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동안 평택에 사시는 사촌시숙께서 충남홍성에 땅과 집을 하나 사 놓았는데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할지 잘 살려 리모델링을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고
남편에게 여러번 한번 와 보고 조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바빠지기 때문에 이번에 갔다 오자고 약속을 하고 길을 나섰다.
마침 시숙께서 말씀 하시는 곳이 참새님 친정과 멀지 않아서
그 댁도 주말에 나중에 집을 지으려고 사 놓은 터에 작업 할 일이 있어
홍성을 간다는 정보도 입수
남편이 시숙과 무슨 일을 하면 나는 참새님 따라가서
쑥이나 좀 뜯어 와야 하겠다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나섰다.
어차피 아주버님을 저녁에나 만날 것이고
만약 일을 하게 되어도 다음날이나 할 것이니 놀작거리며 홍성을 향해 갔다.
평택을 지나는 것을 보고 잠깐 잠이 들었더니 남편이 나를 깨웠다.
우리차는 진천 어디메를 지나고 있었는데 조금전 이정표에 김유신장군의 유적지가
있는 곳을 지났다며 잠깐 들려서 볼까 물었다.
나는 물론 봐야지 하고 대답했다.
김유신 같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유명한 장군의 유적지라는데
있을 때 보아야지 그것을 보자고 일부러 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한참 지나 왔기에 차를 돌려 유적지를 찾아 갔더니 아무것도 없는 공터고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김유신이 태어난 집터란 표시판만 하나 있어 우리내외 황당했다.
그래 아쉬워서 자세히 표지판을 읽어 보니 산쪽에 태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태실이 있는 곳에 대한 설명이 장황했다.
두세가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산성처럼 태실주위를 돌로 쌓았다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하나 밖에 없는 방식이라는 것 등이었다,
뭐가 하나 밖에 없는 것은 보아 두어야 한다.
잠깐이면 될 줄 알고 산을 올랐더니 한참을 헥헥 거리고 올라가도 뭐가 보이지를 않았다.
말 그대로 산길~
더군다나 나는 구두를 신어서 더 올라가면 뒤꿈치에 물집이 생길 것 같았다.
그 때 마침 산에서 내려 오시는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그 복장으로 가려냐고 물으셨다.
아마 내 구두를 의식하고 물으시는 듯 했다.
지도에 보니 멀지 않아서 나섰다고 했더니 산쪽을 가리키며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데
오고 가고 세시간은 걸려야 한다는 것
집에서 점심을 먹고 떠났고 그 때 이미 다섯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꼭 간다 해도 어림이 없는데 애저녁에 포기 하기로 했다.
그 대신 산을 내려 오다가 보니 연보정이라는 표시가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생각지도 않은 멋진 우물을 만났다.
지금 물이 많이 흐르지는 않지만 돌담을 높이 쌓아 만든 것이며
물병처럼 안은 넓고 앞이 좁은 형태가 멋지게 보였다.
아무것도 못 보고 갈 줄 알았더니 뜻밖의 수확이다.
워낙 가물고 물이 적어서 물맛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 옛날
신라를 호령했던 김유신 장군이 어린시절 이 물을 드시고 커
세상을 호령하는 멋진 장군으로 거듭났을 생각을 하니
천년의 세월을 지나 마치 그 분의 어린시절을 조금이나마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일부러 내 그림자를 넣어 사진을 하나 찍었다.
이 사진 한장을 가지고도 일기 한편을 완성할 수 있을만큼 이야기가 많다.
어떤이는 사진에 내 그림자가 들어 가면 사진을 잘 못 찍은 것이라 한다.
둘이 어디를 갔을적에 폼을 재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내가 그와 함께 있었노라고
표현하기 좋은 것이 바로 이 그림자이다.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도 알 수가 있으며 물이 어느방향에서 흐르는지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마터면 아무것도 얻지도 보지도 못하고 갈 것 같았지만
수확은 또 있었다.
그 돌틈사이에서 겨울을 나느라 붉은색 잎을 달고 노랗게 꽃을 피우는
꽃다지들도 만났다.
겨울을 나는 식물들은 조금이라도 햇볕을 많이 받으려고 잎을 붉은색으로
변화시킨다.
