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7
#요한계시록 #짐승의표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짐승의 가르침을 지식적으로 철저하게 익히고 그것에 대해 확고한 신뢰를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짐승의 표를 손에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짐승의 가르침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한마디로, 짐승의 표를 이마나 손에 받는다는 것은, 짐승의 가르침을 자나깨나 쉬지 않고 묵상하고 틈만 나면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20230127
#기독론 #빌헬무스브라켈
여호수아가 무릎꿇어 예를 표하고,기드온과 마노아 부부가 제물을 드린 여호와의 사자는 성자하나님이시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왜냐하면 그래야 그들의 제사가 우상숭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그런데 그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가 아니라,성자께서 입으신 사람의 형체를 두 눈으로 보면서 경배 또는 제사를 드렸다.그런데 성자께서 입으신 그 육체가 단지 일회용이었어도 그들의 경배와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닐수 있는것일까?보이는 육체를 통해서 보이지 않으시는 성자께 경배와 제사를 드린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교황주의자들의 성상숭배 논리와 같은것 아닌가?그렇다면 그들의 경배와 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려면 어떠해야 하는것인가?
#구원협약 #구속언약 #예정
물론,영원전 구원협약을 하나님의 세 위격들께서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인성께는 단지 선택과 지시만으로 이행하시게 하셨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어보인다.하지만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것과 죄없으신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그 직분들을 수행하시고 목숨을 버리는 구원사역을 이행하시는데 일방적으로 지정되셨다는 것에는 쉽사리 지나치기 어려운 모종의 거리낌이 존재한다.이토록 큰 사역에 당사인와의 협의없이 당사인를 선택 지정하고 이행하게 하는것이 과연 타당한가?그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인성께서 영원전에 하나님의 세 위격들과 더불어 구원협약을 논하시고 인성의 자유의지에 따라 일말의 거부감없이 기꺼이 흔쾌히 자원하여 받아들이셨다고 하는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20200127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25장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다
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같은 부모로부터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서와 야곱은 생김새부터 성격과 취향까지 전부 정반대였다. 에서는 날 때부터 온 몸에 털이 북실북실하였고 마치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타고난 사냥꾼이 되어 들판을 누비며 들짐승들을 잡았다. 에서는 생김새와 성격과 성향이 누가 보기에도 남자다웠으므로 아버지 이삭은 리브가가 임신 중에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들어서 알고 있었더라도 그런 에서를 더욱 아꼈던 듯 하다. 반면에 야곱은 형 에서와는 달리 온 몸이 매끈하고 곱상하였고 자기 생김새를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성격도 조용조용하여 장막에서 집안 일을 돕는 것을 더욱 좋아하였다. 그러한 곱상한 생김새와 조용한 성격 때문에 야곱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게 형 에서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비교를 당해왔을지도 모른다. 에서처럼 남자답고 늠름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에서처럼 들판을 누비며 사냥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마치 여자애들마냥 장막에만 거주한다고 수군수군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수도 있다. 게다가 아버지 이삭은 자기보다는 형 에서를 더 사랑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머니 리브가가 보기에는 그런 여성스러운 야곱이 매우 측은하고 안쓰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리브가는 야곱이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야곱에 대해서는 걱정과 우려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루실 무언가 큰 일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편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는 이유가 사냥한 고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는 이유가 명시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야곱보다 우월해 보였던 에서의 치명적 단점은 몸을 너무 많이 사용하느라 깊게 생각할 줄 모르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냥꾼이었기 때문에 지금 눈에 보이는 들짐승에만 온갖 관심과 신경을 써왔다. 들짐승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체력이 중요하므로 에서는 더욱 뛰어난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 자기 육체만을 가장 아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뛰어난 사냥꾼이 되어갈수록 점점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자기 몸 이외의 것들에는 소홀해져 갔고 이는 어느새 에서의 삶의 가치관으로 굳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보기에 자기가 소유한 장자의 명분 따위는 지금 당장 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먼 훗날에나 그 효력과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자기에게는 아무런 쓸모없는 유명무실한 명분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에 지쳐 있을 때 음식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는 야곱의 꾀에 너무도 허무하고 망령되게 넘겨주고 만 것이다.
