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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묵상글 ( 부활 제4주일. - 착한 목자 예수님 닮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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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 실현의 여정
-착한 목자 예수님 닮기-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은 4월의 마지막 날이자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담화문이 참 시의적절했습니다. “은총이며 사명인 성소”라는 주제하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성구를 바탕으로 참 귀한 가르침을 주는 담화문 서두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늘 우리는 60번째 성소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소주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하여 제정되었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이 계획은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오늘날 세상의 고통과 희망, 도전과 성과가운데 우리에게 저마다 주님께서 맡기신 부르심과 사명에 응답하도록 돕고자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교회의 친교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회 목자들의 인도 아래 수행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예외없이 성소 실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소가 실현되는 여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 얼마나 멋집니까! 어떻게? 답은 단 하나,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입니다.
참 역설적인 진리가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나의 성소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마침 어제 피정자들과 나눈 강의 주제와도 일치합니다. 강의 주제는 “참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의 삶-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따르며 제 삶의 자리에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 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소주일이자 착한목자 주일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주님은 우리가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는 생명의 문, 진리의 문, 생명의 문이기도 합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감동적인 복음 말씀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 문이다’ 얼마나 멋진 착한 목자 예수님의 신원인지요! 예수님께는 벽이 없이 온통 누구에게나 사면팔방 활짝 열린 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이라고 다 문이 아니라 생명의 문, 구원의 문, 진리의 문은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제가 자주 예로 들었던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우리의 벽은 점차 넓은 생명의 문으로 사랑의 문, 지혜의 문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벽은 변하여 문이 되고, 부패인생은 발효인생이 되고, 태풍은 미풍이 되는 인생이 펼쳐진다고 참 많이 강조했습니다.
착한목자하니 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생각납니다. 이제는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 분이지만 추기경님의 관한 숱한 일화는 언제 들어도 신선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하루를 마칠 때면 경당에서 기도를 바친후 그날 받은 편지에 대한 짧든 길든 꼭 친필의 답신을 써 보냈다는 일화입니다. 또 하나는 8백명이 넘는 교구 사제들의 영명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친히 축하전화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과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영적우정을 나눴던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비사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추기경님이 선종전 6개월, 사경을 헤매실 정도로 병석에 누워 지내실 때라 합니다. 어느날 어느 자매님이 수녀님을 방문하여 자초지종 남편에 대한 곤경에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며 살려 달라, 도와 달라 애걸복걸하더라는 것입니다.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4년 선고를 받고 2년동안 수감중이었는데 건강이 악화되어 정신적으로 폐인이 될 위중한 상황인지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의 아내가 수녀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수녀님도 딱한 사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정말 염치불구하고 병석에 계신 추기경님께 탄원서를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빙그레 웃으시더니 말씀하셨답니다.
“그래, 그러면 수녀가 내 마음을 담아 한 번 탄원서를 써봐!”
추기경님의 격려에 힘을 얻어 수녀님은 온갖 정성을 다해 탄원서를 썼고, 타이핑하여 드리니 추기경님은 정독하신후 간병인의 부축으로 힘겹게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친히 추기경 이름을 쓰고 싸인한 후 직인을 달라하여 또 떨리는 손으로 직인을 찍어 수녀님께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수녀님은 곧장 직접 법무부 장관에게 전달했고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극적으로 8.15일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출옥하게 되어 살았다는 비사이니 그 당사자에게 추기경님과 수녀님은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돌아가시면서 한목숨 살린 추기경님입니다.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또 사랑과 지혜가 넘쳤던 위대한 어른 김수환 추기경이었는지요!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는 시대라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워지는 추기경님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님이셨습니다.착한목자 예수님을, 김수환 추기경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를 섬기로 오신 착한목자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여 날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착한목자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입니다. 종들중의 종이라는 교황님이 아닙니까!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 바로 섬김은 복음의 핵심적 덕목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되는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착한목자 영성을 배우고 실천하여 문이신 주님을 닮아 갈 수 있을런지요! 답답한 벽이 아니라 활짝 열린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 하늘문이 되어 살 수 있을런지요? 셋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순종과 경청입니다.
첫째, 회개의 은총이자 회개의 선택입니다.
평생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수행 역시 선택-훈련-습관의 경로를 밟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감동하여 마음이 꿰질리듯 아파하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저마다 죄를 용서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가 착한 목자 예수님과 함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명과 책임을 다하면서 복음 선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회개의 완성입니다. 역시 평생과제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숙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 때, 사랑과 지혜, 겸손의 삶이요, 성소의 실현이자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한 우리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여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돌아왔습니다.”
