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사신(死神)
1
태사자(太獅子) 단리후(段里候).
단리제왕가의 소가주이자 차기 무림지존의 등극이 확실시되고 있는 인물.
그가 제갈무황가에 들어섰다. 제갈성의 공식적인 초청에 응한 것이다. 초청 사유는 양가간에 진행되던 혼례 문제를 매듭짓자는 것이었다.
또한 제갈성은 와병 중에 있는 부친을 대신하여 자신이 문제를 처리할 전권을 가지고 있으니 제왕가에서도 가주가 아닌 소가주가 전권을 위임받아 와달라는 뜻을 보냈고, 이를 단리후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남북쌍가의 두 소가주는 제갈성의 거처인 용비각(龍飛閣)에서 다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주위의 가신들을 내치고 단둘이 호젓하게 마주 앉은 그들은 의례적인 인사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십 년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 간에는 각별한 교류가 없던 터라 대화는 다소 격식에 얽매인 어투로 진행되었다.
연장자인 단리후가 대담을 마무리짓자고 했다.
"좋소이다. 그럼, 제갈가와 본가 간의 혼례는 그대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겠소이다. 단, 비명에 가신 대공자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소공자와 운혜의 혼례식은 일 년 후로 미루는 것으로 합시다."
단리후는 형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신랑으로 나서겠다는 제갈성의 파격적인 제안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단 혼례일은 일 년 뒤로 미루자는 주장을 거듭한 것이었다.
제갈성은 어차피 단리운혜가 무황가에 머무르고 있으니 바로 혼례를 치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단리후가 장례에 뒤이어 혼례를 치르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고집을 꺾지 않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지요. 일 년 후 오늘, 다른 예식은 생략하고 바로 본가에서 혼례식을 치르기로 합시다."
부득이 제갈성은 일 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결정합시다."
단리후는 흡족해했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 단리운혜가 비장한 신색으로 주문했던 사항을 성공리에 마친 홀가분함 탓이었다.
시름을 던 단리후의 뇌리에 방금 전 만났던 단리운혜의 참담한 모습이 떠올랐다.
'운혜는 일 년 후로 혼례를 미루지 않으면 파문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혼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지. 이로써 운혜도 어쩔 수 없이 이 혼례를 받아들이겠구나.'
이런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단리후는 가슴 한쪽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누이에게 너무도 가혹한 시련을 강요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며시 어금니를 물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의 장대한 신형이 벌컥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원만하게 타협되었으니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겠소이다. 아버님께서도 흡족해하실 것이외다."
제갈성도 따라 일어섰다.
"먼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너무 예를 갖추지 마시오. 이제 곧 한 식구가 될 테니 말이외다."
"푸하하하! 그렇군요. 곧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겠군요."
단리후와 제갈성이 입을 모아 터뜨린 호방한 웃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서로의 동공을 주시하고 있는 눈빛에도 일말의 웃음기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안면 근육을 일그러뜨려 파안대소를 터뜨리고는 있으나 마주하는 눈빛에는 경계와 탐색의 은밀함만이 번득이고 있을 뿐이었다.
2
오리무중(五里霧中).
제갈무황가의 모든 이목이 총동원되어 제갈운을 시해한 흉수를 찾았으나 근 백 일이 다 되도록 한 오라기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단리운혜를 수행하고 온 제왕가의 무사들도 흉수를 찾는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며 무황가에 머물기로 했다.
그 때문인지 내년의 혼례일까지 제왕가로 돌아가 있기로 했던 단리운혜도 마음을 바꾸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무황가에 남겠다고 한 것이었다.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다.
혁유백이 투옥된 지 어느덧 백 일이 다되었다. 하루, 단 하루만 지나면 형기를 마치고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놋쇠 그릇에 담긴 고깃국이 차갑게 식으며 두터운 기름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그것은 내일의 출옥을 미리 축하하는 의미로 옥리들이 정성스레 마련해 온 혁유백의 저녁식사였다. 혁유백도 그들에게 들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옥리에게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했을 뿐, 고깃국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성의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고 있던 중 돌연 들려온 출옥 소식에 격동에 빠진 탓이었다.
때문에 그는 모처럼 받은 맛난 식사를 즐기기 위해 수저를 드는 대신 격동을 다스리기 위해 명상에 들어갔다.
