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견율 비바사(善見律毘婆沙) 제一一권
물었다.
만약 세기를 셋넷까지 하고 그만두면 무슨 좋지 않음이 있습니까.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절박해지나니, 절박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복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소 외양간 안에 소가 아주 많은데 양 외간 속이 몹시 좁으면 반드시 외양간을 부수고 나와야 하는 것처럼, 만약 열(十)이 차면 몸 안이 너그럽게 받아들여서 마치 큰 외양간과 같나니, 소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지키고 기르기가 쉽습니다.
만약 여덟 아홉까지 하면 무슨 좋지 않음이 있습니까.
어수선하게 의심을 내지 마십시오.
혹자는 말하기를 나는 선의 맛을 얻었지마는 헷갈린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와 같이 잘못됐나니, 그대는 버리고 여의라 고 하기도 하나니, 만약 숨을 세면 안전되게 천천히 세십시오.
마치 사람이 곡식을 되려면 먼저 가득히 씌워 얹기를 마치고 연후에 하나라고 세며 다시 되다가 만약 티끌이나 풀이 있으면 골라 주어 버리고 씌 얹은 뒤에 둘 하고 외치며, 이와 같이 차례로 하여 열까지 이르는 것처럼, 좌선하는 비구의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을 세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혹은 급히 하는 이는 소리를 치는 사람이 소를 세 듯하나니, 어떻게 소를 세는가 하면, 약고 똑똑한 소 치는 사람은 손에 지팡이를 잡고 문 기둥 위에 앉아서 소를 물으며 나올 때에는 소를 때려서 빨리 나오면 지키다가 세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며 이렇게 열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세는 것은 어느 때에는 四대가 좋아하지 않고 숨 기운이 조급하게 내쉬고 들이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내쉬고 들이쉼을 따라 세되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 . 둘. 셋. 넷. 다섯 합니다.
소를 셀 때에 문빗장에 대고서 세며 안팎을 세지 않나니, 빨리 세기 때문에 마음에 안정을 얻습니다. 왜냐 하면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여울을 오르는데 하나 . 둘. 셋. 넷. 다섯 하고 상앗대를 서로 찔러서 배를 버린 연후에라야 안정되는 것처럼, 내쉬는 숨도 그와 같습니다.
어찌하여 마음은 배와 같고 내쉬고 들이쉬는 숨은 상앗대와 같으냐 하면, 마음이 五욕에 흘러가면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이
그를 누르고 안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숨을 들이쉬어 마음이 따라 들어가면, 마치 기름이 몸에 들어가서 아름답고 풍만해짐과 같고, 만약 숨을 내쉬어 마음이 따라 나오면 관 가운데서 가장 크나니, 그것이 큼으로 말미암아 마음도 조복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 법을 제하고 부딪치는 곳에 머무르고 이르러서 세십시오,
그런 뒤에라야 삼매를 이룩합니다.
그러므로 율본 중에서 말씀하기를, 안팎의 숨을 세지 말라.
세다가 언제는 그쳐야 하나니, 만약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숨의 내쉼과 들이쉼을 알며, 곧 그쳐서 세지 말고 이렇게 한 뒤에는 곧 수념(隨念)을
지으라 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수염이라고 하느냐 하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알며 세기를 빌지 않고서 아나니, 수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이 세 가지입니까.
배꼽이 처음이며, 심장이 중간이며, 코끝이 나중이니 이것을 세 가지라 합니다.
만약 내쉬는 숨이면 배꼽이 처음이요
심장이 중간이요
코끝이 나중이 되지마는, 만약 들이쉬는 숨이면 코끝이 처음이며 심장이 중간이며 배꼽이 나중입니다.
만약 마음이 내쉬는 숨을 따르면 마음은 안정되지 못하며, 마음이 안정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몸이 동요하나니, 그러므로 율본에서 만약 마음이 내쉬는 숨을 따르면, 안이 안정되지 못하고 밖이 동요하나니, 동요함으로 말미암아 삼매를 이룩하지 못한다 고 하였습니다.
혹은 들이쉼을 따르고 내쉼을 따라도 그와 같으므로, 숨의 중간과 나중의 내쉼과 들이쉼을 따르지 말고, 다만 코끝에 안정하게 놓아두어 바른 마음만에 머무르고, 그리하여 머무르면서 숨의 내쉬고 들이쉼을 기다리며, 만약 세기를 끊으면 마음의 기억이 스스로 안정됩니다.
마치 절뚝발이가 어린아이를 지키며 기르는데, 바구니에 담아 집의 사이에 매달고 앉아서 잡고 있다가 한 군데로 움직이면 손이 옮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비구의 좌선도 그와 같습니다.
또 이를테면 문지기가 사람이 출입하면 먼저 멀리서 묻지 않고 문지방에 도착한 연후에라야 물으며, 또한 오는 곳과 가진 여러 가지 물건을 묻지
않고 다만 그 출입만을 아는 것처럼, 비구의 좌선도 그와 같아서 먼저 거슬러가지 않고 내쉬고 들이쉬는 숨만을 아나니, 그대들 스스로가 아셔야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만약 세 가지 법을 알면 마음은 곧 안정되느니라 고 하셨나니, 무엇이 세 가지 법이 하면
첫째는 즐거이 듦(樂入)이요,
둘째는 방편이요,
셋째는 위를 얻음(得上)이니, 이것을 세 가지 법이라고 합니다.
마치 큰 나무가 땅 위에 잘 놓였는데, 어떤 사람이 나무를 쪼개려고 하면 먼저 나무 중간을 살펴본 연후에 톱으로써 쪼개나니, 마음은 늘 톱니에다가 두고 보면서 그것을 똑바로 되게 하며 갔다 왔다 함은 살피지 않는 것처럼,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도 그와 같습니다.
선을 생각하는 법을 나타내고 방편을 분별하여 세움은 큰 나무가 땅에 있음과 같고, 잘 나무 중간을 살핌은 마음에 잘 생각함과 같고, 선법은 톱의 왔다 갔다 함과 같나니, 내쉬고 들이쉬는 숨도 그러하여 마음을 톱니에다가 두고 봄은 코끝에다가 마음을 둠과 같습니다.
비구가 좌선을 함에는 마땅히 이 비유를 알아야 하나니, 또한 선정을 나타내고 또한 방편을 세우며 또한 윗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정이라고 합니까.
몸과 마음을 정진(精進)하여 고르고 부드러워지며 성취하는 이것이 바로 선정이라 합니다.
무엇이 방편을 분별하여 세움이라 합니까.
용맹 정진으로써 번뇌를 녹여 없애고 생각을 없애서 끊는 이것이 방편을 분별하여 세움이라 합니다.
무엇을 윗자리에 이름이라 합니까.
용맹 정진으로써 번뇌를 녹여 없애는 이것을 윗자리에 이름이라 합니다.
이 세 가지 법은 일심으로 관하여 이뤄짐이 아니요,
세 가지 법을 완전히 알아야 마음도 움직이지 아니하여 선정의 법이 나타나고 방편을 분별하여 세우고 윗자리에 가서 이르니, 이러함을 얻은 이라야 연후에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를 안험(按驗)하며 성취라고 이름합니다.
어떤 비구가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에 들면 이 비구의 빛이야 말로 세간을 환히 하여 마치 달이 구름에서 나오게 되어 광명이 세간에 비추어짐과
같습니다.
이 선정 중에 어떤 사람이 처음 지으면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나며, 어떤 사람이 수식관을 사용하면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납니다.
그 상서로움은 어떠하냐 하면 이 비구가 혹은 땅에 앉았거나 평상 위에 앉아 있으면서 깔개가 없는데도 그 앉은자리가
부드러워짐이 마치 목화(木花)와 같아서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이미 숨을 헤아렸기 때문이니, 그 몸은 가뿐해지며 이렇게 차례로 거친 날숨이 없어지고 몸과 마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마치 허공에 있는 것처럼 되어 내쉬는 숨은 더욱더 가늘어져서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지며 마치 사람이 경쇠를 치면 처음은 거칠다가 나중은 가늘어지는 것처럼 좌선하는 비구의 쉬는 숨도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본 중에서 말씀하기를, 먼저는 크고 뒤에는 작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이 숨을 헤아리는 선정은 다른 선정과는 다르나니, 다른 선정은 먼저 가늘고 뒤에는 거 치릅니다.
만약 이 비구가 선에 들어도 선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으며 앉음에서 일어나지 않고 마음을 단정히 하고 바로 앉아서 다시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선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줄 앎으로써 말하기를, 이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는 없으며, 누구든 있고 누구에게는 없을까.
그리고 말하기를,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있으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으며 물속에서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으며 장수천(長壽天)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으며,
죽은 시체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으며,
제四선정에 들면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으며,
색 무색계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으며,
멸진(滅盡) 삼매에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이 없다.
하고 생각한 뒤에 스스로 제 몸을 꾸짖되,
너 지혜 있는 사람아,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물에 있지도 아니하며,
색 무색계에 있지도 아니하며 멸진 삼매에 있지도 아니하며,
장수천에 있지도 아니하며 죽은 시체에 있지도 아니하며, 제四선정에 들지도 않았으며,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이 극히 가늘고 작음이 있으면서도 능히 알지 못하므로 다만 다시 마음만을 바루라 고 합니다.
만약 코가 크면 마음을 나아사 아푸타(鼻弗咤)에 두고 만약 코가 낮으면 마음을 입술 위에 둡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이곳을 지킬지니, 수 우트라 중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어떤 사람이 잊기를 잘하여 마음을 편안히 하여 앞에 있게 하지 않으면 아 아나 파아나 선정에 들을 수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다만 아 아나 아파 아나 선정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체의 선정도 그와 같나니, 만약 생각하면 선정은 곧 나타납니다.
