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주유성은 멍하니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래도 조 금씩 상태가 나아져서 이제 자기 밥을 떠먹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흐리멍덩햇다. 오늘도 어중근은 그 앞에서 창을 휘둘렀다. 어중근의 여자 친구인 아랫마을 소녀 향미가 주유성의 옆에서 반찬을 빼앗 아 먹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어중근이 향미를 보고 말했다. "향미야, 바보 형 반찬 그만 빼앗아 먹어." 향미가 입을 삐죽였다. "흥! 오빠는 내가 뭘 빼앗아 먹었다고 그래? 그냥 나물이나 조금 집어먹었는 걸." "내가 다 봤다. 반은 네가 먹었어." "핏! 난 이 바보 오빠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내가 바닷가에 서 발견하지 못했으면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나물 조금 먹는 것 정도는 괜찮아. 그 대가로 보면 약소해. 암, 약소하고말 고." 어중근은 그 삐죽거리는 향미가 무척 귀여웠다. 어중근이 향미를 놀리기 위해서 몇 마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 어주문의 대문이 박살나며 넘어갔다. 그 요란한 서슬 에 향미가 비명을 질렀다. "꺄악!" 어중근이 급히 향미와 주유성의 앞으로 다가와 작살을 들 고 외쳤다. "누구냐!" 부서진 대문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그 수가 얼핏 보아도 삼십 명쯤 되었다. 문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다른 어주문 사람들이 우르르 몰 려들었다. 그래 봐야 어현권의 아내와 딸을 포함해서 열 명이 고작이었다. 어현권이 쳐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선 자를 보 고 놀라 소리쳤다. "흡거파 황광태!" 쳐들어온 자는 흡거파라고 하는 사파였다. 문도 수가 고작 오십여 명이었지만 그래도 이 근처에서는 꽤 알려진 사파였 다. 더구나 흡거파는 사황성의 계보 끝 자락에 걸쳐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어현권이 호통을 쳤다. "황광태! 우리 어주문과 너희 흡거파는 원한이 없을 텐데 이게 무슨 짓이냐!" 황광태가 검을 어깨에 걸친 채 짝다리를 짚고 건들거렸다. "흥! 어현권,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아? 혈마님께서 정파무림을 짓밟고 계신 때라고. 이미 혈마님께서는 주변에 걸리적거리는 정파가 보이면 제거하라는 명령을 온 중원의 사파에게 내리신 상태. 특히 무림맹과 관계된 곳을 없애라고 하셨지. 그런 때에 이 황광태, 어찌 가만있을 수가 있어?" 어현권은 바짝 긴장했다. "그래서 우리 어주문을 노리는 것이냐? 내가 무림맹 출신 이라서?" "아, 아. 원래는 이런 코딱지만 한 문파는 별로 관심이 없 었거든. 여기는 먹어도 사실 돈 되는 것이 없잖아." "그런데 왜 쳐들어온 것이냐!" 황광태가 손짓을 했다. 그의 부하들이 의원 하나를 질질 끌 고 나와 마당에 던졌다. 의원이 비명을 질렀다. "어이쿠!" 의원은 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한쪽으로 후다닥 물러섰다. 그리고 어현권을 보고 말했다. "어 문주, 미안하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나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 황광태가 씩 웃었다. "최근에 가까운 지역 정파 하나가 깨졌다고 하더라고. 그 중 몇 놈이 우리 영역에 들어왔을까 싶어서 의원들을 조졌지. 중상을 입은 놈 없냐고. 그랬더니 이 의원이 즉시 여기를 불 더란 말이야. 거의 죽을 정도의 중상이었다며?" 어현권이 이를 갈았다. "으드득! 그래서?" "너희들을 쓸어버리고 그놈을 잡아가야지. 당연히 정파 놈 이니 여기서 숨겨주고 있는 거겠지. 혹시 알아? 거물일지? 정 말 거물이라면 큰 공을 세우는 셈이지." "대인은 평범한 무인이다. 네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괜찮아. 사실 거물이 아니라도 무림맹 무사 나리가 만든 문파를 멸문시키는 거잖아. 그렇게 보고하면 되니까 내가 손 해 볼 건 없어." 어현권은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낭패다. 이놈은 우리를 몰살시킬 생각이다. 하지만 어사 님은 제정신이 아니니 달아날 수 없다. 어사님을 데리고 도망 가 봤자 어차피 붙잡힌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현권이 작살을 들고 황광태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 에 문도들에게 외쳤다. "내가 막는 동안 모두 달아나!" 어현권은 일류무사다. 그의 작살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작살이 황광태의 얼굴을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그러나 황광태는 고수다. 이제 고수의 길에 겨우 발을 들여 놓은 수준이지만 그래도 어현권보다는 훨씬 상수다. "흥!" 황광태가 검을 뽑아 빠르게 휘둘럿다. 그의 검이 어현권의 작살을 잡고 확 걷어냈다. 어현권이 작살을 빙글 돌렸다. 그의 작살이 황광태의 검에 서 빠르게 떨어지더니 다시 허리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쾌속 했다. 황광태는 그 수법에 조금 놀랐다. "헛! 무림맹 출신이라더니 제법이구나!" 그는 즉시 보법을 밟아 작살을 피했다. 그와 함께 방심하지 않고 검법을 제대로 펼쳤다. 어현권은 처음의 공격에서 우세한 상황을 잡았지만 행운 은 계속되지 않았다. 황광태의 검이 게속해서 어현권을 향해 휘둘러졌다. 어현권 은 작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검을 막는 데 온 정신이 다 팔렸다. 반격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투가 길어지자 자연 스럽게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어현권은 이대로 가면 반드시 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각오를 하고 작살을 뻗었다. "죽어라! 황광태!" 