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二 章 담비라는 女人
일륜이 허우적거리며 중원으로 걷고 있는 정오 무렵.
항주(杭州), 이곳의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왁자지껄하는 상인들의 고함소리가 살아있는 인간사(人間事)를 드러내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생(生)의 바쁜 여백이 하나씩 메꾸어지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옥령, 그는 무엇인가 골몰히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손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화려한 금봉차(金鳳 )가 들려 있었다.
한 마리의 봉황이 살아있는 듯한 형상이 수놓아진 금봉차는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무엇인가를 생각한 듯 입가에 모호한 미소를 머금었다.
― 사실상 철환사비 중에서 가장 골치를 앓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환도유풍(幻盜流風) 담비라네.
― 환도유풍 담비라…….
― 더욱이 놀라운 것은 환도유풍이 여인(女人)이라는 것이네. 그것도 빼어난 미모를 간직한 여자라네.
― 후후훗! 그래요?
― 조심하게. 그녀를 얻는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인간들의 대부(代父)이니까.
― 아름다운 여자가 가장 천한 인간들의 대부라… 꽤 호감이 가는 여자인 것만은 사실이군요.
―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자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될 것이네. 그들의 정보망은 현 개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라네.
― 도저히 손에 넣지 않으면 안될 여자인 것만은 사실이군요.
―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네.
―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옥령은 환도유풍 담비를 만날 계획으로 이곳에 나왔다는 말이 아닌가.
'후후후, 환도유풍 담비… 이 금봉차를 보고 너는 나에게 오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천하제일의 신투(神偸)인 그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러기에 그 어떠한 보화(寶貨)보다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 물건을 사랑하는 것이 여자의 심리이니까.'
그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있었다.
'결국 당신도 여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미끼를 가져왔다.'
미끼, 그는 손 안의 금봉차를 만지작거리며 음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나 옥령에게 그 신투술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을 것이다. 후후훗!'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신선한 매력으로 그의 얼굴에 채워졌다. 그 안에는 꿈틀거리는 그만의 지모(智謀)가 도사리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왔다!'
옥령의 눈이 흰색으로 상쾌한 반응을 일으키고 그의 손 안에 있는 금봉차가 더욱 찬란한 빛을 뿌리며 햇살을 부둥켜 안고 있었다.
한 여인, 일신에는 초록빛 연의를 걸치고 있었고 치렁한 수발은 허리까지 길에 늘어진 채 파도가 일렁이듯 춤을 추고 있었으며, 미월(美月)을 닮은 아미(蛾眉)는 그린 듯 아름답고……
솔잎 끝에 매달린 한 방울의 이술을 본 적이 있는가?
지금 여인의 두 눈이 월파 속에 빛나는 한 방울의 생채(生彩)한 이슬과 같았다.
그리고 미려(美麗)한 콧날은 그대로 미(美)의 앙금을 떠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한창 하늘거리는 듯한 몸짓으로 대로를 헤치고 있었다.
어느 누가 보아도 현숙한 여인이 항주의 거리를 구경나온 모습이었다.
여인은 서서히 옥령과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한 탓인지 그의 머리에 비껴진 옥잠(玉簪)이 옥령의 눈 그늘에 잡혀 들었다.
'후후후! 많이 해본 솜씨야, 아예 사소한 것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것도 큰 것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테지…….'
이미 환도유풍 담비에 대해서는 환히 알고 있는 그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옥령을 모르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스스슷! 옥령과 여인이 촌각의 시간을 두고 엇갈렸다.
헌데 이럴 수가 있는가? 옥령의 손에 들린 금봉차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역시 대단한 실력이었어. 한 손을 들어 손을 쓰다듬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손이 내 손에 든 금봉차를 빼내 품 속에 갈무리해 버렸으니… 그러나…….'
그는 멀어져가는 여인을 힐끗 응시했다.
우연이었을까? 길을 가던 여인 또한 옥령을 뒤돌아 보며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후후훗! 저런 것을 두고 승리의 미소라고 했던가?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나에게는 흐르는 구름조차 잡을 수 있는 섬광표류환허비가 있는 이상은…….'