이 아아나아파아나 선정은 극히 소중하여 모든 부처님 벽지불 큰 아라한들은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로 써 자리(地)를 삼았나니, 연후에라야 도를 따라 생각이 극히 고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정 가운데서의 기억은 위(上)와 슬기(慧)가 되나니, 마치 누인 명주에서 사용되는 바늘과 실은 아주 가늘음과 같습니다.
바늘은 기억과 같고 실은 지혜와 같나니, 잇달아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두 가지 법으로 인하여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을 잃지 아니함이, 마치 밭을 가는 사람의 소가 매우 고단 해졌으면 그 사람도
매우 고단할 것이므로 소를 풀어서 놓을 것이니, 풀어놓으면 소는 곧 숲 속에 들어갈 것이며, 그 사람은 휴식하고 일어나서 소를 따르되, 소자 국을 따르지 않고 숲으로 들어가서 바로 먼저 소가 물을 마시는 곳에 가 머무르면서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소가 물을 다 마시는 것을 기다리다가 새끼를 가져다 코를 뚫고 막대기로써 몰고 가서 다시 도로 밭을 가는 것처럼 비구의 선정도 그와 같아서 만약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이 다 고달파지면 잠깐 놓았다가 휴식하게 하고 내쉬고 들이쉼을 따르지 말며 다만 먼저 코끝에 머무러 숨의 내쉬고 들이쉼만을 듣고서 헤아립니다.
기억은 새끼와 같고 지혜는 막대기와 같나니, 그 위에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으로 하여금 만약 이와 같음을 얻게 하면 오래지 않아 선의 조짐이
나타나서 몸의 기뻐짐이, 마치 목화가 몸에 닿으면 보들보들해짐과 같은 것을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카파 아사 피추(古貝華=솜)와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사나운 바람이 일어남과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별과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이은 구슬과 같다 합니다.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흩여 있는 흰 구슬과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카파 아사 피추 씨와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새끼와 같다 합니다.
어떤 사람의 부딪치는 것이 죄다 강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불꽃과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원숭이와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구름이 일어남과 같다 합니다.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연꽃과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수레바퀴와 같다 하고
어떤 사람의 견해로는 달이 둥글음과 같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수우 투르에서 말씀하신, 비구들이 모여 경전을 외우매 각각의 소견에 좋은 조짐이 있되, 어떤 사람들의 소견으로는 산과 같다 하고 강과
같다 하고 나무와 같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것을 처음으로 하여라고 함과 같기 때문입니다.
물었다.
이와 같은 산과 강과 나무는 어디서 생깁니까.
마음에서 생각함으로부터 있으되 사람이 생각을 냄에는 각각 다르나니, 그러므로 생각도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쉬는 숨을 관하며,
어떤 사람은 들이쉬는 숨을 관하며
어떤 사람은 선의 조짐을 관하나니, 만약 이와 같이 관하지 않으면 아아 나아 파아 나도 일어나지 않으며,
초선법(初禪法)도 이룩되지 않으므로 만약 이 세 가지 법이 있으면 선정을 성취합니다.
만약 좌선하는 비구가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면 스승에게 가서 아뢰되, 제가 이러한 조짐을 보았습니다 고 해야 합니다.
스승은 대답하되 이 보았다는 조짐은 이것이 선의 조짐이라고 말하지 못하며, 선의 조짐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하느니라 고 하면, 이런 대답을
한 뒤에 다시 말하되, 장로여, 당신은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합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스승은 어째서 「이것은 선의 조짐이다.
이것은 선의 조짐이 아니다 고 말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에게 분별하며 말을 하되, 이것은 선의 조짐이다 하면 곧 게을러지며 선의 조짐이 아니다고 하면, 물러나려는 마음이 일어날 터이므로
해설하지 아니합니다.
다만 은근히 가르치면 조짐만이 저절로 나타나리니, 옛날의 게송으로 말씀합니다.
마음을 관에 둔 후에는
나타나는 조짐은 한 가지가 아니나니
만약 지혜 있는 사람이면
바른 마음으로 헤아리면서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에
부지런히 힘써 어수선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선의 조짐이 나타난 뒤로부터는 모든 개(蓋=五蓋)는 적연히 머무르며 모든 번뇌는 적연히 그칩니다.
이 두 가지 법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편안히 간직하면 곧 삼매가 이룩되며, 혹은 초지(初地)를 얻기도 하고, 제번 뇌지(除煩惱地)를 얻기도 하며, 혹은 그대로 선지(禪支)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혹은 초지를 얻으면 이것은 실제로 초삼매지(初三昧地)를 얻는 것입니다.
물었다.
착삼매(着三昧)와 초삼매(初三昧)는 다릅니까, 같습니까.
다릅니다. 초삼매는 마음에 착한 행을 한 뒤에 바 방가(婆傍伽) 마음에 들며, 착삼매의 마음 경계는 하루 동안 한결같이 착한 행에 들어서 바 방가를 따르지 않음이니 이 두 가지 법은 다르다고 합니다.
만약 선의 조짐이 나타나면 혹은 색을 관하고 혹은 모습을 관하여 기르고 자라게 하나니, 마치 전륜 왕이 태에 있을 적에 부모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보호하되 차고 더움을 알맞게 하고 마시고 먹게 하여 잘 수호하면 그 결과를 이룩하게 하는 것처럼, 비구가 선의 조짐을 보호함도 그와 같아서 보호하지 않으면 잃습니다.
어떻게 보호하느냐 하면,
첫째 처소에서 잘 머무르며,
둘째 처소에서 잘 행하며,
셋째 착한 사람을 몸소 가까이하며,
넷째 음식을 알맞게 하며,
다섯째 네 철에 조화되며,
여섯째 잘 거닐고 서고 앉고 누우며,
일곱째 시끄러움과 그 밖의 먹는 것 여읨을 처음으로 하나니, 이 것을 일곱 가지라고 합니다.
이 일곱 가지 법을 이용하여 보호하나니, 만약 보호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선의 조짐은 굳건히 머무르며 차례로 보다 자라서 나타날 따름이요,
갖추 모든 감관은 극히 청정하여 조복 되고 부드러워지나니, 만약 마음을 붙잡으려 하면 잡히고 만약 놓으려 하면 떠나가고 만약 일으키려 하면 일어나고 만약 고르게 하려면 골라지고 만약 기뻐하려 하면 기뻐지고 만약 버리려 하면 버려지게 되며 선하지 않은 사람을 여의고 선하는 사람을 몸소
가까이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선에서 선의 조짐을 압니다.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 마음속에 잘 간직하여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 닦아 익히면서 이런 생각을 할지니 이제 착삼매로 바 방가 마음을 버리고서 진리 마음(諦心)을 일으키며 찰나에 머무르되 없애고 다시 四 五의 자바나(闍婆那)를 일으키리라 고. 이 다섯 가지 마음은
첫째 마음이 작심(作心)이요,
둘째가 학심(學心)이요,
셋째가 수심(隨心)이요,
넷째가 중간심(中間心)이요,
다섯째가 착심(着心)입니다. 만약 다섯 가지를 합하여 네 가지로 하면
첫째가 작학심(作學心)이요,
둘째가 수심, 셋째가 중간심,
넷째가 착심이니 이
넷째는 네 가지로 되며 다섯 가지도 된다고 하나니 여섯 가지는 없고 일곱 가지도 없습니다.
처음 것은 욕계의 마음이요,
착심은 색계의 마음이니, 이 마음 때문에 없어지는 五지(支)와 일어나는 五지로서 十상(相)과 三선(善)을 구족 합니다.
제一선을 얻은 뒤에 곧 관하는 가운데서 생각이 없어지면 제二선을 얻어서 이와 같은 조짐이 없어지며, 제三四선을 얻어서 이와 같이 마음을 위(上)에 까지 이르게 합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이것은 간략한 해설이니, 또 자세히는 정도경에서 해설하였나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제四선정을 얻어서 잘 기억하고 그를 더욱 자라게 하며, 만약 참된 곳에 나아가 이르려고 하면 이 제四선의 다섯 가지 일이 좋습니다.
첫째 편안히 마음에 간직함(安置心),
둘째 들음(入),
셋째 신칙함(勅),
넷째 일어남(起),
다섯째 돌이켜 관함(反觀)이니 이 다섯 가지 일로써 참된 곳에 이릅니다.
이 비구는 이미 유리(流利)를 짓고 혹은 색을 관함을 처음으로 하며 혹은 무색을 관함을 처음으로 하여 색 무색을 관한 뒤에 다시 비파 샤나 아를 증가합니다.
어떻게 증가하느냐 하면 이 비구가 제四선정으로부터 일어난 뒤에 선지(禪支)를 지니며 지닌 뒤에 이 선지는 마음속에 의지하며, 마음은 四대(大)에 의지하여 四대인 몸을 관하며, 이 선지로부터 색이 아닌 것을 처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 색과 색이 아닌 것 등의 법에서 의식을 보며, 이로부터 四대를 처음으로 하여 색과 여러 색들을 함께 하는 법은 의식이요. 색이 아닙니다.
만약 삼매로부터 일어나면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은 몸과 마음이 곧바로 그의 일(因)이므로 이렇게 볼 따름이니, 마치 대장장이에게 풀무가 있는데 사람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바람이 드나드는 것처럼,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도 그와 같아서 몸과 마음으로 말미암아 숨이 드나들게 됩니다.
