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 고수와의 디너타임⑬
전업 화가야말로 영원한 현역이죠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13호(2018. 2. 9)
민정기(20회, 69세)서양화가
이달의 ‘동문고수와의 디너타임’은 화가편이다. 총동창회가 초청한 동문고수는 20회 민정기 서양화가이다.
민정기동문은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전업화가로, 30여년에 걸쳐 여덟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기획전·단체전에 참여했다.
2006년 18회 이중섭 미술상을 받았고 현 서미모(서울중·고 미술인모임) 회장이기도 하다.
패널로는 서미모의 후배회원들이 참여해, 이날 디너타임은 자연스레 서미모의 신년회 자리로 이어졌다.
· 참석자: 민정기(20회) 화가·서미모 회장
정영목(25회) 서울대미대교수
지명문(30회) 갤러리비하이브대표
조경득(32회) 서원대미대교수
서용(34회) 동덕여대미대교수
· 진행·정리: 이필재(29회, 편집인)
· 일시/장소: 2018.1.30저녁7시/ 인사동 선천
“서울 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을 꾸준히 했던 게 인연이 돼 평생 전업화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는 450여 명의 고교동기 중 고작 한 두 명이 미대에 가던 시절이었죠.”
민정기 서양화가는 미술반 활동을 하는 동안 좋은 선배를 여럿 만났다고 회고했다. 이우범(15회)화백, 한운성(17회)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 같은 분이다. 미술반장을 지낸 이화백은 그가 서울 중1학년때 고3이었다고 한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출신인 그는 고2때부터 신문의 시사만평과 월간지<학원>, <아리랑>, <소설계>에 삽화를 그렸다고 한다. 민 동문은 서울 중1학년때 어머니의 권유로 미술반에 가입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서양문물에 일찍 눈뜨셨고 외삼촌이 그림을 좀 그리셨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집에 청화백자도 꽤 있었어요. 그림에 대한 관심은 어머니 쪽 기질로, 말하자면 외탁을 했다고 할 수 있죠.”
+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뭐가 좋습니까?
“영원한 현역이라고 할까요? 화가로 살면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할 일이 있어요. 제가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입니다. 이 나이에도 작업실 환경을 개선하고 작품구상을 합니다. 갤러리 측에서 전시회에 대해 상의를 해오고요.”
92세에 세상을 떠난 20세기 최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는 나이 일흔에 한국전쟁의 참상을 담은 대작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했다.
+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보람이 뭔가요?
“그림에서는 좋은 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림을 가까이하면 마음이 안정되게 마련이죠. 특히 세화(歲畵·새해를 송축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그린 그림)가 그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변에 그림을 나눠드리면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올 한 해 잘 지내시라는 뜻으로 그려 선물하는 소박한 그림이죠. 이런 기복도 그림의 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그 동안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 순으로 열점의 세화를 직접 그렸고 나머지 ‘술해’까지 그리고 나면 이번엔 판화로 만들어 주변에 돌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웬만한 건물이 지어지면 로비 같은 곳에 그림을 거는 것도 그런 뜻이리라. 건물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기를 받아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라는 의미.
+ 살아오시면서 이른바 ‘인생결단’으로 무엇을 꼽으시겠습니까?
“서울 고 시절 여름방학 때 미술반의 계성근 선배, 김문환(20회) 동기 등과 무전여행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 다 자유로운 영혼이었죠. 무전여행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돈을 챙겨왔는데 저는 무일푼이었어요. 그러고 거지꼴이 돼 돌아오니 어머니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 인연이 그 후로 계속 이어졌고, 그 여행 덕에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어요.”
그는 홀어머니 슬하 2남1녀 중 막내였다고 한다. 성적이 안 나오면 어머니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시절 그로서는 큰 일탈을 한 셈이었다.
“그 친구들이 저를 보면 ‘꾸준히 그림 그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인다’고합니다.”
그는 서울대 회화과 시절 연극 반에 가입해 배우로도 활동했다. ‘1987’에 안기부장 역으로 특별 출연한 문성근씨가 학교는 달랐지만 그와 68학번 동기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능의 세계는 또 그렇게 흘러가더라고요.”
그는 대학졸업 후 70년대 선화예고 등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그 후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 때 동인으로 참여해 해체될 때까지 활동했다. 박정희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죽고 전두환 정부가 들어선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그는 엘리트화가로서 민중미술운동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말하자면 문화운동권이었던 셈이다. 그린 그림 때문에 모처에서 찾는 전화가 걸려오고 불려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몇 년 전 같으면 블랙리스트에 오를 활동을 한 셈이죠. 문예진흥원에서 현실과 발언 동인전을 했는데 대관을 해주고도 전시실에 불을 안 켜줬습니다. 힘든 시절이었죠.”
그 후 시대상황이 변하면서 동력을 잃은 현실과 발언은 해체된다. 동인들은 저마다 자기 길을 갔다. 어쩌면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 그는 양평으로 내려가 풍경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름대로 힘들었습니다. 그 시절 몇 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어요. 저에게 창작이란 존재와 욕망이 걸린 일이었죠.”
양평에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매일 아침 태극권을 가르치는 사부는 인권변호사로 간첩조작사건이 전문이라고 했다. 그 무렵 최종현 전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를 만난 덕에 국내외 답사여행을 많이 다녔다. 많이 걸은 덕에 아직도 술을 벗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전업화가로서 한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시절을 그는 ‘손님’ 등 황석영의 신문소설에 삽화를 그려 이겨냈다. 5년가량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황석영 소설에 삽화를 그렸다. 그런가 하면 그가 이중섭 미술상을 탔을 땐 자신과 성향이 다른 조선일보(미술관)가 주는 상을 받았다고 황석영 작가가 자신의 소설에 삽화를 그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 화가 후배, 화가지망생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주시겠습니까?
“과거보다 미대 입시경쟁이 더 치열해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더 해볼만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전업화가가 되기 위해 꼭 미대를 나와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서울고 터 경희궁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로비엔 ‘서울’이라는 타이틀의 화려한 대형 채색벽화가 걸려있다. 그가 감독으로 참여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 다시 태어나도 화가의 길을 가실 겁니까?
“다시 태어나다니, 아니 어떻게 다시 태어나요? (웃음) 늘 새로운 작품을 구상합니다. 내일은 이렇게 접근해봐야지,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답사도 하죠.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고, 그런 과정이 저는 재미있습니다.”
그는 늘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아내보다 생각이 분명한 거 같다고 말했다.
“이 나이에 이러고 살면 복 받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