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전령 Los heraldos negros
날렵한 천장 PLAFONES ÁGILES
성스럽게 낙엽이 지다 Deshojación sagrada
영성체 Comunión
고뇌의 발작 Nervazón de angustia
차가운 뱃전 Bordas de hielo
성탄 전야 Nochebuena
불씨 Ascuas
희미한 빛 Medialuz
버드나무 Sauce
부재하는 사람 Ausente
타조 Avestruz
미루나무 아래서 Bajo los álamos
잠수부들 BUZOS
거미 La araña
바벨 Babel
순례 Romería
좁은 관람석 El palco estrecho
대지에서 DE LA TIERRA
…………?
시인이 연인에게 El poeta a su amada
여름 Verano
9월 Setiembre
앙금 Heces
불경한 여인 Impía
검은 잔 La copa negra
어긋난 시간 Deshora
프레스코화 Fresco
석고 Yeso
제국의 향수 NOSTALGIAS IMPERIALES
제국의 향수 Nostalgias imperiales
흑단 잎사귀 Hojas de ébano
세 편의 선주민 연작시 Terceto autóctono
길의 기도 Oración del camino
우아코 Huaco
5월 Mayo
마을 풍경 Aldeana
가 버린 시절 Idilio muerto
우렛소리 TRUENOS
그리스 막사에서 En las tiendas griegas
아가페 Ágape
거울의 목소리 La voz del espejo
백장미 Rosa blanca
대박 복권 La de a mil
일용할 양식 El pan nuestro
절대적인 존재 Absoluta
진흙 알몸 Desnudo en barro
투항 Capitulación
줄 Líneas
금지된 사랑 Amor prohibido
비참한 저녁 식사 La cena miserable
내 연인의 불가능한 영혼을 위하여 Para el alma imposible de mi amada
영원한 첫날밤 El tálamo eterno
돌들 Las piedras
레타블로 Retablo
이교도 여인 Pagana
영원한 주사위 Los dados eternos
지친 반지 Los anillos fatigados
성인 열전(단락) Santoral(Parágrafos)
비 Lluvia
사랑 Amor
하느님 Dios
하나됨 Unidad
노새꾼 Los arrieros
집의 노래 CANCIONES DE HOGAR
열병의 레이스 Encaje de fiebre
아득한 발소리 Los pasos lejanos
미겔 형에게 A mi hermano Miguel
1월의 노래 Enereida
첨언 Espergesia
주(註)
작가 연보
작품에 대하여: 세사르 바예호(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옮긴이의 글: 그의 시는 언제나 인간을 향한다
●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언어를 새롭게 창조해 낸 서정시인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세사르 바예호의 대표 시집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가 ‘세계시인선’ 52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 저널리스트였던 바예호는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와 더불어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단을 대표한다. 바예호는 토착적 언어 사용으로 ‘선주민 정서(sentimiento indígena)’를 구현한 인종과 혈통의 시인이라고 평가받는다. 바예호의 시 근저에는 인디오의 어조가 있으며, 인디오 특유의 목가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상징성들도 함께 비친다.
농부의 주먹은 비단결처럼 부드러워지고,
입술마다 십자 모양으로 윤곽이 그려진다.
축제일이다! 쟁기의 율동 날아오르고
워낭은 하나하나 청동의 합창 지휘자.
투박한 것은 날이 서고, 허리춤의 전대(纏帶)는 말을
한다……
인디오의 핏줄에서 반짝인다,
눈동자를 통해 태양의 향수(鄕愁)로
걸러지는 핏빛 야라비.
―「세 편의 선주민 연작시」,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에서
하지만 바예호의 시들은 결코 지역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바예호의 선주민 정서는 의도된 언어의 배치가 아니라 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토착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발생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진정성 있는 라틴아메리카 어법을 구사한다. 바예호의 시에는 상징이나 전원적 이미지로 감정을 표현하는 인디오 특유의 상징주의적 요소 외에도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요소들이 풍부하게 구현된다. 바예호 시의 고유성은 시인이 자신의 서정을 그려냄에 있어 라틴아메리카 시 세계의 언어를 새로이 창조했다는 점에 있다.