그의 작살이 황광태의 가슴을 노렸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대신에 작살의 움직임에 변화가 줄어들었다. 모험을 한 것이다. 일순, 황광태의 눈이 반짝였다. 그가 검을 매섭게 올려 쳤 다. 그 칼날에 어현권의 삼각형 작살 끝이 걸렸다. 검과 작살 이 얽히자 황광태가 용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이야압!" 어현권은 작살을 꽉 쥐고 있었다. 그러나 황광태의 검에 걸 린 작살을 빼낼 수가 없었다. 황광태가 힘을 쓰자 작살이 어 현권의 손에서 거칠게 미끄러졌다. 손바닥이 그 마찰에 버티 지 못하고 찢어졌다. 어현권이 작살을 놓치고 신음을 지르며 한 걸음 물러섰다. "큭!" 어현권은 연이은 충격으로 기혈이 틀어졌음을 느꼈다. 잠 시 자세까지 흐트러졌다. 황광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현권의 실력이 예 상 이상이라 조금 찜찜하던 참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재빨리 일장을 날렸다. 막 작살을 빼앗긴 순간에 연이어 날아온 일장이다. 어현권 은 크게 놀랐다. 그는 급한대로 두 팔을 교차시켜 그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황광태의 일장이 그 위를 타격했다. 어현권은 내력에서도 황광태에게 밀리는데 지금 기혈마저 틀어져 있다. 황광태의 일장이 그의 두 팔을 젖혀 버리고 가슴을 때렸다. 어현권의 가슴에서 작은 폭음이 터졌다. 그의 가슴이 순간 적으로 찌그러 들다가 펴졌다. 황광태의 내력이 어현권의 가 슴속을 진동시켰다. "커억!" 어현권이 입에서 피를 뿜으며 몇 걸음을 더 물러섰다. 온몸 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의 운행이 엉망진창이 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황광태는 어현권이 뿜은 피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승기를 잡은 것을 안 그는 진득하게 웃으며 어현권을 향해 검을 뻗었다. "죽어!" 그러나 황광태는 어현권을 찌르지 못했다. 오히려 곧바로 검을 거두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보법을 후다닥 밟으며 물러 섰다. 황광태의 허리를 노리고 작살 하나가 기습적으로 치고 들 어왔다. 제법 날카로운 그 기운에 놀란 그는 보법으로 끝내지 않고 몸까지 잔뜩 비틀었다. 작살이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리가 따끔했다. 그는 즉시 치고 들어온 기운을 향해 검을 날렸다. 검의 끝에 그 작살이 걸려들었다. 어현권의 아들, 어 중근의 작살이었다. "이 새끼가!" 작살과 검이 얽혀 들었다. 황광태가 다시 힘을 써서 검을 떨쳤다. 이번 작살은 어현권의 때보다 훨씬 수월하게 날아가 버렸다. 장력에 맞은 탓에 몸이 마비된 어현권이 소리쳤다. "중근아! 달아나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중근이 독한 눈빛으로 외쳤다. "아버지 버리고는 못 가요!" 다른 문도들도 작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의 손은 떨리 고 있었지만 물러서는 자는 없었다. 마루 위에서는 주유성이 여전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싸움이 한창인데도 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 젓가락으로 음식 을 집어먹는 중이었다. 지금은 빼앗아 먹는 사람이 없으니 더 잘 먹었다. 무기를 잃은 어중근이 두 주먹을 내밀며 다리를 굽혔다. 권 법으로 상대하려는 생각이었다. 황광태는 창날이 스친 허리가 따끔거렸다. 짜증이 났다. "이 쥐방울만 한 새끼! 죽여 버리겠다!" 황광태의 검이 어중근을 향해 날아갔다. 어중근이 이를 악 물었다. '내 살을 주고 적의 뼈를 깎는다.'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다. 그는 한 칼 맞더라도 물러서지 않 고 공격해서 한 대라도 제대로 때려볼 각오였다. 하지만 그런 수법은 어중근 같은 하수가 쓸 것이 아니다. 실전 경험이라고는 별로 없는 어중근이 자기 실력도 모르고 무리한 수를 쓰려 하고 있었다. 어중근이 두 주먹을 얼굴 높이로 들었다. 고수 황광태가 그 모습을 비웃었다. 그는 어중근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날렸다. 단칼에 죽일 셈이었다. 어현권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어중근은 이를 악물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의 뒤에는 일가족이 있었다. 그는 배운 대로 진각을 밟으며 일권을 내밀 었다. 죽을 각오로 날리는 주먹에는 꽤 강한 힘이 실렸다. 그래 봐야 황광태의 검이 더 빨랐다. 황광태의 검은 벌써 어중근의 심장 어림을 찌르려고 했다. 다음 순간, 어중근의 주먹이 황광태의 배를 정확히 때렸다. "꾸엑!" 황광태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두 걸음이나 물 러섰다. 어중근이 아직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라고 하지만 어려서 부터 내공 수련을 한 몸이다. 그가 죽을 각오로 날린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으니 황광태가 아무리 고수라고 하더라도 그 타격이 적지 않다. 황광태가 배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크으윽. 어, 어떤 새끼... 고인이시오?" 황광태의 검은 어중근을 찌르지 못했다. 조금 전, 어중근을 찌르려던 순간에 그는 방해를 받았다. 뭔가 날아와서 그의 검을 호되게 때렸다. 그 서슬에 검이 뒤 로 휙 밀려났었다. 어중근이 진각을 밟고 주먹을 뻗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황광태는 필승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에 수비를 도외시 했었다. 더구나 검을 타고 온 경력에 충격을 받아 움직임이 둔해졌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고수의 경지에 발끝만 겨우 걸 친 그가 어중근의 주먹을 피할 수 없었다. 황광태는 이제 어중근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 리 주변을 둘러봐도 나서는 자는 없었다. 