동생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서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열세였어도 그는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에서와 끊임없이 다투었고 태어날 때는 먼저 나오려는 에서의 발꿈치를 잠아 자기가 먼저 나가려는 투쟁심을 보였다. 아마도 야곱은 태어난 이후에도 자라나면서 그런 형 에서와 사사건건 크고 작은 다툼을 일으켜 왔을 것이고 에서에게 힘에서 밀려도 끈질기게 덤벼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몸을 많이 쓰지 않는 대신에 잠잠히 묵상하고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을 것이다. 마치 큰 그림을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계획하여 이뤄 나가듯이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형 에서를 끝내 이겨먹기 위한 생각을 해왔을 것이다. 드디어 그런 그에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절호의 찬스가 왔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달라는 에서에게 야곱은 그냥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볍게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요구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너무 심각하게 얘기하면 에서가 낌새를 알아채고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한 번 해보는 말처럼 가볍게 던져서 에서가 경계심을 가지지 않도록 했던 것 같다. 에서는 예상 외로 그런 야곱의 미끼를 너무도 손쉽게 물어버렸으나 야곱은 거기서 안심하지 않고 변개할 수 없는 맹세까지 요구함으로써 결정적인 쐐기를 박는다. 에서는 단지 눈에 보이는 들짐승을 사냥하는데 뛰어날 뿐이나 야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자의 명분을 사냥하는데 뛰어났다.
고대 사회에서 장자의 명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아마도 유산 상속에서의 절대적 우선권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율법에서 장자에게는 다른 자녀들보다 두 배의 기업을 배분하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가장 우선적인 상속자로서 대외적으로는 가문을 대표하는 자격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영향력 있는 기업이나 가문이 후계자를 세우고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는 것과도 같다. 다만 장자의 명분은 축복권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후에 이삭이 죽기 전에 에서에게 하려던 축복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넘겨준 이후인데다가 그 축복마저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후에 에서는 야곱이 이전에도 꾀를 써서 장자의 명분을 가로챘다고 하기 때문이다.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서 장차 이삭의 뒤를 이어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이어 온 모든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장자의 명분을 단지 자기 배가 죽을 정도로 고팠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한 그릇 음식에 팔아버리는 망령된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맹세까지 했기 때문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다시 넘겨 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얼마나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깨달았고 소망하였으며 끝내 쟁취하였다. 장자의 명분에 대한 에서의 망령된 짓과 야곱의 간절한 소망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대하는지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밭에 숨겨진 보화와 매우 귀한 진주로 비유하시며 누구든지 이를 발견하는 자는 자기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보화와 진주를 맞바꾼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값진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고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헐값으로 넘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에서와 같은 망령된 자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 당장 내 인생에 풍요로움을 주지 않고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해서 복음을 멸시하고 이 땅의 풍요를 추구한다면 그는 복음에 있어서 에서와 같은 망령된 교인이다. 반면에 복음에 있어서 야곱과 같은 성도는 복음의 영원하고 진정한 가치를 알고 소망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일 것이다. 이 복음을 빼앗기지 않고 견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잠깐의 고난과 손해와 조롱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서 같은 성향의 교인들이 모두 복음을 망령되게 취급한다거나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으려는 술수를 정당화 하고 합리화 할 수는 없다. 에서처럼 남자답고 활동적이어도 하나님께서 신중한 성향을 주실 수 있고 야곱처럼 얌전하더라도 교만하여 버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야곱이 술수를 써서 장자의 명분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죄악을 선한 것으로 바꾸신 것 뿐이지 이를 본받으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야곱은 그런 계략이 아니었어도 다른 경로와 섭리를 통해서 장자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서 투명하고 정당한 방식을 따라야 한다.