둘째, 순종의 은총이자 순종의 선택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한 주님이십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추상적인 순종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순종의 여정입니다. 성소 실현의 여정과 함께 가는 순종의 여정입니다. 영적 성숙의 잣대가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에 나오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고난과 순종을 통한 종과 섬김의 영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 순종하는 영혼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치유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순종의 선택이요 순종의 훈련이요 순종의 습관화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을 닮아 성소의 실현입니다.
셋째, 경청의 은총, 경청의 선택입니다.
경청은 영성의 기초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순종과 겸손입니다. 주님과 소통의 대화인 기도도, 형제들과의 원활한 소통의 대화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은 영성생활의 필수적 기본요소입니다.
하느님은 마치 침묵중에 모두를 듣는 “귀”자체여. 모두를 보는 “눈”자체라 생각됩니다. 참으로 잘 듣고 잘 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서도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들음과 따름으로 요약됨을 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청하여 주님을 따를 때,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고 성소의 실현,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역시 경청의 선택, 훈련, 습관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성소 실현의 여정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부각되는 회개, 순종, 경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소의 실현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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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는 어떤 성소자?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성소 주일을 맞아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좋아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부르면 좋아하지 않거나 겁을 냅니다.
제가 부르면 늘 일을 시키기 때문이지요.
이런 생각 다음 누가 부르면 좋아할까도 생각해봤습니다.
깡패가 부르면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예를 들어 애인이 부르는 것과 어머니가 부르는 것과,
주님이 부르는 것 가운데서 어떤 것이 좋아할까 말입니다.
지난주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 “공동생활”이 주제였는데
피정의 집 동산에 꽃이 만발했기에 다음과 같은 묵상 거리를 드렸습니다.
꽃을 보면 그 아름다움을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는가? 아무도 없는가?
같이 보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가?
같이 사는 자매인가? 밖에 사는 누구인가?
아무튼, 이때 떠오르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나 애인이 부르는 것보다, 주님이 부르는 것이 좋으면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이겠지요.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시고, 우리는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인가? 아니면 목자와 양의 관계인가?
주인과 종의 관계라면 주님께서 일을 시키려 부르실 것이고,
목자와 양의 관계라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려 부르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와 주님 관계가 그 어떤 것 하나인지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주님과 우리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둘 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지도 않고 일을 부려 먹는 분이 아니라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라거나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당신에게로 부르시고 당신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만 부르지 않으시고 열두 사도를 같이 부르시고,
목자가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양 떼를 부르시듯 같이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찰케 됩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나는 혼자 가고 싶은가? 누구와 같이 가고 싶은가?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인가? 다른 누구인가?
부부라면 지금 주님께로 같이 가는 동반자인가?
아직도 서로를 향할 뿐 주님께 같이 가지 않는 관계인가?
자식들은 어떤가? 같이 주님을 향하는가? 서로를 향하는 관계인가?
수도자라면 나는 혼자 주님께 가도록 부르심 받은 독수자인가?
같이 주님께 가도록 함께 부르심 받은 공동체 수도자들인가?
다음으로 우리는 소명을 받드는 주님의 일꾼들이라는 것을 보겠습니다.
소명이라는 말 자체가 성소적인 표현입니다.
소명의 소자와 성소의 소자가 부르심이라는 같은 뜻이고,
명령을 받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요,
부르심을 받아 명령을 받드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주님의 종이요 일꾼들이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설마 일꾼은 싫고 사랑만 받겠다는 얌체나 어린아이는 아니겠지요?
일을 시킬까 봐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것을 살살 피하는 나는 아니겠지요?
