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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공간 스크랩 이인규는 헛소리를 그만두라-[객원칼럼]영·혼·육에 대한 잘못된 주장
21마라나타 추천 0 조회 39 10.10.23 21: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인규씨가 올린 아래의 글에 대해서, 워치만 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옹호하는 입장보다는, 믿는이로서 그를 왜곡하는 이인규씨의 처사가 너무도 거짓되고 가증한 것이어서, 평소에 알고 있던 워치만 니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기대하면서,  수많은 믿는이들에게 아래 본인(이인규) 스스로의 글에서 본인의 잘못됨이 드러나 있음을 만천하에 알려드리려 합니다.

 

 

[객원칼럼] 영·혼·육에 대한 잘못된 주장

2010년 06월 25일 (금) 07:46:27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대림감리교회 이인규 권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협력상담위원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카페 운영자


인간론을 설명할 때 정통교단에서도 어떤 교단은 영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을, 어떤 교단은 영과 혼과 육을 구분하는 삼분법을 지지한다. 물론 필자는 이분법이 옳은가 혹은 삼분법을 옳은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각각 분리된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는 헬라 철학적인 이원론에 대한 것이다.

 

=> 워치만 니가 언제 영,혼,육의 <구분>을 말했지, 분리를 말했는가? 대부분의 삼분론은 구분을 말하는 것이지, 분리를 말하지 않는다. 전인의 통일체 안에서 기능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인규 그대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삼위일체의 가장 거봉이라는 성 어거스틴도 그의 삼위일체 론에서, 인간의 심리적유비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인간의 영혼안에 각인된 삼위일체의 유비에 대해서 8권에서는 사랑하는자 , 사랑받는자,사랑의연대라는 외연적 관계의 삼자관계를 소개한다. 또한, 9권에서 마음,지식,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10권에서는 기억,이해,의지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들을 그가 말할때에는 이 셋들은 하나이며, 서로 동등하다. 이 셋은 실제적으로 존재하며, 관계적으로 서술된다. 이 셋은 분리할수 없다. 이 셋은 부분들인 듯이 결합되거나 혼합되지 않으며, 한 본질적 존재며, 서로 관계적 존재이다.

 

이러한 성 어거스틴의 구분을 이인규 그대는 <분리>라고 비판할 수 있는가?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

 

이러한 주장은 워치만 니로부터 우리에게 전파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념으로부터 숱한 이단들(지방교회, 구원파, 베뢰아 등등)이 나타났다. 심지어 정통교회에서도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을 살아서 분리되는 장소적, 공간적인 개념으로 간주하여 이원론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구조적 성질을 영,혼,육으로 보는 삼분설의 기원이 워치만 니로부터 왔다는 그대의 주장이야말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  441p 사람의 <구조적 성질>에 대해 살펴보라.  이 삼분설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받았으며, 동방교회의 갑바도기아 교부중 대표적인 닛사의 그레고리등에게서 찾아볼수 있다.

 

또한, 중세기에 삼분설은 공통적으로 신뢰하는 정설이 되었다.  종교개혁은 이에 대해 아무런 변화도 야기시키지 않았으나 약간의 지도적 인물들은 삼분설을 변호하였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스콜라주의의 의견에 밀착하였으나 프로테스탄트 계통에서는 이와 입장을 달리하였다.

 

19세기에 삼분설은 독일이나 영국의 신학자들, 예를들면 루스, 올샤우젠, 베크, 델리치,오벌린,윌러,화이트,허드등에 의해 여러형태로 부활하였다.