그간 혁유백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죄수인 탓으로 풀어헤쳐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엉겨붙은 채 더욱 길게 자라 어깨를 덮고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해 창백하게 변색된 얼굴은 형편없이 수척해져 있었고, 까칠한 수염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아 초췌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강인함과 유연함을 겸비하고 있는 그만의 독특한 체형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내공이 제압된 상태로 손바닥만한 제한된 공간에 던져진 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조각 한 장 없이 혹한과 싸워가며 가축의 여물과도 같은 소량의 음식물만으로 연명해 온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놀라운 집념으로 신체의 단련을 거듭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해 온 것이다.
이렇듯 절망의 나락에서 자신을 강인하게 추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대공자 제갈운의 죽음에 대한 피끓는 복수심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수심을 담아 활활 타고 있는 그의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다. 명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시진이 지나 뜨겁던 고깃국에 살얼음이 깔릴 때가 되어서도 그는 평정심을 찾지 못했다.
'결단코 용서치 않으리라. 대공자님을 시해한 무리들...... 그들이 누구일지라도, 아무리 거대한 집단일지라도 한 놈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내 목숨...... 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백 일간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전신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혈관이 팽창되고 가슴에 힘찬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부의 아들이라는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약적인 성공을 거듭하여 급기야 제갈무황가의 수뇌부까지 진입하는 신화를 창조한 그였다.
바야흐로 인생의 정점에 올라 천하를 향해 포효를 터뜨리려던 찬란한 시기에서 급전직하하여 모든 것을 잃고 투옥되어야 하는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는 어두운 공간에서 더러운 손바닥으로 그보다 더욱 불결한 음식물을 퍼 얼어붙은 입 속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오기나 황금빛 인생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복수심 때문이었다. 하늘이었던 대공자의 원한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갚겠다는 그의 의지 때문이었다.
정점에서 천길 아래로 추락하는 비운을 맛보면서 혁유백은 인생의 무상함을 어느 정도 깨우치게 되었다.
아직 남은 생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었으나 그는 명리를 추구하고 야망을 불태우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지난 백 일간의 옥고가 그러한 깨달음을 준 것이었다.
혁유백의 감겼던 눈이 무려 두 시진을 넘기고서야 열렸다.
쇠창살 너머에서 들려오는 옥리의 음성 때문이었다. 오십 줄을 넘긴 나이에도 하급무사를 면치 못하고 있는 진덕(陳悳)이란 인물이었다.
"당주님, 내일 아침 출옥 시 입으실 의복입니다."
늘 자신을 대함에 있어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진덕이 창살 사이로 옷 보따리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건 누가......?"
메마른 음성으로 혁유백이 물었다.
"혁 낭자께서 손수 만든 것이라 합니다. 오늘 저녁 제갈 아씨에게 청을 올린 모양입니다. 아씨의 시비가 은밀히 소인에게 전해주며 건넨 얘깁니다요."
"......."
"혁 낭자야 친혈육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씨의 당주님에 대한 정성은 소인이 보기에도 지극하십니다. 백 일을 하루같이 매일 아침 당주님의 근황을 묻고 확인하시면서 늘 수심에 잠겨 있는 모습이 곁에서 보기에도 딱할 지경이었습죠."
"......!"
혁유백의 차갑게 굳어 있는 안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오랜만에 일어난 감정의 파고가 그런 변화를 야기시킨 것이었다.
그는 폐부에서 우러난 무거운 음성으로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두고 가십시오."
당주가 아닌 죄수의 신분이기에 일개 평무사에 불과한 진덕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는 혁유백이었다.
또 그런 혁유백에게 그리하지 말라 하여도 굳이 당주라 부르며 아랫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진덕은 물러나기에 앞서 위로의 말을 올렸다.
"당주님, 그간 고초가 참으로 많으셨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다시 밝은 세상에 나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되리라고 소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혁유백은 진덕의 말에는 관심이 없는 듯 눈길을 떨구어 옷 보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 백 일간 살기만 내뿜고 있던 그의 눈빛에 따스한 감정이 떠올랐다. 많은 상념을 내포하고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진덕은 혁유백의 무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백 일은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만 소인은 그 동안 당주님을 곁에서 모시며 비로소 알게 됐습죠. 역시 당주님은 소인과 같은 범상한 사람들과는 비견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고초 따위는 훌훌 털어 버리고 부디 이전보다 더 높이 승천하시는 모습이
소인의 눈에는 벌써 훤하게 보입니다요."
진덕은 매우 진지했다. 결코 아부나 의례적인 위로의 인사가 아니었다.
혁유백은 잠시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말씀 고맙게 받아들이겠소이다. 그간 여러 모로 고마웠습니다. 진 선배의 말씀대로 이 은혜를 갚을 기회가 왔으면 좋겠구려."
