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화계사
서울에는 신전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선의 종교 건축물과 종교 의식을 보기 위해서는 시골로 들어가야 하고, 멀리 사는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더 멀리 떨어져야한다. 수도원의 절반은 오늘날 조선 반도 전역에 남아 있는 불교의 거의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가장 멋있는 절들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 진 북쪽의 산속에 있다고 한다. 불손한 사람에 의해 더럽히지 않은 곳에서 종교는 여전히 예전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덜 웅장하긴 해도 서울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절들도 있다. 이들 중 하나는 약 7마일 떨어진 거대한 닭벼슬봉우리의 동쪽 돌기에 위치한다. 이 절은 도시와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주로 종교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이유로 명성을 얻었다. 그곳은 유람지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 신성함도, 장소 자체의 이로운 점도 훼손하지 않는다. 경치를 즐기는 장소로 수도원을 선택하는 것은 중국에서처럼 조선에서 흔한 관습이다.
하루는 내가 실려가 그것을 보게 된 것은 이중용도, 즉 수도승들과 관리들의 쉼터가한 장소라는 것에 있었다. 나는 절 자체를 보기 위해 그곳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조선인들이 수단은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감스럽지는 않았다.
그 방문은 다사다난한 소풍으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의자, 탁자, 기타 사소한 편의품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무리의 악사들과 놀이패들, 여러 명의 기생들, 나의 일본인 요리사를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우리의 도착을 준비하기 위해 악사, 요리사, 그리고 짐을 미리 보내고, 기생들은 쾌활한 동반자로서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따라서 약속된 날 아침, 나의 친애하는 거주지는 많은 혼잡과 피할 수 없는 예비 축제의 현장이 되었다. 온갖 부류의 하인들이 이리저리 서둘렀고, 부지런히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때때로 그들 스스로 무언가를 했다. 가장 야릇한 외모와 거대한 크기의 묶음들을 최대한으로 꾸몄고, 그것들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짐꾼들의 등에 끈으로 묶였다. 마당에는 다양한 종류의 탈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미래의 탑승자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것들을 들거나 끌 사람들이 특별히 할일 없이 빈둥빈둥 돌아다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군대의 진지를 무너뜨릴 만한 소동이 일어난 후, 마침내 짐은 출발했다.
선발대가 출발하자 기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로 집을 가득 채웠다. 평범한 여성성이 부재할수록 더욱 그랬다. 그들은 웃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이리저리 걸어 다녔고, 그래서 이때쯤 부산한 준비에 이은 식사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와 함께 가자고 초대받았던 공사관의 한 친구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마구잡이 연회는 더 마구잡이가 되었고, 그는 바깥뜰에 있는 여러 가지 구색의 탈것에 하나 더 기여했다.
하지만, 정오 직후에 우리는 출발할 수 있었고, 가마 안으로 몸을 들이고, 땅에서 들어 올려져 관문을 빠져나갔다. 친구들, 기생들, 그리고 곁꾼들이 우리를 동반하면서, 가장 전형적인 동양식으로 거리에 한 줄로 늘어섰다. 날씨는 맑고 추웠는데, 땅에는 눈이 군데군데 쌓여 있고 위에는 파란 빛이 감도는 북쪽 겨울날의 햇살만이 반짝이는 만큼 모든 것이 제법 반짝였다.
웃고 즐거운 낮이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거리에 있던 소년들도 그러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활기찬 모습을 전에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남자 아이들을 셀 때, 그들은 보통 조용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흥미로운 놀이의 중심에 있었다. 그것은 "전쟁놀이”라고 불렸다. 튼튼한 막대로 무장한 젊은 전사 무리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고, 소년들은 누구나 모퉁이의 애매함과 신비로운 미로형 골목에 많은 재미가 숨어 있는지 잘 알기에 특히 좁은 골목의 모퉁이까지 누비고 다녔다. 그러고는 참새 떼처럼 갑자기 나타나 휘몰아치다가 다시 사라지곤 했다.
내가들은 바, 그 놀이는 적어도 단순함의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발상과 실행에서 타고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참가자들은 둘로 나뉘어 양측이 막대기와 곤봉으로 서로를 치고 때린다. 그러다 불리한 쪽이 내빼고 다음모퉁이에서 다시 집결할 때까지, 잠시 소강상태를 가진다. 조선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놀이도 나이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다 큰 남자들은 아이들만 큼 열정적으로 놀이에 참가한다. 도시의 거리에서 다소 폭력적인 그 놀이를 한다면, 남자들이 그것에 빠져 행인들에게 큰 폐를 끼칠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도시에서의 대의적인 예의상 작은 소년들로 제한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한적 영향이 작용하지 않는 시골에서는 거의 모든 마을들이 이 놀이에 관여하고, 때리다가 때로는 죽음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들은 운이 없는 희생자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사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이며, 대회가 끝나면, 패자들은 승자들을 위해 숫소를 잡고, 모든 일행이 참여하는 성대한잔치가 열린다.
