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로는 아직 이르다싶은 비가 종일 낙수져서 소리낸다.
절기로는 2월이니 아직 겨울이 갔다기에는 이르고
춘삼월의 눈은 무릎을 덮으니 겨울잠에서 깨자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산골의 생활이란 봄이면 나물뜯고 여름에는 상추심고 가을이면 무우 배추심어
겨울이 오면 무우청도 매달고 감자 고구마는 광에 그득 하니
벽난로에 장작 넉넉히 넣어 고구마굽고 소나무가지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세월은 흐른다.
서울을 떠나 정선에 온지도 이러저러 2년의 세월이 흐른다.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작은 통나무집 하나 짓고 앉았으니
솔가지를 지나는 바람소리는 속세를 떠난 듯 하고
아우라지를 떠나 집 앞을 흘러내리는 조양강은 새벽산책의 고요를 주니
홀로 살아감의 고독은 밀려와도 그 것이 고독인 줄은 모르겠다.
딱히 시골의 생활이 좋다 나쁘다는 그 사람의 선택이라 정답은 없지만
서울에서 느끼는 군중 속의 고독과는 또 다른 고독이다.
겨울이 되어 난로에 넣을 땔나무나 넉넉히 준비하면 크게 할 일은 없어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정선의 탐방을 시작하니
아래의 글은,
얼마 전 폭설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이 덮였던 어느 날
집 앞의 나전 역을 찾아 꼬마기차를 타고 민둥산으로 가는 여정이라
눈내리는 날엔 아우라지에서 꼬마기차를 타시라 안내합니다.
************************************************************************************
나전역으로 가는 지름길은 눈에 파묻혀 바이 찾을 길이 없다.
행여 늦을세라 넉넉히 시간을 두어 나왔기에 솔밭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두고
눈쌓인 길을 조심스레 차들이 다니는 찻길을 찾아들고
북평터미널로 향하는 철로 굴다리를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역원없이 텅 빈 나전역이 찬바람을 맞으며 세월을 거스른다.
역 앞의 작은 공터에는 언제 조성하였는지 작고 아담한 공원이 눈을 함빡 뒤집어 쓴 채
아침햇살에 조는 듯 하고
그 옆 자작나무 한 무리는 하얀 속살을 흰 눈과 견주는 듯 하다.
언제부터인가 무인역이 된 나전역사는 퇴락하여
매표소가 있던 자리와 대합실 자리는 어림으로 짐작할 뿐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만 날리고,
하루 두 번 아우라지를 오르고 내리는 열차시간표가
아직도 기차가 다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도 누군가가 플랫홈의 눈은 한 켠으로 치워놓아 어렵지 않게 플랫홈에 올라서니
세찬 바람은 바람소리와 함께 귓전를 지나며 귀를 얼린다.
오래 전 산같이 쌓였던 석탄더미가 있던 저탄장에는 석탄 대신 순백의 백설이 가득하여
환한 햇살에 더욱 눈부시고
작은 멧새 두 마리가 무엇을 찾는지 눈 속을 헤집으며
철로변의 낮은 나무 사이로 포릉포릉 날아오르는데
한 줄기 철로에는 아침에 아우라지로 올라간 꼬마기차가 낸 흔적이 눈 속에 남아있다.
조양강을 따라 철로는 길게 누워 그 끝이 시나브로 구부러지매
아우라지를 떠난 기차는 숲 속에서 불현듯 나타난다.
멀리 작은 기차가 보이니 그리 빠르지도 않은데 눈보라는 일어
수많은 말들이 달려오며 광풍을 일으키는 듯 하다.
객차 두 칸이 모두인 꼬마기차엔 차표도 열차 안에서 끊는다.
시집 하나 무릎에 두고 하염없이 눈덮인 창 밖을 바라보는 초로의 여인과
배낭을 앞에 두고 앉은 젊은 겨울나그네 두엇,
그리고 나...
차표를 끊어주는 여객전무는 친절하고
열차는 따뜻하다.
좌석 또한 안락하여 넓은 창을 골라 앉은 나그네는 느릿느릿 달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이 세상 모든 호사는 혼자 누리는 듯 하다.
