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九 章 무너지는 천외도후
아소국(阿召國).
난세무림에 여인 천하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선 여인왕국.
지금 그 곳으로 한 명의 청의인(靑衣人)이 들어서고 있었다.
옥령, 아소국을 찾은 그는 다름아닌 난세무림을 딛고 일어선 천군대작 옥령이었다.
"천야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천외도후, 그녀는 함랍철극투산의 퇴정봉의 한 암자에서 기거하고 있다.
― 함랍철극투산이라면 험하기로 이름 높은 곳인데…….
― 그렇다. 그녀는 바로 어려서부터 그곳에서 자라며 하늘을 상대로 도법(刀法)을 연마했다.
― 무서운 여인인 것만은 확실하군요.
― 유사 이래로 가장 완벽한 도법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네.
― 만약 율해라는 도법과 그녀의 도예천비(刀藝天飛)를 논한다면 어느 것이 우위라고 생각하십니까?
― 으음, 그것은 실로 단정을 할 수 없네. 왜냐하면 율해는 패도적이고 쾌(快)를 위주로 하는 도법이라면 도예천비는 하나의 예술과 같은 변(變)을 위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네.
― 그녀가 강한 것만은 사실이군요.
―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네와 다미라와의 대결은 단 일초에 판가름이 날 것이네.
―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득 옥령은 시선을 들어 어두워져 가는 밤 하늘을 응시했다.
유난히도 푸른 하늘가로 하나 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밤 운명은 결정이 내려진다."
허공으로 옮겨진 그의 시선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 운명은 오늘 밤에 결정 지어진다.
옥령은 멀리 칼날처럼 솟아있는 함랍철극투산을 직시하고 있었다.
* * *
휘이이이이!
한 줄기의 매몰찬 삭풍이 대지를 훑고 지나갔다.
휘리리릭!
그리고 그 삭풍에 펄럭이는 두 사람의 옷깃이 있었으니.
이곳은 나는 새라도 날개를 접는다는 험봉(險峯) 함랍철극투산이 아닌가?
그런 곳에 두 사람이 서 있다니.
그것도 야심한 이밤에…….
오래도록 두 사람은 숨소리조차 흘리지 않는 침묵을 일관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공기는 무수한 살기로 팽배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파, 세월의 연륜이 파상적으로 그어진 그녀의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 주름살이 있기에 더 없이 근엄한 인상을 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지금 그녀의 눈은 전면을 향한 채 싸늘한 기광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동공으로 파고드는 한 명의 인물.
'무서운 놈이다. 나이에 비해 헌걸찬 기개와 만인을 압도하는 기상이 흐르는 저 모습은 일대종사(一代宗師)의 기풍이다.'
그녀의 앞, 옥령이 심허무심한 눈빛을 발하며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때 천외도후 다미라의 입가 근육이 푸들거리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누군지는 모르나 훌륭한 기도이다."
"옥령이라고 하오. 그리고 또 천군대작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소."
순간,
"처, 천군대작!"
다미라의 음성이 폭풍을 맞은 듯 떨리는 것은 너무나 위대한 이름 앞에 오는 경외심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찾아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본인이 왜 이곳에 왔는지 능히 짐작했으리라 믿소."
짧은 순간을 빌어 다미라의 안색이 여러 번 변했다.
그러나 종래에는 평정을 되찾고 옥령을 직시했다.
"그랬었군. 중원에서 천상미인거를 백치로 만든 것도 바로 너……."
"아마 틀림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나를 죽여 천외신녀궁을 퇴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것도 너의 계획의 하나……."
"놀라운 추리력이오."
그것은 바로 다미라의 말에 수긍을 한다는 뜻이 아닌가?
"좋다. 그 출중한 기개 하나만은 마음에 들었다."
"후후훗!"
옥령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노을처럼 밝게 피어 올렸다.
"너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불가능 없이 살아온 이가 나 옥령이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확신이었다.
허나 다미라는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흐릿한 웃음을 떠올렸다.
"자신이 있다는 말이군."
"자신이 아니라 정해진 운명이오."
"크크크! 좋은 말이야… 나도 한 때는 그런 말을 즐겨 썼으니까. 그러나… 천하의 그 누구도 나 다미라의 적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두게나."