특히 우리가 나갔던 북동문의 위치가 눈에 띈다. 양쪽 땅이 갑자기 꺼지고, 성문 안쪽에서는 집들의 지붕을 굽어보며, 바깥쪽에서는 가파른 산들의 등성이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바라본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관계로 이곳을 지나면 마을이 없다. 즉시 시골로 들어선다.
처음에는 황량한 평야를 지나 낮은 바위고갯길을 힘겹게 올라가다가 다시 논이 있는 골짜기로 내려갔다. 이 무렵에 가장 늦게 출발한 후발대가 선발대를 따라잡았다. 즐겁게 재회하고, 굽어진 시골길을 천천히 가고, 남여꾼들이 쉬도록 잠시 멈추곤 했다. 남여들과 수입한 세 대의 인력거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일행의 사람 수 뿐만 아니라 그 질로 인해 진척이 더디었다. 우리의 행진은 계속된 장난이었다. 상쾌한 공기와 여행자들의 영혼은 예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하나 둘씩 남여에서 내려 산책에 나섰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전적으로 탈것을 바꿨다. 기생들을 인력거에 태우고 우리는 초보 인력거꾼이 되어 인력거를 최대한 빨리 끌고 가자, 기생들은 무척 즐거워했지만, 복통을 일으키기 거의 직전이 되었다. 이것은 약간의 공황상태를 초래했고, 그래서 우리는 잠시 멈추었고, 다과를 꺼내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몸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평형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들판을 뒤덮고 있는 얼음길을 가는데, 미녀들에게는 공포였고 우리 자신은 쩔쩔맸다. 이번에는 이런 재미로 다음에는 다른 재미로 5마일의 조선의 시골길을 질러가다 보니, 오후가 끝날 무렵에 우리는 닭벼슬산 동쪽에 있는 숲의 입구에 닿았다.
우리는 개괄지를 떠나 숲으로 들어섰다. 잔치 분위기가 일시에 바뀌면서 모든 것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겨울 숲의 엄숙한 침묵이었다. 나무들은 크고 대부분 낙엽성이며, 희뿌연 갈색이고, 길가는 순백색의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곳은 일종의 고독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인상적이었다. 슬플 정도의 침묵은 공기의 일부인 것 같았다. 오직 우리 자신의 목소리와 밟는 소리만이 놀라울 정도로 온 침묵을 깨뜨렸다.
우리는 곧 숲이 좁혀져 계곡의 좁고 긴 길로 들어서 얼어붙은 시냇물 바닥에 도착했다. 시내 한 켠에 오르막길이 있었다. 시내 중앙에는 바위와 얼음이 있었고, 양쪽에 굳어진 모래로 된 산의 날카로운 돌기가 솟아 있었다.
하지만 나무들은 이것들을 시야에서 차단하고 부분적으로 협곡의 진짜 모습을 숨겼다. 우리는 몇 분 동안 계곡을 타고 왼쪽으로 꺾어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다다랐고, 다음 순간 수도원 뜰에 대기하던 승려들 사이에 서 있었다.
겨울 숲의 죽음 속에서 우리 목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졌었다면, 한 무리의 외딴 승려들을 두고 시끌벅적하게 투숙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 나라의 관습을 따랐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이 어려웠다. 한겨울에 도시를 떠나 외로운 수도원에서 잔치를 열다니! 라벨레가 우리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량하고 단순한 승려들은 그 과정에서 전혀 유별난 티를 내지 않았다. 비록 직업상 세상 밖이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특히 바다 저편에서 오는 그 부분에 대해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우리 주위에 모여 우리를 반겨주었다. 짧은 겨울 낮의 잿빛 오후가 저물어 밤기운이 돌 때, 우리는 바깥돌계단을 타고 본관 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장소는 ”화계사”라고 불린다. 봄에,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본 겨울에는 웅장함과 금욕생활이 그것의 매력이었다. 그때 상황은 수도자의 정신 수양에 적절한 것 같았다. 즉 저 너머의 세상과 단절된 계곡, 차가운 잠에 싸여 있는 개울,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소나무, 그것들 자체가 살아있지만 죽음의 모습이다.
