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가을 심령부흥회 / 이지웅 목사(11/8 화요 저녁)
말씀 : 에베소서 2:1-3
제목 : 그 때에 너희는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장을 오늘 우리가 살펴볼 텐데요,
에베소서 1장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에베소서 1장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지요.
1장 1-2절은 인삿말입니다.
1장 3-14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특별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각각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언급됐다고 말씀드렸어요.
1장 15-23절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네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 하나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십시오.
*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우리에게 베푸신 그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하나님 깨달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1장은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요.
인삿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행한 사도 바울의 기도
2장은 굉장히 재밌습니다.
2장은 1절부터 22절까지 되어 있는데, 2장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해라 그러면, 이전과 이후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만일에 영어로 말한다면, Before & After가 되겠지요.
이전과 이후
성형외과에 가면 사진이 걸려 있어요.
성형 받기 전의 모습과 성형 받은 이후의 모습.
그런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데, Before & After로..
이 2장의 내용은 이전의 모습은 어땠는데, 이후의 모습은 어떻게 됐습니다. 라고 나뉘어져요.
그래서 2장의 제목을 대개 많은 사람들이 Before & After 이렇게 정하지요.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면, 2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가 있어요
2장 1-10절,
2장 11-22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어떻게 다른가, 2장 1-10절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이전과 이후입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구원 받기 전의 모습은 이랬는데, 구원 받은 다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2장 1-10절의 모습이라면,
2장 11-22절은 공동체의, 교회로서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이 나눠지게 돼 있어요.
이렇게 우리가 제목을 잡을 수가 있겠지요.
개인과 공동체,
우리가 오늘 이 부분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2장 1절부터 3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구원 받기 전의 모습이 1절부터 3절에 언급되어 있어요.
구원 받기 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 잠깐 보실까요?
저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13 서신, 저는 엡 2:1절부터 3절을 말하고 싶어요.
이 부분은 읽을 때마다 이 내용과 문장의 형식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집니다.
제가 시간이 되는데까지 설명해 볼 테니까 한 번 보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2장 1절부터 10절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구원 받기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으로 나뉘어집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모습은 1절부터 3절입니다. 어떤 모습인지 한 번 보시죠.
(1절)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여러분, 이 표현을 꼭 한 번 기억해 보세요. 우리는 이런 표현을 많이 쓰지요.
기도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란 말을 많이 써요. 그건 맞아요.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게 기도하셔도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러나, 사실은 아니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니라,
2장 1절에 의하면 이미 죽은 죄인입니다. 완전히 차이가 있지요. '거의 죽을 뻔한, 죽어가고 있는, 거의 죽은'이 아니라, 이미 죽은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어, 죽을 뻔 했어. 거의 죽어가고 있어. 거의 죽었어.
그래도 소망이라도 있지요. 아직 죽지 않았어요.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뭐냐면은,
"아니야, 너희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어"라는 것입니다.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어떤 가능성도 없어요.
사실은 기도할 때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셔도 사실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니님, 이미 죽은 어떤 소망도 없고 완벽한 절망과 어둠과 심판 가운데 놓인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성경에 맞겠지요.
구원 받기 전의 모습은 어땠나요?
어떤 소망도 없어요. 어떤 가능성도 없어요.
완벽한 절망 가운데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2절 보세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 [그 가운데]라는 말은 1절에 말했던 허물과 죄를 말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 받기 전의 모습은 어땠나요? 허물과 죄 가운데 행했던 사람예요. 여러분, 여기서 "행하여"라는 말에 한 번 동그라미 쳐 보세요.
*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 원 뜻은 시장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을 못 찾았어요.
내가 이 물건을 사야 되는데, 이 물건이 없어요.
내가 오늘 저녁에 내 가족들을 위해서 생선을 사야 되는데, 그 생선이 없어요. 그래서 그 물건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시장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바로 이 "행하여"라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물건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 헤매는 모습이 바로 이 "행하여"라는 단어예요.
그러므로, '아, 어쩔 수 없었어요. 하나님, 내가 어쩔 수 없어요.'
* 어쩔 수 없이 지은 죄는 이 세상에 어디도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예요.
내가 그 죄를 바라봤어요. 내가 그 죄를 짓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내가 그 죄를 범한 것이예요.
"하나님,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어쩔 수 없었어요." - 아니요, 그건 거짓말예요.
마치, 내가 그 물건을 찾아 헤매듯이 내가 죄를 찾아 헤맸다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에 수동적으로 범하지 않았어요. 능동적으로 범한 것이예요.
"내가 그 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죄를 범한 것이다"라고 성경이 말한 겁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 이 다음은 더 기가 막혀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 이 세상의 풍조들, 상식들, 하나님을 대적하고 높아져 있는, 그 거역해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따라다녔던 사람예요.
