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기는 해도 건봉사 역시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충분한 사전조사를 하지 않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점이 많아 아쉬움이 남았다. 글을 시작하기에 먼저 적어 다음에 가실 분들에게 도움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먼저 극락전 영역 옛 절터 끄트머리에 있는 왕소나무 아래에 가보기를 권한다. 나는 멀리서 소나무를 잡기만 했는데 이 소나무 밑에 가면 현재의 전각들이 한 눈에 보인다고 한다. 다음으로 등공대에 가보길 권한다. 건봉사에서 꽤 걸어 올라야 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있었던 염불만일회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 4m 높이의 기념탑이 있다고 되어 있지만, 블로거들이 올린 사진은 조선후기 석종형부도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삼십일인등공유적기념지탑’이라고 되어 있는 부도만 보인다. 이 부도는 1915년 세워진 것이라고 하며, 등공대에 가려면 건봉사 종무소에 신청을 해야 하는데 10명 이상이어야 가능하다고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이 글은 건봉사의 주요 유적 및 전각을 간단히 보여주는 것으로 전개한다. 주차 후 불이문을 향해 나아가니 왼쪽에 사명당의승기념관이 보인다. 여긴 나오면서 들르기로 하고 조금 더 가니 ‘만해당대선사시비- 사랑하는 까닭’이 보인다. 시보다는 그늘에서 오수를 청하는 고양이가 더 눈에 들어온다.
[전국문화유적총람]은 많은 비지정문화재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오류도 많고, 편찬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 자료집에는 불이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고 나와 있지만 당간이건, 괘불이건 지주는 보이지 않았다. 불이문 좌측에는 조금 오래된 비석과 새로운 비석, 그리고 ‘금강갑계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 가운데 조금 오래된 비석은 고성건봉사능파교신창비(高城乾鳳寺凌派橋新創碑)인데 숙종 34년(1708)에 건립하였다는 자료가 보인다. 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린 뒤 보주형의 상륜부까지 장식했다. 비석 전체의 높이는 2.68m 이다.
별다를 것 없는 불이문은 네 기둥의 반 정도가 돌기둥이고, 이 돌기둥에 금강저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문은 또 다른 역사적 중요성도 지니고 있는데,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된 건봉사 절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라는 점이다. 1920년에 세운 것이다.
정면의 처마 밑에 걸려 있는 ‘불이문(不二門)’이라는 현판은 근대의 명필인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경내로 진입하다 보면 좌측에 석주 등이 보이지만 일단 무시하고 더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능파교가 잘 보이는 지점에서 조심스레 개울로 내려가 본다. 보물 제1336호 고성 건봉사 능파교(高城 乾鳳寺 凌波橋)는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규모는 폭 3m, 길이 14.3m,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조금 더 높다. 이 다리는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하며,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세웠고, 근래에도 내가 이전에 건봉사를 방문했던 10년 전에 한창 보수공사를 했었다. 그래서 이 다리는 육안으로는 오래 묵은 맛을 느끼기 어렵다.
건봉사에는 석주가 많은 편인데 능파교를 넘어 대웅전 영역으로 향하는 길목 좌우에도 독특한 문양을 새긴 두 기의 석주가 서 있다. 좌우 석주에 각 5개씩 있는 문양들은 보시바라밀을 비롯한 10가지의 바라밀을 상징한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에 잠시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모두 새로 지은 것들인데다 지난 방문 때 어느 정도 살펴보았기 때문에 바로 돌아나간다.
능파교를 건너 다시 대웅전 영역을 돌아보니 길게 이어진 홈통을 따라 흘러내리게 설치한 구조물이 눈에 띤다. 절집마다 꽤 즐겨하는 장식인데 무언가 상징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바라보는 사람이 느끼기 나름이겠지만.
대웅전 영역 맞은편인 계곡 남쪽에는 절터에 새로운 건물들이 있는데 이곳에 극락전이 있었기 때문에 흔히 극락전 영역으로 부르기도 한다. 절터로 남아있는 건봉사지를 왼쪽에 두고 계곡을 따라 잠시 걸으면 역시 두 기의 석주가 좌우에 버티고 서 있고 이곳을 통과하면 템플스테이대방, 산신각, 그리고 적멸보궁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곧바로 적멸보궁을 지나쳐 진신사리탑이 모셔진 적멸보궁 뒤쪽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새로 만들어진 석종형의 대형 부도 외에 3기의 부도와 2기의 비석이 있다. 그 가운데 보기에 제일 우측에 있는 팔각원당형 부도가 이른바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인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일명 세존영아탑(世尊靈牙塔)이라고 하여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봉안하였다. 1605년(선조 38)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부처님의 치아와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1724년(경종 4)에 건립하였다.