그 다음에는 재빨리 어주문 사람들을 훑었다. 하지만 어주 문의 문도들 중에 자기 상대가 되는 자는 없어 보였다. 그는 혹시나 해서 주유성을 쳐다보았다. 황광태는 비록 그 초입에 겨우 발을 들여놓은 수준이지만 그래도 고수는 고수다. 주유성의 눈빛만 봐도 얼마나 맛이 간 상태인지 알아볼 수 있다. '저놈은 아니다. 확실히 동태눈깔이군.' 황광태는 눈알을 굴렸다. '누구인지 몰라도 암기의 고수. 하나 보호하려는 것은 이 아이 하나다. 아이의 아비를 공격했을 때는 가만있은 것으로 보아 틀림없겠지. 아니지. 오히려 내가 이 아이만 남기고 다 죽이기를 바라는 걸까? 그럴지도 몰라. 일가족이 없어지면 데려다 제자로 삼기 더 좋을 테니까.' 그는 지극히 사파다운 생각을 했다. 안심한 그는 자신의 목 표물을 확인했다. 주유성이 한 짝 남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콕 콕 찌르고 있었다. '이놈들을 몰살시키면 고수에게 배우게 될 저 꼬맹이가 나 중에 커서 복수한다고 설치겠지. 그래, 어주문 따위 어차피 있으나 없으나 무시하면 그만. 내 목표는 저놈. 지금은 저 바 보 자식만 잡아가자.' 황광태가 소리쳤다. "내 목표는 저 바보 놈 하나다! 다른 놈들은 저항하지 않으 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황광태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들에게 있어 서 주유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어현권은 다르다. 그는 주유성이 무림맹 어사인 줄 로만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구경만 할 줄 아느냐!" 어중근도 외쳤다. "바보 형! 도망쳐!" 주유성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다. 오감은 멀쩡했지만 상 황 판단 능력에 장애가 생겼다. 그에게 요 근래 가장 많이 말을 걸고 눈앞에 자주 보인 사 람이 어중근이다. 그 어중근이 위기에 처하자 주유성은 무의 식중에 젓가락 하나를 날렸다. 당소소의 밥 굶긴다는 협박이 무서워 배워둔 당문의 암기술이었다. 젓가락을 날린 후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흐리멍덩했다. 그 는 하나 남은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려고 애썼다. 젓가락으로 애꿎은 밥만 휘저었다. 황광태가 소리쳤다. "저놈부터 잡아!" 맛이 가 주유성에게 황광태의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어현권은 몸이 마비된 상태고, 어중근은 황광태를 상대하느 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자들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 끼어들지 못했다. 흡거파의 무사 중 하나가 주유성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주유성이 젓가락으로 음식 휘젓기를 그만두었다. 하나 남 은 젓가락을 들어 무사의 손바닥을 콕 찍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젓가락은 손바닥 한가운데를 깊이 파고들었다. "으아악!" 무사가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물러섰다. 팔을 타고 흐르는 고통이 엄청났다.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팔은 어느 새 마비되어 있었다. 다른 무사들은 이 의외의 사태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주유 성은 여전히 멍청해 보였다. 무사들 중 하나가 그 면상에 주 먹을 휘둘렀다. 주유성의 젓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젓가락은 날아오던 주 먹 한가운데 혈을 푹 파고들었다가 즉시 빠져나갔다. 주먹에 서 피가 오줌 줄기처럼 뿜어졌다. "끄아아!" 주먹질을 한 무사 역시 혈을 제대로 당했다. 그 팔은 완전 히 마비됐다. 엄청난 고통이 무사의 정신을 뒤집었다. 무사는 털썩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구경하던 황광태는 엄청나게 놀랐다. 하지만 상황은 간단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그 새끼 얼른 쳐 죽여! 주먹 말고 칼로 치 란 말이다!"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못한 흡거파 무사들이 검을 뽑아 주유성을 쳤다. 날카로운 칼날이 사방에서 주유성을 향해 날 아들었다. 주유성은 어느새 대청마루에서 내려와 있었다. 생각은 없 어도 몸이 반응했다. 그의 몸이 비틀비틀 움직였다. 칼날들이 주유성을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머리 카락 한 올도 건드리는 칼은 없었다. 생각없이 움직이다 보니 사각이 생겼다. 피하기 곤란한 위 치로 칼이 날아왔다. 그 즉시 짧은 젓가락으로 튕겨냈다. 불 쑥불쑥 찔러내는 가벼운 젓가락질에 무사들이 차례차례 뒤로 나동그라졌다. 주유성의 눈은 여전히 흐린 상태였다. 그는 그저 공격받으 니 피하고, 칼이 날아오니 반격할 뿐이다. 칼이 약하게 날아 오면 약하게 찌르고 강하게 날아오면 급소를 찍었다. 그 행동 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그들은 이제 주 유성이 정말 대단한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가 아니라 면 그걸 모를 수가 없다. 흡거파 무사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주유성을 포 위한 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황광태는 일이 완전히 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빛을 흐리게 해서 바보인 척했지만 사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로구나. 그런 자를 건드렸으니 잘못하면 나는 여기 서 죽는다.' 그는 이제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에는 어중근을 인질로 잡을까 생각했다. '인질? 저런 고수 앞에서 인질을 잡는 건 죽으려고 환장한 짓이지. 처음 내 칼을 쳐내던 암기가 어떻게 날아왔는지도 몰 랐단 말이야. 어설프게 인질 잡다가는 내 이마에 저 젓가락이 꽂힌다.' 