진덕은 펄쩍 뛰었다.
"은혜라니요? 엄격한 뇌옥의 규율 탓에 오직 마음뿐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 댑쇼.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애간장만 졸인 것이 소인이 한 일의 전부입니다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 선배가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신 덕에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출옥하게 된 것입니다. 내 두고두고 이 은혜를......."
혁유백의 말이 중도에서 끊겼다. 그의 눈길이 진덕 뒤쪽의 어두운 공간으로 향했다. 간간이 밝혀 놓은 침침한 불빛을 따라 길게 이어진 복도가 괴괴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진덕은 의아한 눈빛으로 혁유백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는 홱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벅! 저벅!
어둠의 저편으로부터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걸. 아직 교대 시간이 되려면 반 시진은 더 있어야 되는데......?"
진덕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어둠 속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운석(雲石)! 자넨가?"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뇌옥 안의 죄수들이 부스럭대는 소음이 뒤를 이었으나 정작 어둠의 저쪽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대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벅! 저벅......!
오직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되며 울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더욱 괴이한 것은 그 발걸음 소리가 울리는 쪽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탓에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그 소리를 내는 인영들의 형태는 전혀 어둠 밖으로 노출되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불이 왜 꺼지는 거야? 벌써 기름이 다 됐나?"
진덕은 다시 전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보게, 운석! 왜 말이 없는가? 쓸데없는 장난 말게나."
진덕은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디밀었다.
"진 선배!"
심상치 않은 사태에 두 눈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혁유백은 다급한 어조로 진덕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당주님."
진덕은 몸을 돌렸다.
"위험합니다! 피하세요!"
혁유백이 다급히 외쳤다.
"그게 무슨......?"
진덕은 몸을 긴장시키며 되물었다. 아니, 되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번쩍!
진덕의 등뒤, 어둠 속에서 하얀 섬광이 작렬했다.
"크아악!"
처참한 비명이 터졌다. 그것은 진덕의 입에서 나온 이승에서의 마지막 소리였다. 검은 어둠을 붉게 채색하는 굵은 핏줄기가 그의 목에서 솟구쳤다.
데구르르!
두터운 솜옷을 걸치고 있던 진덕의 몸에서 분리된 수급이 차가운 돌 바닥 위에 나뒹굴었다.
쿵!
이어 목 없는 동체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스스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일색의 세 인영이 혁유백의 옥 앞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져 왔다. 그들의 발 밑으로 진덕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핏물이 내처럼 흘렀다.
"웬놈들이냐!"
노갈을 터뜨리며 혁유백은 일어서고 있었다.
'날 노리고 온 자들이다!'
혁유백은 한 눈에 삼 인의 불청객이 자신을 목표로 찾아온 자객들임을 알아챘다.
그는 안력을 최대한 돋구어 전방의 괴인영들을 주시하였으나 내공을 제압 당한 상태에서 그의 시력은 범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자연 어둠의 일부인 양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괴인영들의 형태 또한 정확히 식별해 낼 수가 없었다.
주위의 뇌옥에서는 웅성거리는 소음들이 들끓었다. 죄수들이 목전의 상황에 잔뜩 겁에 질려 놀란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괴인영들의 관심은 오직 혁유백에게만 있는 듯 묵묵히 혁유백이 감금되어 있는 뇌옥의 창살을 수도(手刀)로 잘라냈다.
카캉!
놀랍게도 쇠창살은 그들의 손에 의해 하나씩 잘려져 나갔다.
'최소한 나 이상 되는 공력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미 전신을 팽팽한 긴장감으로 경직시키고 있던 혁유백이었다. 그는 쥐고 있는 주먹에 더욱 힘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기해혈이 제압되어 한 줌의 내공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결국 범부나 다름없는 그로서는 가공스런 능력을 소유한 삼 인의 자객을 상대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턱!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던 혁유백의 등이 석벽과 부딪혔다.
'이게...... 마지막인가.......'
스으으!
달랑 하나 남아 있는 불빛을 등으로 받으며 세 개의 검은 인영이 옥 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누가 보냈느냐?"
혁유백은 이를 갈며 물었다. 그러나 삼 인의 괴인영 중 누구도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스르릉!
한 인영의 어깨 위에서 청명한 음향이 울렸다. 얼음장같은 냉기를 머금고 있는 새하얀 검신(劍身)이 자태를 드러냈다. 날이 새파랗게 선 검극(劍極)이 느릿느릿 호선을 그리다 혁유백의 목젖을 겨눈 채 고정되었다.
