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옛날 풍수 보는 법
-용·맥·사·혈은 감여이다
여러분은 ‘머리말’에서 원세계袁世凱(1895~1916)가 지관을 불러다가 조상 묘소의 풍수를 살핀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비록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고대 중국사회에서 매우 유행되었던 문화현상 즉 풍수 관념과 그 조작 행위를 요약한 것이었다. 고대 사람들은 ‘죽음을 섬기는 것은 삶을 섬기는 것과 같다’의 전통이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융숭한 장례를 거행하고, 또한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 중에서도 죽은 사람의 묘지 선택과 설계가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묘지의 좋고 나쁨이 죽은 후 세계의 생활이 안정되고 편안한지 그렇지 못한가에 관계된다. 또한 죽은 후의 생활 정황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친척 내지 자손 후대의 화복길흉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고대 사람들은 믿었다. 물론 개인 주택 ‧ 공공 건물 ‧ 숲으로 둘러싸인 곳 따위의 생활 환경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획과 설계는 자연스럽게 연구할 말한 가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산 자와 죽은 자의 거처 환경을 선택하여 기획할 것인가? 곁들어 그 방위와 날짜를 잡는가? 하는 따위의 연구 토론한 결과가 고대 풍수술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1. 풍수의 뿌리
주택에 관하여,《주역》<계사 하>에 치밀하고 의미심장한 한 단락의 기록이 있다
상고上古에는 사람은 바위틈이나 들에서 살고 있었다. 후세에 어진 사람이 훌륭한 궁실을 지어 옛날의 생활방식을 바꾸게 되었다. 위에는 마룻대를 세우고, 아래는 첨하가 있어서 바람과 비에 대비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개 대장괘大壯卦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대장은 궁실의 장대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 옛날 사람들이 동굴에 거주하거나 혹은 광야에 흩어져 거주하였다. 뒷날에 어진 사람이 집을 지음으로써 그 전의 거처 방식을 바꾸었다. 위에는 마룻대와 들보, 아래에는 처마와 벽이 있어 바람과 비를 막는 데에 이용했다. 이것은 아마 <대장大壮>괘 중에서 얻은 계시일 것이다. 이렇게 집 지는 공로를 먼 옛날 어진 사람들은 역괘에서 받은 계시로 돌렸다. 발생학으로 말하면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한 측면으로서의 사실을 밝혀낸 것이라 할 것이다. 집 짓는 것은 옛날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풍수의 각도에서 말하면, 일종의 ‘술’로써 보통 사람은 종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증에 의하면, ‘풍수風水’라는 용어는 진晋(317~420) 나라 곽박郭璞(276~324)의《장서葬書》에서 이름을 빌린 것이다.
매장이란 것은 생기가 얻어야 한다.《경經》에 가로되, 기氣는 바람風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水를 만나면 멈추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기를 얻어 하여금 흩어지기 않도록 하고 실행하여 하여금 머물도록 했다. 이런 고로 이를 풍수風水라 이른다.4)
매장지는 응당 생기가 있어야 한다. 기氣의 특징은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 옛날 사람들은 매장지를 선택할 때 바람이 모이는 곳을 구하게 된다. 기가 모여서 흩어지게 하지 않고 또한 물을 얻으며 기로 하여금 실행하여 멈추도록 했던 것이다. 소위 ‘풍수’는 바람을 모으고, 물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경》은 옛날 책《청오선생장경靑烏先生葬經》의 약칭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오선생은 한漢 나라 사람으로서 풍수의 술에 정통하여 뒷날의 풍수가들의 숭배를 받았다. 이런 까닭에 ‘풍수술’은 고대에 있어서 ‘청오술靑烏術’이라는 달리 불리기도 했다.