이것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소자가 많기를 기도하는 오늘 성소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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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부활 제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처럼 양들을 잘 돌보는 참되고 착한 목자로 초대 받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떼의 모습은 “떠돌며 사는 아람인"(신명 26,5)으로서 목축생활을 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마음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양떼를 몰고 다니는 목자라는 비유를 통해서 인간 사회에서 행사하게 되는 권위의 두 가지 측면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목자는 양떼의 주인이며 동시에 동반자입니다. 목자는 야수로부터 양 떼를 지키는 힘을 가진 강한 사람인가 하면(마태 10,16; 사도 20,29),양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그들의 사정을 숙지하고 온갖 조치를 다하여(창세 33,13-14) 약한 양들을 안아 주고(이사 40,11) 모든 양들을 자기 딸처럼 사랑합니다(2사무 12,3). 목자의 권위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이는 헌신과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빌론과 아시리아 같은 고대 근동제국의 왕들은 신으로부터 양떼를 모으고 돌보는 일을 위탁받은 목자로 자처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성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대리자가 보여 주는 목자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착한 목자에 대한 희망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분은 왕 또는 무리의 주님으로서 군림하시는 목자라기 보다도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참된 목자상을 지니고 계십니다. 주님은 유일한 중개자이시며, 양 우리의 문이며(요한 10,7),양이 풀밭을 찾아 들어가는 문{요한 10,9-10)이십니다. 그분만이 양을 다스릴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요한 21,15-17), 그분만이 양들을 자유로이 우리에 드나들어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민수 27,17). 목자와 양들 사이의 상호 인식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하는 서로간의 사랑을 기반으로 새로운 인간 존재가 형성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스스로 목숨을 내놓으시기 때문에 완전한 목자이십니다(요한 10,15-18). 흩어진 양들은 그분의 목숨을 내놓는 완전한 사랑으로 양들을 한 무리에 모이기 하여 서로간에 영원히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양들의 생활을 유지시키고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0,27-30).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온전히 닮은 참된 목자가 필요합니다. 참된 목자가 영혼에 그리고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가를 다음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창설한 형제회 수도회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할 때 다음과 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형제회의 목자로서 그대를 세우지 아니하였던가? 그런데도 그대는 내가 이 형제회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내가 그들을 불렀고, 내가 지킬 것이고, 내가 키울 것이다. 그리고 떨어져나간 자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뽑을 것이다. 만약 충당할 인원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내가 그들을 태어나게 하겠다…비록 형제회의 숫자가 셋으로 감소한다 해도 형제회는 나의 은총으로 흔들리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그때부터 프란치스꼬는 무수히 많은 형제들의 불완전함이 단 한명의 성인의 덕행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그 덕행은 주님으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바로 주님의 입과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목자로서의 일은 나의 계획과 나의 원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실행되고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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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자기와 반대되는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말에 대해 연민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까?
몸짓이나 말은 그 행동을 이루는 의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입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의도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이 동료와 싸우고 그를 바보라고 부르면서 욕설을 퍼 붓는다. 그는 성이 나서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다정스럽게 바라보고 부른다. 그는 사랑으로 말한다. 이 양자의 경우 똑같은 말을 했지만 그 마음은 정반대다. 이같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이다.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한테 유익하든 그렇지 않든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방법은 상대방의 행동을 내가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떠나, 판단이나 평가를 내리지 않으면서 관찰한 바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의식은 단순히 경험의 자료를 받아들이고, 인식은 자료를 분류하고 감각은 입력되는 사건을 감지한다. 이 세 단계는 단지 수동적으로 입력되는 정보를 소화한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작용은 수동적인 반응이아니라 적극적으로 싫고 좋은 감정을 발생시킨다. 마음의 의지 작용이 행동에 새로운 사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사건의 출발점은 마음의 의지작용이다. 고통의 참다운 원인, 진실한 원인, 진실한 의미의 바라봄은 마음의 의지적 작용이다.
평화의 마음은 우리 마음 안에서 폭력이 가라앉고 자연스럽게 본성인 연민으로 돌아간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할 때에도 종종 본의 아니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평화 대화의 출발점은 연민의 마음을 가진 대화이여야 한다.
평화 대화는 상대방의 말속에 담겨진 근본적인 원의가 무엇인지를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중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평화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외부의 비판이나 평가를 들었을 때 습관적으로 보이는 반응, 곧 변명하며 물러나거나 아니면 반격하는 행동 양식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자신이나 상대방 그리고 우리의 의도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관찰하고, 그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며 무엇을 원하는가에 초점을 둘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민의 깊이를 인식하게 된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도 귀 기울임으로써 존중과 배려, 그리고 공감하는 마음을 기르게 되어 진심으로 서로 주고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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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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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오늘은 부활 4 주일이며, ‘성소 주일’입니다.
<제1독서>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했던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메시아”로 삼으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거십니다.”(사도 2,38)
그리고 그는 <제2독서>인 그의 편지에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베드 2,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도둑의 비유”를 통해,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십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문’은 드나드는 통로입니다. 곧 ‘문’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문”은 “드나드는 문”으로 하나의 문이지만 두 방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방향은 밖에서 “양 우리”로, 다른 한 방향은 “양 우리”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이 “문”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수평적 이동의 통로로서의 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늘과 땅이라는 수직적 이동의 통로서의 문이기도 합니다. 곧 이 “문”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내려오고, 인류의 사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니 ‘생명과 구원의 문’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가는 문으로서 그 문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로 들어간다.’고 말하며,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이 문이라고 해석하며, ‘말씀의 문’을 통해 생명이 드나듦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는 그 드나듦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동행하는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가 “드나드는 문”이라 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통해 나가는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드나들고 있는가? 혹은 들어가는 문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들어가면, 나갈 필요가 없는 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문’은 오히려, 다시 문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들어가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 우리’ 안에 머물러 편안이 자기만의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목자에게 귀 기울이지도 않고 목자를 따르지도 않는 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9)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당신 풀밭에서 생명의 풀을 뜯게 하소서.
