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19세기를 떠나 18세기 화가들로 발걸음을 옮겨 보고 싶은데, 인상파 활동 시기를 중심으로 전후에
활동한 화가들이 끝없이 저의 눈길을 잡고 있습니다. 고구마가 딸려 나오듯 정말 많은 화가들이 있습니다.
인상파가 끝없이 분화한 탓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생각과 표현이 자유스러운 시기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유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기존 흐름에 대한 반항입니다.
이왕 시작한 독일 화가 이야기인데 한 사람을 더 만나 보겠습니다. 화가이자 에칭과 석판화가로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로도 잘 알려진 막스 리베르만 (Max Liebermann / 1847 ~ 1935)입니다.
암스테르담의 어린이학교 Klein kinderschule in Amsterdam / 68cm x 98cm / 1880
학교라기 보다는 요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놀이방 정도 아닐까요? 화면은 밝고 깨끗하지만 화면 속 아이들
모습이나 보모의 모습이 환한 것은 아닙니다. 저런 시설에 오는 아이들이라면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아이들
이겠지요. 리베르만은 과장됨 없이, 가식 없이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화면에 담아 놓았습니다.
너 나하고 눈쌈 할래?
맨 왼쪽 아이는 친구 얼굴에 눈을 고정시켰습니다.
오른쪽 아이들은 신기한 장난감에 마음을 빼앗겼고 치맛단을 입에 문 아이는 사내 아이의 선물에 얼굴까지
붉어졌습니다. 좀 부끄러운 고백이 함께 했겠지요. 의자에 머리를 파 묻고 있는 두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잠이 든 남자 아이를 깨우는 모습 아닌가요?
리베르만은 유태계 독일인입니다. 아버지는 상인이었는데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유태인들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처음부터 화가가 될 생각은 아니었는지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준 재능은 삶의 진로를 바꾸는 방향타 역할을 하는 모양입니다. 생각해보면 칸딘스키가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화가의 길로 뛰어 든 것은 서른 살 나이였었죠.
통조림 공장의 여인들 Women in a canning factory /49cm x 65.3cm / 1879
통조림에 담길 야채를 손질하는 여인들의 표정이 어둡습니다. 언뜻 보면 고흐나 르파주의 느낌도 있습니다.
손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모두들 머리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가득합니다. 삶이 고단하게 느껴질 때는
몸과 마음이 늘 따로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설움과 회한들이 여인들 사이를 채우고 있는데 머리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여인 옆, 노인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잖아, 지난 번 내가 말한 그 남자 어때?
아직 얼굴에 그늘이 가시지 않은 여인은, 그러나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입니다.
열 아홉 살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리베르만은 1869년, 22세가 되던 해 바이마르 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회화와 드로잉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음 해 보불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 의무병으로
군복무를 합니다. 보불 전쟁 중 화가들의 행동을 보면 전쟁에 직접 뛰어들어 숨을 거둔 사람, 피난을 간 사람,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 등 행태가 다양합니다. 시간이 되면 한 번 정리해보고 싶습니다. 전쟁과 그림은 얼마만큼
연관이 있을까 --- 늘 궁금하거든요.
암스테르담의 양로원 Altmännerhaus in Amsterdam / 55.3cm x 75.2cm / 1880
양로원이라고 해야 할지 노인 요양소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제목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한 생애가 저물어 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똑 같은데요. 모두들 정장을 한 노인들입니다. 담배를 물고 있는
노인도 있고 책을 보는 노인도 보입니다. 이야기를 하는 모습도 있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 광경도 보입니다.
정신 없이 흘렀던 시간이 갑자기 멈춘 듯 합니다. 지팡이를 의지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인에게 지난 간
시간들은 빛의 속도로 흘렀겠지만 지금 이 곳에서는 어떤지 여쭤 보고 싶습니다. 길 위에 떨어진 햇빛들이
떨어진 꽃 잎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사위어 가는 인생 길, 떨어진 꽃 잎이라도 세며 가라는 뜻인가요?