섬광표류환허비.
그는 드디어 이 절세의 신법으로 이 여인을 상대하기에 이른 것이다.
스으으으!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여인의 뒤를 쫓았다고 느낀 순간 그는 어느새 제 자리에 돌아와서 유유히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손에는 조금 전 그가 지니고 있던 금봉차가 들려있는가 하면 여인의 머리에 꽂혀 있던 하나의 옥잠마저도 들려 있는 것이었다.
실로 귀신이 두 눈을 부릅뜰 일이 아닌가?
'후후훗. 이렇게 하면 또 오겠지. 안 올 여자는 아니니까.'
여인, 운명이 철환사비의 일인이라 영명을 했으며 운명은 그녀에게 환도유풍 담비라는 이름을 지어버린 이 여인.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노을빛을 닮은 입술은 호면에 부서지는 월광과도 같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고, 그 미소는 곧 그녀에게 득의한 승리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오늘은 봉을 잡았다. 내 평생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가져본 것은 처음이다.'
아름다운 것을 취한 여인의 마음, 그것은 뜬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걸음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졌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승리를 갈무리한 가슴이 허전한 것이 아닌가?
그녀는 황망히 자신의 품 속을 더듬어 보았다.
'이럴 수가?'
놀라는가?
담비의 미려한 얼굴에 가득 서리는 저 파랑의 잔잔한 물결은.
그리고 무엇인가를 퍼뜩 깨달은 그녀의 시선이 저만큼 멀어지고 있는 옥령에게 쫓기듯이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던 것이다.
자신의 품 속에 있어야 할 금봉차가 옥령의 손에 들려져 있는가 하면, 자신이 머리에 꽂고 있던 옥잠 마저도 그의 손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귀신같은 놈이다. 어느새 내 옥잠까지… 더구나 내 품 속에 있었던 저 금봉차를 빼내도록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다니!'
담비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 올랐다.
생각해 보라.
낯선 사내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더듬고 지나갈 때까지 무방비 상태로 놔뒀으니, 여인에게는 그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겠는가?
'최초로 나 담비에게 패배를 안겨준 놈이다. 더구나 내 몸까지 마음대로 주무르고 갔다.'
당연히 뒤따르는 분노가 그녀의 눈에 서릿발처럼 맺혔다.
'두고 봐라. 네놈의 심장이라도 꺼내올 수 있는 것이 나 담비라는 것을…….'
이렇게 분노한 담비는 서서히 돌아서 옥령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후후! 돌아오지 않고는 안될 상황이었지!'
그는 냉냉하게 시선을 빛내고 다가오는 담비를 응시한 후 더욱 여유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대로(大路)를 벗어나 조금 한적한 소로(小路)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내 심장을 조심해아 할 것 같군. 표정을 보아하니 성난 암코양이를 보는 것 같아.'
그런 시간에 담비의 신형은 그의 일 장 뒤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빙긋! 옥령은 걸음을 멈춘 채 담비를 향해 햇살같은 미소를 퍼부었다.
'저 놈 봐라! 여유있게 미소까지… 좋다. 그 미소가 언제까지 이어지나 보자.'
담비는 마음을 단단히 굳히고 옥령의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스스슷!
담비의 손이 거의 환각일 정도로 현란하게 허공에서 움직이고 옥령의 손 또한 거의 같은 시각을 두고 미풍(微風)처럼 담비의 몸을 더듬고 지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갈라졌다.
그런데, 담비의 머리에는 언제 꽂혔는지 옥령의 손에 들려 있던 옥잠과 금봉차가 한꺼번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빙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그녀의 손 안에는 옥령의 품에 있던 금랑이 들려있는 것이었다.
'빠르다. 옥잠과 금봉차를 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설마 내 금랑까지도 그 사이에….'
그는 경악 대신 신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저만큼 걸음을 옮기던 담비가 혀를 쏙 내밀며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 아닌가?
"후후후… 과연 그 웃음이 잠시 후에는 어떻게 변하는가를 눈여겨 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옥령, 그는 담비의 뒷모습을 보며 어굴어굴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호호호… 감히 나 담비에게 도전을 해오다니. 결과는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웃었다.