이 손톱만큼 작은 생명체들이 그런 삶의 노력을 하며 추운 겨울을 보내고
피워 낸 노란꽃들을 어찌 모른척 지나칠 수가 있으랴~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는 나에게로 와서 어여쁜 꽃이 되었다.
이 사진에 있는 꽃다지 두송이는 내 눈에 뜨거운 여름날
딱새부부가 기껏 열심히 먹이를 물어다 키운 새끼가 어느날 보니
자기 보다 다섯배는 큰 뻐꾹이가 된 모습을 우열종자가 생겨났구나
흐믓히 바라 보는 어미딱새와 새끼 뻐꾹이 같아 보인다.
세상은 알고 보면 복잡하다
그냥 담담히 받아 들이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렇게 여유자작 홍성을 향해 달려 가는데 만나기로 한 시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홍성을 못 가게 되었다시며 어쩌면 좋냐고 물으셨다.
남편은 할 수 없지요 알아서 하루 놀다갈께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침 참새님이 저녁은 어찌 할꺼냐
잠은 어디서 잘꺼냐 묻는 전화가 와서 여차저차 되었다고 했더니
그럼 언니댁도 다 왔으니 예산에 있는 추사 김정희고택에 들려
보라고 했다.
언니는 몇년전에 모놀에서 답사도 다녀 왔고 개인적으로도 갔었는데
갈적마다 무척 좋았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지도 않게 둘러 보게 된 추사 김정희선생의 고택
지난주에 다녀 온 외암마을에 추사의 처가댁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연결됨이 있어 더 좋았다.
우리가 도착 했을 때
햇님이 서산을 향해 달려 가는 중이었고 솟을 대문 창살로 내 비쳐지는
황금빛 볕이 아름다웠다.
한옥은 볕이 있을 때 더 아름답다.
그리고 한 낮 보다는 아침볕이나 저녁볕이 비스듬이 비출 때 더 빛난다.
대문옆 낮은 뜨럭에 여러가지 나무들이 있었다.
그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모란이 막 새순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동네는 아직 아무기별도 없는데 이 동네는 우리 보다 보름 정도는 빨리 봄이 오는 것 같다.
새순 나오는 것을 세어 보니 꽃이 20송이는 넘게 필 것 같다.
그 화사하고 향기로운 모란이 피면 얼마나 멋진 모습일까
모란이 필적에 또 와 보고 싶다.
지금 이만큼 꽃을 피웠으니 4월 말이면 그 탐스런 꽃을 피우리라
한옥을 마주 하고 서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런 한옥에 살지 않았어도 마치 살아 본양 그리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정교하게 문 살이 잘 짜진 창 보다 이렇게 이도 빠지고 약간은 비뚤거리기도 하는
창호를 바른 바깥창이 정겨워 보이기도 한다.
저 문살은 왜 이가 빠졌을까
식민지 시절과 전쟁의 때와 어려운 시절을 보내 왔을 우리네 역사가
저 이 빠진 문 살 어디메에 엮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한참을 바라 보며 혼자 소설 한편을 써 보기도 하였다.
나는 한옥을 가면 앞쪽 보다는 뒷쪽을 돌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쩐지 여자들의 공간이었을 뒤안~
작은 쪽문을 지나 간다.
그 공간 옆에도 키 큰 모란이 하나 자리 하고 있다.
보통 모란은 키가 커도 사람 아래정도인데 볕을 잘 못 받았을까
키가 문 위까지 올라 갔다.
삐걱이며 나무대문 소리가 난다.
그 뒤안에 고운 저녁햇살 받으며 매화가 피었다.
요즘에 와서 우리지역에도 매화가 있지만 어릴적 내 정서 속에는 없었던
설중매며 매화향 이런 것들은 어렵게 읽었던 옛 서적속에서나 상상했던 것들이다.
딱 이맘때가 좋은 때
꽃들에게도 사람에게도 다 때 라는 것이 있다.
열 아홉 처녀 같은 꽃봉오리들
그리고 막 참 생의 길로 들어선 순백의 꽃잎들이 면사포를
두르고 예식장으로 들어 서는 새신부 같이도 보인다.
작은 통로를 두고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뒷담벽이 예뻤다.