풍수의 더 오래된 명칭은 ‘감여堪輿’이다. ‘머리말’에서 한무제(BC 154~ BC 87 재위 BC 141~ BC 87)의 아내 맞는 이야기에도 소위 ‘감여가’가 나온다. ‘감여’라는 용어는 최초에 ‘그림과 주택 책의 신’에 근거라는 설이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은 하늘과 땅을 총체적으로 말하는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동한東漢 시대의 옛날 문자학자인 허신許愼은 감여가 도를 발휘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즉 ‘감은 하늘의 길이고 여는 땅의 그림이다’이라 했다. 이로 보아, 풍수 및 그 대명사 감여堪舆가 최초로 확정되며 더불어 주택 건설과 관계를 맺었다. 주택을 세울 때에는 작은 환경(보기 주택)과 큰 환경(보기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이러고 보면, 풍수술도 일종의 ‘하늘과 사람이 통하는’는 술인 셈이다.
청(1616~1912) 나라 고견남高見南은 다시 풍수와 음양의 기氣를 연결시켰다. 그는《상택지찬相宅之纂》‘머리말’에서 도道를 베꼈다고 했다.
네 바른 방위와 네 모서리 방위는 여덟 방위에 들어 있다. 각각 기가 있으니, 기의 양은 바람을 좇아 행하고 기의 음은 물을 좇아 행한다.6)
여기서 ‘네 바른 방위’는 동 ‧ 서 ‧ 남 ‧ 북을 가리키고, ‘네 모서리 방위’는 남동 ‧ 남서 ‧ 북서 ‧ 북동을 가리킨다. 각기 방위에는 모두 기가 존재하고 있어서. 음 ‧ 양으로 나눠진다. 양기는 바람을 좇아 행하고, 음기는 물를 좇아 행한다. 이러한 바람과 물은 사상사 위에서 오랜 전통의 기론氣論과 합쳐서 음양학설과의 관련이 발생된 것이다.
고대 설화 가운데 일찍이 다음과 같은 설이 있었다.
우禹는 비로소 풍수지리를 시작했고, 공유公劉7)는 음양을 보았고, 주공周公은 이십사 국을 설치했으며, 한漢 왕은 오히려 오택성五宅姓 제도를 만들었고, 관로管輅는 장지를 택하는 격반格盤 제도를 만들었다.8)
풍수의 기원은 옛날 성인과 현인에게 공로를 돌려도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풍수 관념의 유래가 오래 되었음은 말해 준다.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적어도 전국 말기 연燕(BC 403 ~BC 225) ‧ 제齊(태공망太公望 BC ? ~BC 379, 전씨田氏 BC 386~BC 221) 일파의 방술에서 이미 풍수설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풍수술이 진정으로 흥기하기 시작된 것은 양한(전한 BC 206~AD 5, 후한 25~220) 시기이다.《한서》<예문지> <술수략>에《감여금궤堪輿金匱》14권(‘오행’류에 귀속)과《궁택지형宮宅地形》20권(‘형법’류에 귀속)가 소개되어 있다. 앞에서 제시했던《청오선생장경》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나라의 청오자靑烏子9)가 지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 나라의 상택상묘술相宅相墓術은 이미 매우 발달했고 매우 유행했다. 후세의 풍수가들은 이런 감여가와 상택상묘의 형법가들에 의해 연변될 수 있었다.
위진남북조(위진 220~420 남북조 420~598) 이후, 풍수술은 성행하기 전의 공백기였다가 발전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존사의 말이 같지 않은 바에 따라, 점차 같지 않은 종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복건福建의 이법파理法派10)와 강서江西의 형법파形法派11)의 성세가 특히 장대하였다. 이법파는 음양 ‧ 오성五星 ‧ 팔괘의 설로 이미 상생과 상극의 이치를 정리하고, 형법파는 용 ‧ 혈 ‧ 사 ‧ 수가 서로 안배되어 여타 구속와 거리낌을 따지지 않았다. 이법파는 사용하는 법이 너무나 번거로움으로 말미암아 문하의 제자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강서의 형법파의 술은 천하에 크게 현창하여 후세에 풍수를 배우는 자들의 종파가 매우 많게 되었다.
2. 용 ‧ 혈‧ 사 ‧ 수 기타
강서의 형법파 풍수술은 특별하게 용 ‧ 혈 ‧ 사 ‧ 수의 서로의 안배를 중시한다. 이것은 생기가 모이는 풍수의 좋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켜야 할 제일 기본적인 준칙이다. 일반적으로 거주하거나 매장하기 합당한 풍수의 좋은 곳을 선택하려면, ‘용진龍眞’, ‘혈적穴的’, ‘사환砂環’, ‧ ‘수포水抱’의 네 가지 준칙에 의해 자세한 추정을 진행해야 한다.