 

이 정도의 글만 읽어도 삼분설이 워치만 니로부터 왔다는 그대의 소리가 왜 헛소리인지를 알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모르면 잠자코나 있을일이지, 이런 왜곡된 글을 떠들고 다니는 그대의 행태에 대해 그 도가 너무도 지나치며, 의도적인 것이기까지 하여, 필자는 그대의 소리를 헛소리로 단정하는 바이다. 이러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이인규의 글에 대해서 삼가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필자는 이분론도 아니고 삼분론도 아닌, 인간의 전인설에 무게를 두고 3가지의 견해들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1) 영과 혼은 서로 다른 구성요소인가?
과연 성경에서는 영과 혼을 서로 다른 인간의 구성요소로서 구별하는지 알아보자. 삼분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 성경구절을 제시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그러나 이것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별되어진다는 명백한 근거가 되지 않으며, 이것만으로 삼분법을 증거하기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히 4: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을 동일하게 적용시키자면, 인간의 구성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로 되어있어야 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막 12:30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구절을 볼 때에 목숨이라고 번역된 영혼이 마음과 뜻과 힘과 함께 서로 다른 인간의 구성요소라고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사고나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그러한 기능들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인간의 구성요소>가 아니라고 말하는가?  그대가 성어거스틴보다 뛰어난가? 언제부터 그대가 판단자가 되었는가?  인간의 구성요소들을 보는 시각은 신학자들마다의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으며, 그것을 그대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성 어거스팀을 먼저 비판하라. 또한 설사 그 견해들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가 주장하는 소위 <이단>으로까지의 판단 범위가 아니다.

영,혼,육 모두는 한 인간의 구성요소이며, 어거스틴은 심리적인 유비중에 마음,지식,사랑의 이 셋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분리됨이 없으며, 관계적이라고 말한다. 그대의 사고로 어거스틴의 이 말을 이해할수 있는가?  그대는 인간의 정신중에서 감정과 의지등를 구분하지 않는가?  그대의 사고가 참으로 괴이하도다. 그대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구분>이 <분리>로 읽혀지는가?

 

성 어거스틴이 말한 부분을 인용함으로 그대에게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말한다.

한 분 한 분이 다른 한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 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모든 분안에 계시며, 모든 분이 한 분 안에 계시다. 이 점을 깨닫는 사람은 부분적으로 보든지,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보든 간에(고전13:1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기뻐하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존경하며 감사하라. 그러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힘쓰며,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말라.

 

그대는 워치만 니의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으며,  남의 말만 듣고 거리의 외치는 자임이 명백하다. 이것은 아래에서 입증이 된다. 더 이상의 나팔수를 내려놓고 겸허히 경건함으로 돌아가기 바란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구성요소 중에서 물질과 비물질에 대해서 “영과 육체”로 구분하기도 하고 “혼과 육체”로 구분하기도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직접 나타난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soul, 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 10:28)라고 하셨다. 즉 혼(soul)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사후에 존재하는 것을 말하며, 즉 몸은 죽지만, 죽지 않고 남는 사람의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죽지 않는 비육체적인 부분을 “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울은 “육신은 멸하고 영(spirit)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고전 5:5)라고 하였다. 바울은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인 존재를 “영”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고보서 2장 26절에는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라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영혼”은 한글성경에서는 “영혼”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soul(영혼)이 아니라, spirit(영)이다.

결론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혼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영과 혼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죽지 않은 비육제적인 것으로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또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 히 12:23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spirit)”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계 20:4에서는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soul)”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영과 혼에 대한 구별이 없다. 다음 성경구절에서도 그렇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soul)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 6:9).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spirit)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3~24).

또한 죽음에 있어서도 혼(soul)이 떠난다는 표현(창 35:18, 왕상 17:21, 눅 12;20)과 영(spirit)이 떠난다는 표현(시 31:5, 전 12:7, 눅 23:46, 요 19:30)등이 같이 사용되어 사실상 명확한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영과 혼이 각각 따로 떠난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혼이 육체라는 주장도 있는데, 그러한 주장은 상대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영과 동일하게 호환되어 사용되는 단어인 혼이 육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영(spirit)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말씀하셨다(눅 24:39).