그는 자기보다 월등한 고수들의 무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그런 자 앞에서 인질을 잡는 건 죽여달라고 사정하 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부하들을 훑어보던 그는 내심 쾌재 를 불렀다. '죽은 부하가 없다. 치명상을 입지도 않았다. 손속에 사정 을 둔다는 뜻. 뭐가 무서워서? 혹시 내 배후가 두려운가? 그 렇구나. 그렇다면 살길이 있지.' 황광태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이보시오! 우리는 이대로 물러나겠소! 고인을 못 알아본 것을 용서하시오!" 주유성은 대답이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황광태는 확실히 하기 위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흡거파는 사황성의 지부요. 혈마께서 내 뒤에 계시 단 말이오!" 그는 이 협박이 충분히 먹혀들 거라고 생각했다. '혈마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엄청난 고수가 우 리들을 죽이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니 혈마님이 나의 방패 다.' 혈마라는 말이 주유성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주유성은 그 말을 듣자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혈마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 에 맴돌며 강한 자극을 주었다. 강렬한 자극을 받은 주유성은 이 동네에서 깨어난 후 처음 으로 '생각'을 시작했다. '혈마? 혈마? 혈마?' 황광태는 주유성의 그 모습을 오해했다. '옳지. 혈마님이 먹힌다.' 그는 얼른 허풍을 쳤다. "그렇소. 혈마께서 내 후견인이시오! 그분께서는 나를 아 주 아끼시지." "혈마? 혈마? 익숙해. 혈마? 지겨워. 혈마?" 뭐든지 시작이 어려운 법이다. 일단 생각이란 것을 시작하 자 머리가 슬슬 움직였다. 생각을 반복하자 주유성의 머릿속 에서 안개가 빠르게 사라졌다. 주유성은 갑자기 번쩍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는 소리 를 버럭 질렀다. "혈마! 혈마 그 개새끼! 뼈까지 갈아 마셔 버릴 새끼!" 주유성의 정신이 급속도로 돌아왔다. 이지를 상실했던 눈 은 순식간에 예전처럼 맑아졌다. 주유성이 갑자기 가슴을 잡았다. 수라쌍검에게 관통상을 입은 상처였다. "아이고, 가슴이야. 이거 더럽게 아프네. 다 나으려면 무진 장 오래 걸리겠다. 쌍칼 그 새끼도 아주 죽었어." 황광태는 잔뜩 놀라 버렸다. '이자가 감히 혈마님의 욕을 해? 혈마님이 두려운 것이 아 닌가?' 그는 겁이 와락 났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어중근이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바보 형! 정신이 들어?" 주유성이 어중근을 보고 씩 웃었다. "야 임마, 나 바보 아냐. 내가 이래 봬도 어렸을 때는 신동 소리 듣던 놈이야." 황광태는 더 이상 어중근을 상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럴 여 유가 없었다. 압박이 사라진 어중근이 '대단한 무공 실력을 보인' 바보 형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어중근은 주유성의 실력에 크게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바보 형이 원래는 꽤 고수라는 말을 들었었다. 이렇게 적당한 때에 정신을 찾아주니 정말 신이 났 다.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바보 형, 꽤 센데?" 주유성은 그동안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워낙 큰 충 격으로 인해 생각이란 것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제 정신이 돌아와 그동안의 기억이 한순간에 파도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모든 상황 판단이 단숨에 끝났다. 주유성이 어중근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이제부터는 이 형한테 맡겨. 미래의 천하제일창." 그리고는 황광태를 보고 낮게 웃었다. "흐흐흐. 나 주유성, 받은 건 확실히 돌려주거든." 그가 이름을 밝히는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뒤집어졌다. "허억! 주유성!" 특히 황광태가 사색이 됐다.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주유성 이란 이름을 가진 대단한 고수는 단 한 명뿐이다. "서, 설마 당신이 칠절사신 주유성? 말도 안 돼. 거짓말이 다! 믿을 수 없다!" 새로운 별호는 주유성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만들어진 것 이다. 당연히 주유성으로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잉? 그 사이에 일절이 또 늘었어? 그런데 왜 이번에는 서생 이 아니고 사신이야?" 이제 어느 정도 운신이 가능해진 어현권이 급히 자기 품속 을 뒤졌다. 그리고는 무림맹 어사패를 높이 들고 소리쳤다. "맞다! 칠절사시은 무림맹 어사라고 들었다! 이것이 바로 무림맹 어사패! 저분은 칠절사신 주유성이 틀림없다!" 주유성이 사황성의 천라지망에 빠져들었을 때 죽인사파 무사 의 수가 무려 일천이다. 그러느라 기력이 다 빠진 상태에서 그는 마교의 그 무섭다는 탈명수라대와 대등한 대결을 벌였 다. 그것만 해도 이미 인간의 전투력이 아니다. 그 사건의 목격자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유 성이 조금만 덜 지쳤었으면 패배하는 것은 탈명수라대가 됐 을 거라는 소문을 냈다. 당연히 그의 무공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성 이마까지는 아니겠지만 혹시 그 아래 십이왕에 버금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떠돌았다. 십이왕에 칠절사신 주유성을 끼워 넣어 십삼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왔다. 물론 그건 주장으로 끝났다. 