이 비구는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을 보며, 몸을 보며,
색심(色心) 등과 모든 법이 이는 색이 아닌 줄로 보며,
이와 같이 명색(名色)의 뒤에 다시 그 인연을 관하여 보고는 三세 안에서 연속하여 명색이 끊어지지 않으며,
명색이 연속되므로 인하여 의심이 일어나며,
의심을 끊은 뒤에 三상(相)을 관하며
三상을 관한 뒤에 다시 일어남과 없어짐(起滅)을 관하며,
일어남과 없어짐을 관하므로 말미암아 먼저 광명을 보고 十 비파샤 나아 번뇌를 여의며,
여읜 뒤에 도의 지혜가 일어나며,
일어난 뒤에는 법견(法見)을 일어남을 버리며,
생멸의 법이 끝나면 생각 생각이 서로 없어집니다.
또 두 가지 법이 일어남을 버리며 생멸의 법이 끝나면 생각 생각이 서로 없어집니다.
또 두 가지 법이 일어난 뒤에는 三계 안에서 싫음과 근심이 일어나나니, 이렇게 차례로 네 가지 도(四道)를 얻고 나면 아라한의 가위에 일고 十九부(覆)의 관지(觀智)가 있습니다.
지극한 줄을 안 뒤에는 삼계 안의 범마(梵魔) 사문 바라문 중에서 위없는 복 밭을 이루나니, 이것이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의 헤아림(數)입니다.헤아림(數)입니다.
첫째는 네 가지를 널리 해설하여 마칩니다.
나머지 三 四는 딴 선정의 법과 다르지 않나니, 그러므로 내가 이제 분별하여 해설하겠습니다.
깨달음(覺)이란 이희(離喜)를 나타냄이니, 나는 이제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으로 기쁨을 나타내리니, 두 가지 일로써 기쁨을 깨닫습니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느냐 하면,
첫째 관으로써 하며
둘째 헷갈리지 않음으로써 합니다.
어떻게 관으로써 기쁨을 깨닫느냐 하면 二선에 들면 기쁨이 있는데 바로 들을 때에 지혜를 얻고자 하면 관함으로써 저절로 기쁨을 깨닫나니, 그러므로 관으로써 기쁨을 깨닫는 것입니다.
어떻게 헷갈리지 않으면서 기쁨을 깨닫느냐 하면, 二선에 기쁨이 있는데 들은 뒤에 선정으로부터 지혜를 일으키되 기쁨과 함께 평등하게 관하여 비파샤 나아에서 소멸시키고, 그 조짐을 꿰뚫어 지나가면서도 헷갈리지 않나니, 헷갈리지 않기 때문에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파치 삼비 타경(波致三毘陀經)에서 말씀하되, 내쉬는 숨과 들이쉬는 숨으로써 한 마음을 이루고, 마음이 산란하지 않으면 의심이 남을 알으리니, 의식이 남을 이미 앎으로 인하여 곧 기쁨을 깨달으며, 길게 내쉬는 숨과 짧게 들이쉬는 숨으로써 일체의 몸은 없어지는 몸인 줄 깨달으리라 고 하였나니,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이 한 마음을 이룬 뒤에는 의식을 아나니, 이 두 가지 법으로써 기쁨이 일어난 줄 깨닫게 됩니다.
안정된 마음 때문에 기쁨을 깨닫게 되며, 알기 때문에 관하고 관하기 때문에 관을 되풀이하여 마음을 정돈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을 하며 의식이 일어남으로써 바른 마음을 편안히 두어 지혜로써 알게 하나니, 알아야 하기 때문에 알고 버려야 하기 때문에 버리고 관해야 하기 때문에 관하고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나타내나니, 곧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기쁨을 깨달은 뒤에는 나머지 구절과 다음의 뜻도 그와 같습니다.
이 三선정은 곧 다름이 있어서 즐거움을 깨달음이 있으며, 또 四선정이면 치타상 카아라아(心增訶羅)를 깨닫습니다.
물었다.
무엇을 치타상카아라 아라고 합니까.
수(受)(등)의 二음(陰)을 처음으로 삼나니, 이것을 치타상카아라 아라고 합니다.
즐거움을 깨닫는다 함은 이것이 바로 비파샤나아지(地)입니다.
즐거움이라 함은 두 가지의 즐거움이 있나니,
첫째는 몸의 즐거움,
둘째는 마음의 즐거움이니, 三비타 안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치타상카아라아를 없앤다 함은 거칠고 거칠은 치타상카아라아를 없앰이니 정지(定止)라고도 합니다.
또 자세한 설명은 카아 야상 카아라 아(身增訶羅)에서 하였나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문구 가운데에 수(受)도 들어가나니, 만약 즐거움을 가지면 수는 곧 다시 둘로 나타납니다.
치타상카아라아 구절 안에 상(想)과 수(受)와 체타시카아(支多私迦)의 이 여러 법들은 마음과 함께 떠나지 않아서 만약 치타상카아라아를 지니면
상과 수등은 함께 들어가며, 이렇게 수를 관한 뒤에는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일을 해설함이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三 四 중의 四선정에서는 각심(覺心)이니, 무엇이 각심이냐 하면 각심은 기쁨이요, 훌륭한 기쁨이요,
마음에 지극한 기쁨이니, 나는 이제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을 깨달았기 때문에 두 가지의 기쁨이 있습니다.
무엇이 두 가지의 기쁨이냐 하면
첫째는 삼매로 써요,
둘째는 비파샤 나아로써 이니, 어떻게 삼매로써 기쁨을 깨닫느냐 하면 二선정에 들면 기쁨이 있는데 바로 들면 한 찰나에 마음은 기쁨 등과 함께 하여 마음속이 평화롭게 기쁘고 극히 기쁩니다.
어떻게 비파샤 나아로써의 기쁨이냐 하면 二선정에 들면 기쁨이 있는데,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서 소멸하는 법으로써의 기쁨에 부딪치나니, 이렇게 비파 샤나에게 찰나에서 선의 기쁨을 짓고 관을 하여서 마음이 기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따라 곧 평화로워집니다.
나는 이제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을 깨달아 잘 마음에 간직한다 함은 제一선정으로 관하는 곳에서 잘 마음에 간직하고 선정에 들은 뒤에 정(定)으로부터 일어나서 멸멸(滅滅) 법으로써 선하는 마음을 관하여 비파샤 나아 중에서 실제로 상(想)을 지나 한 찰나 마음의 정(定)을 관합니다.
이렇게 하여 한 찰나 마음의 정을 일으키나니 한 마음의 정이 되었기 때문에 관하는 자리에서 마음은 곧 잘 머무릅니다.
나는 이와 같이 해탈의 마음을 깨달았다 함은 번뇌 자리에서 곧 해탈을 얻음이니, 제 二선정으로부터 생각함을 여의고 제三선정으로부터 기쁨을 여의고 제四선정으로부터 괴로움과 즐거움을 여읩니다.
이렇게 차례를 좇아 해탈을 얻고 정으로부터 일어난 뒤에 명멸의 법을 보며, 비파 샤아나 때에서 무상을 보고서 항상 하다는 법을 버리며 다시 괴로움을 보고서 즐겁다는 생각을 버립니다.
다시 나가 없음을 보고서 즐겁다는 생각을 버리어 마음은 즐거움에 집착되지 않습니다.
즐거움에 집착되지 않기 때문에 욕심 여읨을 관하며, 욕심으로부터 없어진다는 생각을 관하며, 일어나는 생각으로부터 버려버림을 관하며, 가진다는 마음으로부터 곧 해탈하나니, 그러므로 율본에 말씀하기를,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으로 마음은 곧 해탈하느니라 고. 이렇게 마음을 관하니, 이것이 바로 네 가지를 해설함이니, 그대들의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제四의 네 가지 중에서 무상을 관한다 함은 무상하다는 생각이니, 무상함을 관할 줄 알아야 하며, 항상 무상함을 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무상합니까.
五음이 무상합니다.
어째서 五음이 무상합니까.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멸합니까.
형상이 변해지는 법이니, 형상이 변해지기 때문에 생기지마는 형상 없는 법으로써 찰나찰나인지라 그대들 스스로 아셔야 하나니, 이것을 무상함을 관한다고 합니다.
그 색을 처음으로 하여 무상함을 관한다 함은 이것은 언제나 무상함을 관하는 것입니다.
관함으로 인하여 이렇게 四대는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이요,
그러나 없어지는 법입니다.
이것이 무상함을 관한다고 합니다.
욕심 여읨을 관한다 함은 두 가지의 욕심 여읨이 있나니, 무엇이 두 가지의 욕심 여읨이냐 하면
첫째는 사라짐의 욕심 여읨(消離欲)이요,
둘째는 남음 없는 욕심 여읨(無餘離欲)
『무엇을 사라짐의 욕심 여읨이라 합니
『일체 법의 형상은 찰나에 없어집니다.
『어째서 남음 없는 욕심 여읨입니까.
『욕심 여읨을 관함은 이것이 열반의 가지(支)이니, 두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도 자리(道處)의 인(因)에 이르며, 이른 뒤에는 적멸의 법을 보며 본 뒤에는 버림을 관하며, 비파샤 나아로써 번뇌를 버려 없애면 바로 열반에 드나니, 이와 같은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로서 맨 끝에 이릅니다.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 품을 마칩니다.
이때 세존께 서라 함은 이것은 간략한 해설입니다.
그때 세존은 아 아나 아파 아나 시티로 써 비구들을 가르치시고, 비구들이 부정을 관함으로 말미암아 함께 서로가 죽였나니, 이 때문에 여러 대중 상가들을 모았으며, 모인 뒤에 세존은 대중들을 꾸짖으셨나니, 너희 비구들은 어째서 같이 서로를 죽였느냐. 미 갈란티 카 사문에게 삯을 주고 또 비구들을 죽였느냐.