한 번의 패배 뒤에 오는 승리의 기쁨은 또 다른 것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염라대왕의 머리카락도 모조리 빼올 수 있는 사람이 나 담비다. 그런데 내 품을 뒤져!"
그녀는 저만큼 뒤를 돌아다 보았다.
어느새 사라졌는가?
옥령의 그림자는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 것이 그녀에게는 더 없는 승리감을 고취시켜주는 하나의 요인이 된 것이다.
"호호호…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그랬더라면 이 금랑은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호호호홋!"
"그러나 대단한 놈이었어. 아직까지 내가 두 번 손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옥령을 인정하고 있었다.
천하제일의 신투라 스스로 자부하는 담비의 품 속에서 물건을 빼갈 수 있는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비는 손 안의 금랑을 만지작거리더니 그것을 자신의 품 속에 깊이 갈무리할 순간이었다.
파르르… 품 속에 손을 집어넣은 그녀의 눈빛이 떨리며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짧은 순간에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으니.
처음에는 경악으로 변했으며 경악은 곧 이어 불신으로 변하는가 했더니 종내에는 불신마저 믿을 수 없다는 회의로 변해버린 것이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놀라게 했단 말인가?
천천히 그녀의 떨리는 손이 품 속을 헤치고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쪽지가 들려있는 것이 아닌가?
담비의 가슴 속에서 쪽지가 나오다니.
무수한 떨림을 일으키던 그녀의 시선이 하나의 쪽지로 옮겨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후였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올리는 바이오. 그대의 몸은 참으로 부드럽고 풍요로웠으며 싱그러웠소.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보송보송한 감촉이 손 끝으로 전해오는 그런 훌륭한 몸이었소.>
그렇다면 옥령이 그녀의 가슴을?
"으으, 이런 모욕을… 정말 사람같지 않은 놈이다."
<사실 낭자의 깊은 배려를 생각해 그냥 가려고 했으나 낭자의 몸이 너무도 아름다운지라 그것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그만 낭자의 젖가리개를 선물로 가져가는 것이오. 이해하리라 믿소.>
담비의 젖가리개가 지금 옥령의 손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 짧은 순간에 담비의 젖가리개를 빼내고 그 자리에 이런 쪽지를 남겨놓았으니, 그리고 그것을 천하제일의 신투인 담비가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으니.
담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으드득! 도저히 이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놈이 중원에 있었다니……."
그녀는 쪽지의 마지막 부분으로 독사같은 시선을 박았다.
<만약 정 젖가리개가 필요하다면 돌려 드릴테니 오늘 밤 자시(子時)에 항주의 서북 사십여 리에 있는 초혼평(招魂坪)으로 나오시오.>
서명도 없는 쪽지, 그것을 다 읽고 난 담비의 얼굴은 철저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초혼평이라고? 그곳이 네놈의 무덤이 되기에는 좋은 자리인지 모르겠다."
쪽지를 갈가리 찢어내는 담비의 얼굴에 돋힌 살기는 문 틈으로 새어드는 음풍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음냉하게 시선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후 그녀는 힐끗 천공의 태양을 한 번 응시하더니 휘익! 일진의 바람처럼 그녀의 모습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환도유풍 담비, 그녀에게 다가온 거센 회오리, 그것은 그녀 스스로가 자초한 길이었으나 그것이 그녀의 일생일대에 가장 화려한 변신을 안겨줄 줄이야…….
* * *
휙!
보는 것만으로도 짙푸른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도끼[斧]가 칙칙한 피비린내가 물씬 배어있는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공간을 유린하고 있다.
퍽!
둔탁한 괴음(怪音)이 내리친 도끼의 끝에서 들려오고,
파파파팟!
처절하도록 붉고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죽음[死]을 연상케하는 혈화(血花)가 칙칙한 공간에 미친 듯이 피어 올랐다.
구름처럼 번져오는 향기는 비리고 비린 혈향(血香)이었다.