● 개인의 고통에서 타인의 고통으로 확장되는 시적 보편성
바예호의 시들은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닮았다. 바예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여러 차례 중단하고 생업에 종사해야 했으며, 20대 후반에는 정치적 소요에 휘말려 투옥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평생을 파리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는 바예호의 첫 시집으로 삶의 고통과 좌절, 실존의 그늘을 토로한다. 이렇듯 굴곡진 삶은 그의 시에도 반영되어 작품 전반에 우울하고 어두운 정서가 깔려 있다.
사노라면 겪는 고통, 너무나 지독한…… 모르겠어!
신의 증오 같은 고통. 그 앞에선 가슴 아린
지난날이 밀물이 되어 온통
영혼에 고이는 듯…… 모르겠어!
―「검은 전령」,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에서
평생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았던 시인은 “사노라면 겪는 고통, 너무나 지독한…… 모르겠어!”라며 삶에 대한 좌절감과 염세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나르시시즘적인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고통에 비추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타인의 고단한 삶에 대한 책임감을 고백하기도 한다.
내 몸의 뼈는 죄다 타인의 것.
아마도 내가 훔쳤겠지!
어쩌면 다른 사람 몫을
가로챘는지도 몰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다른 가난한 이가 이 커피를 마시련만!
난 몹쓸 도둑…… 어찌할 거나!
―「일용할 양식」,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에서
시인의 사랑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넘어 신성(神性)에까지 미친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을 바라보는 신 역시 창조주로서 탄식하며 마음 아파할 것을 짐작하여 시에 녹여냈다. 바예호는 사회의 부조리와 고통을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의 차원까지 확장한 시인이었다.
당신은, 얼마나 탄식하실지…… 빙빙 도는
그 거대한 가슴과 사랑에 빠지신 당신은……
하느님,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그토록 큰 사랑 주시니,
결코 미소 짓는 법 없으시니, 언제나
찢어질 듯 가슴 아프시리니.
―「하느님」,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에서
● 체 게바라의 배낭에서 나온 시집
체 게바라가 청춘기에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한 과정을 그린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에는 체 게바라가 사랑했던 시집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세사르 바예호의 작품이다. 실제로도 1967년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체포되었을 당시 그가 평소 메고 다니던 배낭 속에는 네루다,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 시 69편이 필사된 녹색 노트가 있었다고 한다.
바예호는 1936년 스페인내전 발발 당시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스페인 수호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그의 시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잃지 않았다. 바예호의 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래서 바예호의 시는 혁명가가 힘의 논리에만 휘둘리지 않고 휴머니스트로서 남아 있도록 잡아 준다.
한 병사, 견장에 상처 입은
위대한 병사,
비장한 오후에 활기를 띠고,
웃음소리 사이로,
발아래에 흉측한 헝겊 같은
삶의 뇌를 내보인다.
우리는 함께 걸어간다, 꼭 붙어서,
불굴의 빛, 병자의 걸음걸이로,
우리는 함께 묘지의 겨자색
라일락 옆을 지난다.
―「순례」,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에서
조금밖에 죽지 않은 오후 | 민음사 (minum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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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5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서가명강]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5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 YouTube
서가명강]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6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서가명강]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6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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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기본적인 송가
원제 ODAS ELEMENTALES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9년 8월 10일 | ISBN 978-89-374-7538-2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가장 야심찬 시집
거장의 투명한 눈으로 노래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오마주
파블로 네루다 글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스무 편의 사랑과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인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 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시집으로 위의 첫 시집 외에 『지상의 거처ⅠㆍⅡㆍⅢ』 , 『모두의 노래』,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 『이슬라 네그라 비망록』, 『에스트라바라기오』, 『충만한 힘』 등이 있다.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파블로 네루다"의 다른 책들
보이지 않는 사람 El hombre invisible
공기를 기리는 노래 Oda al aire
엉겅퀴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alcachofa
기쁨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alegría