천하에 자신의 적수가 없다니… 진정 광오한 말이었다.
허나 옥령은 결코 웃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누가 뭐래도 그는 강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인정하겠소."
"그럼에도 너는 자신을 하고 있다."
"천하에 오직 당신의 적이 될 수 있는 한 사람, 나 천군대작이기 때문이오."
"본인 또한 그러기를 원하오."
서서히 두 사람은 서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중원과 아소국의 두 거인(巨人)의 결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정세를 놓고 벌이는 한판의 승부.
파파파팟!
두 사람 사이를 격한 공기의 흐름이 일순간에 무형의 살기로 인해 불꽃을 퉁겨냈다.
다미라의 기세는 대해처럼 음유로운 기세를 머금은 것이었다.
어느새 뽑혔는가?
한 자루의 긴 장도는 허공 중에서 고요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었다.
스르르릉!
그는 아주 천천히 애병 율번을 뽑아 들었다.
일순간 보기에도 서기로운 칠채의 보광이 사위를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으니.
옥령은 율번을 비스듬히 눕히고 다미라의 목 끝을 겨누고 있었다.
허나 그의 내심은 다미라의 기세를 살피며 점차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역시 천군대작이라 불릴 만하다. 같은 무도(武道)를 걷는 사람으로서 너의 출중한 기도를 인정하는 바이다."
은은한 경탄이 서린 다미라의 음성.
"그것은 본인 또한 마찬가지요. 당신은 어쩌면 내가 겪어야 할 가장 무서운 상대라는 생각이드오."
"좋다."
무엇이 좋다는 말인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무서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몰아(沒我)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다미라의 입술을 꿰뚫고 한 소리 짧은 기합성이 끊어질 듯 폭발했다.
"도예천비(刀藝天飛)!"
도(刀)가 움직였는가?
번쩍!
야공을 훑고 지나가는 하나의 사나운 벽력인가?
아니면 하늘에 있는 수만 개의 유성이 한꺼번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하나의 태양이 수만 갈래로 갈라져 쏟아지는 것인가?
눈을 아리게 하는 푸른 청광이 탈혼의 이빨처럼 번뜩이며 옥령의 몸을 파고 들었다.
옥령의 머리가 돌연 번개처럼 영오한 회전을 했다.
'칠채생사검뇌……. 칠채의 색깔과 일곱 가지의 변과 묘리를 함께 시전할 수 없는 천하 최강의 검법…….'
이미 옥령의 신형은 눈부시게 움직이고 있었다.
"타앗!"
율번이 움직이는가?
일곱 가지의 색깔, 칠채가 암암한 공간에 수놓아지고.
"칠― 채― 생― 사― 검― 뇌!"
드디어 펼쳐지고야 말았는가?
그 어떠한 신법으로도 피할 수 없고, 한 번 펼쳐지면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고야 만다는 검학.
옥령과 다미라의 신형이 환상처럼 엇갈렸다.
생(生)과 사[死]의 기쾌무비한 교차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두 마디의 묵직한 신음성이 울려 퍼졌다.
"으으음……."
"억!"
엇갈린 그들은 어느샌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헌데 다미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그녀의 전신은 무수히 흔들리고 있었다.
주춤주춤 그녀는 거의 서너 걸음을 물러서서야 간신히 도로 몸을 지탱한 채 섰다.
"방금… 그 검법의… 이름을 다시 한번… 들려줄 수 있겠느냐……."
다미라의 경악에 질린 새파란 음성은 은은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한 다미라를 옥령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의 목 밑으로는 다미라의 도(刀)가 스쳐갔는지 한 줄기 가느다란 혈흔(血痕)이 그어져 있었다.
문득 옥령은 고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칠채생사검뇌라고 부르오."
"치, 칠채… 생사… 검뇌……. 훌륭한 검법이다."
다미라는 믿을 수 없다는 회의의 빛을 강하게 떠올렸다.
주르르르…….
비로소 그의 심장과 전신에서 가느다란 혈흔이 생기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일곱 가지의 묘리와 일곱 가지의 다른 변(變)을 구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옥령은 다미라의 불신서린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죽음이 찾아드는 노안.
그것이 지금 회색빛으로 퇴색되어 가는 것을 옥령은 무의미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주르르르…….