몸체가 자그마치 집채만한 황소 하나가 눈을 까 뒤집고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쿵! 거대한 황소는 발악 한 번 못하고 썩은 고목이 쓰러지듯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너진 황소의 정수리를 타고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도살장으로 짐승들에게는 바로 사형대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사형집행인을 우리는 백정(白丁)이라 불렀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천박한 부류의 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 버렸다.
황의대한(黃衣大漢), 그의 이름은 가람(伽藍)이었고 그의 직업은 천직인 백정이었다.
구 척에 달하는 거구에 구릿빛 피부를 소유한 가람.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언제나 술에 찌들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스윽! 그의 시퍼런 도끼날에 묻어 있는 몇 방울의 피를 손으로 문지르며 한 옆에 있는 호로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그는 거의 쉬지도 않고 호로병을 깨끗이 비우고 있었다.
"제기랄!"
언제부터인지 그는 한 마리의 생명을 죽일 때마다 괴이한 허무(虛無)에 짓눌려 나직한 욕설을 토해내곤 했다.
일종의 자신에 대한 거친 반발이리라.
그때, 스윽! 그의 앞으로 섬세한 교구가 흩어지는 바람인 양 유유로운 몸짓으로 나타났다.
가람의 거무스름한 눈빛이 폭풍을 만난 듯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에게는 발의 모양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람.
"대주님……."
그는 그 자리에서 푹석 엎드렸다.
나타난 여인은 바로 환도유풍 담비였다.
"일어나라!"
그녀는 한차례 도살장을 쓸어본 후 가람의 머리 위에 시선을 꽂았다.
"할 일이 생겼다."
"하명만 내리십시오. 이 가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옥이라도 다녀올 것입니다."
"네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보낼 놈이 생겼다."
"그놈이 누굽니까?"
"나도 아직 그놈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놈은 나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놈이다. 예삿놈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가람은 두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데구르 굴리고 있었다.
'대주님이 패하셨다면 보통의 놈이 아니다!'
"오늘 밤 자시(子時), 장소는 초혼평이다. 허나 나의 지시가 있기 전에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잊지 말도록."
가람이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담비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꽃은 아름답다.
그러나 지금 세월에 찌든 하나의 주름진 손 끝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꽃은 생화(生花)가 아닌 가화(假花)이기에 살아있는 꽃이라 부를 수는 없다.
노파는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업(業)이기에 오늘도 오색 종이를 오려 꽃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만들어진 꽃은 마지막 가는 영혼(靈魂)을 달래려는 듯 상여(喪輿) 끝에 서럽게 매달리고 있었다.
가화파파(假花婆婆)!
항주의 모든 사람들은 이 노파를 그렇게 불렀다.
상여꽃을 만드는 천하디 천한 부류의 노파.
꽃을 만드는 가화파파의 주름진 노안에는 으스스한 염세적인 삶의 잔재가 검은 잿가루처럼 드리워져 있었으니.
사각사각……. 종이가 오려지고 그것이 노파의 손에서 한 송이의 가화가 만들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이었다.
뚝! 막 또 하나의 오색 종이를 오려가던 가화파파의 손이 굳어지듯 멈춰졌으며 노파의 신형이 흡사 지진을 맞은 듯 파리하게 떨렸다.
그런 가화파파의 회색빛 암울한 동공으로 한 여인의 모습이 파고 들었다.
살아온 이 날까지 가화파파가 단 한 순간도 있을 수 없었던 여인,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요, 마음의 지주로 자리한 여인이다.
"대주님… 어찌 이런 곳까지……."
너무도 피폐한, 그래서 삭풍 끝에 서럽게 울부짖는 듯한 늙은 고목나무같은 가화파파의 신형이 오색 종이 위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름답기는 빙옥을 다듬어 놓은 듯하고,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아픔을 주는 하나의 손이 가화파파의 주름에 뒤엉킨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그리고 손의 임자는 아침 햇살에 부서지는 이슬과도 같은 청아하고 영롱한 음성으로 노파의 황량한 세월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파파… 이 주름이 더 늘어가고 있어요."
아프게 노파의 손을 쓰다듬은 이 여인은 바로 다름아닌 환도유풍 담비가 아닌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천민의 대부(代父).
가화파파의 주름 투성이인 눈가에 퇴색되어 가는 듯한 고뇌의 미소가 떠올랐다.