암기와 숫기와가 조화를 이루어 잘 얹혀진 기와 지붕이
예사롭지 않은 미술조각처럼 내 마음에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드리운 3월 초경의 봄볕과 그 그림자는 또 어떻고 ~
시숙께서 일정을 어떻게 보낼것인가 조금후 미안해 하며 또 전화가 와서
추사선생의 고택을 둘러 보는 중이라 했더니 뭐 볼것도 없어서 어쩌느냐고
걱정스레 말씀 하셨다.
볼 것이 왜 없을까
이렇게나 볼 것이 많아 해가 지고 있는게 너무나도 아쉬운데 말이다.
때로 나도 누구에겐가 그렇게 말한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 보는 관점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제부터나는 다른이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지 ......
관리를 하시는 분이 꽤 넓은 마당을 싸리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놓았다.
나는 참새님 내외가 도착하는 그 시간까지 이 마당에서 어린시절처럼 놀았다.
발꿈치를 땅에 대고 여덟방향으로 돌아 가며 꽃잎을 엮어
꽃도 만들어 보고 또 다른 모양도 만들어 보았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사람들이 디디고 간 발자국도 있었다.
하나 둘 셋 발자국이 손안에 다 있었다.
언제 쓸었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이들이 다녀 가지는 않은 것 같다.
해가 거의 뉘엿할 즈음에 참새님과 방앗간님이 오셨다.
홍성과 예산은 아주 가까워서 마치 이웃마을을 가듯이 드나 든다고 한다.
참새언니가 어디서 정보를 얻어 와 같은 마을에 화암사라는 암자가 있고
그 뒷쪽에 추사의 글씨도 바위에 새겨져 있고 암자 자체도 멋지다고 하여 같이 구경을 갔다.
암자는 일반 가정집 같은 느낌이었다.
그 앞에 오래 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윗부분은 작아 보이지만 아래 밑둥은 몇 아름이나 되었다.
나무들을 보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나무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특히 외곡된 역사 같은 것은 있을 수도 없을터 ......
암자 뒤로 병풍처럼 우뚝 선 바위들이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모습
큰 산도 아니고 평지 뒤편에 이런 바위들이 줄지어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거기에 추사 선생이 직접 암각해 넣은 글씨들이 몇편 있었다.
<천축고선생댁>
이 글은 추사가 연경에 다녀와서 스승의 대문에 걸려 있는 대련을 보고
떠올려 쓴 글이며 형서체로 기록하였단다.
조선후기의 선비들은 소동파를 석가모니와 동일시 할 정도였다고 ~
지금이나 옛날에나 어디에 무엇을 새겨 놓아
오래도록 볼 수 있게 하고픈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구나 싶었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옛날 사람들은 자기의 필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자기의 스승이나
유명한 이의 글씨를 받아와서 그대로 세겨 놓아 더 많은 이들이 감상 할 수 있게도 했다는 것이다.
사진은 안 찍었지만 이곳에 시경 이라는 글씨가 있었는데
추사가 연경에 갔을적에 스승인 담계로부터 받은 글씨를 후세를 위해
이곳에 그대로 세겨 놓았다는 것이다,
하기야 집안에만 잘 모셔 놓으면 몇이나 그 글을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병풍글씨를 감상하고 있다니 뒷산이 불그레 해 지며
해가 지는 듯한 기운이 산을 감쌌다.
동시에 가까이 있던 커다란 부엉이들이 마치 산짐승의 포효처럼 산을 울렸다.
누구랄것도 없이 우리는 뒷산을 향해 뛰었다.
평지의 노을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나는 더 뛰었다.
해가 저 앞쪽 우리가 서 있는 산 보다는 좀 더 높은 산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뒷쪽에 유명한 수덕사가 있다고 언니가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이렇게 해가 뜨거나 지는 모습 보는 것을 참 좋아한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은가
남편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나는 노을만 감상하였다.
해가 뜨거나 질적에 보면 세월이 참 빨리 가는 것을 느낀다.
아침해가 다 뜬뒤에 태양을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안도감에 게을러지기 쉽다.
하지만 막 뜰적에 보면 해가 쑥쑥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알차고
부지런히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고 지는 해를 보면서는 남은 생을 보람있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이 든다.
방앗간님은 내동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해에게서 눈을 안 떼고
노을드는 저녁해를 지켜 보았다.
그래서 우리가 하하 웃었더니 종일 햇볕을 받은 바위가 참 따뜻하다고 했다.