"하나만 묻겠다. 대공자님을 시해한 자들도 너희들이냐?"
이미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인 듯 혁유백은 초연한 기색으로 물었다.
삼 인 중 가운데에 서 있는 한 인영의 입술이 잠깐 들썩거렸다.
"그렇다."
단 한 마디의 대답으로 다시 입을 굳게 다문 그 자가 검을 뽑아든 옆의 인물에게 턱짓을 보냈다.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무심히 끄덕거리는 가벼운 턱짓이었으나 그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츄아아!
진덕의 목을 베었던 섬뜩한 광채가 다시 한 번 작렬했다.
"흡!"
혁유백은 호흡을 멈추며 신형을 움츠렸다. 날카로운 검풍이 그의 머리칼을 자르며 지나갔다.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몸이긴 했으나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일단 목숨을 연장한 것이었다.
얼결에 위기의 순간을 모면한 혁유백은 순간 원수의 검에 무저항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는 말아 쥔 주먹에 불끈 힘을 넣어 대전의 자세를 취한 후 일갈을 토해냈다.
"네놈들이 누군지, 어떻게 본가의 뇌옥까지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다만 적어도 한 놈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을 말아라!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할 테니....... 자, 오라! 내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상대해 주마!"
그의 전신에서 뜨거운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였다.
"오호라!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군. 아니, 그 이상이야. 대단해, 참으로 대단해!"
극도로 말을 아끼던 살수들의 입에서 마음에서 우러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중앙의 인물, 삼 인 중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그는 유난히 깡마른 몸매에 키는 칠 척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등진 불빛 사이로 슬쩍 내비치는 그의 외모는 마치 잘 다듬어 놓은 예리한 장창과도 같았다.
그가 방금 살검을 발초했던 인물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본좌는 사사루(死死樓)의 제십이대(第十二代) 루주(樓主)인 사신(死神) 냉무기(冷茂基)라 한다. 공정치 못한 상황이긴 하나 자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니 너무 원통해 말고 저승으로 가게나."
혁유백의 눈이 크게 열렸다.
'이미 무황에 의해 그 맥이 백 년 전에 단절됐다는 사사루가 실존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사루(死死樓)!
천 년 무림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자객집단으로 지금까지도 강호인들에게 공포 그 자체로 인식되고 있는 집단이었다.
이 백 년 전, 당시 정사를 막론하고 무림의 모든 군웅들로부터 천대받던 직업살수들이 모여 결성된 방파였다.
강호인들의 멸시와 홀대 속에 출범한 사사루는 강호에 발을 들여 놓기 무섭게 무림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무수한 생사혈전을 통해 완성된 그들의 실전무예는 천박하고 거칠며 졸렬하기 그지없다는 세평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오랜 고된 수행을 통해 연성된 정통무예를 갈고 닦은 무림계의 거목들이 줄줄이 사사루의 살수들에게 목숨을 내놓아야만 했다.
결국 사사루가 출범한 지 채 삼 년도 되지 않아 황금만 주면 무림지존의 목도 베어다 주겠다는 개파선언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강호인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사루에 청부 대상으로 접수된 자는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천하의 그 누구도 사사루의 살검을 피해낼 자가 없다는 것이 당시 무림계의 정설로 굳어졌다. 그러나 사사루는 결코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 무림을 장악하려 하지는 않았다. 철저히 암흑의 장막 뒤에서 살행만을 거듭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강호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암흑의 제왕 사사루주가 곧 무림의 제왕이다!"
아무도 사사루의 혈보를 제지하지 못한 가운데 무려 백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영웅이 탄생하였다.
바로 고금제일의 무인, 무황이 등장한 것이다. 무황이 무림출도 후 제일 먼저 검을 겨눈 곳이 다름 아닌 사사루였고, 그것으로 암흑의 제왕은 무림사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그것은 백 년 전이었다.
그 날 이후로 강호인들은 괴담을 늘어놓을 때 사사루를 입에 담았을 뿐, 그들의 실체는 오늘 이 때가 되도록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스스로를 사사루의 십이대 루주라 자칭하는 괴인물이 혁유백의 전면에 나타났으니.......
혁유백은 혼란스러웠다.
'철천지원수 관계인 본가의 내부 깊숙이 이들이 어떻게 유유히 걸어 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리고 구태여 무공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대공자님을 어찌하여 시해한 것일까? 날 죽이려 하는 까닭은 또 무엇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의 행태에 혁유백은 잠깐 고뇌했으나 이내 자신의 지금 처지를 깨닫고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후훗! 그렇군. 사사루의 루주라면 내 목숨을 가져갈 충분한 자격이 있지. 그러나...... 곱게 넘겨 주지는 않겠다."