또한 요한복음 12:27에서 예수께서는 “지금 내 마음(soul, 프쉬게, 혼)이 민망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다음 장, 요 13:21에서 예수님은 “심령(spirit, 프뉴마, 영)에 민망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또 마리아는 “내 영혼(soul, 프쉬케, 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spirt, 프뉴마, 영)이 내 구주를 기뻐한다”(눅 1:46~47)고 말하였다. 마음, 심령 등은 모두 전인적인 개념을 갖는 것으로 해석하여야만 한다. 마음이라는 단어도 원문으로 보면 heart, mind, spirit, soul 등 다양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대의  이분설, 삼분설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는 달리 비판할 말이 없다. 오히려, 그것만이라면, 얼마든지 토론하고 대화할 때에 서로에게 유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삼분설을 받아들이면, 마치 <이단>이라도 되는 것인양, 그대가 판단자가 되어 수없이 많은 믿는이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정도의  글을 쓰는 그대의 지식자랑으로 보아 삼분설이 워치만 니로부터 전해져 온것이 아님에도 그 기원을 워치만 니에게 두거나, 독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오인하도록 유도함으로  그에 관련된 모든 믿는이들을 <이단>화로 정죄해 가는 것은 그대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벗어난 것임을 입증한다.

 

언제 교회 역사가 삼분설을 이단으로 정죄했는가?  어떤 신뢰있고 존경받는 신학자가  삼분설을 취한 믿는이들을 <이단>이라고 확정적으로 정죄한적이 있었던가?  이쯤에서 그대의 얇팍하고 교만하고 의도적인 비판들을 거두어 들이고 주님앞에 회개하기 바란다.  주님의 면전에 서기 전에 부디 참다운 믿는이로 돌아가기 바란다.

 

 

 
(2) 사람은 살아서 영혼(영 혹은 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죽었을 때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이단들뿐 아니라 일부 정통교회조차도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켜 육체에만 죄가 있고 육체에만 사탄이 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헬라적인 이원론적 생각으로 육체를 죄악시하고 육체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것으로서 마치 중세 때의 일부 수도원 시대를 연상케 한다. 그들은 육체를 죄악시하여 스스로 학대를 하였다.

바울은 고후 7:1에서 “거룩함을 온전하게 이루어 육과 영(spirit)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라고 말하고 있다. 육뿐 아니라 영도 더러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영에는 하나님이 거한다”라든지 혹은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주장은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육에는 죄와 사탄이 거하고, 영에는 하나님이 거하므로 영은 죄가 없다는 단체는 위 성경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죄에 있어서도 혼이 죄를 짓는다는 구절(벧전 1;22, 계18:14)과 영에 죄가 있다는 구절(시 78:8, 잠 16:18, 전 7:8, 잠 16:2)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간은 전인적으로 죄인이다. 인간은 육체나 영적으로 모두 죄를 지으며 더러워진 것이다.
게다가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이원론적 구원론은 명백하게 잘못된 주장이다. 물론 성욕, 식욕같은 욕망을 육체적인 욕망이라고 표현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육체만의 욕망이 아니며, 결국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적인 욕망이다. 육체는 죄악되고 더러운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다. 아래 본문은 영혼과 육체가 따로 따로 주를 찬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사람을 육체와 영(영혼)으로 구별하여 죄는 육체에만 있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그렇게 언급하지 않는다. 영적예배는 우리의 몸을 드리는 헌신이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시 63: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죄와 사탄이 육체에 거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기도 한다는 위의 성경구절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반박하겠는가?

 

윗글에 대한 그대의 비판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  고개들어 하늘을 바라보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마치 삼분론자이면, 육체는 사탄이고 영(혼)은 죄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는 헛소리인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을 그대만 모르고서 남들이 듣거나 말거나 허공에 대고 짓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그대는 겉사람과 속사람도 모르는가?   그대의 말중에 <인간은 전인적으로 죄인이다. 인간은 육체나 영적으로 모두 죄를 지으며 더러워진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삼분론을 믿는이들도 대부분이 인정한다. 그럼에도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타락함으로 죄가 원래의 의로움의 뼈대 전체를 무너뜨려 버렸던 것처럼, 이제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의 뼈대 전체를 무너뜨리며, 점진적으로 인간의 모든 존재(이분설,삼분설,전인설)을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 하나님의 신의성품에 참예하게 한다.