우리도 그곳으로 옮겨가 등을 대고 노을을 바라 보았더니 정말 따뜻하고 마음도 평안했다.
그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소년 소녀 같았다.
우리의 몸은 늙어 흰머리가 만발하고 얼굴에 주름도 늘어 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소꿉장난 하고 놀다가 따뜻한 바위에 몸을 기대고
노을을 바라 보던 어린시절의 그 마음이 아닐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아들>에 한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처럼 살아가라 . 그렇게 하면 행복해 질테니>
언젠가 나도 인생의 마지막에 아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그 아버지처럼 말하고 싶다.
후회하지 않고 아들도 나처럼 행복하기를 자신있게 권유하는 부모로 ......
저녁은 참새와 방앗간님의 지인께서 사 주셨는데 예산의 유명 먹거리인
곱창을 사 주셨다.
졸지에 모르는 이에게 신세를 지고 참새님 친정으로 가 하루 신세를 지기로
밤 열시가 다 된 시간에 도착했더니 참새님 부모님께서 어아니벙벙 하시며
거실에 보일러를 넣어라 이불을 깔아 두어라 야단이셨다.
언니가 우리도 올 수도 있다고 이야기도 해 두었고
다음날 새벽부터 일을 간다고 했었다는데
엄니는 다른 것은 다 잊어 버리시고 그 일하는 날이 당일인 줄 알고
아침부터 밤 삶고 달걀찌고 종일 기다리셨단다.
저녁을 잔뜩 먹어 배부른데도 엄니께서 내 주시는 밤참을 사양 못하고
또 배가 욕하게 많이 먹었다.
아침
날도 새기전에 방앗간님은 포크레인을 불러 일하신다고 나가시고
남편 아무렴과 참새님 아버지는 안방에 앉아 큰 소리로 이야기 장단이시다.
외지에서 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시골에서는 큰 재미꺼리일 것이다.
한단에 3천원을 주었다나 언니가 사 온 봄동으로 겉절이를 하고
생선도 구었는데 그릇에 무치다 말고 엄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복잡햐~>
그러더니 어딘가로 가셔서 오시지를 않았다.
뭐가 복잡하다는 것일까
내가 무엇을 복잡하게 했을까 ?
양념도 최소한으로 넣었고 귀찮아 하실까 깨소금도 안 찾았는데......
조금 있다가 보니까 좀 넓은 양푼을 가져 오셨다.
말씀인 즉슨 겉절이 무칠 그릇이 너무 작아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바로 준비하여 점심꺼리를 가져 왔는데 비쥬얼로는 한 열사람
일꾼을 얻은 것 같다.
큰 다라가 두개 가스렌지 냄비도 세개나 된다.
사실 일꾼은 포크레인 기사 한사람이다.
그래도 점심을 준비해 주어야 하니 그렇게나 준비할 것이 많은 것이다.
시골에는 먹는 사람이나 준비한 사람이나 고기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열가지 반찬을 했더라도 고기 한가지를 안했으면 돌아와서 그렇게 말한다.
심지어 남편 아무렴도 남의 일을 갔다 와서 내가 점심에 뭘 주더냐 물어 보면
<뭐 대충 김치하고 그런데 고기는 없던데 ......>
우리내외는 기왕 왔으니 언니네도 없이 놀러 다니기도 그렇고 하여
나는 쑥을 뜯고 남편은 팔을 걷고 아버님과 함께 밭 주변을 정리했다.
아버님께서 그 먼데서 와서 일을 해 주어 고맙다고
그 거리가 얼마냐며 무척이나 고마워 해 주셨지만
사실 우리는 거름지고 장에 온 격이다.
이것도 원님덕에 나팔불었다 해야 하나
한명의 일꾼덕에 참새님내외며 부모님내외 그리고 우리내외
천렵 온 것처럼 따뜻한 봄볕을 맞으며 들밥을 먹었다.
햇볕이 따뜻하여 전혀 춥지가 않았다.
풀관리가 쉽지 않아서 집터는 완전 산처럼 되었다.
그래도 1년에 한번은 풀을 깍아 주었다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처럼
온통 풀밭~
포크레인이 오전 내동 풀을 걷어 내고 높은데를 끌어 내 낮은데를 메우고 났더니
멀끔한 밭이 들어 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노는 땅이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사실은 집에서 시숙 드리려고 토종감자를 가지고 왔었다.