전쟁이 끝나고 그는 자리를 파리로 옮겨 공부를 계속하는데 이 기간 동안 바르비종에서 거주하며 밀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사실주의 화가들이 가장 존경했던 화가는 쿠르베와 밀레였는데 리베르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리베르만의 미술 공부는 네덜란드까지 이어집니다. 나름대로 미술공부를 마쳤을 때 그는 30세가
되었습니다. ‘서른 즈음에’라는 김광석 노래는 아무리 불러봐도 ‘마흔 즈음에’가 맞습니다. 서른의 나이에는
아침에 일어 나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끝 없이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렌의 아마포 창고 Flax barn at Lauren
아마포를 만드는 공장의 모습인 모양입니다. 여인들이 끼고 있는 덩어리에서 실을 뽑아 감는 것이겠지요.
서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앉아서 작업을 하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고단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리베르만은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묘사를 통해 세상이 바뀌는 것을 꿈꾸었었죠. 끝 없이 세상은 나아진다고
보는 사람들과 진정한 세상은 이런 걸음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소와 종류만
달라졌지 내용은 그림 속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요?
그림 속 이야기들 중에는 보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네덜란드에서의 공부가 끝난 후 뮌헨으로 거처를 옮겼던 리베르만은 1884년, 37세의 나이에 베를린으로 이사,
평생을 거주합니다. 그 해 마르타와 결혼을 했다고 되어 있는데 자녀와 관련된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회화는 자연에 대한 정직한 연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초기 작품들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시골 노동자들의 삶의 대한 묘사가 많았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계층에 대한 꾸준한 묘사가 사회
개혁을 가져 올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면 혹시 ‘낭만적인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뮌헨의 노천 맥주집 Munich Beer Garden / 1884
뮌헨 하면 맥주와 전혜린이 떠 오릅니다. 영어로 번역한 제목 독일어 비어가텐은 대개 술집들 옆에 붙어 있는
노천 맥주 집입니다. 큰 나무 밑, 다양한 사람들이 맥주나 음료수를 즐기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곳곳에 있는
걸 봐서는 부모들이 마음을 놓아도 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역시 술은 저렇게 열리 곳에서 편하게 떠들며
마셔야 제 맛입니다. 작은 골 방에서 목소리 낮춰가며 마셨던 일 중에 당당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아이에게 설마 맥주를 먹이는 것은 아니지요?
리베르만의 아버지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미술품 수집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리베르만은 유산으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
했습니다. 참 고마운 아버지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라면 땅을 샀겠지요. 처음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서 시작한
그의 화풍이 인상파로 변하게 된 것도 그가 수집한 작품들의 영향이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웅덩이에서 At the Swimming Hole
제목만 보면 냇가의 웅덩이가 떠 오르는데 소년들이 수영하는 곳은 배가 닿는 부두처럼 보입니다. 한바탕
신나게 물놀이를 끝 낸 아이들이 옷을 입고 있습니다. 물에서 올라 오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몸을 닦는 아이도
있고 벌써 옷을 다 입은 아이도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어디를 가도 행동이 빠른 사람은 여전히 빠릅니다.
샤워를 할 때마다 몸을 보게 됩니다. 몸의 선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봐 줄만 한 몸매였을 때는
관심도 없었는데 무너지고 난 뒤 자꾸 몸에 눈길이 가고 동시에 한 숨이 나옵니다. 잃어 버리고 난 뒤 아쉬움이
커지는 것 중에 ‘몸매’도 적어야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웃옷을 입고 있는 가운데 아이 --- 아주 매혹적인 자세입니다. 저런 자세를 어디서 배웠을까요?
리베르만은 베를린에서 풍경화가와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객들의 주문이 무척 많았는데,
마네의 작품과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면서 리베르만은 독일 화단에 인상파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40대 후반부터 리베르만은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독일 미술계에서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화풍의 변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평도 있었지만 1899년부터 시작한 독일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꿈꾸는 모임을 이끌게 된 것이죠.