그동안은 죽은 자로 취급되어 실제로 그런 서열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어쨌든 주유성은 죽었다고 알려진 후에도 엄청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황광태가 오줌을 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사, 사신이, 사신이 왜 여기에......" 주유성이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뚜둑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 다. 그가 주먹으로 자기 손바닥에 탁탁 치며 황광태 쪽으로 걸 어갔다. 주유성은 너무 신이 나서 죽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질 문했다. "히히히. 그런데 혈마 그 새끼가 니 후견인이라고?" 그날, 산동성 구석의 자잘한 사파 중 하나인 흡거파가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깨끗이 멸문했다. * * * 주가장 무사들은 서현의 수준 높은 음식 맛에 길들여져 있 다. 그런 그들이 단체 급식하는 무림맹 식당 밥을 맛있게 느 낄 리가 없다. "우리가 죽을 각오를 하고 무림맹에 왔는데 어째 나오는 밥이 이따위냐?" "무림맹 무사들은 지금까지 이런 돼지죽을 먹고 싸운 거 야? 상당히 불쌍한 인생들이네." 그들이 투덜거리자 밍밍이 나서서 말했다. "그럼 꼬치라도 먹을래요?" "꼬치? 네 꼬치라면 우리야 대환영이지." "알았어요. 주방이라도 하나 빌려다 주면 내가 꼬치라도 좀 구워줄게요." 주가장은 무림맹에 군자금으로 아주 큰 돈을 기부했다. 또 한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무림맹 은 그 대가로 여러 가지 편의를 보아주었다. 작은 식당 하나 주가장 전용으로 얻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후부터 주가장 백여 명의 식사는 밍밍이 맡았다. 비록 꼬치구이가 전문 분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현 시장판에서 음식 장사로 살아남은 그녀다 기본적인 요리 정도는 얼마든 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요리에는 사소한 결함이 있었다. 대부분의 반찬을 꼬치구이가 채운다는 것이 그녀의 문제 였다. 그녀는 독특한 양념으로 만든 꼬치구이를 반찬의 기본 구 성으로 삼았다. 거기에 꼬치구이 양념으로 만든 고기볶음이 나 꼬치구이 양념을 섞은 야채, 꼬치구이 다진 것을 속에 넣 은 만두 등이 나머지를 채웠다. 보통 이 정도면 불만이 튀어나와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불 만을 말하지 않았다. 밍밍의 꼬치구이 맛은 역시 일품이었다. 나머지 음식들도 꽤 맛이 좋았다. 오히려 주가장 사람들에게 인기 폭발이었다. "역시 밍밍이 꼬치구이야." "아, 이걸 먹다 보니 서현 시장 음식이 자꾸 생각난다." 그 음식 맛이 소문나자 무림맹 사람들이 그 식당에서 밥 한 끼 얻어먹어 보려고 자주 기웃거렸다. 초반에는 주로 무림맹 간부나 명문대파의 고수들이 소문 을 듣고 식당에 찾아왔다. 그중에는 제갈세가 사람도 있었다. 제갈세가의 제갈고원이 뒷짐을 지고 식당에 나타났다. 그 를 따르는 수행원 몇 명이 얼른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은 밥 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 "눈치가 있으면 그만 처먹고 비켜라! 제갈세가의 제갈고원 님께서 오셨단 말이다!" 그들이 쫓아내려는 사람들은 주가장의 무사들이다. 그들 이 발끈했다. "이곳은 우리 밥 먹는 식당인데 왜 제갈세가에서 찾아와서 난리야?" "뭣이? 이놈들이 미쳤나? 제갈고원님께서 오셨다니까!" 어쨌든 무림은 힘 센 놈이 장땡이다. 무사들이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제갈고원은 탁자가 깨끗이 비워지자 거만을 잔뜩 떨며 앉 았다. "에헴. 이곳이 음식맛이 그렇게 좋다며?" 수행원 하나가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꼬치를 가지고 만드는 요리들인데 그 맛이 무림맹 식당답지 않게 아주 일품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디 종류별로 좀 가져오너라." "예." 수행원이 주방을 향해 호통을 쳤다. "어서 종류별로 요리를 가져오지 못하고 뭐 하느냐? 혹시 서두르다가 음식에 든 정성이 부족하다면 크게 혼날 줄 알아 라!" 주방에서 꼬치를 굽던 밍밍이 그 호통 소리에 발끈했다. 그 녀는 꼬치를 집어 던지고 주방에서 걸어나아서 앙칼진 목소 리로 따졌다. "왜 남의 식당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큰 소리예요?" 수행원이 놀라 외쳤다. "어허, 이년이! 감히 뉘 앞이라고. 이분은 제갈고원님이시 다. 제갈세가에서 유명한 고수시란 말이다. 꼬치나 굽는 주제 에 네가 죽고 싶은 것이냐?" 밍밍도 한성질 한다. 하지만 명문세가의 고수가 왔다는 말 에 성질대로 터뜨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밍밍을 보는 제갈고원의 눈빛이 변했다. "호오, 저 아이 미색이 대단하구나. 너, 이리 좀 와보거라." 수행원이 얼른 따라 말했다. "어른이 오라고 하시는데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느냐?" 밍밍은 조금만 더 참기로 했다. 그녀가 주먹을 꼭 쥐며 제 갈고원 쪽으로 다가왔다. 제갈고원이 밍밍의 몸매을 쭉 훑어보고 그 얼굴도 감상한 뒤 혓바닥으로 자기 입술을 핥았다. "이거 명품이로구나. 이런 곳에서 음식이나 할 아이로 보 이지 않는군. 사연이 있는 것이냐?" "흥! 사연은 무슨 사연요. 전 그냥 꼬치구이 전문이네요." "하하, 톡톡 쏘는 맛이 제법인 아이로구나. 그렇지. 미녀는 좀 쏴주는 맛이 있어야지. 좋다. 네 음식 솜씨가 좋다고 하니 내가 너를 특별히 제갈세가로 데려가 주마. 명문세가인 우리 제갈세가로 가는 것이 무림맹 식당에 있는 것보다 너에게 훨 씬 이익일 것이다." 밍밍으로서는 조금도 고맙지 않은 소리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녀석, 부끄러워하는구나. 그러지 말고 이리 오너라. 내 말 만 잘 들으면 앞으로 편안하게 해주마." 제갈고원이 밍밍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밍밍의 안색이 확 변했다. 