 

위 부분에 대해서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의 글을 인용한다.

 

영혼의 실체야말로 은혜가 저하는 적절한 처소이므로 그곳에 있는 은혜가 영헌의 모든 기능적 구조물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로 그 실재에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함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지성가 의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의 본체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 이루어 집니다. 그 연합은 특별한 어느 한 기능적 구조물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전체에 속한 것입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은혜로써  온전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특별한 기능적 구조물에만 온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혼의 실체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어느 한 기능적 구조물에 부분적으로 거핫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에 거하시기 때문에, 은혜로 인하여 영혼 전체의 구석구석까지 다스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결정판인 회복역성경의 글을 인용한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1b겉사람(outer man)은 2썩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1c속사람(the inner man)나날이 3d새로워지고(renew) 있습니다.

 

1b) 겉사람은 몸을 기관으로 삼고, 혼을 생명과 인격으로 삼아 이루어진다. 속사람은 거듭남 영을 생명과 인격으로 삼고, 새롭게 혼을 기관으로 삼아 이루어진다.

혼 생명(걷사람)은 부인되어야 하지만(마16:24-25), 혼(생각,감정,의지)의 기능은 속사람의 인격인 거듭난 영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굴복되어(고후10:4-5) 새롭게 되고 높아져야 한다.

 

2) 혹은, 소멸되고, 소모되고, 마모되고, 계속되는 죽임, 곡 죽이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겉사람, 즉 우리의 물질적인 몸과 이 몸에 생명을 주는 혼(고전15:44과 각주)은 소멸되며 마모되고 있다.

 

3) 이것은 부활 생명의 신선한 공급을 받아 양육됨으로써 새로워지는 것이다. 죽을 몸인 우리의 겉사람은 죽음이 죽이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소멸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거듭난 영우리 존재의 속 부분들(렘31:33, 히8:10, 롬7:22, 25)은 부활 생명을 공급받아 신진대사적으로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다.

 

렘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히8:10 a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다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내 1법들을 그들의 2생각 안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들을 3새길 것이다. 4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5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될 것이다.

 

1) 이 인용문의 출처인 예레미야31:33에 사용된 단어는 법(단순형)이지만, 이 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법들(복수형)이다. 이것은 그 법이 하나의 법이지만, 확장되어 여러개의 법들이 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하나의 법은 생명의 법이다.(참조 롬8:2 ‘생명의 영의 법’).

모든 생명에는 각각의 법이 있다. 생명이 높을수록 그 법도 더 높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이 신성한 생명은 가장 높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신성한 생명은 가장 높은 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여기에서 언급하는 법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신성한 생명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심으로써, 가장 높은 이 법을 우리의 영 안으로 넣으셨다. 그리고 이 법은 영에서부터 우리의 생각,감정,의지와 같은 속 부분들 안으로 확산되어 몇가지 법들이 된다.

 

생명의 법은 문자로 된 법과 다르다. 생명의 법은 그 법의 생명의 요소에 따라 우리를 안으로 규제하지만, 문자로 된 법은 그 법의 죽은 문자로 말미암아, 또 그 법의 죽은 문자에 따라 우리를 밖에서 규제한다.

죽은 문자로 된 법은 외적인 가르침에 달려있지만, 생명의 법은 내적인 의식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자로 된 법을 따른 외적인 가르침들이 필요하지 않다.(히8:11)

 

2) 여기에서 ‘생각’은 렘31:33에 있는 ‘속 부분들’과 일치한다. 이것은 생각이 속 부분들 중의 하나라는 것과 그것이 ‘속 부분들’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속 부분은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과 의지가 포함한다. 이 세가지는 다음 절에서 언급된 마음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3) 먼저 하나님은 그분의 법들을 우리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 다음에 그법들을 우리 마음에 새기신다. 그분은 우리가 생명의 법을 체험하고 있을 때에 이렇게 새기신다.