심지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마귀와 사탄)을 우리가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냐면,
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사랑하고 좋아하므로 따라다녔던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또 어땠나요?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그 마음의 원하는 모든 죄악을 서슴없이 말하고 행했던 사람들이 바로 2장 1절부터 3절이 말하는 구원 받기 전의 모습입니다.
구원 받기 전의 모습은 우리가 죄를 좋아했던 사람들예요. 죄를 따랐던 사람들예요.
죄를 일부러 적극적으로 지었던 사람이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으며, 하나님 없는 삶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이었어요.
그것이 2장 1절부터 3절에서 말하는 구원 받기 전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그냥 읽어 보기만 하셔도 알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기가 막히죠.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감탄해요.
2장 1절부터 3절의 말씀을 표현함에 있어, 즉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을 대적한 삶,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그 죄 된 삶을 묘사할 때에,
잘 들어 보세요..
2장 1절부터 3절의 문장을 한글성경과 달리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두 가지가 없습니다.
잘 들으세요..
한글성경에는 있어요. 그러니까 이 번역이 좀 아쉬워요.
이 2장 1절부터 3절의 문장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문장에서 반드시 있어야 되는 두 가지가 없어요. 그것은 바로 주어와 주 동사입니다.
여러분,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어요.
2장 1절 보세요.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한글성경에는 "그는"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라어 성경으로 2장 1절부터 3절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주어가 없어요. 동사가 없어요.
"무슨 문장이 이래? 무슨 문장이 이럴 수가 있어."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주어가 없어요. 동사가 없어요.
저는 이 2장 1절부터 3절에 나오는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왜요? 2장 1절부터 3절은 무슨 내용이라구요?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예요.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삶이예요.
저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부분을 글을 적을 때에, 일부러 주어를 생략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일부러 동사를 적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어 없는 문장, 동사가 없는 문장을 읽으면, 이게 찝찝해요.
이게 무슨 말이야? 문장이 왜 이래?
문장이 온전하지 않아요.
하나님 없는 삶이 꼭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어요. 어지러워요.
그리고 나서는 이 2장의 주어가 첫번째로 등장하는 곳이 어딘가? 3절을 지나 4절에서 이제 첫번째 주어가 언급됩니다.
그 하나님 없는 삶, 세상의 풍조를 따르며 어지럽고 혼돈스러운, 하나님과 단절된 그 모든 삶을 다 묘사한 다음에 드디어 이 2장에 첫번째 주어가 4절에 나와요.
그 첫번째 주어가 무엇인지 한 번 보십시오.
(4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이것이 첫번째 나온 주어입니다.
2장에 첫번째 주어는 1절에 나오지 않고, 2절과 3절에 나오지 않고, 첫번째 주어는 4절에 나옵니다.
그 주어는 누군가, 무엇인가, 하나님입니다.
그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 없는 삶 가운데 임하자,
그 어두운 삶이 순식간에 빛으로 바뀌어요. 무질서했던 삶이 순식간에 질서로 바뀝니다.
공허했던 삶에, 그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임하자, 그 공허했던 삶이 충만으로 바뀌어요.
저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이 내용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감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기가 막힌 사람이지요.
그 내용에 맞게 문장을 기가 막히게 쓰는 사람예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어두운 삶에 공허한 삶에 그 무질서한 삶에 임했을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그 변화는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예요. 발전하는 것이 아니예요.
물이 포도주가 되듯 완전한 변화인 것입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게 아니예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어둠이 빛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공허함이 충만함으로, 이전에 없었던 완벽한 새로운 것이 일어나는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것입니다.
누가 오늘 이것을 원하십니까?
조금 더 나은 삶,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잏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꿈꾸지도 못했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새로운 삶이 열려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 설명은 뭐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예요.
여러분, 제가 오늘 이 단어를 설명드릴 테니까, 오늘 이 단어를 꼭 이해하고 가세요.
"긍휼" - 저는 20년 이상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데,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가르치기 힘든 단어들이 있어요. 물론 가르칠 수 있지요.
긍휼 - 이런 것들은 헬라어 히브리어 써서 가르칠 순 있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그냥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예요. 어떻게 하면 이 긍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긍휼입니다.
도대체 긍휼이란 게 뭘까?
긍휼 - 긍휼의 하나님이 임하셨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이 긍휼이 뭘까?
여러분, 저랑 같이 오늘 공부해 보세요.
히브리어로 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라함"이라는 단어예요.
라함 - 히브리어로 긍휼을 의미하는 라함에서 어떤 단어가 나왔냐면, "레헴"이라는 단어가 나왔어요.
라함, 레헴 비슷하죠. 그런데 이 레헴이란 단어를 우리가 알아요.