두 상자를 가져 왔었으며 한 상자는 언니네 드시라고 가져 왔었다.
생각해 보니 그걸 이 땅에 심으면 땅을 안 놀려도 되고
여름에 감자도 나누어 먹을 수 있으니 좋을 것 같아 감자를 심자고 제안했다.
언니도 생각해 보더니 그러면 좋겠다고 하여 집으로 가서
감자상자를 가져 오고 퇴비와 멀칭할 비닐도 가지고 왔다.
언니네가 사 놓은 땅은 예산군에 속하고 친정은 홍성이지만
차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이다.
그리하여 졸지에 일이 또 시작되었다.
포크레인은 땅심 좋은 땅을 뒤집어 골을 만들어 주고
남자분들은 괭이와 삽으로 돌도 골라 내고 나무 뿌리도 걷어 내 옥토를 만들었다.
나는 엄니와 감자눈을 땄는데 그도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언니는 탈락되었다.
엄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일을 하다가 뭔 말씀인지 이해가 안가서 나중에보니
참새언니가 계속 중간에서 통역을 해 주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에 울타리콩 씨를 잘 못 길러서 완전 씨를 지웠다.
그래서 엄니께 울타리콩 씨를 조금만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봐서>
하고 짧게 말씀하셨다.
울타리콩씨가 있다는 말씀을 들은터라 당연 주실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말씀 하시니 나는 좀 벙떴다.
내가 뭐가 맘에 안드시나 먼저 드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봐서 - 내 논리로는 그렇다
네가 하는 것을 봐서 맘에 들면 주고
맘에 안들면 안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랬더니 눈치 빠른 참새님이 중간 통역을 했다.
그것은 그런 뜻이 아니고 집에 있는 울타리콩씨를 가서 보고
남을 주어도 되겠나 검사를 해 보고 결정을 하겠다는 뜻이란다.
그 때에 나는 아무래도 나 자신이 피해의식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엄니는 당신의 주장이 확실 하셨다.
감자 눈 따는 것에 있어서도 강원도는 감자농사를 많이 하는 곳이고
몇백평 몇천평을 하니 쉬운방법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드려도 영 엄니의 전통고집을 세우셨다.
어쪄면 평지와 산골이 다를 수도 있겠다 싶어 내 방법 말고 엄니의 방법을 따랐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엄니가 내가 산골사람이라 영 뭘 모른다 생각하시나 보다 했더니
엄니께서 맞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참새님 부모님은 두 분다 귀가 어두워지셔서 말을 크게 해야 하는데
이럴 때는 내가 혼잣말처럼 했는데도 금방 알아 들으시고
지난번 내가 장끔도 모르는 맨재기라는 말씀을 하셔서
참새언니와 내가 자지러졌다.
지난번 명절무렵이던가 언니가 친정에 내려 갔더니 엄니께서 들깨를 몇말 해서
팔아 달라고 다 짜다가 놓으셨단다.
농산물은 해마다 가격이 달라서 올해는 얼마에 파나 하고
카페 농산물 판매방을 뒤져 내 판매기록을 보았더니
내가 깨 짠 시공도 안 나오게 싸게 내 놓아 깜짝 놀라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회원제나 마찬가지라 싸면 싼데로
비싸면 비싼데로 거의 같은 금액을 받는다고 했더니 엄니가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그이가 산골에 살아서 장끔도 모르는 가 보다고
세상물정을 그렇게 모르고 어찌 장사를 하느냐고 혀를 찼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언니가 오늘 다시금 그 원리에 대해 설명을 했다.
<엄마 이 친구는 농사해서 가격이 싸도 그 가격
비싸도 그 가격에 팔아 >
했더니 어머니께서 펄펄 뛰셨다.
그럼 시중 금이 비쌀 때야 그렇지만 쌀 때는 누가 사겠느냐 물으셨다.
<그래도 이 친구한테 사는 사람들은 비싸도 그냥 믿고 의리로 사는 거야 >
하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이 똥그레지셔서 혀를 끌끌 차시더니
<그럼 그덜도 장에를 못가나 벼> 하고 말씀 하셔서
참새님과 내가 뒤로 나뒹굴뻔 했다.