여래는 꾸짖으신 뒤에 비구들을 위하여 제三파아라아지카를 맺으셨습니다.
「어떤 비구가 일부러 사람 목숨을 끊으면라고 하신 이와 같은 것을 처음으로 합니다.
성문 제자들에게 법인과 성인이 섞였었기 때문에 비구들을 꾸짖으면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아, 쓸데없는 사람들아,라고 하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뿌리를 끊으시고 다음에는 붙따라 정하심에 이르시되 죽음을 찬탄하고 죽음을 가르치는 것을 처음으로 합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나는 이제 그 근본을 말씀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계율을 제정하여 마치셨읍니다고 하였습니다.
욕심의 속박이라 함은 욕심이 와서 마음을 묶는다 함입니다.
죽음을 찬탄한다 함은 말하되, 「너는 세간에 있으면서 여러 괴로움이 많구나, 너는 여러 공덕을 지어서 죽으면 하늘에 나게 되리라 고 함입니다.
이미 선(善)을 지었다 함은 이것을 처음으로 합니다.
너는 이미 선을 지었으므로 의심할 것 없이 죽으면 반드시 하늘에 나리라 고 함입니다.
악업을 짓지 않았다 함은 너는 살생과 망어를 하지 않았고 일체 악업은 네가 죄다 짓지 않았다.
너는 병으로 고통이 극심한데 살려 함은 무엇 때문이냐.
왜냐 하면 너는 이미 선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여기에서 죽으면 천상에 나서 五욕 락(欲樂)을 받게 되리라 고 함입니다.
악업이라 함은 빨리 죽게 함이니, 병인이 비구의 말을 듣고 이 말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니, 이것을 끊음(斷)이라고 합니다.
알면서 함(知)이라 함은 이것이 바로 중생인데 나는 그를 죽게 하려고 한다 고 하면 틀림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생으로서 사람 몸을 받는다 함은 태로부터 처음이 되어 늙기까지이니, 이것이 사람의 몸입니다.
처음 마음(初心)이라 함은 처음에 생명을 받을 적의 마음이라는 것이니, 이 말을 받을 적의 마음이라는 것이니, 이 말은 五욕계(欲界)를 나타내므로
처음 마음이라고 말하며, 마음을 三무색음(無色陰)과 함께 성립됩니다.
칼랄 라(迦羅羅) 빛깔이라 함은 이것은 처음 사람 몸이 성립되면 칼랄 라라고 하나니, 칼랄라의 빛깔에는 만약 남녀의 몸매면 합하여 三十색이 되며, 만약 고자(黃門)의 몸매면 二十입니다.
물었다.
무엇이 남녀의 칼랄라 빛깔입니까.
처음 칼랄 라를 이룰 때에는 진짜 큰 양털로 맑고 맑은 소와 기름(蘇油)을 찍어서 떨어뜨려 있음과 같습니다.
게송으로 말씀합니다.
소와 기름의 작은 물방울과 같이
맑고 맑아서 더러움과 흐림이 없나니
칼랄 라가 처음 생길 적에는
빛깔도 그와 같습니다
이와 같이 아주 작고 가느나니, 이것으로써 처음을 삼습니다.
과거 세상의 사람 수명은 二千 살인데 칼랄 라가 점차로 자라나고 커서 이에 늙고 죽기 까기 하나니, 이것을 사람 몸이라고 합니다.
목숨을 끊는다 함은 칼랄 라 때로부터 혹은 뜨거운 손으로 움켜잡거나 손으로 문지르거나 약으로써 먹게 하거나 하여 이와 같은 갖가지의 방편으로 끊어버려 살지 못하게 함이니, 이것을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두 가지 생명(二生)이라 함은
첫째는 형체 있는 생명(色生)이요,
둘째는 형체 없는 생명(無色生)입니다.
모든 형체 안의 것은 모두 끊을 수 있나니, 형체 있는 생명은 끊을 수 있으므로 형체 있는 것을 끊으면 형체 없는 것도 죽습니다.
왜냐 하면 형체 없는 것(마음)은 형체 있는 것(몸)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물었다.
형체(色)를 끊는다 함은 과거의 형체입니까,
현재의 형체입니까, 미래의 형체입니까.
게송으로 말씀하겠습니다.
과거 세상 생명은 지금의 생명이 아니요
미래 세상 생명은 지금의 생명이 아니요
현재 세상 생명은 이 살아 있는 생명이며
과거. 미래를 떠나서 현재를 취함이니
현재의 생명을 끊으면 생명을 끊음입니다
무엇을 현재라고 합니까.
한 찰나가 계속하여 소멸되지 않는 이것을 현재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찰나입니까.
나고. 늙고. 없어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만약 그와 같다면 죽임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저절로 나고 저절로 없어지므로 끊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현재는 계속하고 과거는 아직 소멸되지 않았나니, 마치 사람이 밖에서 열을 만나서 알았지마는 방에 들어와 편안히 앉은 뒤에는 열기가 이미 스러지고 냉기가 스며와 계속되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나니, 과거의 생명은 계속되어 현재에도 끊이지 않았으므로 만약 끊으면 곧 살생이 되며 이것이 바로 미래 세상의 생명의 인(因)입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마땅히 중생을 알아야 하며, 중생의 목숨을 끊는 줄 알아야 하며 방편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마땅히 중생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까.
세상 사람이 거짓 이름으로 부르되 중생이라 하나니, 그 실제를 말하자면 살아 있는 기운(生氣)입니다.
어떻게 중생의 목숨을 끊는 줄 알아야 합니까.
살아 있는 기운을 끊어서 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방편을 알아야 합니까.
여섯 가지의 방편이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함(自),
둘째 가르침(敎),
셋째 던짐(擲),
넷째 놓음(安),
다섯째 방자(呪),
여섯째 신력입니다.
무엇을 스스로 함이라 합니까.
스스로가 죽이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침이라 합니까.
딴 사람에게 죽이기를 가르침이니, 이렇게 너는 죽이라 고. 던짐이라 함은 화살을 처음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따라 목숨을 끊게 함입니다.
놓음이라 함은 대 살촉 구덩이 독약 등을 한 군데에 놓아두어 닿으면 즉석에 죽는 것입니다.
방자라 함은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 아아타바니카(阿塔婆尼耶) 요,
둘째 셈(數)입니다.
무엇이 아아타바니카입니까.
적국이거나 도둑에게 방자를 하여 머리. 배앓이며 갖가지의 질병으로 그를 죽게 함입니다.
셈이라 함은 문구에 의한 주문을 열 번. 스무 번하여 이렇게 백 번까지 셈을 바로 셈이라고 합니다.
신력이라 함은 신통을 씀이니, 용왕. 가루라. 야차. 천인. 사람 왕 같은 것입니다.
용왕이 중생을 죽임에는 눈으로써 보기도 하고 깨물기도 하고 독을 뱉어서 죽이기도 합니다.
가루라는 능히 三十 심(尋)의 둘레에서 쪼아 죽일 수 있습니다.
용. 야차. 천인 사람 왕은 그 가지가지의 방편에 따라 중생을 죽게 합니다.
그릇이며 막대기를 준다 함은 가지가지의 그릇. 무기 내지 칼인 이와 같은 물건을 주어서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함입니다. 그리하여 소리치며 말하기를, 네가 살려 함은 무엇 때문이냐. 죽음만 같지 못하느니라 고 하면서, 쇠몽둥이. 돌. 나무. 새끼. 독약이며 갖가지 죽는 도구를 그 몸에 가까이하며 찬탄하여 말하기를, 너는 이미 세상에 있을 적에 이미 여러 공덕을 지었으므로 죽어서는 반드시 하늘에 날 것이며, 난다 나바나(難陀園) 안에서 하늘 사람과 옥녀(玉女)와 함께 재미있게 즐기리라.
무엇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이런 고통과 병을 받느냐 고 합니다.
혹은 가르쳐서 바위에 던지게 하기도 합니다.
바위라 함은 산이 갈라져서 도 조각이 된 깊은 골짜기 속입니다.
혹은 가르쳐서 지옥에 들게 하기도 합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만약 사람을 가르쳐서 이렇게 자살하게 하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이것이 사람 몸을 죽이는 것이니, 만약 딴 중생이어도 파아얏티카죄가 됩니다.
어찌하여 세존은 이 계율을 널리 제정하셨느냐 하면 미래 세상의 악한 비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뒷 구절은 차례로 알기 쉽습니다.
혹은 독약이거나 찌르고 찍는 여러 가지 죽는 기구에 즉시 하지는 않지마는 뒤에 이로 인하여 죽으면 이 비구는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나는 이제 큰 양과 네 가지를 나타내겠습니다.
어떤 것이 큰 양과 네 가지냐 하면, 어느 한 비구가 큰 양이 한 곳에서 잠자고 있음을 보고 기억해 두면서 나는 밤에 죽이리라 고 하였는데, 이 큰 양은 딴 곳으로 옮겨서 잠을 자고 큰 양이 있던 곳에는 아버지 거나 어머 니거나 혹은 아라한이 와서 대신 옷으로 몸을 덮고서 잠을 자는데, 이 비구는 가 닿아 어두운 밤인지라 이것은 사람인 줄 분별하지 못하고 이것은 큰 양이리라 고 말하며 칼을 가지고 찍어 죽여서 혹은 아버지가 죽게 되었거나 어머니가 죽게 되었거나 혹은 아라한이 죽게 되었으면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逆罪)가 됩니다.
왜냐 하면 처음에 양을 죽이려는 마음을 지었지마는 칼을 내려치려고 할 때에 마음을 내서 말하기를, 이는 양이기를 바라지도 않고 사람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바로 이 목숨만을 끊는다 고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어느 한 비구가 와서 대신 양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자는데, 죽이는 이가 말하기를, 이것을 곧 죽이리라 고 하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역 죄는 되지 않습니다.