이 단어를 알면 거꾸로 아, 라함이라는 단어는 그런 단어겠구나라고 유추할 수가 있어요.
제가 오늘 라함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레헴을 설명해 드릴께요. 레헴이란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태)라는 뜻입니다. 임신된 아이가 머무는 어머니의 자궁(태)를 히브리어로 레헴이라고 말하고, 이 레헴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긍휼을 의미하는 라함에서 나왔어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신다, 우리를 긍휼히 품어 주신다라는 말은, 어머니가 그의 잉태한 자녀를 태에 품는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제 아내가 우리 아이를 임신했을 때 모습을 제가 정확히 기억합니다. 아무리 열이 나도 약 안 먹습니다. 그냥 버팁니다. 왠줄 아세요?
혹시라도 이것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게 긍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임신한 어머니들이 넘어질 때에 배를 움켜잡고 등으로 넘어져요. 혹시라도 내 애가 다칠까봐..
그게 긍휼이라는 단어의 뜻이예요.
저는 첫째 아들이 있고 둘째, 셋째가 쌍둥이예요.
둘째 셋째가 아주 어렸을 때에, 깜짝 놀랐어요. 이가 과잉치가 있는데 입천장에서 이가 나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너무 놀래서 치과에 갔어요. 항둥이 이가 과잉치가 네 개씩이나 되고, 이가 막 입천장에서 나고 이상한 데서 나요.
그런데 그때 치과 선생님이 하지 않았어도 됐을법한 얘기를 제 아내에게 했어요 이런 말예요.
치료하다가 아마 별 의미없이 말씀하신 거였겠지만, 제 아내는 그렇지 않았어요
'어머니,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날 때에 주차마다 형성되는게 있습니다. 어떤 주차에는 손이, 어떤 주차에는 뇌가, 어떤 주차에는 발이, 손가락이, 손톱이 그게 자라나는 주차가 각 주차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아마도 잘은 모르겠지만, 이 쌍둥이들이 어머니 배에서 자라날 때에 이빨이 형성되는 그 주차에 아마도 어머니가 뭔가 실수하셨나 봐요'라는 말을 했어요. 진짜..
여러분, 그날 밤 제가 기억해요. 제 아내는 잠을 못 잤어요. 저를 붙잡고 계속 울었어요.
'자기야, 나 때문이야 애들 이렇게 된 거 나 때문이야.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가 언제였을까, 내가 약도 안 먹었는데..'
제가 알거든요. 열이 40도 올라가도 버티더라구요
언젠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와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자요.
'여보, 애들 이렇게 된거 나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그게 긍휼이예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입니다.
내가 되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은 분노예요. 그러나 그 죄를 범한 인간인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세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은 명확합니다. 거룩한 분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입니다.
안타까움 - 니가 왜 그렇게 사니? 니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되니?라는 안타까운 마음,
'그거 나 때문 아니겠니, 나 때문 아니겠니 라는 그 안타까운 마음, 그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
정죄가 아닌 것입니다. 판단이 아니고 심판이 아닙니다. 내버리심이 아닌 것입니다.
그 긍휼의 하나님이 우리의 공허한 삶 가운데, 무질서한 삶 가운데, 죽음과 어둠에 임하는 순간,
여러분, 나의 모든 삶이 순식간에 바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것도 안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새벽까지 와서 하나님께 간구하겠습니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풍성이라는 단어는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풍선을 불 때에, 우리가 바람을 넣으면 풍선이 점점 커져요. 여러분, 그 풍선이 점점 커질 때에 풍선 안에는 공기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어떤 빈 공간이 없어요. 꽉 차 있어요. 그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예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그러므로 오늘 저녁에 나오신 분들 가운데 그 죄로 말미암아 두려운 분이 계세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세요. 그래서 용서를 간구하세요. 그러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범해 놓고도 모른척 넘어가지 마세요.
회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습니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세요.
"예, 하나님 내가 세상의 풍조를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죄를 짓기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내 안의 그 음란함과 욕심과 그 시기 질투와 내가 다른 사람 잘되는거 절대로 꼴보기 싫은 그런 죄악된 마음들이 내 안에 가득했던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하기 좋아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기를 좋아했던 바로 그 죄인입니다.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 이 시간 나의 삶에 임해 주시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는 순간 나의 삶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어두움이 빛으로, 그 공허함이 충만함으로 바뀝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삶의 특징은 공허함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 그 공허함과 허전함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나의 삶을 채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10절은 개인의 삶에 있어 구원 받기 이전의 모습과 구원 받은 이후의 모습으로 나뉩나다.
공동체에 있어서도 동일하지요.
공동체에 있어서도 구원 이전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죄: 죄를 정확히 이해/인식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존귀한지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절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이야기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근본적인 문제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