그 수도원은 불교였다. 신도신앙 혹은 조선에서 그것과 상응한 신앙에는 수도원은 없고, 오직 적당히 그리 부르는 절과 사당만 있을 뿐이다. 수도원이 속하는 불교의 종파는 기독교 종파 중에서도 로마 가톨릭에 비유할 수 있다. 불교는 기독교만큼 많은 종파와 세세하게 따지는 신앙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우선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로 크게 나뉜다. 인도 불교는 후자에 속하고 중국, 일본, 조선 불교는 전자에 속한다. 이것들 각각은 셀 수 없이 많은 종파들로 세분된다. 우리와 거의 비슷한 개신교교회가 있다. 이 개신교 종파들은 구교에 스며든 학대에 반대한 정말로 개신교 종파이기 때문에 사실상 일본에 국한되어 있다. 조선교회는 대부분 옛 방식에 집착하는 교회들이다.
이들 종파의 외형적 상징물은 유럽의 그것들만큼이나 다양하며, 그 상징물 자체도 유럽교회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다. 불교의 존재를 모르는 유럽인이 화계사에 서 있다면, 자신이 로마 가톨릭 수도원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삭발, 참회복, 염주, 예배, 종소리, 그리고 그 밖의 백여 개의 익숙한 광경들과 소리들은 모두 그에게 지구 반대편의 수도승을 연상했을 것이다. 그는 동양의 색깔을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로마를 이식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에 처음 왔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에 경악했다. 그들은 낯선 땅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소유물이어야만 했던 것과 마주쳤다. 중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은밀히 온 이유를 설명해야 될 시점까지, 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주저 없이 그것을 악귀의 소행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너희들은 진정한 믿음의 외형적인 형태를 참으로 얻었다. 너희와 우리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너희 하나님이 우리의 악귀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개종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는데 입에 발린 칭찬으로 이런 말을 하다니!
불교의 원리에 관해서라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일반적인 오해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는 것이 완전히 부적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우상에 대한 신성한 공포를 가지고 자라왔고, 우리 모두는 기독교 울타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어떤 믿음의 외적인 상징물에 적용하기 위해 ”우상숭배”라는 용어를 편리한 형용사로 사용한다. 우리는 고대 유대인들의 글을 통해 괴물에 익숙해졌고, 그 후 야만적인 부족들 사이에서 오늘날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마지막으로 초기 가톨릭 선교사들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우리를 위해 극동 종교들을 우상들로 채웠다. 이제, 사실은 우상이 예로부터 존재했다는 것, 그것들이 오늘날 야만인의 숭배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그러는 것 이상으로 부처의 문명화된 종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교도들이 예배한다면, 로마교회도 그렇다.
만약 이 마지막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면, 우리는 부처의 숭배에서 그것들의 존재를 진정으로 부인해야 한다. 어떤 신앙에서든 실제로 믿는 것의 정확한 위치는 항상 어려운 문제이며, 이 신앙이 외적인 표현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두 배로 그렇게 된다. 정신은 무의식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을 감각에 나타낼 수 있는 방식으로 옷을 입히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악화는, 이슬람교 같이 그러한 도움을 만드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관찰되어 왔다. 인도의 한 불교도가 말했듯이, "그것은 마치 눈물이 뺨에 흘러내릴 때까지 바라보고 있는, 눈앞에 없는 친구의 사진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그림을 보고 우는 것이 아니라 사진이 상기시킨 생각에 운다.” 하지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잡을 수 있는 작은 것에 집착하게 되고,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그가 숭배하게 된 인상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마침내 겁에 질리게 된다. 신앙의 상위 정신은 그 너머를 계속 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중은 어디까지나 우상숭배 속에 가라앉아 있다. 신앙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는 두 신념의 순수함이나 웅장함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둘 다 악령을 숭배한다는 것은 논쟁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나는 유럽과 아시아 양대 종교를 언급하는 동안, 종교적 교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교묘함이 예수회에 국한되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를 언급하겠다. 일본의 위대한 개신교 종파는 "신교”라고 불린다. 이제는 일본어만큼 소리가 서투른 언어에서 많은 단어들이 하나와 같은 발 몸을 갖는 경우가 많다. ”신”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다른 의미들 중에서, 그것은 두 가지 의미 - ”새로운”과 ”진살'- 를 가지고 있다. 이제, 그 종파의 창시자들은 겸손했고, 그것을 ”새로운 종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의 신봉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대담해지고, 스스로 선택한 호칭의 미천한 의미에 놀라면서, 그들은 문양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즉, 그들은 오래된 발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이 쓰여진 성격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 때부터 그들은 이 책을 "진실된 종파”라고 썼고, 뻔뻔스러운 태도로 이것이 항상 그 이름이었다고 주장했다.