사신 냉무기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구분되는 창백하고 싸늘한 미소였다.
"후후, 과연 놀라운 기상과 담력이야. 해서 본좌가 직접 나선 것이지. 영웅이 저승으로 갈 때에는 그에 적합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본좌의 평소 지론일세. 때문에 오늘은 피를 보지 않겠다던 마음을 고쳐먹고 본좌가 직접 나선 것이네."
혁유백이 선혈로 물든 입술을 뒤틀며 응수했다.
"감사의 인사는 생략하겠소."
"기대하지도 않았네. 실상 본좌가 이곳에 온 까닭은 중요한 밀담이 있어 왔던 길에 무황가의 뇌옥을 한번 둘러볼까 해서 수하들을 따라 무심히 내려왔던 것이네. 자네의 죽음엔 별 관심이 없었고......."
스윽.
냉무기는 한 발을 더 내디뎌 혁유백과의 공간을 줄였다. 그의 우수가 어깨 위로 올라가 검자루를 쥐었다.
그 자세에서 얇은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한데 자네를 직접 보니 문득 몸이 뜨거워지더군.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호적수를 만났을 때 느끼는 돌연한 긴장감 때문이었지."
아무 음향도 없었다. 그러나 냉무기의 어깨 위에서 칙칙한 기류가 뭉클뭉클 피어 올랐다.
그의 검신은 특이하게 묵광(墨光)을 띠고 있었다. 그 묵광에는 죽음의 기운이 진득하게 배어 있는 듯했다.
"피를 봐야겠어, 자네의 붉은 피를 말이야."
묵광이 자신에게로 뿜어져오자 혁유백은 전신을 옥죄어오는 기류에 뒤덮여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특히 묵광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목표인 자신의 심장은 이미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공정치 못한 일방적인 도륙에 지나지 않으나 억울해하지는 말게. 자네가 정상적인 몸이었다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대신 고통 없이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단 일 검에 자네의 심장을 뚫겠네. 자, 그럼...... 잘 가게, 젊은 친구......."
살랑!
한 가닥 미풍이 부는 듯했다. 범상한 사람으로선 감지할 수 없는 극히 미약한 대기의 흔들림이었다.
파치칙!
석벽이 검게 그을리며 부서져 나갔다. 혁유백이 서 있던 곳의 뒤쪽 석벽에 묵광이 작렬한 것이다.
놀랍게도 혁유백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몇 방울의 선혈을 바닥에 떨군 채 좌측으로 삼 보 가량 비켜서 있었다.
"호오!"
냉무기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탄성을 발했다.
"내공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직 타고난 진원지기(眞元之氣)와 본능적인 감각만으로 본좌의 검을 피해내다니!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로구만!"
그러했다.
혁유백은 사사루의 루주 사신 냉무기가 펼쳐낸 살검을 피해낸 것이다. 비록 심장 한 치 옆의 가슴에 깊은 검상을 입긴 했으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깝군, 정녕 아까워! 자네가 본좌의 사람이 아니란 것이......."
"전력을 다 쏟아야 할 것이오. 내 질긴 목숨을 거두고 싶다면."
혁유백은 한 손으로 가슴의 상처를 짓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날카로운 수도의 형상을 만들어 냉무기의 미간을 겨누었다. 단순히 피하기에만 급급하지 않고 반격을 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자네 덕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되는군. 하찮은 벌레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비로소 절실하게 통감했으니."
냉무기는 묵검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한 손이 아닌 양 손이 검자루에 포개져 있었다.
"사사루에는 수천여 종에 달하는 실전무예를 바탕으로 완성된 필살의 무공이 있다네. 백 년 전 세인들이 살인무예라 일컫던 일점혈(一點血)이 바로 그것이지. 이 일점혈로 자네의 운명을 가늠해 보겠네."
또다시 암울한 묵색 기류가 혁유백의 전신으로 뿜어져 갔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거력이 내재되어 있는 기류였다.
순간, 혁유백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투혼이 그의 입을 열게 했다.
"본인은 아직 미완성의 단계에 머물고는 있으나 무황가의 최고 절학이라 할 수 있는 폭섬광으로 귀하의 일검을 받겠소."
"폭섬광!"
냉무기의 안면에 처음으로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본 사사루를 멸망케 한 무황의 절학인 폭섬광을 자네가 연성했단 말인가?"
"흉내는 낼 수 있는 정도요."
"크음!"