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소위 ‘용진’은 생기가 흐르다가 맺어진 산맥을 가리킨다. 옛날 사람들은 산세 기복의 구불구불한 모양이 마치 용과 움직이는 것 같아 땅바닥에 꼭 생기가 있다고 여겼다. 고대 풍수술은 이에 근거하여 산세를 ‘용’이라 하고 산세 기복이 길게 이어져 구불구불한 맥락을 ‘용맥’이라 했다. 산맥이 맺힌 곳을 ‘용혈’이라 하나 ‘혈적’은 생기가 모이는 좋은 혈의 위치를 가리킨다. 용과 혈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용을 찾는 것은 급소를 찌르기 위해서이고, 급소를 찌르려면 꼭 혈을 찾아야 한다. 이로 인하여 용의 혈은 근본이다. 생기가 흐르는 산(‘용진’)을 찾기만 하면, 산의 기복을 따라 물이 사이하는 곳에서 생기가 모인 좋은 혈(‘혈적’)를 찾을 수 있다.
풍수술에서 사람들은 혈지穴地 주위의 산을 ‘사’라고 한다. 만약 혈지의 좌우와 뒤 측면이 산으로 에워싸이고, 혈 가운데의 생기가 모여서 바람에 흩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풍수가들은 거처 혹은 묘지를 선택할 때 대풍의 영향을 받지 않게끔 바람을 피하는 조건을 고려해야 된다. 소위 ‘사환’은 혈지의 뒤 측면과 좌우의 산이 겹쳐 둘러싸여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가리킨다.
소위 ‘수포水抱’도 이와 흡사하니 혈지 앞에 물이 감도는 것을 가리킨다. 물은 연못, 시냇물, 강과 하천 내지 바다로 나눈다. 무릇 둘러싼 물로써 전체를 이룬 것이 상위가 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생기를 둘러싸서 안에 모으고, 길을 잃을 위험을 피할 있는 것이다. ‘사환’과 ‘수포’는 모두 생기를 모으기 위해서이다. 특히 ‘수포’가 더욱 중요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생기가 바람타고 흩어지면 고쳐 거둘 수 있으나, 물은 일단 집결하면 나아갈 수 없다. 만약 물의 생기를 둘러싸서 모으지 못하면, 생기의 작용을 막을 수밖에 없기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소위 ‘풍수’는 바람을 모으고, 물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용진’, ‘혈적’, ‘사환’, ‘수포’는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산에 들어가 용을 찾는 것이 첫 절차이다. 기복이 길게 이어지고 구불구불한 많은 산맥에서 산세의 대체적인 방향을 분별한 뒤 탁월한 식견으로 생기가 넘치는 진짜 용을 식별해내야 한다. 그 다음 다시 이 진짜 용의 방향을 따라 그가 멈추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그곳이 왕왕 생기가 모인 좋은 혈의 장소이다. ‘왕왕’이라고 한 까닭은 용맥이 멈추는 곳이 무조건 ‘혈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또 자세히 혈지 주위의 환경을 보아야 한다. 사환과 수포로 바람이 모인 곳인가?, 아니면 사비砂飛와 수주水走로 바람을 맞아 기가 흩어진 땅인가?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거주하거나 매장하기 합당한 좋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용 ‧ 혈 ‧ 사 ‧ 수의 설은 풍수술에서 제일 기본적인 원칙일 뿐이다. 만약 풍수가 좋은 곳을 살피려면, 용 ‧ 혈 ‧ 사 ‧ 수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풍수가들은 용 ‧ 혈 ‧ 사 ‧ 수 이외에도 조산朝山15) ‧ 안산案山16) ‧ 명당明堂17) 따위의 더욱 가치있는 연구를 살펴야 한다. 소위 ‘조산’은 혈과 맞은편의 멀고 높은 산이다. 그러나 ‘안산’은 혈 앞의 가깝고 작은 범안(책상)과 흡사한 산이다. ‘명당’은 ‘당국堂局18)’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주택과 묘지 앞으로 많은 물이 모이거나 혹은 생기가 모인 빈 땅을 가리킨다. 처한 위치와 형태의 크고 작음에 따라 소명당 ‧ 중명당 ‧ 대명당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소명당은 혈 앞의 희미한 경계의 통합을 가리킨다. 한 사람 크기만큼 용납되는 곳이다. 중명당은 혈 앞 산사山砂 안의 물이 흐라는 곳이다. 대명당은 혈 앞 산사 밖의 물이 흐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조산 ‧ 안산의 형태가 변화무쌍하다. 거기다 익힘과 탐구가 다르다. 그런데 그것이 있건 없건 큰 국면에서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명당은 다르다. 고대에 ‘산에 들어서 수구水口를 찾고 혈을 증명하면 명당을 만난다’이란 말이 있다. 이런 점에서 명당이 음 ‧ 양 주택풍수에 대한 주요성을 알 수 있다.