수만 갈래로 갈라진 검흔을 타고 흐르는 피의 양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중원을… 내가 너무… 몰랐다."
"그렇소."
"너 같은 사람이 만약 한 사람만 더 있었더라도… 본녀는 이런 야망을 묻어 두었을 것이다. 전설을… 믿었어야… 했는데……."
쿵!
마침내 다미라의 신형은 함랍철극투산의 험봉에서 무너졌다.
천외도후 다미라, 그녀의 불길 같은 야망도 허무하게 차가운 대지 위로 스며들고만 것이다.
문득 옥령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오늘 내가 그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운명이 따라주었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서서히 자신의 목언저리를 쓰다듬는 옥령.
그의 손에는 시뻘건 선혈이 진득하게 묻어나오고 있었으니.
'정말…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나의 검이 빨랐을 뿐이다.'
옥령은 손 안에 묻어나온 진홍빛 선혈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한 마디.
"이로써 천외신녀궁은 중원에서 퇴진을 할 것이다."
휘이이잉!
기다렸다는 듯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한 줄기 삭풍이 험봉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리고 서서히 옥령은 함랍철극투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성광이 부서지는 곳에는 천외도후의 시신만이 싸늘하게 놓여 있었으니.
아소국의 바람은 차기만 했다.
천외도후 다미라, 그녀가 죽었다.
오직 중원을 정복하려는 하나의 일념만으로 살아온 야망 속의 여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또 하나의 회오리를 예고하는 것이었으니.
* * *
한 마리의 새가 빠르게 허공을 날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손이 새의 발목에 묶인 하나의 서찰을 풀어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다.
<천외신녀궁의 전 제자들은 지금 즉시 궁(宮)으로 귀환하라. 한 명이라도 어기는 제자가 있을 시는 엄벌에 처함.
도후(刀后) 백소아(白小兒).>
아무도 모르게 중원에 퍼져있는 천외신녀궁의 전 제자들에게 하달된 문제의 서찰.
그리고 어느 날 조용히 아주 조용하게 중원을 빠져나가는 행렬이 있었으니.
수십 만의 여인들, 그런 그녀들의 얼굴에는 비통한 그 무엇이 안개살처럼 서려 있었다.
무엇인가?
그녀들이 돌연 중원에서 소리없이 사라져 가는 것은.
* * *
아소국의 천외도후가 차디찬 야망을 무너뜨릴 때, 중원천하에서는 하나의 대파란을 예고하는 사건이 움트고 있었다.
지옥마성(地獄魔城).
이 저주(詛呪)가 안개처럼 스물거리는 마역에서 하나의 불씨는 싹트고 있었다.
대전(大殿).
아수라상(阿修羅像)이 흉물스럽게 조각된 대전의 넓이는 그야말로 하나의 광장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인(二人), 그들은 대전의 한 가운데 우뚝 선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흑의무복에 검날 같은 입술과 냉막한 기운이 서려 있는 청년.
그는 바로 천 년의 저주가 서린 지옥마성의 제 일 인자 천년마제(千年魔帝) 냉무혼이 아닌가?
지금 그는 전면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은은한 떨림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백의여인(白衣女人), 일신에서 풍기는 기품은 고귀함과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도가 담담한 가운데 은연중에 보는 이를 압도하고 있었다.
뿐이랴?
백옥궁장의 화려한 선으로 노출된 몸매는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을 들뜨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얼굴은 백색 면사로 완전히 가려 있어 용모를 헤아릴 수 없었다.
문득 냉무혼이 백의 면사녀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군. 아녀자의 몸으로 감히 이곳을 찾아와 나 냉무혼에게 정사(正邪)를 노하고 있으니."
조용한 음성이라고는 하나 그 안에 서려있는 분노는 노도처럼 광란을 하고 있었다.
허나 여인은 놀랍게도 단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말.
"다시 말하자면 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겁이 번번이 지옥마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더 이상의 혈겁(血劫)은 서로에게 비극을 초래하는 것, 마제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더 없이 맑고 청아했으며 아리도록 영롱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말 속에 도사리고 있는 뜻은 가히 엄청난 것이었으니.
부르르르… 냉무혼의 흑의가 바람도 없는데 거세게 흔들렸다.
그가 천년마제의 휘호를 가슴에 안은 이후로 언제 이런 말을 들었던가?