충격을 받은 듯 냉무기가 검을 내리곤 경탄의 시선으로 혁유백을 응시했다. 잠시 후,
"애석한 일이군. 본좌가 무황가의 금혈수법을 안다면 당장이라도 자네의 기해혈을 풀어주고 정당한 대결을 치르고 싶건만......."
백 년 전 무황이 사사루의 루주와 혈전을 치를 당시 구사했던 검학이 바로 폭섬광이었다.
결국은 사사루의 루주를 양단시키고 사사루를 괴멸케 했던 그 폭섬광을 익힌 자가 백 년의 시공을 넘어 냉무기의 눈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냉무기는 진정 혁유백이 온전한 상태에서 펼쳐내는 폭섬광과 자웅을 겨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무황가의 독문비법으로 혈도를 제압 당한 혁유백을 해혈해 줄 방도가 그에겐 없었다.
"귀하의 말이 진심이라면......."
혁유백이 돌연 안광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바로 냉무기의 응수가 이어졌다.
"진심이다. 한 치의 가식이 없는 본좌의 진심이다."
"그렇다면...... 내게 검 한 자루만 빌려주시오. 체내에 고여 있는 원기(元氣)를 한 순간에 격발시켜 운용한다면 폭섬광의 일 초는 대충 시전할 수 있을 것 같소."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원기를 강압적으로 끌어올려 무공을 펼쳐내겠단 말인가? 원기마저 소진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곧 자살행위란 걸 모르는가?"
기묘한 정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혁유백의 목숨을 거두어야 할 입장에 있는 냉무기가 그의 생명을 걱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혁유백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어차피 귀하의 살검을 피해낼 수 없는 몸. 차라리 그 길이 무인의 최후로는 더 적합하다 생각하오만."
"그런가? 그래...... 그렇겠군."
목전의 상황을 곱씹어 본 냉무기는 혁유백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의 눈빛을 받은 우측의 인물이 자신의 검을 혁유백에게 건네 주었다.
"지극 정성으로 간수해 온 검이구려."
혁유백은 받아든 검을 가볍게 일별하고는 허공을 몇 차례 그어보았다.
"자, 준비됐으니 발초해 보시오. 사사루의 절학 일점혈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살인무예인지 감당해 보겠소이다."
검을 쥔 손을 바닥으로 늘어뜨려 일견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 자세로 혁유백이 냉무기를 담담히 응시했다.
이윽고 아래로 처져 있던 냉무기의 검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피할 수 있는 조그마한 명분만 있다면 정녕 피하고 싶구먼.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아......."
그래서일까? 냉무기의 검에서 분출되는 묵광에 살기가 피어 오르지 않았다.
냉무기는 무거운 음성으로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두고두고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것만 같군. 하지만...... 할 수 없는 일. 사사루의 백 년 혈한을 풀어야 할 책무를 지고 있는 본좌로서는......."
결국 냉무기의 검이 다시 혁유백의 심장을 겨누며 멈추었다. 비로소 은은한 살기가 묵광에 번져 나갔다.
냉무기는 멋쩍은 기색으로 말했다.
"염치없는 양보네만 발초는 자네가 먼저 하게나."
"사양하지 않겠소이다."
혁유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공도 충혈되었고 태양혈과 목줄기의 핏줄도 굵게 돌출되었다.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진력을 무리해서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질식할 듯한 무거운 긴장감이 뇌옥을 뒤덮어 버렸다. 제대로 이곳을 지켜볼 수 없는 다른 죄수들도 곧 폭발할 듯이 팽창된 긴장감을 감지하고 모두들 숨을 죽였다.
어느 순간, 혁유백의 검 끝에서 한 가닥 푸르스름한 기운이 발출되었다. 미약한 기운이긴 해도 분명 검신에 혁유백의 원기가 전달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흐음!"
냉무기의 안색이 자못 진중해졌다.
'이 젊은이는 선천적으로 상상키 어려운 미증유의 능력을 타고났음이 분명하다. 방심은 금물이다. 이 일 초에 필생의 공력을 다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냉무기의 깡마른 체구에 걸쳐 있는 검은 장포가 크게 부풀어올랐다. 바람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지하뇌옥이건만 그 장삼은 태풍을 만난 듯 무섭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의 묵검에서 발출되는 기류는 더욱 짙어져 맹렬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혁유백을 에워싸여 갔다.
그 순간 하단을 겨누고 있던 혁유백의 검극이 중단의 높이로 치켜올려졌다.
이어 혁유백의 신형이 유연한 움직임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터져 나오는 사자후가 있었다.