풍수술에서는 소위 ‘문봉文峰’ 혹은 ‘문필탑文筆塔’이란 말이 있다. 이 익힘과 탐구도 용 ‧ 혈 ‧ 사 ‧ 수의 설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문봉’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문봉’은 촌락 성지 부근의 산중에서 제일 높은 산봉오리이다. 그의 형태가 문인이 사용하는 붓과 너무나도 같기에 ‘문봉’이라고 했다. ‘문봉’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역의 동남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만약 한 지방에 ‘문봉’이 없으면, 그럼 해당 지역의 문인들은 공명을 얻기가 힘들다고 한다. 만약 이런 정황을 바꾸려면, 응당 ‘문봉’이 있어야 할 방위에 풍수탑風水塔을 세워야 한다. 즉 ‘문필탑’이다. 그러면 이런 결점 혹은 퇴세를 미봉 혹은 돌려 잡을 수 있다.
3. 양택과 음택
풍수의 책자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양택’, 죽은 후 매장하는 묘지를 ‘음택’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풍수가 좋은 곳은 모두 ‘용진’ ‧ ‘혈적’ ‧ ‘사화’ ‧ ‘수포’를 살피게 된다. 이와 대응하여 양택풍수 아니면 음택풍수를 구별하지 않고, 그 과정은 왕왕 용을 찾는 것, 사를 살피는 것, 물을 관찰하는 것 ‧ 혈을 점검하는 것 따위의 네 가지 절차가 있다. 용 ‧ 혈 ‧ 사 ‧ 수 네 개의 환경과 절기의 방면은 양택 풍수의 요구가 음택 풍수보다 비교적 높다. 일반적으로 음택 풍수와 비교하면 양택 풍수는 용이 더 길고 혈이 더 넓고 사 내의 각 봉과 혈의 연관이 더 밀접하고 물의 집합과 굴곡의 기세가 더 현저할 것을 요구한다.
양택 풍수는 큰 것으로 수도 ‧ 시와 읍, 작은 것으로 마을 ‧ 집인데, 우선 부딪치는 것이 토대의 선택 문제이다. 도시의 토대 선택은 용 ‧ 혈 ‧ 사 ‧ 수에 대하여 특히 용맥의 집결을 특별히 주목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는 서안 ‧ 낙양 ‧ 남경 ‧ 북경 따위의 역대 유명 도시가 소재한 위치를 조금만 주의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북경을 예로 하면, 그 땅은 전에 명(1368~1644) 나라 초기 주태朱棣(1360~1424)21)의 봉지였다. 후에 주태가 제왕이 되고 즉 성조成祖(재위 1402~1424)가 되어 나라의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천도는 정치상 ‧ 군사상의 고려 이외에도 풍수상 요소도 작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북경의 북침연산北枕燕山과 거용관居庸關은 서쪽으로 태행산太行山이 우뚝 솟아있고 동쪽으로 산해관山海關과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황하에 닿아 있어 중원과 기름진 들판 그리고 강산의 형세를 굽어보아 충분히 사이四夷22)를 제어하고 천하를 평정한다고 생각했다. 즉 ‘용 머리의 땅’ ‧ ‘만년의 수도’라고 칭했다. 바로 이런 생각은 이후 청(1616~1912) 나라에서도 그대로 북경으로 정하는 바가 되었다.