아무리 좋은 시절에 살아 초고속열차니 무어니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호사 중의 호사려니...
얼음장 위로 눈이 쌓이고 군데군데 돌덩이라도 있으면 어김없이 눈은 쌓여
둥근 항아리같이 보이는 돌무더기를 두고
정선으로 흘러 들어가는 한 줄기 조양강은 여울지어 흐르고,
강가의 버드나무 높은 가지에 둥지를 튼 까치는 이따금 생각난 듯 날아오른다.
자동차로 다니던 정선 읍내는 여느 날과 달리 기차로 나오니 새삼 고즈녁하고
더욱이나 읍내를 뒤덮은 눈으로 한층 한산하다.
정선을 지난 꼬마기차는 강을 두고 산으로 산으로 오른다.
간혹 만나는 터널을 빠져나온 산은 기암절벽에 쌓인 눈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터널을 나올 때마다 꿈에서나 그리던 그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난 듯 하니
대군 안평의 꿈에서 노닐던 도원이 안견의 필치로 그려진 몽유도원도는
정녕 이 곳을 두고 그렸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산 아래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는 옆집으로 잇는 길을 내느라
눈을 치우는 모습이 아스라하니 평화롭고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라는 어느 역사도 이 곳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드는 仙坪역은
정녕 간이역다운 간이역이라고 세간에서는 이름이 자자하니
신선이 사는 땅이라는 이름 그대로 오로지 보이느니 산과 나무 그리고 눈꽃이라
시간과 세월은 이 곳에서 정지되었으니...
군데군데 민출한 자태를 자랑하는 낙엽송 군락과
이에 질세라 흰 눈을 머리에 인 큰 소나무 무리는 앞서고 뒤서고 끝이 없고
기차가 지나며 내는 회오리로 소나무에 쌓인 눈꽃은 목련처럼 바람에 날린다.
강원 땅이 아니라 할까 비탈진 둔덕의 거친 밭에는 옥수숫대를 무더기무더기로 쌓아올려
처음 보는 이는 무엇일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칠현사 현판이 눈에 들어오니 여기가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알겠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
거칠현동은 이 곳 서운산에 있는데 어이하여 만수산인가...
고려 말 송도의 칠현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두문동에서 나와 이 곳에 은둔하여
송도의 만수산을 그리워 했기에 그런가보다.
이름도 단아한 별어곡에 잠시 정차한 기차는 민둥산역에 길손을 내리는데
얼마 전까지 증산이라는 역명은 민둥산역으로 바뀌었고
비둘기호로 시작된 증산과 구절리를 잇는 열차는 지금은 통일호를 거쳐 무궁화호로 바뀌었지만
그 때 쓰던 팻말을 보존하여 전시되었기에 아련한 그리움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러고보니 오는 내내 정녕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로다 여겼던 이 곳은
지금도 무릉리라 부르니 그 느낌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역에서 올려다보는 민둥산은 그 옛날 화전민들이 나물이 많이 나게 하려고 불을 질렀다 하니
지금도 산머리는 허허벌판이나
덕분에 지천인 억새로 새로운 명성을 얻었으니
새옹지마의 고사는 사람에게만 맞는 말도 아닌가보다.
기차에서 내린 나그네의 발길은 시가지로 향하나
눈을 치느라 중장비가 내뿜는 굉음에 민둥산은 후일로 미루고
오늘의 발길은 여기서 접는데,
오르지 못 하니 그리움이요
그리움은 가슴깊이 새겨진다.
첫댓글 정선 나그네님, 작은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누리시는 소박하고도 정서적인 아름다운 인품이 보입니다. 그에 비에 저는 너무 넓고 크고 화려함속에 많은 시간을 보낸지라 몇 달을 고국에서 지내는 동안 소박한 삶을 동경하고 있답니다. 유럽에서 20년 세월을 다 쓰려면 나그네님께 죄송해서 말도 못 끄내지요..ㅎㅎ ..*^^*......