만화에서 보면 뭐가 어이가 없고 황당할적에 뒤로 나자빠지는 그림~
엄니는 내가 엄청난 산골에 살아서 장에도 못 나오고
세상 물정이 비싸졌는데도 모르고 옛날 값을 받는 세상 촌년으로 인식하신 듯
나에게서 도시인들에게서 나오는 뭔가 모를 위기의식 같은 것은 아예 내려 놓으신 듯 싶었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리셨다.
<아니 장 끔도 모르고 살만치 산골이면 들기름을 또 어떻게 짜러 나오고
사려면 또 어떻게 한데......>
보통의 농사꾼들은 농사를 지어 판매하는 곳이 장이다.
장에서 거래 되는 것이 곧 장끔인데 누가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지나면서 인사로 이렇게 말한다.
<장 끔 보러 가세유?>
그러니까 장 끔을 얼마나 잘 아느냐에 따라 꼭 장에 안 팔더라도
더 유리하고 현 시세로 팔 수 있는 것이니 시골의 정보는 곧 돈이다.
언니는 혼잣말로 우리엄마가 금자가 얼마나 유명한지를 어찌 알것이냐
하고 말하며 한참을 웃었다.
아마 한달 웃을 것을 다 웃은 듯
참새님 댁에 다녀 온 후로 이 일기를 시작해 놓고
이 부분에 와서 사흘도 넘게 글을 이어가지 못했다.
분명히 너무도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넘어가고 했는데
그것을 표현 하려니 영 그 상황이 아니었다.
욕심은 있어서 어찌하든 그 상황을 좀 멋지게 묘사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포기
말을 글로 쓰지 못하는 그 아쉬움으로 전문 작가들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다행히 사람이 많아서 감자는 금방금방 심어졌다.
한팀은 감자를 놓고 한 팀은 비닐을 쒸우고
어딜 가서 일 만들기 좋아하는 나 때문에 정말 큰일이다.
나도 그런 나를 말릴 수가 없으니 되는대로 살아야지 뭐~
제법 그럴듯한 감자밭이 만들어졌다.
강원도 산골의 토종감자가 뿌리를 내리고 하얀꽃을 피워내어
뜨거운 여름날에 분나는 감자로 만날 수 있기를.
참새님네는 아직까지 이곳에다 집을 지을지
더 마음에 드는 땅이 나오면 이주할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기왕 온 김에 시숙댁 집터 보아주려고 가지고 왔던 수맥기를 가지고
물 나오는 곳을 표시해 드렸다.
모두들 생각지 않게 애 썼다고 방앗간님이 홍성한우로 저녁을 내셨다.
부모님들은 안 가신다고 우덜이나 먹고 오라고 하셔서 정유점에가 사가지고
집에서 같이 먹었다.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정신없이 먹었다.
감자가 다 잘 큰다고 해도 장에 내다 팔면 오늘 먹은 고기값도 안 나올 것이다.
언니의 아버지께서 강원도 산골에 사는 우리와
안양 시내에 사는 참새님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를 정말 모르겠다고
또 말씀 하셨다.
몇년전에 왔을적에도 하시던 말씀이셨다.
그래서 내가 참새언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 누구나 다 안다고 했더니
그럼 그렇게 유명한데 텔레비젼에도 안 나오느냐고 하셨다.
언제 언니도 부모님을 위해 텔레비젼에 나와야 할 것 같다.
그 밤에 우리가 집으로 간다고 했더니 부모님께서 적극 말리시더니
나에게도 있는 양파엑기스며 새로 움 돋은 쪽파 등을 챙겨 주셨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쌀을 주신다고 후레쉬를 들고 밖으로 나가시기에
우리집 창고에 가을까지 먹을 쌀이 있다고 사양하였지만
두분이 마음 맞춰 하시는 말씀에 폭풍 감동~
그건 그 쪽 사정이고 수고하고 밤길 가는 딸 친구에게
쌀 한자루 내 주는 것은 아버지 마음이라셨다.
두 분께서 기어이 쌀 한자루를 차에 실어 주시며 마음 흐믓해 하셨다.
봐서 주시겠다던 울타리콩씨는 내 해석대로
내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엄니의 해석으로
남 줄 정도로 실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얻지 못하였다.