종교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외모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의복의 장점이다. 옷은 관상을 바꾸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내가 이 승려들을 면밀히 살피고 서 있을 때, 내가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그들이 일본인과 닮은 모습을 보았다. 평상복을 입고,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깎은 점에서 일본인들과 닮지는 않았지만, 같은 베옷을 입고, 똑같이 머리를 깎은 점에서 이 두 종족의 기원이 같다는 것에 대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수도원 건물의 구도는 다음과 같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그 사이에 아무 문도 없고 바깥마당에서 간단하게 끝났지만, 계곡을 마주보는 쪽에는 돌담이 있었다. 안뜰은 본관 앞마당으로 중앙 큰방은 식당이었다. 이곳은 우리의 연회장이 되었다.
그 뒤에는 또 다른 뜰이 있었는데, 식당 맞은편에는 두 개의 전각이 있었는데, 그 전각은, 대중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신들에게 봉헌을 하는 곳으로, 물론, 흔한 그림, 청동상, 북, 인공 꽃 등으로 가득 찼다. 옆에는 예배의 장신구와 간접적으로 연결된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반원형으로 이것들은 안뜰에서 들어오지 않고, 바깥에서 들어오게 되어 있으며, 승려들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작은 집들이었다. 본관 오른쪽에는 건물 자체와 한 채를 이루고 있는 집들이 있다. 그것들은 분명히 공부방으로 사용되었다. 전체 건물이 세워진 곳은 주변과 비교해 평탄했지만, 앞쪽에는 여전히 경사가 심해, 이 앞에 배치된 건물들을 공중으로 높이 올려 독수리 집처럼 보이게 했다. 그곳에는 건축이나 장식이 풍부하지 않았고, 일본도 언제나 그랬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의 평범함, 모든 것이 매우 평범했다. 이것들은 안마당 옆 건물에 있는 다소 진기한 물건들 중 하나인데, 특히 가장 괴상하게 조각된 거대한목어로 천장에 머리와꼬리가 매달려 있었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거닐고 있을 때, 두 건물 중 더 큰 건물의 종소리가 극동 특유의 독특한 방식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종방울이 종 안에서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종 밖에서 종을 친다. 이렇게 하면 타종 조절이 쉬워진다. 이것은 처음에는 매우 느리지만, 점점 더 빨라지고, 계속되는 소리의 놀 속에 타종이 멈춘다. 그리고 다시 생각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세 번의 가벼운 타종으로 마무리된다. 그런 다음 적절한 간격으로 전체를 반복한다.
안뜰에 있는 두 전각 중 더 큰 전각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 우리는 들여다보러 갔다. 동료 구경꾼들은 예의 바르게 뒤로 물러서, 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해주었고, 따라서 신발을 벗지 않고 최대한가까이 서 있게 해주었다. 예배는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십여 명의 승려들은 그들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그들이 염불과 함께 끝없는 원을 그리며, 엄숙하게 돌고 있었고, 한구석에 작은 초보자한 명 이 앉아 북을 치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만큼 관심 있었고, 우리가 이미 알게 된 그들 중 몇몇은, 돌면서 앞으로 나설 때, 주저하지 않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몸짓으로 우리에게 웃으면서 눈인사를 했다. 이 행위는 그들 입장에서는 더욱 용서할 만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염불은, 혹은 뭐라고 부르든,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암기하여 지금은 잘못 발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도, 그 의식은 특별히 엄숙하지는 않았다. 너무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예배에서 존엄성이 크게 결여되지 않았다.
언젠가 일본 내륙의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에서 예배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건물과 그 배경은 위풍당당했다. 음악은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이었다. 기도는 엄숙하고 웅장했다. 그것은 모두 50센트의 겸손한 봉헌을 위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극동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을 처음 감상했다. 악기들은 사찰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실제로 사찰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 경우, 사제들이 신비로운 돌기를 얼마나 계속할지 몰랐기에, 그들이 몇 바퀴 도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봤다는 결론과 함께 물러났다. 하지만, 우리가 건물과 그들의 법당을 거닐 때에도, 염불 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그러므로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수도원 풍경과 소리 속에서, 수도원의 저녁 행사가 아닌 그날의 최고의 행사를 향해 우리를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