 

롬7:23 내 지체들 안에 있는 1한 다른 법내 생각의 법과 2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3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1) 믿는이의 영,혼,몸 세부분에는 서로 다른 세법이 있다. 롬7장, 8장에 계시된 대로, 이 세 법은 우주 안에 있는 세 편에서부터 유래한다. 믿는이의 지체들 속에 있는(롬7:23), 즉 그의 몸 안에 있는 죄와 죽음의 법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인데, 사탄은 죄로서 믿는 이의 육체안에 거한다. 믿는 이의 생각, 곧 그의 혼 안에 있는선의 법(롬7:23)은 사람의 타고난 생명, 즉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다.

믿는 이의 영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데, 그분은 그 영으로서 사람의 영 안에 거하신다.(롬8:2, 16).


세 법을 가진 이들 세 편은 그들(하나님, 사람, 사탄)이 에덴동산에 있었던(창3장)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금 믿는 이 안에 있는 세가지 법 이외에, 사람 밖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롬7:22, 25)

 

엡4:22 1여러분은 2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3옛사람, 곧 4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a옛사람을 5b벗어 버린 것이며,

3) 옛사람은 아담에 속하였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다.

 

엡4:23 또한 생각의 1a영 안에서 2b새롭게 되어

1) 이것은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이며, 이 거듭난 영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어 있다. 이렇게 연합된 영은 우리의 생각 안으로 확산되어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변화된다.

2)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위한 것이다.(롬12:2, 고후3:18)

  

고후5:17 1그러므로 누구든지 2a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3b새 창조물입니다. 4c옛것들은 d지나갔습니다. 5보십시오, e새것이 되었습니다.

3) 옛 창조물에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없지만, 하나님에게서 거듭난 믿는 이들로 구성된 새 창조물에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이 있다(요1:13, 3:15, 벧1:4).

그러므로 믿는이들은 육체의 옛 본성을 따르지 않고 신성한 생명의 새로운 본성을 따르는 새 창조물이다(갈6:15)

 

이인규 그대는 위에서 <사람을 육체와 영(영혼)으로 구별하여 죄는 육체에만 있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이다.>라고 하는데, 윗글 회복역 성경 어디에서, 그러한 것이 있는가?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타락은 전인의 타락이며 거듭남으로 인해서 영,혼,육이 변화를 받아서 점진적으로 성화(유기적인구원)되어가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그대는 어찌 그런 어이없는 말로 사람들을 호도하고 왜곡시키는가?
 


(3)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과 “영”은 인간의 육신과 영을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을 대조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영을 좇는 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 “영”은 개인적인 사람의 영과 육체를 분리시켜 구별하자는 “개인의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좇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총체적인 인간”을 말함으로서 “성령 하나님”과 대조되는 경우로 사용되었다. 또한 육신이 죄로서 거한다는 표현은 그 육신 자체가 곧 성령을 거스른 전인적인 인간의 욕망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 성경본문과 같다.

“육체(인간)의 소욕은 성령(하나님)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즉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영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성령이 구별되고 대조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어 “루아흐” 혹은 헬라어 “프뉴마”로 표현되는 “영”이란 때로는 인간의 영, 즉 인간의 내적인 생명력으로서 신적실재와 접촉하는 직접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가리킨다. 인간의 영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하였듯이, 바울이 말한 “육신의 소욕”의 개념은 사람을 육과 영으로 분리하고 구별하여 영을 좇는 개념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좇는 삶”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용된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7~8).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의 생각”은 물질적인 고깃덩어리만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을 좇지 않는 총체적인 인간의 생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본문에서 “육신에 있는 자”라는 뜻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 즉 육신에 있는 자들(거듭나지 않는 자)과 육신에 있지 않은 자들(거듭난 자들)을 구분하여 주는 기준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바울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다시 말하여 “육신에 있다”는 말의 뜻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상징적이며 상태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며, “영에 있다”는 말은 “거듭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6~7).

