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부산 수영(水營) 장대벌(將臺) 성지
<장대벌성지 - 01>
수영이란 조선 시대에 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軍營)을 이르는데,
부산 수영은 경상좌수영이 있던 곳으로
정3품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약칭 水使)가 그 관장이었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가서 군사들을 명령하던 돌로 쌓은 대(臺)를 말한다.
조선 시대 군영(軍營)에는 연병장 정면에 장대가 있었고
연병장에서는 군사들의 훈련 · 사열 · 열병 이외에
간혹 중죄인에 대한 사형, 즉 군문효수(軍門梟首)가 집행되기도 했다.
당시 군대가 주둔했던 여러 곳이 ‘장대(將臺)가 있는 벌판’이라는 뜻으로
장대벌로 불리고 있는데, 부산 동래의 수영 장대벌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순교지로 유명하다.
특히 병인박해 때인 1868년에는 동래의 전교회장 이정식 요한을 비롯한
8명의 천주교인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 요한 회장은 가족들을 데리고
기장(機張)과 경주를 거쳐 울산 수박골로 피신해 교우들과 살고 있었다.
그러나, 동래에 남은 교우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이 요한의 정체가 알려졌고,
포졸들은 그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마침내 울산에서
그의 가족과 교우들을 체포하여 동래로 압송하게 되었다.
그때 투옥된 사람은 이 요한, 그의 아들 이월주 프란치스코와 며느리 박조이 마리아,
조카 이삼근 베드로와 이관복 야고보, 차장득 프란치스코, 옥조이 바르바라였으며
이 요한의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는 이미 동래에서 붙잡혀 감옥에 있었다.
<장대벌성지 – 14처>
동래 부사는 그들을 47일간 옥에 가두어 두고 심문하며 형벌을 가했으나
아무도 믿음이 흔들리거나, 다른 교우들의 신변을 발설하지 않자
경상좌수사 구주원(具冑元)에게 보내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수영(水營)으로 옮겨진 이튿날 구 수사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혹형을 행하며
배교하기를 강압했지만 8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1868년 9월 20일(음 8월 4일), 수영 장대로 끌려나가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처형을 맡은 군사들은 부자(父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렸지만,
동래 관장은 그대로 동시에 집행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참수된 교인들의 목은 장대 위에 매달아 두었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처형을 지켜본 이들은 “수영 장교들과 군졸들은 삼엄한 분위기에
위엄을 갖추었지만, 사형수들은 마치 잔칫집에 나가는 기쁜 표정으로 순교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일성록(日省錄)’과, 당시 현장을 목격한 두 사람이
1951년 8월 20일에 한 증언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들이 순교한 후 이 요한 가족 4명의 시신은 친척들이 거두어
부산 가르멜 수녀원 뒷산(동래구 명장동 산96)에 묻었다가
1977년 9월 19일 오륜대 순교 복자 기념관 뒷동산으로 옮겨 모셔졌고,
나머지 4명의 시신은 찾지 못해 기념비만 건립했다.
◇ 일성록(日省綠)
<일성록>
1752년(영조 28년)부터 1910년(융희 4년)까지 국정의 제반 사항을 기록한
일기체 연대기로서, 흔히 ‘왕의 일기'라고 표현한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쓴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이다.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와 더불어
조선왕조 3대 연대기로 꼽힌다.
<위키백과>
♱ 복자 이정식 요한(李廷植 1795~1868)
<이정식 요한 복자 흉상>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이정식 요한은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
교련관(敎鍊官)이 되는 등 여러 소임을 두루 거쳤고
많은 사람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59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가족을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계명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작은 방에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어 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에 임명되었고,
자신의 본분을 다하여 교우들을 이끌었다.
가족과 함께 피신한 울산 수박골에서 체포되어 문초를 받게 되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했으나
교우들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고 동래 장대벌에서 순교했다.
그의 부인은 홍주 출신으로 문경으로 이주하여 "영남 회장"이란 별명을 가진
박 요한의 누이였다.
이정식 복자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한
이월주 프란치스코이고 둘째 아들은 1868년 7월12일(음력) 충주에서
외삼촌 박 요한과 함께 순교한 이다두였다.
<가톨릭 성인 목록>
이정식 요한은 같은 날 순교한 대자 양재현 마르티노와 함께
부산지역 최초의 복자품에 올랐다.
♱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梁在鉉 1827~1868)
<양재현 마르티노 복자 초상화>
양재현은 동래의 좌수(坐首)로 일하고 있었다.
좌수는 조선 시대에, 지방의 자치 기구인 향청(鄕廳)의 우두머리로서
수령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가
향원(鄕員) 인사권과 행정 실무 일부를 맡아보았는데,
고종 32년(1895) 직함을 향장(鄕長)으로 고치면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표준 국어대사전>
그는 이정식 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68년 박해 때에 양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갔다.
관장 앞에서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통영의 경상우수영으로 이감되었고,
다시 동래 수영으로 이송되었다.
지역 유지인 그를 배교시키기 위해서 세 관아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동래 감옥에서 이정식 요한 회장과 교우들을 만난 양 마르티노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고 함께 순교했다.
당시 그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가톨릭 성인 목록>
그의 행적은 후손들의 구전에 의해 알려진 것이다.
‘병인군난치명사적’에는 양 복자의 가족도 신자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최 마리아, 아들 벨라도, 며느리 엘리사벳은
구금되지 않고, 양 마르티노의 처형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수영 장대순교성지 홈페이지>
♦ 장대벌의 성역화
<1868년의 장대 돌>
광안 본당은 1987년 6월 신자들의 성지 조성 헌금으로
동네 한가운데(부산시 수영구 광안 4동 546-4번지)에 있는
옛 장대벌 터 1백 61평을 확보하고 이듬해 7월
부산교구 순교자 현양 위원회가 성역화에 착수,
1988년 9월 30일 완공하여 순교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2004년에는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한 뒤
8위 순교자의 위패를 모셨다.
<장대벌 성지 -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