실용적인 시각에서 말하면, 양택 풍수 가운데 들판을 비교적 많이 주목하는 것은 보통 주택단지 설계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통 주택 단지는 두 개의 큰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산골짜기 광야의 주택단지, 다른 하나는 성시城市 정읍井邑의 주택단지이다. 풍수가들이 일반적으로 보통 주택을 이런 위치에 지을 수 있다면, 정말로 훌륭한 풍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왼쪽에는 흘러가는 물를 의미하는 청룡이 있고, 오른쪽에는 큰 길를 의미하는 백호가 있고, 앞에는 강과 연못를 의미하는 주작가 있고, 뒤에는 언덕을 의미하는 현무가 있다.’ 네 방위의 청룡(동쪽) ‧ 백호(서쪽) ‧ 주작(남쪽) ‧ 현무(북쪽) 따위는 각자 자기의 위치를 주관한다. 이런 위치는 자연적으로 풍수가 좋은 곳이다. 그러나 도시에서 이런 조건은 아마도 쉽지 않다. 생각해 보면, 도시에 인구가 조밀하고 건물이 즐비한데, 어디에 가서 언덕 ‧ 흘러가는 물과 같은 자연 환경을 찾겠는가? 풍수가들이 성시와 정읍의 주택에 대하여 전통적인 용 ‧ 혈 ‧ 사 ‧ 수 따위의 요소에 새로운 함의를 부여하여 응용을 가하는 까닭이 있다. 대체적으로 말하면, 자연 형태의 용 ‧ 혈 ‧ 사 ‧ 수 따위의 지세가 성시와 정읍의 주택에서 이미 각각의 용마루 ‧ 연못과 우물 ‧ 담벽 ‧ 가도 따위의 대응물로 연역하여 변화되었다. 즉 다시 말해서 성시와 정읍의 주택 풍수에서 특별히 용마루의 높고 낮음, 연못과 우물의 위치, 벽담의 형태 ‧ 가도의 방향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풍수가들은 주택 이외의 환경에 주목한 결과, ‘집 밖의 여섯가지 일戶外六事’23)을 조성했다. 도로와 거리 ‧ 연못과 우물 ‧ 뒷간 ‧ 희생 가축 우리25) ‧ 묘우 ‧ 교량 따위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만약 주택 옆의 도로와 거리가 비좁으면, 주택 안의 통풍이 이루어지지 않아 좋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을 부귀가 없는 주택이라 한다. 주택 옆에 제단 ‧ 분묘 ‧ 교량 따위가 있으면, 이는 위험한 살기가 있고, 사찰과 묘위 ‧ 기생 교육원 부근은 응달의 사특한 기운이 많게 된다. 주택 옆에 도살장 ‧ 변소 따위가 있으면 더러운 기운이 많게 되고 또한 부귀가 없는 주택이라 하는 따위이다.
풍수가들은 양택의 외형과 주택 밖의 환경을 주목하는 동시에 내부의 배열도 매우 중시한다. 풍수가들이 보기에는 양택의 내부 배열은 성시와 같고, 마을의 배열과 같다. 주택 내의 건축 모형은 자연계의 안산 ‧ 명당 따위가 비슷해진다. 예를 들면, 실내의 천정 모양이 명당과 비슷하다. 너무 넓어서 기가 흩어지거나너무 좁아 채광이 불리하게 된다. 넓고 좁음이 꼭 알맞아야 정기를 기르고 재물을 모을 수 있다. 안채 앞의 집은 안산이 되므로, 안산이 너무 높지 않아야 주객의 뒤바뀜26)를 면할 것이다.