야차 귀신이 와서 양이 있던 곳에 대신하매 죽이는 이가 말하기를 이것을 곧 죽이리라 고 하면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되며 五역 죄는 되지 않습니다.
만약 양이면 파아얏티카죄가 되며 만약 마음에 부모와 아라한 죽이기를 바랐다면 차례로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아버지가 군대 가운데 있는 줄 알면서도 군대를 바라보고서 쏘아 아버지가 맞아서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되며, 만약 아버지가 아니면 파아라아지카죄입니다.
키 큰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키 작은 사람을 죽였거나 진홍색 옷 입은 사람을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흰옷 입은 사람을 죽였으면 가르친 이는
중죄를 벗어날 수 있으나 죽이는 이는 파아라아지카가 됩니다.
만약 가르치며 말하되 만나는 대로 죽여라 고 하면 죽음을 따라서 모두 죄가 되며, 사람에게 오늘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가르침을 받은 이가 다음 날에 죽이거나, 또 다음날에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오늘에 죽이거나 오전에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오후에 죽이거나 하면, 죽이는 이는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가르친 이는 중죄를 벗어납니다.
혹은 때를 따라서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만약 죽이면 모두 중죄가 되며, 가르쳐 말하되, 만약 어떤 사람이 이곳에 와닿으면 너는 죽이라 고 하고, 바라던 사람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가르친 이가 보매, 가르침을 받은 이를 구별하지도 않고서 죽이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죽은 이는 처음 가르쳤을 때에 두스크르타죄가 됩니다.
어떤 비구가 비구에게 가르쳤는데, 가르침을 받은 이의 마음에 생각하되, 나는 먼저 저 벗을 죽이리라 고 하고, 칼을 내리쳤는데 도리어 바라던 사람을 만났다면 죽인 이와 가르친 이가 모두 중죄가 됩니다.
만약 차츰차츰 죽임을 가르치되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또한 앞과 같으며, 때와 때 아님도 앞과 같습니다.
어떤 비구가 비구에게 가르치되 비구를 죽이라고 하였는데, 가르칠 때에 아직 도를 얻지 못하였다가 죽이려 할 때에는 이 비구가 이미 아라한을 얻었으면 가르친 이와 죽인 이가 모두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눈앞에 있는데(不靜) 눈앞에 없는(靜) 것으로 말을 한다 함은 눈 앞에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이는 없는 줄로 생각하고 말을 한다 함입니다.
혹은 공양할 때에 원수진 비구 가운데서 여러 비구와 함께 와서 앞에 앉았는데 어둠 때문에 가리어진지라 온 줄도 모르고 말하기를, 이 아무개를
도둑이
어째서 죽이지 않으면 독사가
어째서 깨물지 않으며 사람이
어째서 독약을 타 주지 않을까.
내 뜻은 이 사람이 죽어야 아주 즐겁겠다 고 이렇게 말을 함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눈 앞에 없는 것으로 말을 함입니다.
눈 앞에 없는데 눈 앞에 있는 것으로 말을 한다 함은 이 비구가 공양하는 곳에 와서 앉아 있는지라. 아까 방자하는 비구가 이 비구가 온 줄 알고 있다가 왔던 비구가 떠나간 뒤에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줄로 생각하여 말하되 앞에 말한 방자와 같이 하나니, 이것이 눈 앞에 없는데 눈 앞에 있는 것으로 말을 한다 함입니다.
앞과 뒤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방자로 죽게 하면 죄다 두스크르타죄입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이제 죽음을 찬탄한다 함을 연설하겠습니다.
몸으로써 찬탄을 한다 함은 그가 아는 대로 혹은 칼과 몸뚱이를 주기도 하며 독약을 주기도 하며 노를 주기도 하며 혹은 산 바위에 몸을 던지게 하기도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죽이면서, 죽으면 반드시 물건을 얻으리라 고 하고 혹은 다시 사람 몸을 얻으면 재부(財富)가 한량이 없고 혹은 하늘에 나게 되리라 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써 가르침이며, 혹은 손을 흔들기도 하고 발을 흔들기도 하고 눈을 부릅뜨기도 합니다.
소리 높여 말한다 함은 입을 열고 소리를 내면서 뜻대로 찬탄하며 그를 가르쳐서 죽게 하는 것이니, 이 사람이 그 찬탄함을 알 때에 두스크르타죄가 되며, 그 찬탄함을 따라 죽으려고 고통하다가 죽지 않으면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되며, 만약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만약 이 사람이 그 찬탄함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딴 사람이 풀이하여 말을 한지라, 나는 죽어서 반드시 하늘에 나게 되리라 고 하여 죽으면 찬탄한 이는 죄가 없습니다.
만약 두 사람을 위하여 찬탄하면 죽는 대로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혹은 마음에 목적한 사람은 없으나 부질없이 죽음을 찬탄하였기 때문에 만약 죽는 이가 있으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만약 심부름꾼을 보내서 아무개를 죽게 하라고 찬탄하게 하면 처음 말할 적에 두스크르타가 되며 가서 말한 뒤에 고통을 받으면 스투울라아탸야며 만약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심부름꾼이 죽으면 하늘에 나게 된다고 찬탄함을 듣고서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하지는 않고 도리어 친한 벗과 권속들을 향하여 말하였다가 만약 죽는 이가 있으면 심부름꾼은 파아라아지카가 되며, 가르친 이는 두스크르타죄가 되며, 만약 심부름꾼이 하늘에 난다는 말을 듣고서 스스로가 죽으면 가르친 이는 두스크르타죄가 됩니다.
혹은 글을 지어서 심부름꾼에게 글을 가져가게 하되 심부름꾼은 쓰여 있는 말을 모르는데, 만약 죽으면 보낸 이는 파아라아지카가 되며, 심부름꾼은 죄가 없습니다.
혹은 글을 지어서 지적하지는 않지마는 만나는 대로 사람에게 주어 죽게 하는데, 만약 그의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가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혹은 죽이려는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 경서(經書)를 거짓으로 만들어 갖가지로 죽음을 찬탄했는데, 어떤 사람이 이 경서를 읽으면서 경에 죽으면 하늘에 난다고 찬탄함을 보고 경의 말대로 가지가지로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만약 부모가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만약 나중에 뉘우치는 마음을 내어 경을 불사르면 처음 경을 짓게 될 적에 두스크르타죄입니다.
혹은 많은 비구들이 함께 죽음을 찬탄하는 경을 만들었는데, 만약 경을 읽고 죽는 이가 있으면 많은 비구들은 죄다 파아라아지카가 되며, 만약 그의 부모가 죽게 되면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혹은 죽음을 찬탄하는 경을 만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훔쳐서 읽고 이로 인하여 죽었으면 만든 비구는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또 떠내려간 것을 만나거나 혹은 떨어지고 잃어버린 것을 어떤 사람이 주어서, 경에 의하여 죽었으면 경을 만든 비구는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이제 목숨을 끊는 처음 일을 말씀하겠습니다.
어떤 비구가 죽이려는 마음이 있어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아무개가 그 속에 떨어져서 죽게 하면 처음 땅을 파낼 적에 두스크르타죄가 되며, 만약 구덩이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으면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되며, 만약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혹은 딴 사람이 떨어져서 죽으면 비구는 죄가 없습니다.
또 일체를 위하여 구덩이를 만들었는데 사람이 빠져서 죽으면 파아라아지카가 되며, 만약 부모가 빠져서 죽으면 파아라아지카와 역 죄가 됩니다.
혹은 구덩이가 깊은데 어떤 사람이 식량을 메고 구덩이 속에 빠진지라 즉사는 하지 않지마는 나중에 다 먹으면 반드시 틀림없이 죽을 것이요
나올 기약이 없으므로, 처음 구덩이에 떨어지면 구덩이를 만든 이는 이미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혹은 구덩이를 만들음이 본래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인데, 사람은 오지 않고서 스스로가 잘못하여 구덩이에 떨어져서 죽으면, 처음 구덩이를 만들 때에 두스크르타죄가 됩니다.
다시 어떤 사람이 구덩이에 떨어져 손과 다리가 부러지고 즉사는 하지 않았지마는, 또 구덩이에서 나오게 된 뒤에 이로 인하여 죽으면 구덩이를 만든 이는 파아라아지카죄가 되며, 만약 딴 인연으로 말미암아 죽으면 범한 것이 아닙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사람에게 구덩이 만들기를 가르쳐서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앞에서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혹은 구덩이를 만들어 귀신을 잡는데 처음 구덩이를 만들 때와 귀신이 안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으면 두스크르타죄가 되며, 만약 죽으면 스투울라아탸야요, 사람과 축생이 떨어져서 죽음은 범한 것이 아닙니다.
또 나중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 구덩이를 메우거나 또 딴 일로 부서지면 범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갖가지의 죽이는 기구를 만들어 사람을 죽게 하면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앞의 말씀과 같습니다.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며, 혹은 딴 일로 구덩이를 만들면 떨어진 이가 있더라도 범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괴로움. 공함. 무상. 부정관을 말씀하는데, 사람이 이것을 듣고서 스스로가 죽으면 범한 것이 아닙니다.
널리 율본을 말씀하여 마칩니다.
이제는 죽이는 계율의 인연을 말씀하겠습니다.
혹은 몸과 마음으로부터 일으키어 죄를 얻기도 하고,
혹은 입과 마음으로 지어서 죄를 얻기도 하고,
혹은 몸. 마음. 입을 이용하여 죄를 얻기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성 죄(性罪)이며 신업(身業) 구업(口業) 해심(害心) 고수(苦受)입니다.