부르넨버그의 시골 술집 Country Tavern at Brunnenburg / 1893
확실히 초기 리베르만의 작품과는 화풍이 달라졌습니다. 인상파 느낌이 아주 강합니다. 마을의 나이만큼 오래 된
나무 밑, 동네 술집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모인 각자의 사정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큰 양산처럼 펼쳐진
나뭇잎 때문에 모두들 시원하고 상큼해 보입니다.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무대는 다르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큰 나무가 있는 쉼터에서는 길을 멈추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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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김용호 --- 주막에서 일부
평론가들 중에는 1890년부터 1930년 독일 미술을 지배한 화가는 리베르만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1920년, 73세 고령의 나이에 독일 미술 아카데미 의장을 맡으면서 그의 위치는 확고
했습니다. 독일의 자유로운 문화 정책을 실현하는 대표주자로 국제적인 신임도 얻은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나찌가
등장하면서 곤란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숲 속의 나무꾼 Holzhacker im Inneren eines Waldes / 63.5cm x 48.9cm / 1898
인상파의 고민 중 하나는 밝은 색을 쓰면서 작품 속 대상들의 깊이가 부족하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야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빛의 흐름과 반짝거리는 대상들을 묘사하기는 좋았지만 또 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 작품은 야외이기는 하지만 빛이 많지 않은 숲 속입니다. 그러나 나무들은 그 무게와 깊이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리베르만의 고민 그리고 그 문제를 타개하는 재능이 범상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요?
리베르만은 유태인이라는 이유와 비 독일적인 근대 회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독일 민족주의 미술가들과
정치꾼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습니다. 원래 리베르만은 유머감각이 뛰어났고 위트가 있어서 베를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문에 한 주라도 그에 관한 기사가 빠진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치는,
이념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습니다.
제가 ‘야만’과 ‘맹신’을 미워하는 것은 자기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영하는 소년들 Boys Bathing / 112.5cm x 152cm / 1898
어두운 배경 속 아이들 몸이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막 나온 아이들이 서둘러 옷을 입고 있는데,
하늘을 보니 소나기라도 내릴 듯 합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조금 불편한 마음이 꺼림직해서 그림을 다시 드려다
보다가 혹시 리베르만은 곧 다가 올 세기의 변화에 대한 불안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미지의 변화에 대한 희망으로 아이들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써 놓고 보니 점쟁이를
해도 되겠습니다. 마음이 편하면 맞는지는 둘째 문제이죠.
나찌가 독일의 정권을 잡은 뒤 더 이상 유태인의 작품을 공공미술관에 전시 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리베르만은 1933년, 아카데미 의장직을 그만 둡니다. 나찌는 그 해부터 공공미술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을 압수하기 시작합니다. 나찌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는 발자국 소리가
베를린을 흔들었을 때 이미 ‘야만’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바닷가의 테니스 게임 Tennis Game by the Sea / 69.5cm x 100.3cm / 1901
요즘 세상에도 보기 힘든 테니스의 ‘성 대결’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윌리엄스 자매와 같은 힘이나 샤라코바의
괴성 대신에 우아함이 있습니다. 바다 바람이 거센지 구경을 하는 여인들은 양산과 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
속으로 숨어 들었는데 코트 위의 두 여인은 게임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초기의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하던
주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부르주아들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까지 범위가 넓어졌지만 리베르만은 여전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있는 노르드봐익 모래언덕 Dune near Nordwijk with Child / 49cm x 60cm / 1906
언덕 너머로 바다가 열렸습니다. 점점이 떠 가는 배도 보입니다. 배가 사라지는 곳 너머로는 다시 하늘이
열렸습니다. 아이 앞에 모든 세상이 열린 것이죠. 아이가 가는 길은 반듯한 길이 아니라 풀 섶을 헤치고
가는 길입니다. 지난 비에 파였는지 붉은 속 살을 드러낸 비탈도 보입니다. 사는 것은 그렇게 위험을 피하고
건너면서 자신의 두 발로 길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혹시 너무 잘 닦여진, 아주 안전한 길로 지금까지
걸어 왔는지 돌아 볼 일입니다. 허락된다면 그런 길을 찾아 남은 시간 걸어 보고 싶습니다.
리베르만은 독일이라는 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은 세계시민적인 사고의 소유자였습니다.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희망과 정직성이 작품에 담기면서 그의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확연하게 구별되기도 합니다. 그의 말년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젊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지옥을 보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행이었죠, 리베르만 선생님?
첫댓글 베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