바울이 말한 “육체의 소욕”이란 영혼을 제외한 고기덩어리만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외면하는 총체적인 인간의 소욕을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또 영이 거듭난다는 것은 이전의 영이 죽거나 혹은 없었는데,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 영을 강퍅하게 하셨다”(신 2:30)는 것처럼, 불신자에게는 영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듭난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영이 존재한다.

 

이는(3588) 너의 하나님(430) 여호와께서(3068) 그를(0000) 네 손에(3027) 붙이시(5414) 려고(4616) 그 성품을(7307) 완강케 하셨고(7185) 그 마음을(3824) 강퍅케 하셨음이라(553) 오늘날과 같으니라(3117)

 

j"Wr(7307, 루아흐) , 숨, 바람, 영

루아흐(명여)는 루아흐(j'Wr , 7306: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730회 나온다.

 

bb;le(3824, 레바브) , 내부인간, 마음, 정신, 의지

레바브(명남)는 레브(ble , 3820)와 동일하며, '내부 인간,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를 의미한다.
→ 3820 레브를 보라.

 

과연 워치만 니가 불신자에게는 <영>이 없다고 했는가?

영에속한 사람 2권, 9페이지, 사람의 거듭남(4장과비교)의 인용

 

죄인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위로부터 영의 거듭남이 필요한가? 이는 사람이 타락한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영이기에 영의 거듭남 곧 새 영을 영접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사탄은 타락한 영이고 인간도 타락한 영이다. 차이가 있다면 인간에는 육신이 있다. 사탄은 하나의 영이다.

 

(중략) 사탄은 그의 타락으로 인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잃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탄처럼 타락하였고 어두움 속에 떨어졌고 하나님에세서 끊어졌다. 그럴지라도 사람의 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영은 이미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서 교통할수 없고 다스릴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해석으로 말한다면 사람의 영은 이미 죽은 것이다. 범죄한 천사장의 영이 영원히 존재하듯 범죄한 사람의 영도 영원히 존재한다.

 

윗글 어디에서 이인규 그대가 말한 <불신자에게는 영이 없었다>고 한 부분이 있는가? 영에속한 사람의 책 불과 9페이지만 읽어도 알수 있는 것을  그대는 제대로 알지도 알아볼 노력도 하지않는 가증한 처사이다. 이것이 바로 오히려 그대가 거짓된 자요, 교만한자요 사탄의 계략에 빠진자요, 형제를 라가라하는 자인것이다.  부디, 주님의 은혜와 긍흉하심으로 모든 비방을 중지하고 겸손함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즉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 그 영이 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영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음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을 때에,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죽음도 함께 포함되어졌다.

 

바울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나(엡 2:1)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롬 6:11)고 말하였을 때에, 영과 육을 구별하고 분리하자는 것은 아니며, 전인적인 나의 시간적인 변화를 뜻한다. 우리의 영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 5:17).

 

