病으로 늘거가뇌 이듕에 라이른 허므리나 업고쟈
전육곡(언지)의 두 번째 작품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노래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르치는 방법은 보여주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뜻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뜻을 가지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는다는 말은 특정 시대나 사람에 관계 없이 자주 쓰인 표현이다. 때로는 가난한 삶을, 때로는 거칠 것 없는 삶을, 때로는 욕심 없이 자유로운 삶을 뜻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그러나 중장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깊은 사유를 동반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태평성대를 만났으니 병 없이 오래 살기를 염원하기는 쉽다. 세상이 워낙 뜻 같지 않으니 병을 앓는다고 탄식하기는 쉽다. 그렇지만 세상이 참으로 다행히 태평성대이니, 나도 참으로 다행스럽게 병으로 늙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해 하는 삶이다. 그리고 종장에서는 이 모든 삶의 무게와 동일한 염원이 있다. 다만 하나 허물이나 짓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러져가는 노을과 스쳐 부는 바람만으로도 나의 전부를 삼고, 병으로 늙어 죽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일지라도 허물 하나만 없으면 된다는 생각은 도덕 차원이 아니라 철학의 차원이다.
淳風이 죽다니 眞實노 거즈마리 人性이 어디다니 眞實노 올마리 天下애 許多英才를 소겨 말가
세 번째 작품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말이다. 초장과 중장은 뚜렷한 대비이다. 초장에서는 순풍이 죽고 없다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순풍이 죽고 없으니 더 이상 사람의 본성이나 세상의 교화에 기대할 수 없고, 따라서 누구나 힘을 길러 자기 몫을 키우면 그만이다. 유학자들은 이것을 난세라고 불렀다. 퇴계는 이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짓이라고 부정한다. 치세와 난세가 순환한다는 이치를 믿기 때문이다. 중장에서는 사람의 본성이 어질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유학의 모든 이론은 이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역으로 유학자들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설득하는 데 일생을 보내야 했다. 그 원조는 맹자이다. 맹자가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전제가 가장 심각하게 도전받아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든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든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주장에 힘겹게 맞서서 유학의 정통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흔히 성선설의 원조가 맹자인 것처럼 알려졌다. 퇴계는 당연히 이 말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사람의 본성이 선하고, 그렇게 말한 주장이 옳다는 것을 설득하려면 뭔가 보여줄 게 있어야 한다. 여기서 퇴계는 아이들을 한 차례 격려한다. 천하의 영재들은 다 알 수 있다고. 허다한 영재는 누구이며, 이 말을 아이들에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재라는 말도 맹자가 씀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런데 이 영재를 두고, 영재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사람은 아직 유학을 모르는 사람이다. 모든 유학 경전에서 사람의 자질을 논하는 대목은 똑같다. 사람의 본성은 하늘에서 타고나 신령스러운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성인의 자질을 가졌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이란 수양의 정도와 방식에 따라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으며, 그 자질이 영재이다. 이 작품에서 퇴계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추상적이다. 천지간에 살면서 제발 허물이나 없이 살자는 다짐도, 사람이 어질다는 성인의 말씀도 다 옳기는 하지만 손끝에 잘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종종 자연으로 나가서 확인한다.
春風에 花滿山고 秋夜애 月滿臺라 四時佳興이 사롬과 가지라 며 魚躍鳶飛雲影天光이아 어늬그지 이슬고
봄바람이 불어 온 산에 꽃이 만개하고, 가을이 깊은 밤에는 달이 뜰에 가득하다. 이것이 자연이다. 왜 그런가? 그 이유도 자연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달이 뜨고 지는 것도 누구의 무슨 힘이 미쳐서가 아니라 저절로(自) 그러한(然)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만이 아니라 그 사물이 그렇게 되고 그렇게 하는 모든 원리를 뜻한다. 중장에서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 한가지라고 하였다. 이 말은 꽃이나 달도 사람과 같이 감정을 느낀다는 말이 아니라, 계절마다 자연이 자아내는 흥취가 마치 사람이 때에 맞추어 표출하는 삶의 모습과 같다는 뜻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한살이도 저 사계절의 순환과 같다. 인생의 봄날인 소년 적에는 깨어나 꽃을 피워야 하고, 인생의 겨울인 노년에는 조용히 자신에게 침잠하여 궁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삶도 스스로(自) 그렇게 하는(然) 올바른 삶이다. 종장은 격언으로 마무리하였다. “어약연비(魚躍鳶飛)”. 물고기는 물에서 뛰어오르고, 솔개는 하늘에 닿게 난다는 말이다. 《시경》의 표현을 《중용》에서 인용함으로써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물고기는 물고기니까 물에 살고, 물에 살아야 물고기답다.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자 하면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날아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솔개는 솔개니까 하늘을 날고, 하늘을 나니까 솔개답다. 솔개가 물 속에 살겠다고 고집하면 불가능하기도 하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이 가장 낮은 물 속에도 거기에 알맞은 삶이 있고, 가장 높은 하늘에도 거기에 알맞은 삶이 있다. 저 구름의 그림자나 천체의 빛도 마찬가지이다. 이보다 더 명징하게 천지의 질서를 보여줄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저절로 그러한 사물을 보고 우주의 자연스러움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사람이든 자연이든 아무리 그렇게 존재해도 결국은 그것을 알고 모르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으며, 행하고 않는 것도 사람에게 달렸다. 그래서 배워야 한다.