"폭뢰단천(爆雷斷天)!"
폭섬광의 제 일식이 발초된 것이다.
콰아아아!
혁유백의 검은 용의 입으로 돌변하여 거대한 화염을 뿜어냈다. 극열(極熱)과 극강(極强), 그리고 극쾌(極快)를 모두 갖춘 고금제일의 검학이 펼쳐졌다.
"헛!"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냉무기는 본의 아니게 경악에 찬 탄성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폭섬광의 위력이 예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혁유백의 검이 횡으로 그어왔기 때문에 그의 신형은 빛살이 되어 수직으로 솟아올랐다. 빛살을 능가하는 빠르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폭뢰단천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츠파파팟!
냉무기의 검이 현란한 춤사위를 펼치며 겹겹의 검막을 형성했다.
쿠콰콰쾅!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돌가루가 광풍에 휩싸여 흩날리면서 장내는 온통 모래 바람에 뒤덮여 버렸다.
또한 혁유백의 검에서 발출된 기류의 일부가 냉무기의 발 밑을 스치고 지나가 쇠창살을 강타하자 그대로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녹아 내렸다.
그러고도 그 열류는 그대로 전진을 거듭하여 맞은편 뇌옥의 쇠창살마저 뜨겁게 지져댔다. 두 검이 충돌하며 일으킨 여파로 거세게 흩날리던 돌가루가 가라앉은 것은 일다경을 훌쩍 넘기고서였다.
"크으으. 이 정도일 줄이야."
냉무기의 칠 척 장신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군데군데 의복이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양 옆으로 비켜나 있던 그의 수하 둘은 더욱 낭패한 모습이었다. 검은색 장포는 반 이상이 타 버려 누더기와 다름없이 되어 버렸고, 피부 곳곳에도 붉은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극심한 타격을 받은 이는 바로 혁유백 자신이었다.
체내의 원기를 일시에 모두 소진해 버린 탓에 그의 몸은 생기를 잃고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또한 냉무기가 펼쳐낸 검강과 정면으로 격돌하면서 받은 내상까지 겹쳐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혁유백은 충돌의 여파로 저 멀리 퉁겨나가 바닥에 처참한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맞은편 뇌옥 앞이었다.
사지를 맥없이 늘어뜨린 자세였다. 두 눈은 감겨 있었고 코와 입에서는 연신 굵은 핏줄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도 이미 멈춘 듯 가슴의 기복도 전혀 없었다.
"저 젊은이가 폭섬광을 일 성만 더 깊이 연성한 상태에서 내공을 제압 당하지 않았었다면 바닥에 누운 것은 아마도 본좌였을 것이다."
냉무기는 숙연한 기색으로 혁무기를 내려다보았다.
수하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확인해 볼까요?"
냉무기는 고개를 저었다.
"대라신선이 온다 해도 그를 살릴 수 없을 것이다. 오장육부가 파열되고 전신의 혈관이 터져 버린 것은 젖혀놓고라도 한 줌의 원기도 남아 있지 않은 몸뚱어리가 어찌 산 사람이겠느냐? 더 이상 그의 시신을 훼손하지 마라. 물러간다."
마지막으로 혁유백에게 암담한 눈길을 한 번 준 후 냉무기는 몸을 돌렸다.
수하 한 명이 다급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루주님, 예상치 않았던 소란으로 옥사가 엉망이 됐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의 얼굴을 본 죄수 놈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혁유백이 비관자살을 한 것으로 꾸미는 것은 불가능해진 상황이니 아예 이 안의 죄수 놈들을 도륙 내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만........."
"오늘은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다. 본의 아니게 한 영웅을 야비하게 죽였다는 것만으로도 본좌는 지금 심신이 피곤하다."
저벅, 저벅.......
올 때보다 한결 더 무겁게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냉무기는 뇌옥을 빠져 나갔다.
혁유백의 곁에서 미심쩍은 얼굴로 쭈뼛거리고 있던 다른 한 명의 수하도 별수 없이 냉무기의 뒤를 따르며 동료에게 말했다.
"결과적으로 루주님까지 나서서 그들의 번거로운 일을 해결해 준 격이 됐으니 나머지 일은 그들에게 일임하도록 하세. 당초 그들이 원했던 그대로의 모양새는 갖추지 못했으나 우린 할만큼 한 것 아닌가. 이대로 가세."
동료도 수긍했다.
"하기사 이런 구차한 일에 루주님까지 개입되어 심기까지 상하시게 됐으니 그들이 서운한 마음을 품을 순 없겠지. 자, 어서 가세."