만약 귀납한다면, 양택 내부 배열의 요점은 ‘집 안 여섯가지 일户内六事’27)로 파악할 수 있다. 즉 문 ‧ 천정 ‧ 청당廳堂 ‧ 상포床鋪 ‧ 부엌 ‧ 디딜방아 따위이다. ‘육사’의 강구는 방위와 관계가 많다. 그러나 방위에는 다시 8괘 방위28) ‧ 24 산악 방위 ‧ 8천간 방위 ‧ 6 관상 방위 ‧ 6 교체 방위 ‧ 4 묘지 방위 ‧ 태세 방위 ‧ 나가고 막는 방위 ‧ 죽은 기운 방위 ‧ 땅의 기운 방위 따위의 여러 종류가 있어 비교적 번거롭다. 여기에서는 하나하나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다.
그밖에도 양택 풍수가 주택의 내외 배열에 대해서는 얼마 정도 구체적인 보기가 요구된다. 예를 들면, 소위 ‘다섯 가지 실상五實’을 취하나, ‘다섯 가지 허상五虛’29)는 피했다. ‘다섯가지 실상’은 즉 주택이 작고 사람은 많다, 주택의 문이 크고 내부는 작다, 담장이 완벽하다, 주택이 작고 여섯 가지 가축은 많다, 주택의 배수구가 동남으로 흐른다 따위이다. ‘다섯 가지 허상’은 이와 반대가 된다. 즉 주택이 크고 사람은 적다, 주택의 문이 크고 안은 작다, 담장이 완전하지 못하다. 우물과 부엌이 제 자리에 있지 않다(즉 위치가 좋은 풍수를 얻지 못한다). 택지가 크고 집이 적다, 마당과 담장이 넓다 따위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다섯 가지 허상’의 주택은 사람을 가난에 쪼들리게 하고 ‘다섯가지 실상”의 주택은 사람을 부귀하게 한다.
풍수가들에 의하면, 음택 풍수와 양택 풍수는 같은 양상이다. 죽은 사람이 땅에 묻힌 후의 편안함 여부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고 죽은 사람 가족의 좋고 나쁨과 후세 자손의 재난과 복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삶과 죽음의 길이 다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세계는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모종의 신비성을 더 갖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사람의 세계에 대해 일종의 경외의 심리가 만들어진다. 이로 인하여 음택 풍수를 특별히 중시하게 된다. 사실상 고대 풍수 저술의 절대 다수는 음택 풍수를 연구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용 ‧ 혈 ‧ 사 ‧ 수 따위의 일반적 준칙도 최초에는 음택 풍수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음택 풍수는 양택 풍수와 비슷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음택 풍수가 산골짜기와 광야에 위치한다면, 용 ‧ 혈 ‧ 사 ‧ 수 따위의 요구는 만족하기 어렵지 않다. 만약 평원과 대지에 위치한다면 어떻게 이런 요구를 만족시킬 것인가? 이래서 소위 ‘평양용법平洋龍法’에 파급되었다.
평원과 대지는 고산과 준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설령 우연히 산등성이가 있다 하더라도 언덕에 기복이 많고 끊겨졌다 이어졌다 한 것이 많다. 이 때문에 만약에 용을 찾아 혈을 세우려면 다른 하나의 논법이 필요하다. ‘평원과 대양에서 발자취를 묻지 말고, 다만 물이 풍요한 것을 보거든 진룡인 줄 알거라’30) 다시 말하면, 평원과 대지에서 지세의 높고 낮은 기복이 선명하지 않으면, 용을 찾고 혈을 세움에 물의 힘을 주류로 삼아야 한다. 주류의 물으로써 용을 삼고, 물의 동서남북과 애워싼 곳을 혈로 삼고 혈 주위의 물의 힘으로써 땅의 힘으로 사를 삼아야 한다. 이래야만 생기가 모인,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풍수를 찾을 수 있다.