하지만 무공을 모르는 그녀가 제갈고원의 손을 피 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당소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누구야? 고원이 아냐?" 제갈고원의 몸이 굳었다. 그는 소리 들린 방향을 천천히 돌 아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다, 당소소? 다, 당신이 왜 여기......" 당소소가 다가오며 씩 웃었다. "여기가 우리 집 식당이니 당연히 밥 먹으러 왔지." 제갈고원이 땀을 조금 흘리기 시작했다. 그가 수행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혹시 하남 서현의 그 주가장에 서 차지한 식당이냐?" 수행원이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이, 이놈아, 여기가 무림맹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이라며?" "여기가 제일 맛이 좋습니다만?" 제갈고원은 자세히 묻지 않고 찾아온 자기 실수를 탓했다. 그는 얼른 당소소에게 포권을 했다. "당 여협, 오랜만이라 반갑기는 하지만 제가 바쁜 일이 있 어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당소소가 손을 흔들어 그를 말렸다. "아니야. 그래도 찾아왔는데 밥이나 먹고 가." "저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 당소소가 예쁘게 웃었다. "감히 내가 준다는 밥을 거절해?" 제갈고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머, 먹겠습니다." 당소소는 밍밍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밍밍아, 꼬치 태워먹어서 버리는 거 있니?" 잠시 후 당소소가 직접 꼬치 요리 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제갈고원의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남기지 마라." 제갈고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꼬치의 고기 하나를 빼 먹었다.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헛, 맛있습니다." 좀 탔지만 그래도 맛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내심 불안했 다. 사천나찰 당소소가 내놓은 것을 혼자 다 먹자니 아무래도 찜찜해서 급히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어서 먹어라." 수행원들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꼬치 가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고원이 요구하니 안 먹을 수도 없었다. 요리 그릇은 빠르게 비워졌다. 마침내 그릇을 비운 제갈고 원이 당소소에게 다시 포권을 했다. "음식도 다 먹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당소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속 괜찮아?" "속이요?" 제갈고원이 생각해 보니 속이 슬슬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부하들은 이미 얼굴에서 땀을 뻘 뻘 흘리고 있었다. "매, 매운 꼬치였습니다." 당소소가 제갈고원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호호호. 오랜만에 봤더니 무공이 꽤 늘었구나. 단장산을 처먹고도 멀쩡한 걸 보니까." 제갈고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부하들도 마찬 가지였다. "허억! 단장산!" "괜찮아. 죽지 않을 만큼만 썼어. 음, 양 조절에 실패했을 지 모르니까 무림맹 의원 찾아다가 해약이라도 먹어. 방심하 다가 창자 진짜로 끊어지면 어떻게 해?" 제갈고원은 슬슬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독의 약효가 본 격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무공이 더 약한 그의 부하들은 이 미 창백해져서 덜덜 떨고 있었다. 당소소가 한마디 덧붙였다. "역시 너무 많이 넣었나? 서두르지 않으면 해약도 안 들을 거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갈고원과 그 부하들은 허둥 지둥 식당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에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 렸다. "크아악! 내 창자가 끊어진다!" 한때 사천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사천나찰 당소소가 직 접 독을 탔으니 분량 조절에 실패할 리가 없다. 제갈고원은 속이 뒤집어져서 한동안 개고생을 했다. 공력이 낮은 자들은 똥오줌을 못 가렸다. 힘없는 곳에서 제갈고원쯤 되는 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면 보복을 받아 다 박살나고도 남는다. 그러나 주가장은 사황성 음혈진격대를 몰살시킬 정도로 자체 무력이 강하고, 거기에 더해서 무림맹에 거금을 기부했 다. 앞으로도 돈을 더 내놓기로 했다. 배경으로 당문이 버티 고 있다. 특히 주가장은 칠절사신 주유성의 본가로 유명하다. 거기 서 함부로 굴었으니 제갈세가에서는 보복은 고사하고 사과를 해야 할 판이다. 그 이후로 주가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감히 그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지 못했다. 적어도 취걸개쯤 돼야 안심 하고 밥을 먹었다. 주가장은 무림과 별 친분이 없다. 당문의 사람들이야 친분 이 차고 넘치도록 있지만 독왕의 딸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식당에 함부로 밥 내놓으라고 찾아갈 사람은 몇 명 없다. 당 연히 찾아오는 외부 인사도 별로 없다. 남궁서천은 그나마 주가장과 손톱만큼의 친분이 있다. 더 구나 그의 여동생인 남궁서린은 요새 당소소 옆에서 맴돈다. 그는 그 핑계로 주가장 전용 식당에서 삼시 세끼를 모조리 얻어먹었다. 남궁서천이 탁자에 앉아 있자 밍밍이 꼬치구이를 포함한 음식 몇 가지를 내놓았다. 다년간 장사로 단련된 밍밍이 영업 용 미소를 지었다. "남궁 공자께서는 자주 오시네요." 