이 탑에 봉안되어 있던 진신사리가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난 1986년 도굴단에 의해 도굴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총 12과 가운데 8과를 되찾아 그 가운데 3과는 다시 사리탑에 봉안하고 5과는 금 경내에서 따로 보관하며 신도들에게 친견을 허용하고 있다.
적멸보궁에서 나오면서 왕소나무를 멀리서 바라본다. 앞서 적은대로 나무 아래까지 가지 못한 것이 여러모로 아쉽다.
이제 나가는 길. 건물자리별로 구획된 땅 위에 주초를 비롯한 돌덩이만 드문드문 놓여진 강원도 기념물 제51호 고성건봉사지(高城乾鳳寺址)를 잠시 거닌다. 건봉사는 전국 4대 사찰-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으나-의 하나로, 신라 법흥왕 7년(520) 때 아도화상이 지은 절이다. 처음에는 ‘원각사’라고 불렀으나, 이 절의 서쪽에 새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어 건(乾)과 봉(鳳)을 합쳐 ‘건봉사’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경덕왕 17년(758)에 발징화상이 고쳐지었고,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다시 고쳤다고 한다.
범종각까지 걸어내려오니 그 옆에 이른바 ‘고성 구 건봉사지 나무아미타불 석주‘가 보인다. 이 석주는 높이 3m에 각 변이 38cm인 방형 화강암 석주인데, 각 면에 종서(縱書)로 ①나무아미타불(한자) ②나무아미타불(한글) ③불기 2955 무진하(戊辰夏) ④대방광불화엄경을 새기고, 정상에 봉황(?) 한 마리를 조각해서 올려놓았다. 1928년에 세운 것이다.
건봉사 입구에는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외에 다른 한 인물을 기리는 흔적들이 있다. 조명암이란 시인 겸 작사가인데 일제강점기 때 건봉사에서 출가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이후 다시 환속하여 보성고등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문인 겸 작사가로 활동했다. 새겨진 노랫말 고향초는 매우 유명한 노래다.
남쪽나라 바다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사명당 의승병기념관도 들러본다. 이 기념관은 사명당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곳이 바로 건봉사라는 역사적 의의를 살리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영정과 왜장 설복장면, 사명당생가, 사신 활동상을 담은 디오라마 5점이 소장돼 있다. 또한 사명대사관련 고서적 사본 6본, 유물복제품 11점, 교지 4점, 비문탁본 2점, 역사화 12점, 매직비전 1식, 건봉사 모형도 2점 등도 전시돼 있다.
입구에 있는 부도전을 향해 타박타박 걷는다. 늘씬한 소나무들이 붉은 수피와 파아란 솔향기를 자랑하는 기분 좋은 길이다. 부도전에는 수십 기의 부도에 10여기의 비석들이 있다. 아직 일일이 세보지 못했지만 세어본다 하더라도 사진만으로 정확하게 셀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부도들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들이며, 한곳에는 근래에 세워진 부도들이 집중되어 있다.
비석들은 형태나 상태로 볼 때 근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부도들은 석종형 부도와 옥개석이 있는 부도가 적당히 섞여 있다. 이 가운데 제 일 안쪽에 있는 부도군이다.
진입기준으로 보자면 부도전 못미처 좌측에 있는 사명당대사의 동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건봉사를 떠난다.
[인용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건봉사 홈페이지, 전국문화유적총람]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풀빛님 댓글 보고 검색을 해봐도 사진이 올라와 있는 것은 전혀 없네요. 직접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설령 있다고 해도 현재의 건봉사 경내에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풀 빛 감사합니다. 홍예교의 형체는 유지하고 있는지요? 미리 알지 못해 찾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이제 언제나 다시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데요...
@풀 빛 혹 사진이 있으시면 카페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세한 답사기 잘 읽었습니다
한번 더 가야겠네요
나무아미타불 석주 위의 봉황은 혹시 오리 아닐까요? 남부지방의 짐대나 목부비공설화에 따른 오리일 수 없을까요?
공식자료에 그렇게 나와 있어 그대로 옮겼지만 의아하여 물음표를 남겨 놓았습니다. 더 찾아봐야겠지만 역시 봉황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시니브로 오리라 하시니 석주를 기둥 삼은 오리 솟대같은 생각이 ㅎ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어느날 갔더니 조금 황량했죠
다음에 가니 능파교가 태풍에 무너졌고
또 다음에 가니 진신사리 봉안식...그리고 온전한 때 다시 한 번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