자비라 함은 어느 한 비구가 병으로 몹시 괴로워하는데 비구들이 이 비구의 병이 중함을 보고 자비심으로써 소리 높여 말하기를, 「장로여, 장로는
계율을 지니어 두루 갖추었거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을 받습니다.
장로가 만약 죽으면 어찌 하늘에 나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병든 비구가 말을 들은 뒤에 생각하되 비구들 모두가 나의 계율을 지니어 두루 갖추었음을 찬탄하며 죽으면 반드시 하늘에 나리라고 하는구나 고 하여 먹지 않고 죽으면 찬탄한 이들은 파아라아지카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비구는 병든 비구를 가서 돌보되, 부디 죽음을 찬탄하지 말고 바로 말하기를, 장로는 계율을 지니어 두루 갖추었나니, 살고 있는 곳과 여러 옷가지 물건 아는 이와 벗들을 그리워하거나 집착하지 마시고 오직 생각을 三보에만 두며 몸의 부정함을 생각하시어, 三계 안에서 부디
게으르지 말고 목숨의 장단을 따르십시오
하는데 만약 이 병든 비구가 이 말로 인하여 죽으면 이와 같은 것은 설법으로 인하여 죽었으므로 죄가 없습니다.
여러 비구들은 앉으려면 먼저 손으로 자리를 어루만지고서 앉습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어떤 자리를 먼저 어루만지고서 앉으며, 어떤 자리를 어루만지지 않고서 앉습니까.
만약 홑으로 자리를 차린 것이면 어루만질 필요가 없으며, 만약 담요. 털로 짠 베. 담자리. 이불이 있는 것이면 먼저 어루만진 연후에 앉습니다.
어떤 비구가 먼저 이르렀는데 나중에 단월이 담요 털로 짠 베 담자리와 이불을 깔면 어루만지지 않고서 앉습니다.
또 단월이 말하되 법사는 이 가운데에 앉으십시오 하면, 이에 앉고 어루만질 필요가 없으며, 혹은 전에 이미 비구가 있었으면 뒤에 오는 비구는 다시 어루만질 필요도 없이 곧 앉으면 됩니다.
절굿공이 구절(椿杵)에는 절굿공이 구절 가운데서 일부러 짓지 않는 것이면 죽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절구질 구절(椿臼)의 뜻은 이해할 수 있으므로 말씀할 필요가 없습니다.
늙은이의 출가 구절(老出家句)에는 세 구절이 있나니, 첫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말하되, 대중 스님들이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하고, 빨리 이르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밀어서 땅에 넘어뜨렸으므로 즉사하였지마는 이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둘째 구절은 무엇 때문에 아버지가 죽기를 좋아하였느냐 하면, 대중스님들 앞에서 대중 스님들이 묻기를, 누구의 아이냐 고 하매, 이는 바로 마할 라카(摩訶羅=노인(老人)의 아이입니다 고 하므로, 이 마할 라카의 아이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움직여서 죽게 하였나니, 이 때문에 중죄(重罪)를 얻었습니다.
셋째 구절은 바로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되며, 이로부터 다시 세 구절이 있지마는 이해하기 쉬우므로 해설할 필요가 없습니다.
걸식한 밥(分衛食)에서는 세 구절이 있는데, 이 걸식한 비구가 법을 소중히 여긴 까닭에 밥을 얻어서는 먼저 같이 배우는 이에게 주며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나니, 이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상좌(上座)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일체가 다 죽었나니, 나머지 구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절은 혹은 걸식하면서 외도의 집으로부터 밥을 얻되 극히 정한 밥일지라도 받지 말며, 만약 이미 받았으면 남에게 주고 스스로는 먹지 말며, 감추지 말고 버릴 것이요, 또한 축생에게도 주지 마십시오,
시험으로 하면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되나니, 왜냐 하면 시험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며, 만약 결정코 죽을 것을 알면 중죄가 됩니다.
이로부터 세 구절에 전하나니,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욕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구절 중에는 이 비구는 낮에나 밤에나 생각하며 그 마음을 억누르려고 하되, 음욕을 누를 수가 없으므로, 도리어 스스로 생각하되, 나는 계율을 지니어 완전히 갖추었거늘 무엇 때문에 계율을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가겠는가.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고 하고, 이 때문에 그리드라쿠우타 산꼭대기에 올라가 바위에 던져 주었는데, 바위 아래에 나무를 찍고 베는 사람이 있다가 비구가 떨어지는 때에 떨어지자 그 사람을 베어서 죽였어도 죽이려는 마음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제 몸을 죽이지 말라. 몸을 죽이는 이와 내지 먹지 않는 것도 두스크르타죄가 되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어떤 비구가 병으로 몹시 괴로워하는데 대중스님들이 보고 병든 비구를 돌보면서 간호하는 데에 애쓰고 고생하므로, 스스로 생각하되 이들은 바로 나 때문에 몹시 고생함이 이러하니, 스스로 수명을 살펴보아도 오래는 살 수 없구나 하고, 밥도 먹지 않고 약도 먹지 않는 것은 좋습니다.
또 어느 비구가 나의 병이 몹시 괴롭고 나의 수명도 다하였으며, 나의 도의 자취는 손바닥에 있는 것과 같다 고 하여, 만약 이와 같이 보고 먹지 않다가 죽으면 죄가 없습니다.
어떤 비구가 선견(禪見)에 들어 도를 얻으려고 하여 마을에 들어가서 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먹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좋습니다.
돌 구절(石句) 중에는 비구는 돌을 쪼개지 못하나니, 돌뿐만이 아니라 내지 풀. 나무. 흙도 그러합니다.
만약 탑. 절을 일으키려고 돌을 포개서 던지고 때리고 깨뜨리는 것은 또한 할 수 있으며, 내지 방사를 수리하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중식 후에 허공에 밥을 던져서 뭇 새들에게 주는 것도 할 수 있으며, 또 나쁜 짐승이 있다가 다가오면, 돌과 흙을 던져서 놀라게 하여 닥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또한 할 수 있습니다.
김으로 땀을 내는 구절(烝句)은 차례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통한 뒤에 낙태하였다 함은 이 여인의 남편이 멀리 떠나갔으므로 부인은 남과 몰래 정을 통하여 잉태를 하였는데, 태가 자라고 크므로 비구에게 나아가 약을 빌어서 낙태하였다 함입니다.
여인을 나란히 하는 구절(並婦句)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르는 구절(按句) 중에는 여인이 비구를 향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낙태할 수 있습니까 고 하매, 비구가 대답하되, 그대는 눌러서 아이를 죽이면 저절로 떨어집니다 고 하여, 비구는 누를 것을 가르쳤는데, 여인은 뜨거운 기운으로써 다림질을 하면 비구는 죄가 없습니다.
또 비구는 자기가 눌러서 죽이라고 가르쳤는데 여인은 딴 사람을 불러서 눌러 죽이면 비구는 죄가 없습니다.
또 다만 누르면 곧 죽는다고만 가르쳤는데 그대로 자기가 눌렀거나 혹은 딴 사람이 눌러서 죽으면 비구는 중죄가 됩니다.
아이가 없는 여인의 구절(無兒女句)에는 일체 여인이면 모두 임신을 하는데 어찌하여 아이가 없다고 부르느냐 하면, 만약 임신하려고 할 때에 일체 여인은 임신을 하지마는 만약 죄업이 있는 중생이 태에 들어가면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짧은 동안에 곧 없어지나니, 그러므로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여인의 四대가 조화되지 못하였는데 바람이 불어서 없어지기도 하며 혹은 아이가 있는 곳에 벌레가 있고 또한 산 벌레가 먹어서 없어지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아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 비구는 모르고 약을 지어 아이를 머무를 수 있게 하여 약을 주었는데 죽으면 비구는 두스크르타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장차 오는 세상의 비구들은 의사가 되지 마십시오.
만약 의사 행위를 하면 두스크르타죄가 됩니다.
만약 출가한 비구. 비구니. 식사마 아나 와. 사미. 사미니를 위하여 약을 배합하면 죄가 없습니다.
혹은 같이 배우는 이들이 스스로가 약을 지닌 것이면 배합하며 만약 약이 없으면 자기가 지닌 것을 주어도 됩니다.
만약 자기에게 없으면 그를 위하여 가서 자자(自恣)하는 단월 집에 청할 수도 있습니다.
약을 구하되 얻지 못하면 다시 딴 집에 갑니다.
또 다섯 가지의 약을 줄 수 있는 데가 있습니다.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 아버지요,
둘째어머니요,
셋째 부모를 모시고 봉양하는 사람이요,
넷째 자기의 정인(淨人)이요,
다섯째 판두팔라아사(畔頭波羅沙)입니다.
물었다.
무엇을 판두팔라아사라고 합니까.
선 남자가 출가하기를 바라되, 아직 옷과 바리를 얻지 못하여 절 안에 의지하여 머무르려고 하는 이입니다.
만약 부모가 재산이 넉넉하여 스스로 좋은 약을 가졌으면 의사는 다시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부모가 오히려 왕위에 있으면 병이 있어서 얻지 못하여도 그를 위하여 약을 배합하지 않습니다.
혹은 부모가 가난하여 병들었을 때에는 혹 가다가 절에 데리고 들어와서 돌보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씻음에는 부디 몸을 대지 말며 음식은 손수 주어서 먹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면 사미처럼 다름이 없이 하며, 손발을 씻고 기름을 몸에 바름에는 죄다 손수 해드릴 수 있으며 공양에는 나을 수 있게 합니다.