기타의 음택 풍수에 있어서, 구체적인 요청이 자연스럽게 많이 제기되었다. 두 세 마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세한 설명도 없이 음양풍수에 대하여 이와 같이 심혈을 기울리는 원인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런 고심에 대하여, ‘머리말’에서 원세개袁世凱(1895~1916)가 담벽을 허물고 용맥을 소통되게 한 사례를 통해 그 내용 일단을 대략 엿볼 수 있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명(1368~1644) 나라 말년 숭정崇祯(재위 1627~164
4) 황제와 이자성李自成(1606~1645)31) 사이의 한 차례 풍수 전쟁일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자성이 주도한 대규모 농민 봉기는 명 왕조의 강산을 위협하여 동요하게 했다. 숭정 황제는 전문가인 사람을 섬서미지陝西米脂에 파견하여 이자성의 선조 무덤을 파헤치게 했다. 이런 행위로 이자성의 힘이 나날이 향상되고 발전하는 생기를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첨예하게 대립하여 이자성이 농민군을 거느리고 안휘성 풍양 주씨風陽朱氏 집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숭정 황제 선조의 능묘를 태워버렸다. 그 결과 역사의 진실은 숭정 왕이 목을 매어 죽고 이자성도 후에 군대가 패배하여 사망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이런 결과의 원인이 그 풍수 전쟁의 그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풍수가들이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의 이런 신비한 관련에 대하여 풍수가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론으로 주도면밀하게 표현하게 된다.《청오선생장경》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인생]백년에 죽음을 맞게 되니 형체를 벗어나 본디로 돌아가고, 정과 신은 문으로 들어가며, 뼈는 뿌리로 돌아가는데 [그 뼈가] 길한 기운에 감응하여 많은 복이 사람에게 미치리라32)
그 대략적인 뜻은 사람이 죽은 후 신체는 사라지지만 정신은 멸하지 않고 무덤 안에 거주하고 만약 산천영기의 자양을 받으면 무덤 안의 마른 골격이 생기를 얻는다. 이렇게 일종 혼합을 거쳐 산생한 길한 기氣가 자손을 감응하고 엄호하고 돕는다.
탁명 곽박郭璞(276~324)이 지은《장서》가운데서 더 해명하였다.
부모와 자손은 본래 한 기운으로 같다. 서로 불러 감응한다. 마치 귀신의 복을 받은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천하의 이름난 묘가 존재하는 것이다...... 모양과 혈은 벌써 따르니 곧 산과 시내의 정수와 조화의 정영이 그 가운데에 응결하고 융합하였다. 진실로 그 정수를 훔치고 정령을 훔치니 부모가 남긴 유골이 융합의 땅에 간직하게 된다. 자손의 마음이 이에 기탁함으로 말미암고 그 마음의 위탁한 바로 인하여 마침내 함께 감통함에 능하니, 장래에 복이 이를 것이다. 사람을 알면 마음이 기운에서 통하고 기운이 하늘에서 통하니......오호라! 뼈를 장사지냄이 아니니, 사람의 마음을 장사지내게 된다. 산과 시내의 정령이 아니니, 역시 사람 마음이 스스로 정령일 뿐이다.33)
이 단락의 말은 산 사람 ‧ 산과 시내 ‧ 죽은 사람 삼자 사이를 기운을 통해 상호 교통하고 감응하는 관계를 매우 적절하게 설명하였다. 이런 교통하고 감응한다는 사상은 음택 풍수 관념의 최종적인 전거일 뿐만 아니라 풍수관념의 기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또 원시사유의 ‘호삼’과 무술의 ‘교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 않는가?
4. 풍수의 미분성
많은 향촌에서 사람들은 보통 풍수 술사를 ‘지리선생’이라 한다. 근년에 와서 건축학 영역의 학자들이 정밀하고 깊은 학술 성과를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하였다. 풍수술의 내적 핵심은 원래 고대 건축이론의 정화에 있었다. 풍수술은 고대 건축이 공간 환경을 정제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간 경관과 자연 경관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대규모의 건축들을 배치하는 천고의 수수께끼로 해답했다. 이로 보면 풍수술은 사실 지리학 ‧ 생태학 ‧ 경관학 ‧ 건축학 ‧ 논리학 ‧ 미학 따위의 종합성 ‧ 계통성이 매우 강한 고대 건축 설계 이론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풍수 실체의 모든 비밀에 모두 해답하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풍수술 가운데 새로운 세력이 돌연 나타났다.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는 것이 새로워짐을 느끼게 했으나 구체적 분석은 여기에서 소개할 필요가 없다.
다음은 풍수술 가운데 사용하는 도구인 나침반을 통하여 풍수의 미묘한 감성적 인식을 느껴 보기로 한다.