#20220127
#룻기 #Ruth 2:1-23
제 2 장
룻이 보아스를 만나다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면서 재력과 지위를 가진 보아스라는 인물이 언급된 것은 그가 룻과 긴밀한 관계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을 한번 더 모압 여인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녀의 덕스럽고 고결한 인품을 한층 더 드러내기 위함인데 아마도 당대 이스라엘 여인들 중에서는 룻에 필적할만한 현숙한 여인이 없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룻은 자기 고향 모압에서는 잘나가는 귀족 집안의 딸이었을 것이므로 어려서부터 힘든 일이나 고생같은 것은 겪지 않고 귀하게 자라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룻은 자기 고향 모압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시어미 나오미만을 바라보면서 하루살이와 같은 가난한 자들이나 하는 고된 이삭줍기를 하겠노라고 나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모압은 여호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는 족속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덕목 또한 그리 도덕적이지 않았을 것인데도 룻은 모압 사람답지 않게 노인을 그것도 가장 갈등과 불화가 심한 관계인 시어미를 지극정성으로 모실 정도의 성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은 어느 밭으로 가야할지를 알지 못한채 무작정 나가서 이리저리 곡식 베는 일꾼들을 따라갈 뿐이었으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룻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 인도하심은 우리에게 가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연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흉년 때 여호와의 기업을 버리고 모압 땅으로 이주했던 엘리멜렉과는 달리 그의 친족인 보아스는 동족들과 함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그 흉년의 재앙을 묵묵히 잘 감당하고 버텼고 이에 그는 풍성한 소출로써 일꾼들과 이삭줍는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유익을 줄 수 있게 되었다. 보아스와 일꾼들이 서로를 향해 정겹게 축복하는 것은 그만큼 보아스가 얼마나 일꾼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후대하였으며 일꾼들도 그런 보아스의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함으로 열심히 일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지시를 받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이나 상대에 대한 각자의 의무가 있겠지만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므로 솔선수범하여 아랫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어쩌면 룻은 이밭저밭을 돌아다니면서 이삭줍기를 부탁했으나 모압 출신 이방인이라는 것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하다가 보아스의 밭으로 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룻은 모압에서는 곱게 자란 귀족 집안 여인이었어도 타국인 이스라엘 유다 땅에서는 모압에서의 신분을 부정하고 그저 과부 시모를 모시는 미천한 과부라는 자기의 처지를 원래 자기의 신분이었던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룻의 딱한 처지와 겸손함을 오로지 보아스의 사환만이 거두어서 자기 주인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주인인 보아스가 후덕하고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섬기는 사환도 그렇게 선을 베푸는 것이 주인인 보아스의 뜻이라 여기고 룻을 밭으로 들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주인의 재물을 남용한 불의한 청지기는 아마도 자기 주인의 선한 성품을 따라 빚지러 온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기보다는 야박하게 받을 것 다 받거나 더 받거나 해서 주인의 성품과 명성을 훼손했기 때문에 불의하다고 정죄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룻은 자기 고향 모압에서도 안해본 처음 하는 이삭줍기가 손에 익지 않아 서툴고 매우 힘들었을텐데도 보아스의 사환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열심히 성심성의껏 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이 이삭을 줍는 룻처럼 작은 선이라도 찾아 열심히 행한다면 주님의 사환인 천사들이 우리의 주님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잠깐 쉰 것 빼고는 계속 선을 행하는 중이라고 보고할 것이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자초지종을 들은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에게 아주 특별한 호의들을 베푸는데 이는 단지 룻이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시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대한 것이라고만 보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보아스로서는 어떻게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압 여인 중에 이런 현숙한 여인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 했을 것이고 그런 룻이 자신의 아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가졌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그러나 그 바람이 단지 남자의 여자에 대한 본능적인 음욕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과 몸의 쾌락을 만족시키려는 것이었으면 보아스 정도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 정도면 이스라엘 여인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보아스는 점잖은 신사였기 때문에 자신의 재력과 높은 신분을 가지고 남자의 음욕을 채우려는데 남용하지 않고 자신을 도울 현숙한 배필을 찾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지금까지 독신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보아스의 눈에 룻이라는 현숙한 여인이 군계일학 낭중지추처럼 나타났으니 그녀의 효심을 내세워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특별한 호의들을 베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필이면 룻이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모압 여인이라는 것과 친족의 과부라는 것과 적지 않은 나이차이 등이 자신의 소망대로 하기에는 걸림돌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어서 여러 호의를 베풀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아스는 자신이 룻을 축복한대로 여호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 그녀의 선행에 보답하고 그녀를 자신의 날개 아래에 보호하였다. 