雷霆이 破山 야도 聾者 몯듣니 白日이 中天야도 瞽者 몯보니 우리 耳目聰明男子로 聾瞽디 마로리
후육곡의 둘째 작품이다. 배움에 대한 시이다. 초장과 중장은 대비를 통해 배우지 않은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벽력이 내려쳐 산을 무너뜨려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한다. 객관적으로 있는 세계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중장도 동일하다. 밝은 해가 하늘에 떠 있어도 소경은 보지 못한다. 하늘에 태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종장은 경계이자 권유이다. 귀머거리와 소경이야 원래 그러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리는 귀가 밝고 눈이 밝은 사람이니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총”은 귀가 밝다는 말이고, “명”은 눈이 밝다는 말이다. 귀와 눈이 밝아서 많은 것을 받아들이면 아는 것이 많아진다. 흔히 총명하다는 말은 재주가 많다는 뜻으로 쓰이며, 동시에 아는 것이 많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배울 줄 아는 능력, 배우려는 태도 그것을 총명하다고 하였다. 배워서 총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총명한 사람은 배울 줄 안다.
愚夫도 알며거니 긔아니 쉬운가 聖人도 몯다시니 긔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낫듕에 늙주를 몰래라
누가, 얼마나, 언제까지 배워야 하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읊었다. 안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의 함수관계는 어떠할까? 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한계를 설정해 두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이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이 있고, 고생해가면서 아는 사람(困而知之)이 있다고는 하였다. 그러나 공자가 스스로 생이지지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나서는 이 영역은 자동으로 소멸했다. 이 영역이 사라지면 맞은편에 있는 곤이지지도 저절로 사라진다. 남는 것은 학이지지이다. 배움과 앎의 관계란, “사람이면 누구나 배워야 알고, 사람이면 누구도 배우면 안다.”는 것이 정론이 다. 초장에서는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알고 행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아는 대상은 사람의 본질적인 도리이다. 대표적인 것이 오륜이다. 부모 자식과 형제간의 도리 같은 것은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과 무관하게 누구나 안다고 하였다. 이것을 일러서 “양지(良知)”라고 한다. 중장에서는 성인도 다 알고 행하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성인이 인간과 우주의 원리야 다 알지만, 사물의 구체적인 이름이나 정치의 실무에 대해서는 모를 수 있다는 뜻이다. 종장에는 답이 제시되어 있다. 배워야 할 범위는 우부도 아는 최하의 단위에서부터 성인도 모르는 세부적인 사실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다. 배우는 때는 태어나면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이다.
5. 시대와 사유
문학이 본질적으로 그렇듯이, 시조는 그것이 창작된 시대마다 그 시대의 미학과 사회적 가치를 담당해온 장르이다. 다만 견고한 장르적 관습 때문에 그것이 잘 안 드러나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관찰자의 선입견이 더 큰 문제이다. 조선 전기의 시조는 악장의 강압적 분위기를 극복하면서 서정성과 사상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분리되어 16세기 중반까지 전개된다. 그 중 사상성 지향의 시조를 살펴보면 그 진화의 과정이 뚜렷하다. 15세기 초반 <강호사시가>에서 서정과 이념의 어색한 결합을 보여준 이래, 병자사화의 주역이자 피해자인 젊은 엘리트들은 비판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념을 시조에 실었다. 그리하여 비판적 태도는 문학적 성취를, 이념은 주제의 강도를 확보하여 전형성을 보여준다. 15세기 끝무렵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사화가 이어지고, 이로 인한 정치적 황폐화를 겪으면서 관료형 학자들이 이룩한 사상적 진화는 보편 윤리의 재발견이고, 이것이 오륜가, 교훈가류의 시조로 나타났다. 윤리적 삶의 대상을 백성 모두에게로 확대한 점은 휴머니즘의 표출이며, 지나친 계몽 의식과 전고의 활용은 창작성의 약화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뒤이어 16세기 중엽에 퇴계를 비롯한 사림들이 존재론과 당위론을 끝없이 궁구하는 철학을 확립하고, 이것을 다음 세대에까지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 제도를 마련하고, 그 핵심적 방법으로 모국어를 활용한 고유시 양식을 계발했다는 점은 놀라운 발견이다. 당연히 교훈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짧은 정형의 시 속에 성리철학의 깊고 넓은 세계관을 압축시켜 표현한 것은 시조 발전에 큰 공헌이다. 자연의 실체와 삶의 태도로서 자연성의 발견, 인간 본성 당연과 당위를 추구한 점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창작되는 시조의 정본으로 자리잡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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