아메리카를 기리는 노래 Oda a las Américas
사랑을 기리는 노래 Oda al amor
원자(原子)를 기리는 노래 Oda al átomo
칠레의 새들을 기리는 노래 Oda a las aves de Chile
붕장어 수프를 기리는 노래 Oda al caldillo de congrio
땅에 떨어진 밤을 기리는 노래 Oda a una castaña en el suelo
양파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cebolla
빛살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claridad
구리를 기리는 노래 Oda al cobre
비평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crítica
앙헬 크루차가를 기리는 노래 Oda a Ángel Cruchaga
행복한 날을 기리는 노래 Oda al día feliz
건물을 기리는 노래 Oda al edificio
에너지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energía
질투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envidia
희망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esperanza
대지의 풍요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fertilidad de la tierra
꽃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flor
푸른 꽃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flor azul
불을 기리는 노래 Oda al fuego
과테말라를 기리는 노래 Oda a Guatemala
실을 기리는 노래 Oda al hilo
소박한 사람을 기리는 노래 Oda al hombre sencillo
불안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intranquilidad
겨울을 기리는 노래 Oda al invierno
실험실 연구자를 기리는 노래 Oda al laboratorista
레닌그라드를 기리는 노래 Oda a Leningrado
책을 기리는 노래 1 Oda al libro I
책을 기리는 노래 2 Oda al libro II
비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lluvia
목재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madera
말베니다꽃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malvenida
바다를 기리는 노래 Oda al mar
탐조(探鳥)를 기리는 노래 Oda a mirar pájaros
속삭임을 기리는 노래 Oda al murmullo
밤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noche
숫자를 기리는 노래 Oda a los números
가을을 기리는 노래 Oda al otoño
노란배딱새를 기리는 노래 Oda al pájaro sofré
빵을 기리는 노래 Oda al pan
한 쌍의 연인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pareja
지난날을 기리는 노래 Oda al pasado
게으름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pereza
가난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pobreza
시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poesía
민중 시인들을 기리는 노래 Oda a los poetas populares
봄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primavera
한밤의 시계를 기리는 노래 Oda a un reloj en la noche
리우데자네이루를 기리는 노래 Oda a Río de Janeiro
단순함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sencillez
고독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soledad
셋째 날을 기리는 노래 Oda al tercer día
시간을 기리는 노래 Oda al tiempo
대지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tierra
토마토를 기리는 노래 Oda al tomate
폭풍우를 기리는 노래 Oda a la tormenta
옷을 기리는 노래 Oda al traje
평온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tranquilidad
슬픔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tristeza
발파라이소를 기리는 노래 Oda a Valparaíso
세사르 바예호를 기리는 노래 Oda a César Vallejo
여름을 기리는 노래 Oda al verano
삶을 기리는 노래 Oda a la vida
포도주를 기리는 노래 Oda al vino
작가 연보
작가에 대하여: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시인 (김현균)
작품에 대하여: 일상에서 시를 길어올리다 (김현균)
추천의 글: 오직 사랑을 이유로 (김상혁)
● 아침마다 거장의 손으로부터 받아먹는 빵과 같은 시
“우리 시인들은 낯선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낯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해변에서, 낙엽 속에서 문득 시를 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진정한 시인이며 시는 살아남을 수 있다.”
─ 파블로 네루다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칠레의 국민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파블로 네루다의 대표 시집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기본적인 송가』(Odas Elementales)가 국내 최초 완역되어 민음사 세계시인선 38번으로 출간되었다.
네루다는 굴곡진 라틴아메리카와 칠레 현대사의 주역 중 하나로서 ‘문학 투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으로부터 모든 시대를 통틀어 서구의 가장 고전적인 시인이라는 평가도 받은 ‘서정과 순수’의 시인이기도 했다. 평생 2500여 편이 넘는 시를 남긴 네루다는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주체와 객체, 역사와 신화, 부드러움과 단호함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유연함으로 자신의 시에 대한 손쉬운 일반화를 거부하였다. 이 시집은 분명하게 민중의 삶을 향하면서도 ‘단순한 언어의 미학’으로 높은 예술성을 달성한 네루다 후기 시 미학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
책이여,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항구에서 들려오는
간헐적인 외침에
귀를 기울인다.
구리 잉곳이
모래밭을 가로질러,
토코피야로 내려간다.
밤이다.
섬들 사이에서
우리의 대양은
물고기들과 함께 고동친다.
내 조국의
발과 허벅지,
석회질의 갈비뼈를 만진다.