허나 그것은 일순간의 변화, 그의 눈에 서려있는 분노의 기색은 나타날 때보다 빨리 사라졌다.
"무인(武人)으로서 피[血]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숙명, 나 냉무혼은 나에게 주어진 숙명을 다하는 것 뿐이오."
"자신의 불의를 그런 식으로 돌리지 마세요. 숙명이다 운명이다 하여 공공연히 피를 부르고, 그것을 정당화 시키려는 것은 치졸한 자의 행동이에요."
순간,
번쩍! 냉무혼의 눈에서 새파란 낙뢰가 기쾌무비하게 스쳐갔다.
"말을 함부로 하는 여인이군. 당신은 여기가 어딘가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고 입을 열었어야 했다."
"그래서요,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요?"
"본인은 본인의 일에 방해를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더구나 그대 같은 여인이 참견을 한다는 것은 더욱 더 좋아할 수가 없구려."
음성은 더없이 담담했다.
그러나 저 음성 안에 실려있는 살기를 쥐라서 알랴.
그런데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무례한 자… 그렇게 입을 놀리고도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다시없는 비극이 될 것이다."
순간,
번쩍! 마치 빙옥을 다듬어 놓은 것 같은 여인의 손이 허공에서 한차례 현란하게 움직였다.
스스스스… 사방의 벽에서 수많은 은빛 그림자가 일렁이는가 했더니 그들은 순식간에 대전의 벽, 바닥, 천장 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일련의 움직임으로 보아 그들의 무학은 이미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
냉무혼의 눈빛이 짧은 순간에 변화를 보이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인 것이다.
'무서운 놈들… 밖에는 본성(本城)의 지옥백팔검(地獄百八劍)이 깔려 있는데 그들의 이목을 속이고 이곳에 잠입을 해오다니…….'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내심일 뿐.
"후후후!"
냉무혼은 입가로 냉혹한 웃음을 풀풀 날리고 있었다.
"어쩐지 기세가 당당하다고 했더니 믿는 것이 있었군. 그러나……."
냉무혼은 면사로 가려진 여인의 얼굴을 빤히 직시했다.
"오늘 이곳에 잠입한 자는 모두 죽는다. 그것이 하늘이라도……."
여인의 면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서운 인물…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나.'
츠파앗!
번쩍!
검(劍), 얇기는 면도날처럼 얇은 것이 싸늘한 광채는 푸른 물이라도 베어낼 듯한 청광이었고, 길이는 넉자에 빠르기는 낙뢰가 쏟아지는 것처럼 빠르게 냉무혼의 전신을 투명하게 베어오고 있었다.
냉무혼은 슬쩍 몸을 틀어 우측으로 미끄러졌다.
지극히 간단한 동작, 허나 일체의 불필요한 동작을 배제한 절묘한 신법의 극치가 아닌가?
싸악!
섬칫한 파공음과 함께 네 자루의 장검이 아슬아슬하게 간일발 차이로 그를 스쳐갔다.
그러나 암중에서 냉무혼을 공격하고 있는 은영(隱影)들 또한 한 틈의 허(虛)도 용납치 않았다.
그들은 마치 냉무혼의 그런 동작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어느 새 또 다른 네 자루의 장검이 천장에서 돌출되더니 그의 목 한치 앞까지 이르러 있었다.
'허억!'
냉무혼은 그들의 공격에 다급한 신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그는 꼿꼿한 자세 그대로 좌측의 방위로 미끄러져 갔다.
스으으…….
냉무혼의 몸이 막 한 쪽의 벽으로 미끄러져 갔을 때,
번쩍! 번쩍!
이미 그 자리에서도 네 자루의 장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냉무혼의 전신 요혈을 탈혼의 이빨처럼 폭사해 오는 것이 아닌가?
'시, 실수다. 이들을 너무 경시한 것이…….'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에 은은한 경악이 스쳐갔다.
그러나 그의 일신무학은 하늘조차 비웃을 경지에 이르른 것이었으니.
푸스스스…….
냉무혼의 신형이 흐릿한 안개의 형태로 화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열 두 자루의 검을 통과해 중앙에 내려섰다.
그런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가공할 살기.
"죽인다."
짧은 분노의 일갈이 대전을 쩌렁하게 울리는가 싶더니.