정인이라 함은 그를 고용하여 숲에 들어가서 땔나무를 찍고 베는 이이니, 만약 병이 들어서 아직 집에 가지 못하였으면 비구는 약을 주며, 만약 이미 집에 이르렀으면 비구는 약을 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선 남자가 비구에게 의지하여 부림을 받다가 만약 병들면 비구는 약을 줄 수 있습니다.
다시 열 가지의 약을 줄 수 있는 데가 있습니다.
첫째 형이요,
둘째 아우요,
셋째 누이요,
넷째 누이동생이요,
다섯째 작은 이모요,
여섯째 큰 이모요,
일곱째 작은 아버지요,
여덟째 큰 아버지요,
아홉째 작은 외숙이요,
열째 큰 외숙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지닌 약이면 배합하고 만약 없으면 차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나중에 반환하면 좋거니와 반환하지 않더라도 요구하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차츰차츰 하여 七세(世)까지이며, 그로부터 약을 빌고 약을 배합할 수 있으므로 남의 집을 해치거나 더럽히지 않습니다.
만약 제수와 매부가 병이 들면 약을 누이와 아우에게 주어서 스스로가 매부와 제수에게 줄 수 있게 합니다.
만약 아우가 없고 누이가 없으면 어떻게 약을 줄 수 있느냐 하면 생질과 조카에게 주면서, 너희 스스로가 너희 부모에게 드리라 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화상(和尙)의 부모가 절에 있다가 질병이 들면, 제자도 화상의 부모를 위하여 약을 배합하고 병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또 화상은 부모가 없어도 자기가 약을 지녔으면 좋고, 또 제자가 없어도 부모가 약을 지녔으면 좋고, 또 제자와 부모가 없어도 지닌 약을 스스로가
주면 됩니다.
화상이 제자를 간호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또 딴 사람이 병이 들어가 혹은 도둑이며 군인이 다치고 와서 절에 들어오면, 비구는 만약 권속이 있으면 권속에게 나아가 약을 빌어서 줄 수 있습니다.
만약 권속이 없으면 어떤 착한 우바새에게 나아가 빌어서 주어도 됩니다.
혹은 어떤 단월이 대중 스님들을 공양하기를 부모와 다름없이 하다가 만약 단월이 질병이 들면, 대중 스님들은 그를 위하여 약을 배합할 수 없고 약을 줄 수도 없습니다.
또 단월이 다만 묻기만 하되, 대덕이시여, 아무개가 병이옵니다.
어떻게 다스리며 어떻게 약을 배합합니까 하면, 대답하되, 이 약으로 나을 수 있다 고 하는 이런 말이면 좋습니다.
혹은 단월이 또 비구에게 묻되, 대덕이시여, 저의 어머니가 병들었는데 원컨대 대덕은 처방을 하여 주소서라고 하여도, 비구는 처방하지 못하며 방편을 써서 곁의 대덕에게 묻기를, 아무개 비구가 병들었는데 무슨 약으로 다스리리까 하면 대답하기를, 장로여, 이 약을 쓰십시오.
이 약이면 나을 것입니다 고 합니다.
단월은 두 비구의 말함을 듣고 돌아가서 부모를 위하여 탕약을 배합하나니, 어떤 비구가 이와 같은 말을 함은 죄가 없습니다.
그때 대덕 마하 아파두마(摩訶波頭摩)는 바사바(婆娑婆)옹의 부인이 병이 들은 지라, 부인은 궁중의 한 여인을 보내서 묻게 하였습니다.
대덕 마하 아파두마는 잠자코 대답이 없으면서 곁의 비구와 함께 말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두 비구의 말함을 듣고 돌아가서 부인을 위하여 약을 배합하였더니 곧 낫았습니다.
부인은 병이 나은 뒤에 세 가지 옷을 만들고 三백의 카 하아 파나(迦利沙槃)와 또 탕약 창고 타카(正瞿多者)가 담은 옷과 물건을 보내면서 대덕 앞에 놓고 문안하며 말하기를, 부인은 이제 이 약으로써 대덕의 향화(香花) 비용으로 올렸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파두마는 생각하기를, 이 향은 바로 의사가 얻은 몫이다 하고 정(淨) 한 것만을 가져다 공양을 하였습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이와 같이 지혜스러운 사람은 능히 중생을 이롭히므로 자기에게도 죄가 없으며 이렇게 함을 좋습니다.
혹은 속인이 말하기를, 대덕이시여, 청컨대 아무개를 위하여 주문을 만들어 주소서 하면 비구는 만들지 않습니다.
또 말하기를, 대덕이시여,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워주소서 하면 그를 위하여 송주를 외웁니다.
마땅히 이런 생각을 해야 하리니, 이 속인은 불법을 모르므로 만약 내가 주문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으레 나쁜 생각을 내리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우노라 고 합니다.
물을 가져다 새끼에 뿌려서 줄 것을 만약 새끼와 물을 만들어서 주면 두스크르타죄가 됩니다.
혹은 국왕과 마을의 큰 단월에게 병든 이가 있으므로 사람을 절에 보내서 비구를 청하고 그를 위하여 주문을 해설하게 하면, 비구는 그를 위하여
아아 타아나 아티야(阿咤那咤)를 해설하며, 혹은 병인의 처소에 가서 그를 위하여 법을 말하기도 하며, 계율을 주기 위하여서 갈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단월이 말하되, 지금 아무 국왕 아무 단월이 죽어서 지금 장사 지내오니 청컨대 비구께서는 장례를 배움 해 주소서 하더라도 갈 수 없지마는
만약 비구 스스로가 생각하되, 나는 가서 장사 지냄을 보고 무상함을 관하리라.
이로 말미암아 나는 행여 도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으리라 고 하고 이와 같이 하면서 가면 죄가 없습니다.
걸식한 밥은 혹은 줄 수 있기도 하고 혹은 주지 못하기도 합니다.
부모에게는 줄 수 있으며, 딴 사람에게는 주지 못합니다.
카 하아 파나 만큼이라도 부모를 공양하는 사람에게는 줄 수 있으며 정인에게 줄 수 있으며, 판두팔라아사에게 줄 수 있나니,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주어야 합니다.
또 도둑이거나 겁탈하는 사람이 와서 빌면 줄 수 있습니다.
물었다.
어떠한 사람은 위로해 줄 수 있고 어떠한 사람은 위로해 주지 못합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든지 절에 와 이르면 귀하고 천하고 도둑이 고를 묻지 않고 일체 모두 위로할 수 있습니다.
또 부르며 구함이 있거든 필요한 것이 자기의 물건이면 줄 수 있으며 만약 대중 스님들의 물건이면 먼저 대중 스님네에게 아뢰고 화합하면 줄
수 있습니다.
또 어느 힘이 센 나쁜 사람이 와서 빌면 물건을 지키는 사람은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해서 뜻대로 줄 수 있습니다.
준 뒤에 대중 스님들은 물건 지킨 이를 꾸짖되 이는 그대가 지키다가 곧 나쁜 사람에게 주었다 고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사는 곳을 보호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나는 이제 그 증거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그때 시이 할라디이파에 이름은 아누라아다푸타(阿㝹羅陀)인데, 그 안데 도둑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아바야(阿婆耶)이었습니다. 五백의 도둑이 시중 하며 둘러싸고 한 군데 안에 머물렀습니다.
성책을 세워 짓고 성책의 四면에서 각각 一유순을 떨어져 가서 겁탈을 하였습니다.
딱다기(隔歷=격력(擊攊)과 같음) 구절에서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죄가 되는 것은 쿤다카(屈陀迦)에서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혹은 들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하였다 함은 열일곱 무리(十七群) 비구 열일곱 사람이 있다가 여섯 무리(六群) 비구의 한 사람이 있음을 보고, 열 일곱 무리 비구의 한 사람이 그의 바리를 가지매 여섯 사람이 그를 들어서 땅에 엎드러뜨렸습니다.
차츰차츰 꼭 같이 다름이 없이 하여 각각 그 위로 올라앉은지라
이에 늙은 여섯 무리 비구들이 죽었으므로 죄를 정하여 마쳤나니, 율본 중에서 말씀합니다.
귀신을 다스리는 구절(治鬼句)에는 야차 귀신을 죽였나니, 이 야차는 잘 사람을 붙잡았으므로 비구는 주문을 지어 외우며 그가 그만두게 하였지마는 그만두려고 하지 않는지라 비구는 말하되, 만약 네가 그만두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리라 고 하였는데도 야차는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구는 혹은 쌀가루로 혹은 흙을 이겨서 야차 귀신의 형상을 발라 만들고서 주문을 외우며 그 손발을 끊으매 손발이 곧 끊어지고 그 목을 끊으매 목도 곧 끊어져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되나니, 야차를 죽이는 것 뿐만이 아니요,
하늘 제석을 죽여도 스투울라아탸야죄가 됩니다.
나쁜 야차의 구절(惡夜叉句)은 어느 한 절에 나쁜 야차가 안에서 사는데, 이 비구는 방안에 나쁜 야차가 있는 줄 모르고 한 비구가 온 것을 방안에 들라고 하여 그를 편안하고 즐거이 머무르게 하였나니, 그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만약 죽일 마음이 있어서 들이어 죽게 하였으면 중한 죄를 범하고 죽지 않아도 스투울라아탸야죄를 범합니다.
나쁜 야차뿐만 아니라 혹은 독사. 호랑이 등에 있어서도 죄다 나쁜 야차에게 들어가서 범하고 범하지 않는 앞의 말씀과 같습니다.
험난의 구절(險難句)에는 험난한 곳에 많은 도둑이 있는데 가르치는 이가 모르면서 하면 죄가 없으며, 알면서 하다가 죽으면 중죄를 범하며, 죽지 않으면 스투울라아탸야죄를 범합니다.