그 표정을 본 남궁서천이 환히 웃었다. "밍밍 소저의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요. 하하하." 밍밍이 여전히 환히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마음은 달랐 다. '내가 네 녀석 밥까지 해야겠냐? 어디서 이런 식충이가 굴 러들어 와서 일거리만 늘려놓는 거야? 쳇! 돈도 되지 않는 거 지 같으니라고. 제발 그만 좀 와라.' 이 식당이 유료로 운영되는 곳이라면 밍밍은 정말로 남궁 서천을 반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주가장 전용 식당. 몇 그릇을 추가로 만들더라도 들어오는 수입은 한 푼도 없다. 주가장 사람들을 위한 밥이라면 모를까 이런 외부인들은 조 금도 반갑지 않다. 음식을 내려놓고 돌아가던 밍밍이 엉뚱하게 주가장 무사 정사석을 보고 짜증을 냈다. "아저씨! 꼬치로 이 쑤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거 또 쓸 거란 말예욧!" 남궁서천은 그런 밍밍을 보며 꼬치를 먹었다. 고기가 입에 서 살살 녹았다. '흐, 귀여워라.' 그는 처음에는 정말 밥만 먹으러 이 식당을 찾았다. 그러나 연일 식당을 찾다 보니 그의 눈에 밍밍이 들어왔다. 밍밍은 일단 미모가 남부럽지 않다. 서현 아가씨들이 주유 성을 포기하게 만든 미모다. 거기에 치열한 서현 시장에서 장 사로 단련된 덕분에 정말 포근한 영업용 미소를 지을 줄 안 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 역시 남궁서천의 취향과 딱 맞았다. '저 시원한 성격이 너무 좋구나.' 밍밍이 왜 무림맹까지 따라왔는지 꿈에도 모르는 남궁서천 은 혼자 미래를 꿈꾸며 꼬치를 먹었다. '아이는 셋이면 될까? 난 많을수록 좋은데.' 오늘따라 꼬치가 더 맛있었다. 검옥월의 손에는 항상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녀는 피가 흐 르는 손을 붕대로 단단히 감은 채 검을 휘두르기를 멈추지 않 았다. 지나친 수련으로 찢어진 손바닥은 아물 틈이 없었다. 붕대를 아무리 단단히 묶어도 피는 계속 배어 나왔다. 혈도를 짚어서 지혈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무공 수련에 방 해가 되는 점혈을 하지 않았다. 검옥월의 외모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눈매가 변한 후 그녀의 감춰진 아름다움이 완전히 드러났다. 절색이 라는 말로 부족한 그녀의 외모에 더해서 고절한 무공은 여러 무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 그녀의 미모는 신녀문의 천영영과 비교되고 있었다. 천영영과 함께 무림맹의 쌍화라고까지 불렸다. 깜순이라고 불리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당연히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 사방에 굴러다녔다. 그러나 천영영의 경우와 달리 그 남자들은 검옥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 못했다. 검옥월은 접근하는 모든 남자들을 비무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에게 남자는 무공을 높여주는 비무 상대일 뿐이다. 쫓아 다니는 남자가 있으면 무조건 시비를 걸어서 싸움을 했다. 그리고 검옥월에게 흑심을 품을 만한 연령층의 남자들 중 에서 그녀의 상대가 되는 무공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비문파 검각에서도 동년배를 넘어 윗대와 겨룰 정도의 무 공을 가진 검옥월이다. 여자 외무에 혹해서 쫓아다니는 남자 들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녀의 비무 상대가 됐다가 비참하게 패배한 남자가 스물 을 넘어가면서부터 아무도 쉽게 접근하지 않았다. 가끔 멋모 르고 다가가는 자들은 예외없이 그녀에게 박살났다. 사람들은 이제 그녀와 거리를 두면서 훔쳐보는 것으로 만 족했다. 그녀에게는 무림명까지 생겼다. "흑장미 검옥월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가시가 너무 따가 워." "괜히 장미가 아니지. 가시가 있어서 장미라고." "그러게 말이야. 꽃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꺾을 방법이 없으니 원." "우리 같은 보통 무인들은 이렇게 구경이나 하는 수밖에 더 있나?" 다른 사람들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사이, 추 월이 그녀를 곧잘 찾아와서 피 묻은 붕대를 갈아주었다. "검 아가씨, 너무 무리하지 마요." 검옥월이 이를 오도독 갈았다. "혈마와 천마를 꺾을 무공을 얻을 때까지 수련을 멈출 수 는 없어. 내 평생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복수를 하겠어." "검 아가씨, 혼자 힘으로는 무리예요. 그들은 무공 말고도 사황성과 마교라는 힘이 있어요." 검옥월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힘? 그래, 힘이 필요해. 그럼 내가 검각 각주가 되겠어." 검의 완성을 목표로 삼는다고 하는 검각은 마교를 치가 떨 릴 정도로 싫어한다. 무림에 떠도는 소문에는 그들이 신비문 파가 된 이유가 마교의 발호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것까지 있다. 무론 그런 것은 단지 흔한 소문 중 하나일 뿐이지만, 그렇 게 소문날 정도로 검각은 마교를 싫어한다. 아주 당연하게도, 정사대전에 마교가 개입된 시점에서 검 각의 참여는 자동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검각 혼자서 마교를 상대할 수는 없다. 검각이 아무 리 비밀에 싸인 신비문파라고 하지만 마교는 단일문파로는 사상 최강인 조직이다. 마교라는 하나의 문파가 무림맹이나 사황성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그들의 힘은 강하다.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또 그 외의 여러 정파가 견제 를 당하는 동안 신비문파 검각은 정예 무사들을 무림맹으로 파견 보냈다. 무림맹주 검성 독고진천이 환히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허허허. 어서 오시오. 이거 같은 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방문이 무척 반갑습니다." 