후후후우우우웅!
그의 손이 피를 칠해 놓은 듯이 혈광을 띄우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의 장심에는 보기에도 선명한 귀졸(鬼卒)의 형상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도사리고 있었다.
"보여주지… 나 냉무혼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가를……."
냉무혼의 입술을 헤집고 음산무비한 괴소가 흘러 나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후우우웅! 그의 쌍수가 허공에서 요란하게 갈라지는가 싶더니.
"살영흑류귀영강(殺影黑流鬼影 )!"
냉무혼의 몸이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며 연속 삼장을 갈라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의 신기(神技)와 가공할 위력.
쩌르르르릉!
대전의 한 구석이 요란하게 진동을 하는가 했더니.
파파파팟!
수백 개의 귀영(鬼影)들이 그의 장심을 떠나 천장과 벽 그리고 바닥 등에 무수히 박히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아악!"
"케엑!"
수십 마디의 비명성이 어느 한 순간에 이어 나오고.
주르르르… 바닥과 천장, 벽 등에서 선홍빛 선혈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뒤이어 핏물을 흠뻑 뒤집어 쓴 은영(隱影)들이 대전으로 굴러 떨어졌다.
쿠쿠쿵!
정확한 숫자는 십 육 인.
그들의 눈은 이미 허옇게 까뒤집혀 죽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그들의 미간, 그곳에는 한결같이 보기에도 소름끼치는 나졸들이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백의 면사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두어 걸음 물러섰다.
면사에 가려 표정을 볼 수는 없었으나 그녀의 놀람은 이미 극을 넘고 있었다.
'무서운 무공! 저들은 신도원(神道園)에서도 백위 안에 드는 고수들인데… 단 일초에…….'
이 무슨 말인가?
신도원(神道園).
언젠가 여웅비는 이런 말을 남겼다.
― 신도원은 정확히 그 인원이 사백 사십 사 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파를 연합한 것과 비례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신도원이 아닌가?
중원의 영원한 베일 속에 철저히 가려져 있는 비밀세력, 그들이 바로 냉무혼을 공격한 은영들이라니.
그렇다면 이 여인은 누구인가?
문득 냉무혼은 음랭한 시선을 발하며 백의 면사녀를 응시했다.
"본인은 문득 이 사람들을 보고 한 사람을 떠올렸소."
그런 그의 시선은 면사 사이로 감춰진 여인의 얼굴을 직시했다.
"본인은 오래 전에 한 명의 수하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중원에는 신도원이라는 신비한 세력이 있으며 그 세력의 원주가 놀랍게도 미색을 겸비한 여인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도 이제와서 생각하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던 것 같구료."
백의 면사녀는 의외로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 여인은 신도원의 원주이며 이 나라의 고귀한 신분을 지닌 군주(君主)임과 동시에 천하가 모르는 또 하나의 신분을 생각해 냈소."
"대단한 일이군.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면사 여인의 그 말은 곧 냉무혼의 말을 시인하는 것이 아닌가?
무영군주(無影君主).
그렇다.
이 여인이 바로 이 나라의 무영군주였으며 신도원의 원주였던 것이다.
냉무혼은 서서히 무영군주를 향해 가벼운 예를 올렸다.
"미미한 백성이 군주님을 뵙습니다."
무영군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면사 사이로 흘러나오는 시선이 은은한 놀라움으로 차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생각을 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심기를 지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그러면서도 그는 당당하다!'
"그래, 그대는 내가 무슨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신도원의 원주요, 이 나라의 군주로서 가질 수 있는 신분이라면 오직 하나… 중원의 영원한 불문율인 천군십예사황의 일 인인 화야(花爺)… 바로 천하가 모르는 군주의 또 다른 신분일 것입니다."
확신을 하듯 냉무혼의 마지막 말은 칼로 자르듯 명료했다.
"훌륭한 안목이다. 천년마제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그것은 바로 시인의 뜻이 아닌가?
화야(花爺).
중원의 영원한 불문율인 천군십예사황.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신분의 소유자.
― 알려고 하지 마라. 그가 누구인가는. 천하인이 모두 그일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불문율을 가진 화야.
그것이 바로 무영군주였다니.
신비가 밝혀진 곳, 바로 지옥마성의 대전에서였다.
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