죽이면 곧바로(殺即是)라 함은 이와 같이 시작되는 글귀입니다.
어느 한 비구는 한 비구와 원수인데, 이 비구는 원수 비구를 죽이려 하여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대낮에 죽이면 사람들이 곧 알 것이므로 엿보아서 밤에 죽이리라 고 하고, 먼저 머무르는 곳을 자세히 살펴서 안 뒤에 돌아갔습니다. 밤이 되자 원수 비구의 처소에 가니 벗들이 많이 있는지라,
이 비구는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아 이것이 원수일 거라고 의심하면서 죽인 뒤에 바로 원수면 중죄를 범합니다.
어느 한 비구가 이것이라고 의심하면서 저것을 죽였다고 함은 이 원수 비구의 머무르는 곳에 많은 벗이 함께 잠을 자므로 어둠 속에 더듬어 찾으며 말하되, 이것이 원수라고 하면서, 잘못되어 저것을 죽임이요,
어느 한 비구가 그는 이것이리라 고 하면서 이 사람을 죽였거나 이것은 그 이리라 고 하면서, 죽이매 곧 그 사람이었거나 간에 이와 같이 죽이면 죄다 중죄가 됩니다.
사람 아닌 것 구절(非人句)에는 처음에 이 귀신을 나가게 하라 고 말하면서, 병든 비구에게 지팡이를 주었는데, 때리다가 마침내 죽였나니, 그 때문에 죄는 없습니다.
물었다.
만약 귀신을 나가게 하려 하면 어떻게 나가게 합니까.
타알라나무 잎으로나 혹은 실로써 병든 사람의 손과 발을 묶고서 지팡이를 주고, 라타나 수타(羅多那說) 주문을 외운 뒤에 말하되, 너는 계율 지닌
사람을 침범하여 번거롭게 말라. 너는 떠나가라 고 합니다.
그를 위하여 설법한다 하는, 이 구절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사는 말하였다.
나무를 찍는 구절(斫木句)에는 조금 다른 뜻이 있습니다.
혹은 이 나무가 넘어질 때에 비구를 치어 죽여도 범한 것이 아니니, 이 비구는 손안에 칼. 도끼. 가래가 있었으되, 비구는 차라리 죽음을 지킬지언정 이 칼과 도끼 등으로 나무를 찍고 흙을 파서 그 목숨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흙을 파고 나무를 찍으면 파아 라티카 죄가 되며 파아 라이카 죄가 되므로 인하여 성인의 가르침에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차라리 계율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율을 범하고서 살지는 않습니다.
만약 어느 딴 사람이 흙을 파고 나무를 찍으면, 구하여 내면 좋고 또 방편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방편이냐 하면, 죽은 나무가 있으면 딴 비구가 떠서 올리면 좋습니다.
또 비구가 구덩이에 빠지면 딴 비구가 노를 내려서 낚아 올릴 수 있나니 부디 스스로가 나무를 찍지 마십시오. 여러 속인과 사미들에게 말하여
그를 위하여 찍을 수 있습니다.
불을 지르는 구절(放火句)에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을 질러서 절에 가까이 다가오면, 사는 곳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구는 풀을 깎고 흙을 파서 불을 끊어 버릴 수 있나니, 범한 것이 아닙니다.
불에 태움의 구절(方燒句)에는 다시 뜻이 있나니, 만약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중생을 태워버리리라 고 하면, 그 가운데는 중생이 있음에 따라서 죽으면 그에 따라 죄가 되나니, 五역. 파아라 아티카 스투울라아탸야 파아 라티카가 그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나다. 이제 바로 풀을 태우리라 고 하면, 파아 라티카가 되며, 사람을 시켜서 태우게 하면 두스크르타가 됩니다. 다만 사는 곳을 보호하려고 태우게 되는 것만은 제외됩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락 즙 구절(酪汁句)에는 생 타락 즙 찬 타락 즙이니, 그대들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수비 이 라카(穌毘羅漿)라고 합니까.
『먼저 아말 라카(阿摩羅) 하리이 타카(訶羅勒) 비비 히타카(鞞醯勒)로부터 낸 것입니다.
곡식(穀)은 七곡(穀)이니, 멥쌀로부터 처음이 됩니다.
나머지의 감자 온갖 나무의 과일. 온갖 죽순. 고기. 꿀. 사탕. 식염. 마늘 등 이와 같은 물건을 죄다 합쳐 섞어서 하나로 만들어, 혹은 독에 넣기도 하고 혹은 작은 그릇에 넣기도 하여 머리에 진흙으로 덮어서 놓아두고 三. 四년 동안을 그것이 삭기를 기다립니다.
삭았을 때에는 빛깔이 마치 꿀색과 같나니, 이것으로 병을 다스리되, 풍병. 문둥병, 이와 같은 병을 처음으로 합니다.
만약 이 약을 마시고 먹는 때에 먹으면 모두가 살진 고기 맛입니다.
온갖 약은 이 약에서 지나감이 없으며 맨 첫째가 됩니다.
어떤 비구가 이 약을 먹을 때에는 오정이 지나도 먹을 수 있으며, 만약 병이 없는 이면, 물에 타서 먹을 수 있습니다.
제三 파아라아지카 품을 마칩니다.
세존은 네 가지의 진리를 알리시고
넷째의 중요함을 잘 말씀하시어
이제 분별하시며 해설하시니
파 아라지 카라 이름합니다
그때 부처님은 바이샤 알리에 계셨다 함은, 이 뜻은 이미 앞에 있었으므로 다시 거듭 연설하지 않겠으며, 그 아직 해설하지 못한 것을 이제 내가 말씀하겠습니다.
속인을 위하여 마구 부렸다 함은, 혹은 속인을 위하여 밭 갈고 동산 숲을 만들기도 하여, 온갖 할 일은 우리들이 해야 한다 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또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로되, 속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서입니다.
율중에서 이미 말씀하였습니다.
심부름한다 함은 속인을 위하여 심부름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이익되는 법(聖利法)을 행한다 함은 인간 가운데서 이름하되, 위 없는 법이라고 하며, 인간에서 뛰어난 법이라고 하며, 브라만(梵) 법 이라고도 하며 열반에 드는 법(入涅槃法)이라고도 하나니, 이 법은 부처님 벽지불 아라한의 법입니다.
이 비구는 제一선을 얻었다 고 이렇게 시작하나니, 비구들은 함께 상의한 연후에 여러 속인들을 향하여 말을 합니다.
어느 비구의 이름은 붓타 락 기타인데 제一선정을 얻었고 달마 락키 타는 제二선정을 얻었고 상가락키타는 제三선정을 얻었느니라 고 하며, 이렇게 속인들을 향하여 말하고 차례로 제四선정 아라한 번뇌 다함(漏盡) 三달지(達知)까지 이릅니다.
속인들이 묻거나 묻지 않거나 여러 비구들은 이와 같이 다시 서로가 찬탄합니다.
속인들의 공양으로 얼굴빛이 윤이 나고 마음이 화평하여 기쁨이 넘치고 기력이 넉넉하여졌나니, 왜냐 하면 이 비구들은 공양을 얻은 뒤에 음식의
좋은 맛이며 멋대로 놀고 좌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얼굴빛이 윤이 나고 화평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바위(婆裘) 물가라 함은 이 비구들이 바위 물가에서 안거하였기 때문에 바구 물 비고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물으시는, 너희들은 머무러서 화합하고 안락하느냐 라 함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四체와 아홉 구멍은 죄다
안락하느냐.
수고롭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라는 것이니, 세존은 위로하신 뒤에 바위 물 비구들을 꾸짖되, 너희들이 이와 같은 행을 지으면 곧 이는 큰 도둑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일부러 단언하심으로 인하여 장차 오는 세상의 비구들에게 이런 행을 짓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율본에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시되, 지금 세상에 다섯 가지의 큰 도둑이 있느니라.
무엇이 다섯 가지냐 하면, 첫째 여러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니, 혹은 一백 二백 이렇게 내지 五백 사람의 주인이 되며, 성과 마을에서 겁탈하고
담과 벽을 뚫고 넘는 이것은 세간의 큰 도둑이니 이와 같은 것이 처음이 되느니라.
비구도 그와 같아서 두스크르타죄와 파아얏티카를 범하며 이렇게 차츰차츰 하여 파아라아지카죄까지 범함에 이르며 남의 공양과 존중과 찬탄과
합장과 예배를 받나니, 이것이 처음이 되느니라.
지금 세상에 이 나쁜 비구는 스승과 같이 배운 이를 버리고, 이끗을 경영하며 구하여 이끗을 얻고, 이끗을 얻은 뒤에는 멋대로 먹고 마시어 신체가
살지고 씩씩하여 기력이 넉넉하면, 같이 서로 희롱이나 하며, 혹은 음식의 좋은 맛을 말하기도 하고, 음욕을 말하기도 하고, 국토의 가면과 즐거움이며 마을을 말하기도 하고, 동산 숲의 단것과 좋은 찬이며 갖가지 기억과 언설을 말하기도 하고, 도(道)의 추악함을 말하며 마음을 함부로 놓아버려
능히 스스로 누르지 못하고 마침내는 계율을 깨뜨리면서 신심 있는 단월들이 보시한 의복 음식 탕약 침구 방사 상석(床席)을 받나니, 실은 샤아카
종족의 제자가 아니 고늘 샤아카 종족의 제자라고 일컬으며, 맑은 행이 아니고 늘 스스로 이는 맑은 행이라고 일컫나니, 이 여러 가지 보시를 받는
이것이 첫째 번의 큰 도둑이라고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