당신 기쁨이 차오르고 당신 사랑에 깃들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 진리 안에서 거룩해지게 하시고,
당신의 집에 저의 거처를 마련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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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경청과 소통을 통해 드러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각자의 성소에 충실할 수 있는 은총을 기원합니다.
어린아이 이설아 첼리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빠지지 않고 미사참례를 합니다. 아주 귀엽고 이쁩니다. 제가 손을 내밀면 손도 잡아주고 인사도 잘합니다. 물론 수녀님 보좌신부님에게도 애틋합니다. 그런데 제가 늘 입던 수단을 입지 않고 일반 옷을 입은 채 손을 내밀었더니 멈칫하였습니다. 늘 같은 모습이 아니기에 선뜻 손을 주지 않았습니다. 목소리와 모습이 다르니 혼동이 온 것입니다. 아이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관심과 진실한 사랑이 없이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고, 더더욱 주님과의 소통이 긴밀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10,3).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10,27-28). 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그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나를 알고 계신 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면 답답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커킹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살게 되며 마침내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다른 음성을 따라가는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움켜쥐고 싶은 것이 있어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는 것이지 주님은 늘 사랑으로 속삭이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문제의 답,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 간에도 서로 통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도 저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기회를 만들어 성체조배를 하면서 주님과의 속 깊은 만남을 이루시기 빕니다.
오늘 성소주일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성직자, 수도자의 길에 나설 수 있는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릇으로 쓰일 성직자, 수도자가 여러분의 가정에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되고 수도자가 종신서원을 하려면 지금 시작해도 앞으로 10년 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시작하면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 손녀를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명은 수녀가 되었으며 하나는 결혼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젊은이들에게 특별 성소의 꿈을 키워줄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와 칭찬과 권고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복사들을 미래의 신부님, 수녀님으로 부릅니다. 언젠가 그 소리가 마음을 흔들기를 희망하며.
결혼 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그중에 다양한 성소로 초대받습니다. 특별 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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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활 제4주일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지향을 따라 ‘성소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일꾼을 하느님께 청하자고 하였습니다. 성소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일삼는 백성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의 가르침을 어기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부르셨습니다. 세리는 세상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열혈당원 시몬도 부르셨습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복음서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을 전하는 책입니다. 복음은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때 사라집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에 연연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가까이 있을 때는 부정과 부패가 있었고, 타락하였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과부의 정성과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도, 능력이 많은 사람도 교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질 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은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두려워했고,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갔던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신앙이 되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답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을 견디어 내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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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성당에서 나와 마트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몇 개의 신호등이 있습니다. 이 신호등 때문에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차가 전혀 없는데도 신호를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눈치 보며 건너가는 것입니다. 누가 하면 나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역시 급한 마음에 그분을 따라서 무단 횡단을 하려고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경적이 울립니다. 진행 신호를 보고 멀리서부터 속도를 높여서 차 한 대가 달려온 것입니다. 진짜 위험했습니다. 몇 초 빨리 건너가려다가 정말 빨리 하느님 나라에 갈 뻔했습니다.
