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잡혀가는 시지(詩誌) - 동인지 / 김수영
- 1966년 2월 시평
이달의 시단의 특기할 만한 일은 시지 <현대시학(現代詩學)>이 새로 나왔다는 것과 동신지 <신춘시(新春詩)>가 뜻밖에도 정진하는 뚜렷한 흔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현대시학>은 편집 솜씨나 체재상으로는 신선미를 풍겨보려는 노력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내용면으로 별로 이렇다 할 만한 참신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 앞으로는 좀더 동인지 중에서 실력 있는 필자를 발굴해 내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고 기성인과 신인의 배합을 반반 정도로 해서 시지로서의 전진하는 비전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이번 호에 게재된 작품만 하더라도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근 열 명이 전부 기성인이고, 이 기성인들 중에서도 작품이라고 내세울 수 있을 만한 것은, 미안하지만 김광섭, 서정주, 박목월의 소위 구세대인의 작품뿐이다.
이에 비하면 <신춘시>는 실속에 있어서 확실히 전진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권일송의 <볼리비아의 기수(旗手)>를 위시해서 조태일의 <나의 처녀막>과 황명, 강인섭, 이근배, 신세훈 등의 여러 작품이 문학지나 종합지를 능가하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동인지의 발전을 위해서 지극히 반가운 일이다.
특히 권일송의 <도쿄 올림픽의 이시카와 다쓰조 씨에게> 부친 인류의 미래상을 노래한 과감한 시 <볼리비아 기수>는, 평자로서는 이러한 때묻지 않은 진정한 시의 제시를 무엇이라고 격찬해야 좋을지 격찬할 말을 모르겠다. 이런 시를 앞에 놓고는 시의 기교문제 같은 것은 정말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당신은 그때,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들며 모여 사는
나라와 세계가 무엇이며
그것들을 다 털어도 메꾸어지지 않을
깊은 고독이란 것을,
7만 5천 개의 가슴을 한데 묶어도
채워지지 않을 그 거대하고
장엄한 고독을 위해 ---.
당신은 조용히 울고 있었다.
이 구절에서 보이듯이 군데군데 어색한 듯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흠점은 이 시가 주는 전체적인 감동에 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 시정신 만세!
박목월의 작품은 <흰 장갑>(현대시학)과 <무제(無題)>(세대)가 둘 다 종전의 그의 작품에 비해서 현대적 현실의 구심점을 향해서 한걸음 더 가까이 접근해 보려는 탐색의 노력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흰 장갑>보다도 비교적 끝머리가 무난하게 맺어진 <무제>도 <노끈으로 질끈 포박된 채 / 네거리를 매달려 가고> 있는 <이글거리는 눈>의 잉어가 <푸줏간이 즐비한 / 네거리를 / 푸줏간마다 푸들푸들 떨리는 / 무수한 고깃덩이가 / 쇠갈고리에 즐비하게 걸리고 / 어느 갈고리는 비었는데 / ---- / 돈으로 호가(呼價)되었다>의 비평적 정의(定義)의 귀결이 역시 약해 보인다. 이런 약점은 김광섭의 <서울 크리스마스>(현대시학)에서도 노정(露呈)되어 있다. 이런 작품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 비평적 지성을 시에서 발동시킬 때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공룡 같은 현대의 매머드 문명은 가까이 머리를 디밀면 디밀수록 점점 더 보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여기에 여간한 신념이 없이는 그에 대한 개괄적인 정의나 귀결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다시 말하자면 이런 스탠자를 취한 작품의 경우에는 정의나 귀결을 작자가 <내리지> 말고 독자로 하여금 <얻게 하는> 편이 대체로 안전하다). <무제>의 <돈>의 역설이나 <서울 크리스마스>의 <발 벗은 거지가 끌고 세계의 아침으로 가>는 <예수의 헛 짚세기 한 컬레>의 리뎀프션이 상식과 관념의 귀결 같은 정화된 인상을 주는 것은 그 점에 대한 극복이 약한 데서 오는 거라고 생각된다.
이밖에 인상 깊은 작품으로는 이일기의 <눈에 관한 각서>(현대문학)와 이성교의 <해협>(신동아)을 들 수 있다. <해협>은 특히 잘 정리된 산뜻한 인상을 준다.
평자는 요즘 미국의 평론가 스티븐 마커스의 <오늘의 소설>이란 논문을 번역하면서 오늘날 우리의 시단의젊은 세대들의 작품이 유별나게 심미적 내지 기교적으로 흐르는 원인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재미 있는 시사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달의 작품만 보더라도 자기의 체질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심미적으로 흐르는 사람으로, 이를테면 김요섭의 <각서>(현대시학) 같은 작품을 보면 도무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런 하이칼라한 오코너머스한 경향은 요섭의 본질이 아니다. 변모가 어디까지나 자기의 본질의 발전체라야 된다는 기본 명제를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