성경이 말하고 있는 “육에 속한 사람”(고전2:14, 푸쉬기코스)은 문자적으로는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혼에 속한 사람을 뜻한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스트롱 박사는 인간을 건물로 비유하여 “영”이라는 창문은 하늘로 향한 것이고, “혼”은 지상을 향하여 달린 창문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비유는 적절한 설명으로 보이는데, 영혼은 창문이며, 그것이 어떤 개념으로 사용되었는가에 따라 의미적인 관점으로서 구별되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영과 혼은 실제적으로는 분리될 수 없지만, 의미상 개념적으로 구별될 수 있으며, 영은 인간성의 특수한 방면으로서 사람과 하나님을 결합케 하는 것, 혼은 속사람의 세속적 행동과 관습에 제한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보면 적절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죽어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서 썩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게 되며, 썩지 않을 신령한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으며, 성경에서 육체라는 표현은 대부분 영과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을 말하거나, 단지 개념상으로 영과 대비시키는 육체로서 그 의미를 표현한다. 성경에서는 인간이 살아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경우가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서 2장26절과 같이, 영혼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최근에는 영성개발원이니 영성신학이니 하는 곳에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주장을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이며, 헬라철학적인 이원론 사상일 뿐이다. 특히 입신이라는 비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죽지 않고 천국과 지옥을 갈 수 있다는 신사도운동은 비기독교적인 주장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일부 이단 단체 중에 “죄가 육체에 거한다, 사탄이 육체에 거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생각하여 보아야만 한다. 죄는 그 자리를 육체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전인적이며 총체적인 자아가 죄를 짓는 것이다. 과연 영혼(혹은 영)이 배제된 육체가 죄를 지을 수 있는가? 마음은 영을 대표하는 기관이며 마음 안에 영이 있으며, 또한 동시에 육체가 있으므로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11:9)

 

성경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인간은 영(영혼)이 배제된 육체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으로 죄를 짓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히: 레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


“마음(헬: 칼디아)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반면에 마음은 선을 낼 수도 있고 악을 낼 수도 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헬: 칼디아)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즉 성경에서 “육체의” 라는 말은 “죄많은” 이라는 단어와 동일시 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육신이 그 자체가 연약함으로 유혹의 목표가 되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자들과 같이 죄가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그 영향과 활동이 지정의에 미쳐 전인적으로 죄가 파급되어지는 것이다.

 

헬라철학적인 이원론자들은 이 세상의 근원을 영(선)과 물질(악)의 두가지로 구별하려고 하며, 모든 창조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양분하려고 한다. 그러한 헬라철학은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육체만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포함한 전인적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육은 그 자체만으로 악하거나 악의 원천이 되지 않는다.

 

 

이인규 그대의 윗글에 대한 모든 궤변과 헛소리는 결정적으로 아래 워치만 니의 글로서 기각되었음을 단정할 수 있다.

 

(워치만 니의 글)

이는 사람이 타락한 영이 되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영이기에 영의 거듭남 곧 새 영을 영접할 필요가 있는것이다

그럴지라도 사람의 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영은 이미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서 교통할수 없고 다스릴수 없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인규 그대의 섣부른 지식자랑은 이제 그쳐야 한다.  그대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은 거짓된 것이며, 쓸모없는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잘못된 지식의 기초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믿는 성도들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 그대가 쓴 이글은 그대가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글이었으나, 오히려 그대 스스로가 잘못되었음을 고백하는 글이 되었음을 만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1) 워치만 니는 삼분론을 처음으로 주장하여 퍼뜨린 사람이 아니다.

2) 결코 워치만 니의 삼분설은 성 어거스틴처럼 <구별>을 말하는 것이지, <분리>를 말하지 않는다.

3) 삼분론을 취하는 워치만 니는 결코 육체와 영혼을 죄와 죄없음의 대비로 보지 않으며, 겉사람-속사람의 대비를 그대가 오해 내지 의도적으로 잘못된 비판을 하는 것이다.

4) 워치만 니는 결코 타락한 사람안에 영이 없다고 말한적이 없었다.

 

위의 4가지 중에서 어느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부분이 없었으니, 그대가 바로 거짓된 자요, 수근수근하는자요 비방하는 자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그대는 주님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가야 한다.

 

또한, 윗글로만 보아도,  그대는 이미 다른 믿는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격 없음이 입증되기 충분하고, 앞으로도 다른 잘못된 믿는이들을 판단하는 것은 그대의 몫이 아님을 알려드린다.  지금까지의 준 공인으로서 행한 그대의 과오를 주님앞에 가기까지 회개하기도 짧은 인생이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안에서  깊은 통회함으로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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