검각 사람들은 독고진천을 극복 대상으로 여긴다. 검에 모 든 것을 바치는 자기들 중에서는 검성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 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중원무림에서 검성이 나왔다. 그 사실 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도 검성의 무공을 얕잡아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검성 의 검의 경지를 부러워한다고 하는 거이 옳다. 그들을 이끌고 온 사람은 검각의 장로인 이화월백검 백소 란이다. 무공이 검각의 각주 못지않다고 알려진 대단한 고수 이며 검옥월의 사부다. 백소란이 가볍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백 소저는 아직도 정말 아름다우시오." 검성은 백소란을 예전에 충분히 겪어보았다. 백소란은 젊 었을 때 무림맹에서 활동했으며, 그 당시에도 검성은 무림맹 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검성이 기억하는 백소란은 아름답다고 말해주면 무조건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백소란의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으로 입 을 살짝 가리며 말했다. "아이, 참. 그나저나 검성께서도 여전히 듬직하시네요. 모 르는 사람이 보면 아직 장가도 가지 않은 총각인 줄 알겠어 요. 새장가는 계획 없으세요?" 철없는 그 대답에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검성 은 나이가 팔십이다. 무공이 너무 높아 아직 중년 끄트러미 정도로 보이기는 하다. 하지만 총각이라는 말은 얼토당토않 다. 더구나 새장가라는 말에 검성마저도 당황했다. 무림맹 주나 검성 어느 신분을 생각해도 그런 말은 예의에 어긋난 다. 이화월백검과 같이 온 다른 장로가 급히 말했다. "더 많은 문도를 데려오지 못해 아쉽습니다." 검성도 사태를 무마하느라 즉시 답했다. "오백이 적다니요. 검각의 무사들은 정예 아닌 자가 없다 고 알고 있소이다. 오백이면 충분하지요." 그의 말은 사실이다. 검각은 무사의 실력이 부족하면 아예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지금은 워낙 비상사태라 그 기준 을 많이 낮추기는 했지만 오백여 명은 모두 날고 기는 실력을 가진 무사들이다. 검옥월이 자기 사부인 백소란과 마주 앉았다. 백소란의 얼굴에는 안쓰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검 옥월의 손만 보고도 그녀가 어떤 수련을 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이 예뻐졌구나." 처음에는 몰라볼 뻔했다. 검옥월은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얻었다. 그러나 검옥월은 냉랭했다. "얼굴은 검법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옥월아, 그래도 여자는 미모가 좀 받쳐 주는 편이 여러모 로......" 검옥월이 말을 끊었다. "사부님, 부탁이 있어요." "말해보거라. 내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마." 검옥월이 또박또박 말했다. "각주가 되고 싶어요." 백소란은 검옥월을 안다. 결혼한 적이 없는 백소란은 검 옥월을 어려서부터 딸처럼 키웠다. 그래서 검옥월이 검각의 각주 자리 같은 것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없던 여자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검옥월은 변했다. 백소란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칠절사신 주유성 때문이니?"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검옥월의 목적이 뭐인지는 그녀에게 훤히 보인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내가 너를 이곳에 보낸 덕분에 너무 심한 번뇌에 빠졌구 나. 그런데 알고 있니? 각주 경쟁은 누구나 시작할 수는 있단 다. 하지만 아무도 마음대로 끝낼 수는 없지." "잘 알고 있어요." "네가 각주가 되기 위한 경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다 시는 그만둘 수 없다. 경쟁을 시작하면 너를 지지하는 사람 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네 편을 선언한 후 에 네가 포기하면 어떻게 되겠니? 너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다음 각주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번 경우에는 지금 각주의 눈 밖에도 나지. 지금 가장 유력한 후보는 각주의 딸이니까." "그것도 알고 있어요." "일단 각주 경쟁을 하면 반드시 이겨야 한단다. 물론 옥월 이 너는 가장 각주가 될 가능성이 높은 아이. 아마 몇 년 내에 네가 후계자로 결정되고, 이삼십 년 뒤에는 틀림없이 각주가 되겠지. 하지만 각주가 결혼을 하려면 반드시 데릴사위를 들 여야 해. 외부로 시집간다는 건 각주가 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래도 좋으니?" 검옥월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전, 결혼 같은 거 하지 않을래요." 백소란이 그녀를 보다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휴우. 칠절사신 주유성이 네 마음에 그리 크게 자리 잡았 었니?" 검옥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소란은 자기가 키운 검옥월의 눈빛에서 모든 대답을 읽을 수 있었다. 백소란이 마침내 결정했다. "그래, 이 사부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마. 각에 연락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마. 네가 다음 대 각주 경쟁을 선언한다면 지지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거야." |
첫댓글 즐독입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