밤새도록 물가에 들러붙어 있다가
기타가 잠에서 깨어나듯 노래하며
하루의 햇살과 함께
아침을 맞는다
― 「책을 기리는 노래 1」에서
네루다는 지역 일간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시를 연재하기로 하면서, 특이한 조건을 하나 걸었다. 바로 문예면이 아니라 뉴스면에 시를 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의 시는 독자들의 삶과 호흡하며, 몇 년간 인기리에 연재되었다. 네루다는 시는 모름지기 모두가 함께 나누는 빵 같은 것이 되어야 하며 최고의 시인은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건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그의 오랜 시적 신념이 마침내 가장 적절한 시의 형태로 구현된 것이 바로 이 송가 시리즈다. 민중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그가 평생에 걸쳐 옹호해 온 가난한 민중에 의해 폭넓게 읽혔고,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거장의 가장 야심찬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별이여,
고운 종이에
싸인
요정 대모여,
넌 천체의 씨앗처럼
영원하고, 옹글고, 순결하게
땅에서 고개를 내민다.
부엌칼이
널 자를 때
하나뿐인 고통 없는
눈물이 솟는다.
넌 괴롭히지 않고도 우리를 울게 했다.
― 「양파를 기리는 노래」에서
● 공기(Aire)에서 포도주(Vino)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시가 된다
이 책의 시는 알파벳 순서대로 정렬되어 있다. 공기(Aire)에서 시작하여 포도주(Vino)까지, 네루다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시로 썼다. 이 순서에는 어떤 위계도 차별도 없다. 시인의 투명한 눈을 통해 옷과 토마토, 양파 등의 소박한 일상 사물에서부터 기쁨과 슬픔, 질투와 평온 등의 감정, 아메리카라는 땅과 세사르 바예호 같은 자신이 사랑했던 동료 시인, 여름과 비, 숫자, 게으름 등,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이 시가 된다.
비가 돌아왔다.
하늘에서 돌아온 것도
서쪽에서 돌아온 것도 아니다.
나의 유년기에서 돌아왔다.
밤이 열리자, 천둥이
밤을 뒤흔들고, 소리가
고독을 쓸어갔다,
그리고 그때
비가 도착했다,
나의 유년기의
비가 돌아왔다,
처음엔
성난
돌풍 속에서,
나중에는
어느 행성의
젖은
꼬리처럼,
비는
타닥타닥 끝없이 타닥타닥
끝없이
― 「비를 기리는 노래」에서
짤막한 시행은 신문 지면에 싣기 위해 판형에 맞춘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위한 네루다의 의도적 선택이었다. ‘언어의 미다스 왕‘이라 불렸던 네루다의 유려한 솜씨로 수수한 진정성과 강렬한 서정, 서사시적 우아함이 시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여기로 들어오지 마라.
이리로 지나가지 마라.
곧장 가거라.
네 우산을 가지고
남쪽으로 돌아가라,
뱀의 이빨을 가지고
북쪽으로 돌아가라.
여기에는 시인이 살고 있다.
슬픔은 이 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
― 「슬픔을 기리는 노래」에서
네루다는 서시(序詩) 「보이지 않는 사람」에서 분명한 어조로 자신의 새로운 시적 자아를 밝힌다. 남과 다르다는 우월의식과 교조주의, 그리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내 형제 옛 시인’에 대한 결별의 선언은, 과거 자신의 시를 포함한 기존의 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이제 ‘보이지 않는 사람’인 ‘나’는 피 흘리며 아파하고 땀 흘려 노동하는 모든 이들인 ‘우리’다. ‘나’는 핍박받는 민중의 영웅적 대변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의 ‘기본적인 것’, 친숙하고 소박한 사물들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투명한 존재다.
나의 삶을 위해 모든
삶을 내게 다오,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게 다오,
내가 그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리니.
내게 다오,
모든 기쁨을,
가장 은밀한 기쁨마저도,
그러지 않으면 달리
알려질 길 없으니.
난 그것들을 이야기해야 하네,
하루하루의
투쟁을
내게 다오,
그것들은 나의 노래이고,
그렇게 우린 모두 다 같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걸어가리니,
나의 노래는 모두가 하나 되게 하는 노래 :
모든 이들과 함께 부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노래.