룻은 보아스가 자신에게 베푼 여러가지 특별한 호의들을 받았을 때 그것들을 마치 당연한 권리나 특혜로 여겨 뻔뻔하게 행하지 않고 그럴수록 더욱 자신을 낮춰 조신하게 행동한다. 모압에서의 신분이었다면 보아스와 견줄 정도였어도 그의 앞에 얼굴이 땅에 닿을 정도로 숙여 절을 하고 자기 자신을 그의 하녀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한없이 낮춘다. 그럼에도 그녀의 겸손은 그저 표리부동한 표면적인 예의상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은 처음부터 고귀한 신분이 아니었던 것처럼 진실된 겸손이었다.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나오미는 그저 며느리 룻이 허기나 간신히 가시게 할 정도만이라도 이삭을 주울 수 있다면 많이 거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곡식과 음식을 가져온 것을 보고 그렇게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여호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을 안할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크건 작건 호의와 친절을 베푼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기를 습관화 해야 한다. 나오미가 보아스더러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생육하고 번성할 여지가 있는 룻과 그럴 여지가 없는 나오미 자신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친족이 가난이나 채무 등의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린 땅 값을 대신 갚아주고 친족에게 그 땅을 되돌려주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기업을 물러준다는 것은 자신의 재산 상 손해를 무릅쓰는 것이므로 매우 가깝거나 특별한 의미를 가진 친족이 아니면 선뜻 베풀지 못하는 선행 중의 선행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 기업을 판 자는 친족에게 대신 물러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전적으로 무를지의 여부는 친족의 긍휼과 호의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미는 보아스가 남편인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친족 중 하나라고 하면서도 선뜻 나서서 요구할 처지는 못되므로 다만 보아스의 선한 성품에 기대어 한가닥 희망을 가져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급적 보아스와의 접점을 유지해야 하므로 룻에게 추수가 끝날 때까지 그가 베푼 호의를 저버리지 말고 간직하라는 조언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이런저런 선을 행하는 것 자체로는 하나님 그리스도로부터 좋은 것을 받을만한 공로가 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여지와 가능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20210127
#민수기 #Numbers 31:25-47
전리품 분배
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6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수령들과 더불어 이 사로잡은 사람들과 짐승들을 계수하고
27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28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은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29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가져다가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30 또 이스라엘 자손이 받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나 각종 짐승 오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
31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여호와께서는 우선적으로 전쟁에 나선 1만 2천 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전리품의 절반을 나누어 주라 하신다. 우리가 볼 때는 그들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웠으므로 전리품들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은 군사들만으로 미디안 5개국 연합군을 물리치게 하셨기 때문에 따지고 보자면 군사들이 그 얻은 전리품을 받을 자격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군사들에게 전리품의 절반을 주라고 하신 것은 눈에 보이는 대가가 아니면 도무지 행하려 하지 않는 인간의 죄악되고 연약한 본성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고 많은 의무와 책임을 행한 자들에게는 그만큼 많은 대가를 주어야 한다는 보편적인 사회통념을 존중하신 것이며 장차 주님의 사역에 가시적으로든 비가시적으로든 성령의 열매를 맺은대로 하늘의 상급을 주시겠다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여호와께로부터 전리품의 절반이라는 막대한 상급을 받게 된 것에 누구 하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들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있는지를 돌아보며 매우 황송해 했을 것이다. 반면에 다윗과 함께 시글락에서 아말렉에게 빼앗긴 사람들과 소유물을 되찾으러 동행한 6백 명 중 일부 또는 다수의 불량배들은 중간에 낙오한 2백 명에게는 되찾은 재산이건 아말렉에게서 탈취한 노략물이건 아무 것도 주지 말고 가족들만 돌려보내자고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와 공로로 아말렉을 이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불량배들의 주장을 거부하고 자기들이 아말렉을 이기고 모든 사람과 소유물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돌보심 덕분이라 하면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낙오할 수 밖에 없었던 2백 명들에게도 되찾은 재산과 노략한 전리품들을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하고 대대로 율례로 삼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종이 아무리 주인이 시킨 일들을 열심히 잘 했어도 주인 앞에서 자랑할 수 없고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 여겨야 한다고 하셨고, 아침 일찍부터 일한 일꾼들은 오후나 저녁에서야 일한 일꾼들과 동일한 일당을 받는다고 주인의 선함을 불평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 등의 직분자들이 이스라엘의 군사와도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아무리 헌신하고 수고하며 희생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성과나 열매에 대해 자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랑해서는 안된다.