두 수하들은 신형이 훌쩍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3
그들이 사라진 지 얼마 후, 숨죽이고 있던 죄수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 낮은 음색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젠장! 하필 내 코앞에 굴러와 뒈질 건 또 뭐야!"
만귀옹 도위의 투덜거림이었다.
조금 전 격전의 여파로 도위의 옥창살도 반 이상 녹거나 파괴되어 있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외눈으로 혁유백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며 연신 혀를 찼다.
"쯧쯧, 파죽지세로 내닫던 네놈의 인생이 고작 이런 비참한 종말로 막을 내리게 되다니....... 불쌍한 녀석, 한 치 앞도 못 보고 제 멋에 겨워 천방지축 날뛰더니만 잘 뒈졌다, 잘 뒈졌어!"
변함없는 독설이었으나 평소와는 달리 일말의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어조였다.
만귀옹은 혁유백에게서 침울한 눈길을 거두었다. 이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입술이 썩어 문드러져 없어진 추괴한 그의 입이 연신 들썩거렸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군. 사사루가 백 년만에 느닷없이 출현한 것도 그렇고. 더구나 그들이 하필이면 원수지간인 제갈무황가의 뇌옥까지 제집 안방 드나들 듯 하는 건 또 무슨 조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던 도위의 눈길이 다시 혁유백에게 향했다.
"또 사사루가 구태여 뇌옥 안까지 들어와 감금되어 있는 저 녀석을 살해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마도제일의 지략가로 불리던 도위였으나 목전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맛살의 주름의 골이 더욱 깊어만 갔다.
"알 수 없군, 알 수 없어. 뭔가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실체를 종잡을 수가 없어. 제길! 반 년 넘게 옥 안에 처박혀 있었더니 내 머리도 석두가 다 되었구나!"
연신 입방아를 찧어대던 도위는 돌연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는 듯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헛! 그런가? 사사루도 그들과 한 통속이란 말인가? 그럴 수가? 하지만 그렇다면 말이 되는구먼. 그래, 이로써 호각지세가 이루어지는 거야."
깊이 침잠되어 있던 그의 동공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그럼, 이걸로 하나의 수수께끼는 해결된 셈이로구먼."
골똘히 염두를 굴리던 도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문득 그의 시선이 다시 혁유백에게 향했다. 그는 몸을 움직여 혁유백에게 다가갔다. 왠지 그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한데 이 녀석은 정말 뒈지긴 뒈진 거야?"
이미 경계가 되는 옥의 창살은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기에 도위는 수월하게 혁유백의 옆에 쪼그리고 앉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시신에 불과한 혁유백의 몸에 도위는 손을 갖다댔다.
"완전히 갔구먼.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원기까지 격발시킨 탓에 오장육부가 제자리를 이탈한데다 근혈(筋穴)까지 모두 거덜났어. 염라대왕이 다시 이승으로 내보내고 싶어도 기어 나올 기력조차 없는 놈이야."
핏덩어리에 불과한 혁유백의 전신 곳곳을 꼼꼼히 살펴보던 도위가 고개를 저으며 손을 거두었다.
"휴우! 불쌍한 놈......."
추괴하게 일그러진 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까닭 모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탄식이었다.
그러다 돌연.
"어라? 이건......?"
도위의 가느다란 외눈이 번쩍 뜨였다.
"맥박! 틀림없어! 맥박이 뛰고 있어!"
도위의 손이 다시 혁유백의 몸 위에 얹어졌다. 이어 굽은 허리를 더욱 꺾어가며 귀를 갖다댔다. 혁유백의 가슴 부위였다.
"이거야 원! 이 꼴을 하고서도 혼백을 잡아두고 있다니....... 무서울 정도로 생명의 집착이 강한 놈이로다. 역시 예사로운 놈이 아니야."
혁유백의 놀라운 생명력에 질렸는지 도위는 한동안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넋을 놓고 앉아 혁유백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다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추괴한 입술이 다시 벌어지며 고뇌에 찬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걸 우연이라 봐야 하나...... 아니면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무슨 뜻일까?
도위의 중얼거림에 담겨 있는 의미는.......
늙고 병든 데다 체구마저 왜소한 그는 혁유백을 어깨에 들쳐 메었다. 자신의 몸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워 보이건만 내딛는 걸음걸이는 기이하게도 물 흐르듯 유연했다.
역한 피비린내를 품고 있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도위의 발걸음은 점차 멀어져 가고 있었다.
- 다음 권에 이어짐 -
첫댓글 필력이 대단합니다. ㅎㅎ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