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0.바람은 쌀쌀하지만 햇살은 참 따사로운 봄 날씨
가까운 포충사 뒷산인 제봉산을 다녀왔다.
광주에 있는 거리 이름중 충장로와 금남로는 잘 알지만 제봉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것 같다.
아시다 싶이 임진왜란대 활약한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시호를 따서 충장로가 되었고
금남로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때 공을 세운 금남군 정충신에서
그리고 제봉로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제봉 고경명장군의 호를 따서 지은 도로로
남광주역에서 전대병원오거리-동구청-전남여고-대인광장-광주역까지의 도로명이다.
그리고 제봉산은 고경명장군의 호를 따서 지은 포충사 뒷산인데 그곳이 고경명장군이 태어 난 곳이다.
시작2024-03-10 10:20:24
종료2024-03-10 13:28:53
전체 시간 03:10:15 운동 시간 02:35:21 휴식 시간 00:34:94
전체 거리 4.5km 운동 거리 4.5km
속도 최고 속도 5.0km/h 평균 속도 1.8km/h 구간 속도 4.5km/h
경사도 오르막 0.9km 내리막 0.9km 평지 2.8km
고도 시작 고도 55.0m 최고 고도 194.0m 누적 고도 145.0m
소모 열량 총 소모 열량 565kcal
포충사 주차-포충사경내 관람- 편백데크길-제봉산-고원희가옥-광주콩센터-포충사 원점회귀
양과동정 (良苽洞亭)의 과 자가 크게 쓰여 있는데 송시열이 글씨를 쓰려고 하는데 먹물 한방울이 먼저 떨어져 그 한방울 자리를 포함해 글씨를 쓰다 보니 과자가 더 크게 쓰여 졌다고 하는 믿거나 말거나....
지정종목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지정일1990년 11월 15일
소재지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166-1번지
시대미상
종류/분류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조경건축 / 누정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1990년 11월 15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포충사에 주차를 하고 경내를 한바퀴 둘러 본다.
광주 포충사(光州 褒忠祠)는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사우이다. 1974년 5월 22일광주광역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601년 전라도 광주에 충렬공고경명(忠烈公 高敬命)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을 함께 배향하였다. 1603년 사액을 받았다.
포충사에 대해 더 보려면==>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C%A3%BC_%ED%8F%AC%EC%B6%A9%EC%82%AC
포충사의 충노비는
옛사우 입구 홍살문 앞 자연석에 새겨진 비인데,
공경명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던 봉이,
귀인의 충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며,
이들은 고경명의 가노로서 의병을 따라 나서
주인이 순절한 후 시신을 거둬 장사를 지내고
이듬해 충열공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 참가해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인물들입니다.
괘고정과 광산이씨
광산구 대촌출장소 원산동 마살메 어구에 이르면 논가운데 한 쪽이 썩은 조선 버드나무가 서 있고 바로 옆에 느티나무가 서있다. 이 곳 사람들은 이 버드나무를 괘고류 또는 괘고정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살메(만산동)마을은 광산이씨가 살고 있으며 광산이씨의 선조인 필문 이선제의 부조묘가 있는 곳이다.
만산동을 일명 만호동이라 부르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이장동에서 살았던 광산 이씨인 일영이 만산동으로 이주해 들어와 살다가 죽자 그 아들 선제가 만산동 뒷산에 묘를 쓰고 시묘를 했다. 다시 선제가 죽은 뒤 이 곳에 묘를 쓰고 과거에 합격한 5형제가 시묘를 할 때 많은 선비들과 관리가 출입했기 때문에 만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괘고유는 광산이씨인 선제가 심은 나무로 그가 죽기전에 예언했다는 말이 전설로 전해온다.
선제가 말하기를「이 나무는 내 자손들의 성쇠와 그 수를 같이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나무는 그의 5대손 동암 이발형제 일가들이 정여립의 란에 몰려 장살을 당한 뒤 말라 죽었다가 3백여년이 지나 다시 살아 났다는 전설로 유명하다.
그 내용은 이 나무가 심어진후 선제의 아들 손자 대대로 벼슬에 올라 이 곳에 있는 선제의 부조묘에 고유를 드리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북을 걸고 삼현육각을 잡혀 축하연을 배풀곤 하였다. 그 연유로 이나무를 괘고정(괘고유)이라 하였는데, 5대손이 뿔뿔이 흩어진 뒤부터 말라 죽기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아 죽었는데 가지는 모두 곰삭아 없어졌으나 죽은 원목만은 계속해서 지탱하고 있었다 한다. 숙종 때에 이르러 동암과 광산이씨들의 죄가 신원이 되고 그 자손 일부가 이 곳에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여기서 살게된 이상엽이 이 나무에 얽힌 광산이씨들의 옛 일화를 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중 그의 아들 주신을 시켜 이 나무를 불태워 그 흔적을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주신은 집 머슴들과 함게 나무를 해다 가운데만 썩어 보기 흉하게 서있는 이 나무 가운데다 마른 나무를 가득 채우고 불을 질러 3일간을 태웠으나 썩어가던 이 나무는 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도끼질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목을 태우는데 실패한 주신은 아버지께 도저히 괘고정 썩은 둥치가 불에 타지 않음을 말하자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하시며「그 썩은 나무 사이를 파고 양자나무를 심어 보아라」하였다.
주신은 그 말을 듣고 정자나무로 알맞는 느티나무 묘목을 구해 썩은 괘고정 사이에 심었다. 이 양자나무가 30년 가량 자라자 이변이 일어났다. 3백여년 전에 죽어 고목뭉치만 남아 3일간 불을 먹은 이 나무 한 쪽에서 새움이 트기 시작했다. 지금의 조선버드나무는 서북편에 두 가지가 뻗어 높이 20m 가량의 고목이 되어 있으며, 그 옆에 양자나무인 느티나무도 나란히 자라고 있다. 이 나무의 내력을 아는 이들은 이곳을 지날 때 마다 이 괘고정을 쳐다보며 선제가 남긴 유언을 이야기 한다.
[출처] 대촌동 설화들|작성자 푸른하늘
1990년 10월 15일 광주광역시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원산동에 있는 이선재(李先齋)의 부조묘로,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영구히 제사지내도록 하 던 특전인 부조지전으로 건립한 사당이다. 이선재는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가부(家父), 호는 필문(畢門)이다.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문종 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을 그만 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으로 이 고장에 향약(鄕約)을 베풀어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 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秀巖書院)과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사당은 정면 3칸과 측면 1칸,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막돌 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마루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리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문으로 띠살문이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高設三門)과 양측으로 맞담 위에 기와를 얹은 담을 돌렸다. 부조묘의 뒤쪽 산 언덕에 이선재의 묘와 묘비가 있다. 마을 앞에는 그가 심었다는, 괘고정(掛鼓亭)이라고 불리는 오래 된 거수(巨樹)가 있다.
이쁜 꽃들을 보고 멋지게 힐링한 봄나들이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