지남침. 고대에서는 나반羅盤 혹은 나경羅經이라 했다. 그러나 그 구조는 지금의 지남침에 비해 매우 복잡했다. 나반(지남침)은 자석 바늘의 지향 특성을 이용하여 방향을 확정하는 일종의 의식적인 도구였다. 그 이전에는 군사 ‧ 항해 따위의 영역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풍수술에서 음택과 양택의 아침 방향과 주택 내의 각종 그릇과 물건의 방위를 측정하려면 꼭 나반을 사용해야 했다.
나반과 종이 만드는 기술 ‧ 인쇄하는 기술 ‧ 화약의 발명 들을 합쳐 고대의 4대 발명이라 불린다.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먼 옛날의 황제黃帝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황제가 군대를 출동시켜 무장 반란을 일으킨 치우蚩尤를 토벌했다. 그 때 치우는 많은 군대를 활용하는 작전과 전법을 폈다. 삽시간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온 세상이 캄캄했다. 손을 펴도 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군대는 구름과 안개 사이에 포위되어 엉망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황제는 대신 풍후風后에게 북두칠성의 두병이 시종 북쪽 방향을 향하는 특성을 모방한 지남차指南車를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차의 위 방향은 하나의 쇠로 만든 작은 사람이었다. 차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막론하고 작은 철인의 팔이 시종 남쪽 방향을 가리켰다고 한다. 지남차의 동향패거리의 보조로 인해 황제의 군대는 짙은 안개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설화는 아무래도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설화는 적어도 우리들에게 나반의 기원과 응용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하한선은 전국 시기이다. 일종의 ‘사남司南’이라는 점을 칠 때, 나반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한비자》<유도편>에서 말하기를, ‘선왕은 사남을 세워서 아침과 저녁을 바로잡게 했다.’이라고 했다. 동한의 왕충王充(27~미상)은《논형》<시응편>에서 더 상세하게 ‘사남의 북두칠성 자루杓를 땅地에 던지면 그 뿌리柢는 남쪽을 가리켰다’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표’는 북두성을 모방한 숟가락 모양의 자석을 갈아 만든 것이고 ‘저’는 숟가락 자루이고 ‘지’는 점치는 판의 지반을 말한다. 학자가 고증하여 복원한 사남에 의하면, 지반에는 이미 팔괘 ‧ 간지와 28 별자리 따위의 내용이 있었다. 한대에 유행했던 점복의 식반式盤은 요즈음 지반과 비슷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남은 일종 점복의 성격을 지닌 자석의 성질을 지닌 지남이니 사남은 풍수 나반의 추형이다.
한대 이후 나반의 제작이 점점 정밀해 갔다. 나반의 표면의 내용도 점점 풍부해졌고 오행과 팔괘 ‧ 간지와 갑자 ‧ 절기와 방위에서 천문 역법 ‧ 주와 나라의 분야 따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수술 계통의 원리인 모든 요소를 모두 포함하였다. 그것들은 같지 않은 권역과 층차로 구분되었고 안에서 밖으로 균일하게 나반의 표면 위에 분포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반 표면의 권역과 층위가 많을수록 그 내용이 풍부하고 복잡함과 효용도 많게 된다. 다만 이런 흔히 보는 18 층차와 세 가지를 합친 나반으로 논하게 된다. 모든 층위의 내용은 용이 내려와 맥을 떠나는 사용 방법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전거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런 층차가 더 많고 내용도 더 풍부한 나반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반인에게 나반은 일종 과학 기구에 불과하다. 생각지 못하거나 혹은 그의 뒤에 이렇게 풍부한 문화가 내포되어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풍수에 대한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게다가 풍수의 운명이 마치 차할 것 같다. 그것은 우선 일종의 ‘미신’ 활동으로 보이고 그 다음 가운데 지리학 ‧ 생태학 ‧ 경관학 ‧ 건축학 ‧ 논리학 ‧ 미학 따위의 요소가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사실 일종 문화 산품과 문화행위로써 소위 ‘과학’과 ‘미신’으로 어떻게 뚜렷하게 구분해 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