─「보이지 않는 사람」에서
이 시집은 이데올로기적 논란을 비껴가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대중 독자의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으나, 공공의 책무를 지닌 노동자로서의 시인이라는 정체성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버린 것은 아니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경제적 수탈을 비판하고, 여러 정치적 폭력에 항거하는, 색채가 분명한 시를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네루다는 이러한 시들 역시 정치적 구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민중을 향해 흘러들 수 있도록 근원적 휴머니즘의 시세계를 구축해 냈다.
산정의 소나무들은
소곤거렸고,
모래나 밀가루처럼
소박한 민중은
난생처음,
얼굴을 마주 보고
희망을 맛볼 수 있었다.
과테말라여,
오늘 너를 노래한다,
오늘 과거의 불행을
그리고 너의 희망을 노래한다.
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내 사랑이 너를
지켜 주었으면 좋겠다.
─「과테말라를 기리는 노래」에서
● ‘송가’라는 고상한 (또는 영웅적)형식으로 ‘소박한’ (또는 낮은)것을 노래하는 파격
쿵, 하고 밤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밤 자신뿐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낙하는 허무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땅에 묻힌 후에야 “오래고도 새로운 차원을 열게 될” 새로운 밤나무가 된다. 여기서 네루다가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이 나타난다. 그에게 사랑이란 ‘매혹당함’이자 동시에 상대를 향하여 ‘자기를 던짐’이다.
─ 김상혁(시인), 추천의 글에서
송가(Ode, Oda)는 고대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에 의해 그 원형이 확립된 서정시의 형식이다. 핀다로스는 당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성대했던 네 개의 스포츠 제전(올륌피아, 네메아, 퓌티아, 이스트미아)의 승리자들을 영웅으로 격상시켜, 엄숙한 주제와 품위 있는 문체, 웅장한 합창시의 형식으로 칭송하였다. 고대 그리스 이후로도, 송가라는 형식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시대, 권력자 혹은 영웅의 고귀함을 찬미하는 웅장한 장시의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나 네루다는 지금껏 송가의 대상이 된 적 없는, 혹은 진지한 ‘시’의 주제도 된 적 없던 아주 소박한 보통의 것들을 주제로 선정하고 이를 송가라 불렀다. 이로써 시의 엄숙함과 권위를 탈피하는 한편 일상은 숭고의 차원으로 격상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넌 쿵하고
땅에
부딪혔지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풀은
계속 산들거렸고, 늙은
밤나무는 온 숲의
입인 양 속살댔다,
붉은 가을의 이파리 하나 떨어졌고,
시간은 땅 위에서
계속 꿋꿋이 일했다.
넌
한낱
한 톨의 씨앗이기에
― 「땅에 떨어진 밤을 기리는 노래」에서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던 전쟁의 기억이 멀지 않은 냉전의 한복판에서, 땅에 떨어지는 밤 한 톨과 갓 끓인 붕장어 수프가 시인에게 심오한 시적 영감을 주는 것은 자못 감동적이다. ‘기본적’이라는 표현은 주제와 형식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시적 기원으로 돌아간다는 뜻까지 담고 있다. “연필에 침을 묻히며 태양과 흑판, 시계 혹은 인간 가족에 대한 글짓기 숙제를 시작하는 소년의 그것”이 바로 이 시집의 출발점이다.
너의 뿌리들이 모여들어
꽃과 잎을 펼칠 순간을
기다리며.
넌
깃발처럼
하늘에서 펄럭인다,
산과 바다뿐만
아니라 세상의 가장 작은 구멍,
지친 농부의 강렬한
눈,
잠에 빠진
인간 입의
검은 산호마저
메울 때까지.
― 「밤을 기리는 노래」에서
[세계시인선38] 너를 닫을 때 나는 삶을 연다 | 민음사 (minum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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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명강]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3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서가명강]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3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 YouTube
꿈과 환멸이 공존하는 대륙, 라틴아메리카.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문학에 투영되었을까?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시인 루벤 다리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카노르 파라의 절제된 시어는 삶의 비애와 고통으로 가득하다. 펄펄 살아 있는 인간의 고통을 호흡하며 꿈과 희망을 빚어낸 라틴아메리카의 독창적인 문학은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해온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미래를 향해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기에 영원히 젊은 문학이다.
영원히 젊은 남미 문학 이야기 4강(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김현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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