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의약품 상자. 딱 그만했다. 끽해야 사슴벌레나 몇 마리 들어가 있을 법한 플라스틱 채집통이었다. 룸미러로 여자를 보며 물었다.
"그건 뭐에요?"
여자가 답했다. "뱀이에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여자가 멋쩍다는듯 웃었다. 투명한 채집통 바닥에 흙처럼 깔려있는 신문지. 붉은 뱀이 미끄러지듯 그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새낀갑네. 굵기가 볼펜심만한 걸 보니. 허허."
여자가 말없이 웃어보였다. 나도 한 번 웃어주고는 말했다.
"그럼 출발할게요."
이따금, 룸미러로 훔쳐본 여자는 꽤나 예쁘장한 편이었다. 귀여운 단발머리에 동그란 얼굴. 쌍커풀 진 큰 눈과 둥근 코입. 죄다 둥글어서 어쩐지 아이같은, 여려서 뱀 같은 건 사진으로만 봐도 기겁할 거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저 뱀은 어른이 되면 크기가 얼마나 할까. 너무 작아서, 룸미러로는 뱀이 보이지 않았다.
계기판의 화살표가 붉게 경고했다. 목적지까진 아직 멀었다. 여자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주유소 들러서 가스 좀 넣을게요. 아까 충전한다는게 그만.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러실 수도 있죠, 뭐. 그대신 천원 깎아주셔야 돼요." 여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뱀은 냉혈한들이나 키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나 보다.
"꽉 채워주세요." 차창을 내리고 말했다. 퀴퀴한 휘발유 냄새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LPG 미터기의 변화를 무심히 지켜봤다. 폐부를 채우는 노란 냄새. 딱히 싫지는 않다.
"아저씨, 아저씨." 여자가 내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 빨리 나가주실래요. 뱀이 이상해서요." 여자가 말했다. 굵은 실 같은 뱀은, 크기만 작을 뿐이지 테레비에서 보던 먹이를 먹는 모습과 똑같이 자기 꼬리를 먹고 있었다.
"아까 주유소 입구에서부터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차창 내리고 나서부터 이러더라구요. 검색해보니까 뱀이 제일 싫어하는게 휘발유 냄새래요." 당황스러웠다. 여자가 울먹이는 게 내 탓인 것만 같았다.
재빨리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냈다. 뱀은 어느새 4분의 1 가량 자신을 먹어치웠다.
직원은 연신 카드를 긁어대더니 말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기기 고장인 걸까. 3분의 2. 저 조그만 몸뚱아리에. 대체 내장이 얼마나 큰 거지.
직원이 영수증과 카드를 내밀었다. 난 사과 한 마디 없는 그를 노려보고 조용히 차창을 닫았다. 서둘러 시동을 걸고 엑셀을 밟으려던 찰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멈춰봐요." 웃음기가 싹 가신,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열이 전부 빠져나간 얼음 같은 목소리였다.
"아저씨, 이거 봐요. 어쩔 거에요." 여자가 채집통을 들이밀며 말했다. 뱀은, 얇고도 길었던 그 뱀은, 자기 몸을 몽땅 삼켜서 콩벌레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만약 살아있다면 똥은 어떻게 쌀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겨요? 아저씨 때문에 내 뱀이, 생명이 죽었는데?"
내 뱀. 생명. 여자는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이라 생각하는 권위적인 엄마와, 한 번도 생명을 빼앗아 본 적 없는 여린 사람처럼 말했다. 사과를 해야 할지, 그게 왜 내 탓이냐며 화를 내야 할 지 고민했다. 내 내적갈등에는 관심이 없는지 여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다정아. 어떤 븅신 같은 아저씨 때문에 뱀 죽었어. 몰라, 자살한 거 같아. 신기하긴 개뿔. 짜증나 죽겠어, 지금. 일단 내려서 다른 택시 타려고. 응. 집 앞에서 다시 전화할게." 통화하는 내내, 그리고 통화를 마친 순간까지도 여자는 날 노려보았다.
여자가 채집통 입구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은 마술을 하는 것처럼 열심히 무언가를 찾다가 마침내 장난감 총알만한 뱀을 집었다. 저걸 갑자기 왜. 가져가서 술이라도 담글 생각인가.
여자가 손을 귀 옆으로 가져가더니 무엇인가를 내게 던졌다. 미간이 따끔했다. 바닥에 날 때린 무언가가 떨어졌다. 언뜻 코딱지 같기도 한 그것. 뱀이었다. 뱀을 던지다니. 뱀으로 맞다니!
"가져가서 술이나 담가 먹어요, 아저씨." 여자가 차문을 열며 말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미간을 어루만지며 바닥에 떨어진 뱀을 응시했다. 저 작은 뱀이 혹시 내 두개골에 부딪혀 터지지는 않았을까. 만약 터졌다면, 뱀의 피는 파란색이란 말이 있던데 내 꼴이 우숩지는 않을까. 혹시나하고 미간을 어루어 만졌던 손을 확인해봤다. 손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아차. 뱀에는 세균이 많다는데. 서둘러 차에서 내려 주유소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