적색 신호등은 분명히 정지 신호입니다.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커다란 혼란이 다가옵니다. 문득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즉, 우리 삶 안에서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옳지 못한 길일 때에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눈치 보면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말이지요. 또 그 멈춤의 시간이 고통스럽다면서 그냥 앞으로만 가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적색 신호도 어느 순간에는 녹색 신호로 바뀝니다. 영원히 적색 신호만 있는 신호등이 없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멈출 수밖에 없는 그 순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녹색 신호로 바뀌어서 다시 힘차게 나아가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그래서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라는 멈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으로 완전히 멈췄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부활이라는 녹색 신호로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며, 지혜롭게 지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둘 수 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양 우리에 들어가는 두 부류의 사람을 비교합니다. 하나는 양들의 목자이고,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도둑이며 강도입니다. 도둑, 강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도둑’이라고 했고(요한 12,6), 예수님 대신 사면받은 바라빠는 ‘강도’라고 했으며(요한 18,40),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장사치들을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즉, 도둑, 강도는 모두 하느님 이름 밑에서 탐욕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름 붙여 부르는 당시 양치기 생활의 관습이었지요. 그만큼 양들을 소중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받은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외면할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우직하게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들리면 산산이 흩어집니다. 우리는 과연 목자를 충실하게 따르는 양의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혹시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탐욕을 추구하는 도둑과 강도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또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따를 수 있는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소주일인 오늘, 우리를 부르심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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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말할까'하고 괴로울 때는 진실을 말하라(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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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문
들고 나는 문, 죄인을 가두는 문, 진실을 은폐하는 문, 외부 세계와 차단된 문, 죽음과 파괴를 의미하는 닫힌 문입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와 바람과 햇빛이 들어오는 문,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생명으로 가는 문도 있습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가두는 문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활짝 열린 문이십니다. 심심치않게 지구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곤 합니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신념에 기인한 낭설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살고 있는 세계와 인간의 생명 또한 영원하지 않기에 인간의 운명 또한 깨지기 쉽다는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러한 낭설에 어리석게도 물질 세계에 갇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스스로 나약해지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힘으로도 다시 닫히지 않는 무한하고 영원한 공간, 새로운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는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도 더 이상 육신이 소멸되는 심판을 받지 않고, 더 이상 물질적 감옥에 갇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한된 세계에 갇히지 않기에 별과 달처럼 무한히 날아 성령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원천으로 들어가는 문이십니다.
사람이 죽기위해 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만일 인간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태어나지말고, 차라리 살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만일 삶이 그렇다면 그 삶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죽음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셨고 고난 끝에 그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절망과 주검의 무덤을 열고 나오신 것은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완전한 생명, 죽음의 그림자 조차도 있을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충만한 생명, 바로 고통과 질병, 굷주림과 갈망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생활과 주님의 삶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삶이란, 완전한 사랑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더욱 풍성하고 발전해 나가고, 더욱 완전해지기 위한 고귀한 그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어린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축복을 하고 생일을 축하하는 이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 인간도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원천안에서 완전하고 충만된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는 유일한 문입니다. 언제나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야하고 언제나 유일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하며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고통과 아픔, 상처를 치유하고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방황하는 영혼에 끝없는 사랑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양들의 문이십니다. 지금 그 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잘못된 다른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2.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들어오도록 아주 광활하고 넓은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나의 문은 어떴습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오도록 활짝 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굳게 닫고 있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나도 마음의 문을 더 넓게 열기 위해 나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말씀의 나눔
1.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그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닫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을 닫고 살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양들의 문’이신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나의 닫힌 문을 열고 나와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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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30. 부활 제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양들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래서 다른 이를 따라 가지 않고 목자의 뒤를 따른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례받고 싶어서, 내가 선택해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따라나섰을 뿐입니다. 어디로 인도하시든 그것은 그분의 선택입니다.
목자는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주님을 말합니다. 목자는 문입니다. 양들의 문입니다. 그 문은 양들만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늑대이거나, 양의 탈을 쓴 다른 것들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
목자는 문입니다. 문은 그 의미가 아주 많습니다. 그중에 몇 가지는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문은 밖과 안을 구분합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즉 문은 기준입니다. 밖과 안을 구분하는 기준 말입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 사랑과 무관심을 구분하는 기준, 벗과 적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그것이 주님이시고, 그것이 성경이고, 그것이 교회입니다. 목자의 문, 그것은 교회를 교회이게 하는 기준입니다.
문은 자격을 검증합니다. 그 문에 들어설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합니다. 우리 집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집안 식구들이거나 내가 초대한 손님입니다. 그 이외에는 도둑입니다. 그래서 담을 넘거나 창으로 들어오려 합니다. 왜? 자격이 없으니까요!
오늘 물어보십시오.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자격이 되려고 노력하는가? 자격증 시대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자격증을 따려고 자신의 스펙을 늘리려고 학생이건 회사원이건 학원을 드나들기 바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의 수를 늘리기 때문입니다.
하늘 문 자격증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면 어떤 자격증보다 열심히 그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십니까?
양이 그 자격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물어뜯는 이리나 늑대가 아니라, 양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하늘 문을 드나들 수 있는 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슉, 팍, 피옹
텔레비전을 즐기지 않지만
그중 즐겨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뉴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야구 예능입니다.
야구예능팀의 감독님은
선수들을 이렇게 지도합니다.
그래 슉치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피옹해야지
팍팍 하는 거라고
그런데 신기하고 선수들이 이 말을 알아듣습니다.
저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그들은 알아듣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그 경지까지 가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각으로 몸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경지까지 가본 사람과의 대화는 모든 것을 풀이하지 않아도
서로 쉽게 알아듣습니다.
탁, 후, 숭….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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