"대주님! 이 늙은이가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나 봅니다."
"파파, 무슨 말을… 이 상여의 꽃은 갈수록 더욱 아름다운 조화(造化)를 이루고 있어요 이 꽃과 같이 추잡한 세상을 비웃으며 사는 거에요."
가화파파는 얄팍한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를 생각한 듯 담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대주님, 무슨 일이 있었군요. 그것도 좋지 않은 일이……."
담비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행위는 바로 가화파파의 말에 수긍을 한다는 뜻이 아닌가?
"말씀해 보십시오. 이 늙은이가 대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노파의 음성은 메마른 사막의 삭풍과도 같았다.
"한 가지 일이 생겼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 나에게 두 번의 패배를 안겨주고 접근을 해오고 있어요."
"대주님께서 패배를……?"
"문제는 그 놈의 정체에요. 그 놈은 분명 내가 철환사비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어요. 오늘 밤 자시(子時)에 초혼평으로 날 불렀어요. 그것이 그의 치밀한 음모같은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군요."
"도저히… 살려둘 수 없는 놈이로군요."
이 무슨 변화인가?
가화파파의 눈[眼]이 지금 가공할 살기(殺氣)와 싸늘한 한광(寒光)으로 음냉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결코 항주 사람이 알고 있는 상여꽃을 만드는 가화파파의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는 무림의 초극고수(超極高手)의 눈,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래서 일이 너무 막중한지라 파파를 찾았어요."
"대주님! 노신을 믿으십시오. 노신이 있는 이상은 그 누구도 대주님 몸에 손 끝 하나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광오한 자부심, 그것이 서슴없이 가화파파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믿어요. 파파의 말을. 그럼 초혼평에서 만나요. 나는 또 가볼 때가 있어요."
담비는 목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어느 덧 상여집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가화파파, 그녀만이 멀어져가는 담비를 오래도록 직시하고 있었다.
* * *
초혼평(招魂坪).
이곳은 온통 갈대 숲으로 뒤덮여 삭막함을 자아내는 곳이다.
사사삭!
한 가닥 스산한 삭풍의 끝에서도 무성한 갈대잎들은 을씨년스러운 기음(奇音)을 발하고 있었다.
까악! 까르르! 듣기만 해도 소름이 절로 끼치는 까마귀 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울부짖으며 초혼평을 더욱 음산하게 휘감고 있었다.
그러한 초혼평에 서 있는 사람.
고월(孤月)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이 심묘로운 광채를 발하는 그, 그는 다름아닌 천군대작의 휘호를 가슴에 안은 이 시대의 신인(神人) 옥령이 아닌가?
그는 오래도록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휘감아오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문득 도도히 흐르는 야공의 성운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이 어슴푸레하게 열렸다.
"지금은 자시……. 약속대로라면 그녀는 지금쯤 이곳에 와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많은 동조자들을 대동한 채로……."
웃으려는가? 담담하게 음성을 토해내는 그의 입꼬리가 상명한 일렁임을 보이는 것은.
"그러나 그대는 한 가지를 알았어야 했다."
무엇을 말인가?
"그것은 나 옥령이 이 중원 십팔만리를 통틀어 가장 강하다는 천군대작이라는 것과… 그대를 취하고자 내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과 땅이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이치이듯 변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광오하리만큼 자신만만한 옥령의 태도는 확신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가 다름아닌 천군대작이라는 휘호를 지닌 옥령이기에 가능한 말이 아닌가?
헌데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슷!
갈대잎을 가르는 경미한 음향이 바람결에 실려오는가 싶더니 옥령을 향해 다가오는 사인(四人)의 그림자가 긴 장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동(東),
"내 이름은 가람(伽藍). 오늘 만난 기념으로 네놈의 두 팔을 책임지겠다."
수만 장 지하유부에서 흘러나온 듯한 음성과 함께 한 자루의 시퍼런 도끼[斧]를 어깨에 메고 횃불같은 안광(眼光)을 폭사시키고 있는 구 척 거구의 인물이 태산처럼 드러났다.
바로 천한 부류의 인간 백정 가람이 아닌가?