때로 내 생각과 계획과는 다르게 일의 방향이 달라지지만
그것은 우리의 대처에 따라 기억될 만한 멋진 오늘이 될 수도 있다는
삶의 교훈들을 얻었다.
첫댓글 이 일기를 보며 할 말이 참 많은 걸 느낍니다.
천안과 진천 사이에있는 만뢰산(萬竹+賴山)은 정감록에 전란을 피할수 있는 조선의 10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만뢰'라는 말은 莊子에 나오는데 '자연에서 나는 온갖 소리'를 말합니다. 삼국이 충돌하던 시대의 군사요충지로서 한때
김유신 장군은 아버지 김서현이 이곳에 근무할 때 만명부인에 의해 탄생한 것이지요. 물론 유적은 별로 없고 조금 더
올라가면 연꽃처럼 핀 보련산(寶蓮山)가운데 보탑사라는 봄꽃이 아름다운 절이 있고 우리나라 전통 목탑을 재현해 놓은
것을 볼수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들러 보세요. 예산 곱창을 드셨다고 하는데 삽교곱창이 알려져 있고..
그렇지님이야 산나물박사로 자타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어느 책에서 보니 예산 덕산뜰에서 나는 나물이 전국에서 가장 맛있다라고 했더군요.
지나다 보면 '들밥'을 파는 집도 보이는데 오래전 조그만 공사를 하던중 누가 '국수댕이'라는 나물을 뜯어왔는데
그 향기로운 된장국의 맛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홍성은 충신열사가 많이 난 지방으로 유명하지만 우스개소리로 청와대 빼고는 다 있다고들 말하지요.
자고로 산골쌀 보다는 평야지대의 쌀이 맛이 좋은 법인데 옛부터 이 '내포지방'은 권세가들이 자리를
잡고 산물을 조달한 곳. 추사 가문도 마찬가지인데 화암사는 그 집 문중원찰로 추사의 글씨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다락에 걸려있던
@이보 坐花醉月(꽃속에 앉아 달빛 더불어 취하다) 멋진 초서 글씨가 생각납니다.(원문은 이백의 글)
뒷산은 낮아도 올라보면 예당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추사가 젊은 시절 여기서 즐겨 논 듯. 끝자락에 가면
소봉래(小蓬萊, 작은 금강산)란 각서도 있지요. 참, 각서중 詩境이란 글씨는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의 글씨가
아니고 남송시대 육유(陸游)의 글씨라는 설이 있었으나 요즘은 추사 선생의 친필이라는 설이 우세합니다.
이십여년전 쯤에는 풍골이 좋은 노스님이 절을 지키고 계셨는데 지금은 안 계실 것 같고 추사고택과 더불어
이곳이 명당임을 실감케 하는데 선생의 후손이 끊겨 제사도 부근 청화재 스님이 대신 치루는 실정이더군요.
@이보 아래 장미님도 추천 하신것을 보니 보탑사를 꼭 다녀와야겠네요
고맙습니다
이 댓글들은 저 혼자 보기 정말 아까운 글이네요
제 카페에 공유해도 될런지요?
@그렇지 제가 가서 달겠습니다.
@이보 카페지기만 글을 올릴 수 있어서 추가글을 하나 쓰려구요
참새님과 방앗간 님도 이보님을 뵙고 싶어합니다
가끔 좋은 글 도란도란 사랑방에 올려주세요
만뢰산 이정표가 반갑더군요
진천 보탑사 옆에 있는 산인데, 늦은 시간이 아니고 등산화만 신었다면 예쁜 산이예요
험하지도 않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걸요
추사고택도 많이 간 곳이고
걍 좋은 곳
약속이 취소되었는데도 만날 분이 계셔서 천만다행이었고
딸이 귀하기에 그 친구는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께서 계신 참새님과 방앗간님은 좋으시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마음
자 ~~~ 알 알 것 같사옵나이다
봐서 주겠다고 하신 콩 씨는
잊어버려 못 주신 듯 하네요
시차 적응이 안 됐는지
밤이 되면 잠 잘 생각을 안 하네요
홍성 한우도 알아주는군요
좋은 여행 마시셨네요 ..
장미님 여행 잘 하고 돌아 오셨네요
건강히 돌아 오셔서 고맙습니다
얼굴을 한번 뵙고 났더니 훨씬 더 좋으네요
가끔 만나 뵐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 ㅇ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