죄송하긴요... 언젠가는 그 못 다한 이야기 듣고 싶네요. 안녕히~
글을 감칠맛나게 참 잘 쓰세요 ..님의 글을 읽다보면 제가 글속에 주인공이 된듯한 착각이 듭니다..지난번 정선장에서는 곤드레나물 파는 아줌마.. 이번글엔 ~~시집 하나 무릎에 두고 하염없이 눈덮인 창 밖을 바라보는 초로의 여인이 되어 꼬마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주인공입니다...ㅋㅋㅋ 한가한 겨울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 여행하시는 정선 나그네님의 삶이 여유로워 보입니다.. 자연의 축복을 벗삼아 몸과 마음 만땅으로 충전하시여 산골속의 외로움 즐거운 생활로 누려보시어요 ...
아, 기차의 그 분이 님이셨군요.ㅎ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하더군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산골의 생활이매 즐기고자 합니다. 감사!
정겨운 글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정말 글을 넘 잘쓰시네요 부러울 정도로요
지금있는 곳이 내가 최고의 호사를 누릴수 있는길이다 생각 하고 살아가자니
마음에 크게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이처럼 정선 에서
꼬마 기차를 타면 더욱 행복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렇지요. 내가 처해있는 현실이 최고의 호사라 생각하시니 모든 일이 긍정적으로 보일겝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여행은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겠지요. 내내 행복하세요~
글을읽다보니 내가주인공이된듯.배낭을지고 꼬마기차를 타고싶어요.너무글을 잘쓰셔서 어느영화의한장면을 보는듯 합니다.쓸쓸하면서도 여유로운 그곳생활이 부럽기도합니다.벽난로에서퍼지는따뜻함속에 파뭇혀 커피한잔마시며 좋은책읽고 음악들을수있다면 ....사랑하는사람과함께라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남은 땅이 강원도라 합니다. 보면 볼 수록 정들고 살면 살 수록 사랑하게 된답니다. 언제 오셔도 정선은 반갑다 하지요...
아침마다 여행을 동행해서 다녀오는 듯한 느낌..항상 잠자던 생각이 깨어나게 해주셔서 넘 넘 감사합니다..
공감하여 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우물안 개구리처럼 내륙 깊숙한 작은 시골에 사는 저로선 그대가 머문자리를 사랑하고 고마워하지 않을수가 없네요..
아름다운 글에도 머물고 생소한 곳의로의 여행도 직접 다녀온것처럼 느끼고 삶에 지쳐 각박해진 마음에 여유로움도 찾고...
"군중속의 고독과 또 다른 고독" "세상의 호사를 혼자 누리는 듯하다" 라는말이 나를 뒤돌아보게 합니다..넘 감사해요, 정선 나그네님~~
감사하긴요... 공감하여주시니 제가 더욱 감사하지요. 정선엔 지금 함박눈이 펄펄 내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절기로는 아직 2월이니 겨울이군요~ㅎ
바쁜 마음에 저는 벌써 봄비이려나 했어요~ㅋ
정선 나그네님 덕분에 올 한 해도 아름다운 정선을 풍경화를 보는 듯
삶방에서 즐거운 이야기 꺼리루 마음은 늘 동심을 향해 달려 가는 한 해가 될 것 같네요.
글도 맛깔 스럽고~ㅎ
어렸을적 고향을 거니는 듯한 기분에 넘 좋은데요~ㅎ
늘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정선 소식 자주 들려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글을 쓰시기 위하여 많은 자료를 보시고, 연구하셨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글을 써주시니. 대가족이 정선아리랑의 탄생지를 여행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입니다. 정선 탐방 잘했습니다. 언제인가 실제적으로 탐방할 날이 있겠지요,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자연스럽게 탐방을 해야 제멋이겠지요,
네, 정선에 오자 처음 한 일이 정선의 역사에 대한 연구였지요. 정선 탐방은 봄까지 계속됩니다. 안녕히~
아우라지에서 꼬마기차라...정선에 갔다가 꼬마 기차도 타 본 느낌입니다....잘 봤습니다
느낌만으로는 부족하니 실제로 타보시기를...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