순간 옥령의 동공 깊숙한 곳으로 짧은 기광이 퍼뜩 스쳐갔다.
'드디어 나타났는가?'
그의 시선이 서서히 가람을 향해 옮겨지고 있었다.
헌데 막 시선을 돌린 그의 귓전으로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횡량한 음성이 서(西)로부터 들려왔다.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가화파파라는 이름을. 그대의 목을 조심해라."
가화파파, 오색의 종이로 만든 가화 한 송이를 머리에 꽂고 하나의 지팡이로 몸을 의지하며 우적거리듯 나타난 노파, 그는 바로 가화파파였다.
옥령은 말 없이 다가서고 있는 가화파파를 직시했다.
'가화파파! 항주가 알고 있는 그녀는 상여꽃을 만드는 천하디 천한 노파였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무림의 고수라니…….'
새삼스럽게 환도유풍 담비라는 여인에 대한 무서움이 그의 머리 위로 서서히 지배해오고 있었다.
그때 옥령의 남쪽으로부터 여인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으니.
"호호호……. 매끈하게 생긴 공자님, 이 마요(魔妖)가 공자님의 죽음을 마중하게 되어 한없이 기뻐요."
어느새 다가왔는가?
옥령의 남쪽으로부터 상명한 죽음의 미소를 드리우고 나타난 한 명의 여인.
그녀의 손에는 자그마한 한 자루의 파혼도(破魂刀)가 히뜩히뜩한 죽음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요(魔妖)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여인이다. 그러나 한 번쯤 경계해야 할 여인임에는 분명하다.'
옥령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요라는 여인의 상큼한 미소의 뒤언저리에 서려 있는 죽음같은 살기를.
또 다시 갈대잎처럼 메마르고, 그런가 하면 단 하나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무심한 음성이 그의 서쪽에서 들려왔다.
"내 이름은 여살(女殺). 너에게 죽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사람이다."
그는 또아리를 튼 한 자루의 마편(魔鞭)을 들고 표정없는 얼굴로 갈대밭 사이를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옥령, 퇴색된 어둠을 등에 지고 허무한 빛을 짓이기며 나타난 사 인을 바라보는 그의 입에는 추상의 빛부신 미소가 무지개처럼 피어 올랐다.
그리고 한 마디 말.
"좋은 밤이군. 그대들과 어울리는… 안 그런가?"
의미를 감히 점지할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인(四人)을 향해 묻는 말.
사 인의 싸늘한 동공 깊은 심처가 기이한 빛을 발한 것도 순간이었다.
그들의 한결같은 생각으로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이렇듯 말장난을 하고 있는 사람은 대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무서운 놈이다.'
'저 허허로운 자세가 마음에 걸리는군. 언뜻 나약함에 얼비치는 심연한 기운은…….'
그러나 이러한 생각도 잠시,
스으으으…….
그들은 바람결에 흐르는 구름인 양 옥령을 완벽히 에워싸고 있었다.
"좋은 말…….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 이 자리가 네놈의 무덤이 된다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가람이 조용히 어깨 위의 도끼를 가슴 앞으로 끌어당겨 전신의 피를 말릴 것 같은 살기를 흩뿌리며 입을 열었다.
허나 옥령의 입가에 서려 있는 미소는 좀체로 걷힐 줄을 몰랐다. 아니 더욱 더 고요하게 뒷짐을 지며 야공의 부서지는 성운을 한가로이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도… 그러나 나 또한 한 가지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설사 그대들의 주인인 환도유풍 담비가 온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확신할 수 있는 한 마디 말의 마지막 의미, 그것이 사 민의 뇌리 깊숙이 와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기묘하게 대치를 이루고 있는 오인(五人)의 잔영(殘影).
그들의 위로,
휘이이이잉! 사사사삭!
한줄기 메마른 삭풍이 서럽게 울부짖으며 초혼평을 훑고 지나가고 그 바람은 물씬 죽음의 내음을 풍기고 있었으니.
밤, 운명(運命)의 서글픈 변주곡을 울릴 이 밤의 여정은 아직도 길기만 한데.
첫댓글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