여호와께서는 전리품의 나머지 절반은 모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명하시는데, 이 또한 인간의 일반 기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적국에게서 탈취한 전리품은 모두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주거나 아니면 국가가 회수하지, 그것을 국민 또는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전리품의 절반은 회중들에게 나누어주라 하시면서 이 전쟁이 전적으로 여호와 당신께 속하였음과 수고한 자들이라고 모든 성과를 독차지해서는 안되고 적절히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율법에는 추수를 하더라도 밭의 가장자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두고 나무의 열매도 높은 것이 있는 것은 남겨두라 하였으며, 가난한 자나 고아나 과부나 여행자들은 도구를 이용하지 않는 선에서 타인의 과실이나 곡식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굶주림에 처한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은 나발이나 막대한 소출을 거두고도 남을 도울 생각은 안하고 더 큰 창고를 지어 평생 잘 먹고 지낼 궁리만 한 부자나 거지 나사로가 굶어죽게 내버려둔 부자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은 자기들의 부유한 소유를 자기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도는 당시 교회에서 애찬을 행할 때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풍족하게 먼저 와서 먹고 마시고서는 나중에 가난한 자들이 먹을 것을 남겨놓지 않아서 부끄럽게 만들었다며 부자들을 책망하였는데, 이는 그 부자들도 자기들의 소유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자기들이 받은 풍성한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기자랑하고 파당을 짓는데 악용하는 것을 보고 심하게 책망하였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 경제 체제를 우상처럼 숭앙하는 기독교인들은 정부의 소득분배 정책을 가지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며 독한 비난을 서슴지 않는데, 이는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율법과 규례를 제정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과도 같다.
여호와께서는 군사들이 전리품으로 받은 가축 절반에 대해서는 2리를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로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백성들이 전리품으로 받은 가축 절반에 대해서는 2푼을 성막을 맡은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명하신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아무런 기업이 없고 오로지 백성들이 제사 때 드린 제물이나 십일조 등으로만 살아야 했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이들에 대해서도 분배를 잊지 않으신 것이다.
32 그 탈취물 곧 군인들의 다른 탈취물 외에 양이 육십칠만 오천 마리요
33 소가 칠만 이천 마리요
34 나귀가 육만 천 마리요
35 사람은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서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도합 삼만 이천 명이니
미디안 5개 연합국 중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단지 처녀 3만 2천 명 뿐이었다. 이 미디안 처녀들은 이스라엘 남자들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36 그 절반 곧 전쟁에 나갔던 자들의 소유가 양이 삼십삼만 칠천오백 마리라
37 여호와께 공물로 드린 양이 육백칠십오요
38 소가 삼만 육천 마리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공물로 드린 것이 칠십이 마리요
39 나귀가 삼만 오백 마리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공물로 드린 것이 육십일 마리요
40 사람이 만 육천 명이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공물로 드린 자가 삼십이 명이니
41 여호와께 거제의 공물로 드린 것을 모세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미디안 처녀 3만 2천 명 중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절반인 1만 6천 명이 분배되었으므로 2리인 32명이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엘르아살은 대제사장이라서 오로지 이스라엘 처녀와만 결혼하였을 것이므로 이 미디안 처녀들이 엘르아살의 아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제사를 위한 업무에 쓰임을 받았을 것이다.
42 모세가 전쟁에 나갔던 자에게서 나누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절반
43 곧 회중이 받은 절반은 양이 삼십삼만 칠천오백 마리요
44 소가 삼만 육천 마리요
45 나귀가 삼만 오백 마리요
46 사람이 만 육천 명이라
47 이스라엘 자손의 그 절반에서 모세가 사람이나 짐승의 오십분의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장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미디안 처녀 나머지 절반인 1만 6천 명은 백성들에게 분배되었고 그 중의 2푼인 320명은 레위인들에게 분배되었다. 이 여인들은 아마도 성막 봉사를 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녀들이 레위인들과 결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