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돌아온 영웅(英雄)
1
참혼도부(斬魂刀夫) 추량(秋良).
삼십이 세.
과묵한 성격.
이따금 야수와 같은 면모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는 좀처럼 말이 없는 위인이다.
녹슨 칼 한 자루를 달랑 허리에 찬 채 강호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 수없이 많은 싸움을 치러낸 낭인(浪人) 출신으로 참혼도부란 별호가 말하듯 손속이 잔혹하기로 이름난 도객이었다.
그는 낭인들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명성을 날렸으나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제갈무황가로 찾아온 것은 인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거느리던 삼십여 명의 낭인들과 함께 무황가로 찾아왔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강북무림에서 작은 신화를 일궈냈던 낙혼검 혁유백 때문이었다.
그는 제 발로 찾아와 혁유백의 수하를 자처했던 것이다.
하지만 혁유백이 죽자 그는 미련 없이 무황가를 떠났다.
지금은 다시 과거의 낭인생활로 돌아가 강호를 정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 그는 동전 한 닢에, 때로는 독주(毒酒) 한 잔에 자신의 생명을 팔며 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매우 가난했다. 그것은 일거리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근 들어 그의 칼 솜씨가 무뎌졌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를 따르던 충직한 수하들도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가고 그는 혼자가 되었다.
쓰디쓴 황주(黃酒)만이 그의 고독을 달래줄 뿐이었다.
그것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주점 주인들에게 공갈, 협박, 때로는 구걸하다시피 해서 겨우 얻은 것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근래에는 쉽지 않았다.
그와 눈빛도 마주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내놓고 그를 괄시했다. 동전 한 닢은 고사하고 술 한 잔도 권하는 자가 없었다.
추량.
한때는 낭인들의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알려졌던 그였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저 기력이 떨어져 황야에서 까마귀밥이 될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해 있었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깔리는 한낮의 대로변.
제법 규모가 큰 한 반점 앞에서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쿡쿡쿡!"
오물을 뒤집어쓰고도 추량은 툴툴 웃었다. 방금 전 주방에서 버린 오물들을 뒤집어쓴 것이다.
"오늘은 재수가 좋은 걸. 잘하면 간만에 공술도 얻어먹을 수 있겠어, 쿡쿡쿡!"
전신에 뒤집어쓴 오물을 툭툭 털어 내며 추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 시진이 넘도록 술 구걸을 했지만 반점은 술 대신 오물을 퍼부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젠장! 이젠 정말 갈 곳이 없군."
이유는 그것이었다. 방금 오물을 퍼부었던 반점이 그나마 인심이 후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물세례로 인해 그 반점도 더 이상 기댈 곳이 못 되었다.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추량은 비실비실 반점을 등지고 걸어갔다. 황폐해진 몸은 술로 찌들어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콜록! 콜록!"
그는 한 골목 입구의 담에 기대어 앉은 채 기침을 해댔다. 이따금 입에서 붉은 피가 토해져 나오기까지 했다.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폐인(廢人)이었다. 길을 오가던 행인들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그를 피해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는 죽립을 깊이 눌러썼는데 아까부터 추량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
그는 추량을 내려다보다 그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
기침을 연발하던 추량은 힐끗 죽립인을 바라보았으나 곧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별난 놈이군. 이것도 구경거리가 되는 모양이지?"
"천만에. 역겨워서 다가왔네."
죽립인의 음성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추량은 흠칫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비틀어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왜 내 앞에 앉은 거지? 적선할 생각이 없다면 어서 꺼져."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 사지가 멀쩡한 놈이 영혼마저 타락했으니 한 푼도 줄 수 없지."
"이런, 우라질 놈이 있나!"
추량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기력이 쇠한지라 그의 음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죽립인은 비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혹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처분할 생각이 있다면 은자 한 냥쯤은 줄 용의가 있네."
죽립인은 태연히 흥정을 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폐인이 다된 추량은 녹슨 칼만은 단단히 허리에 비끄러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퇴락한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추량은 문득 싸늘하게 외쳤다.
"개소리!"
죽립인은 여전히 유유자적했다.
"예전엔 몰라도 이제 자네에겐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은데 뭣하러 차고 다니는가? 차라리 술로 바꿔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죽일 놈! 웬 참견이냐? 남이야 칼을 차고 다니든 바가지를 차고 다니든......."
"무엇 때문이지? 모든 걸 포기하면서도 칼만은 놔두는 이유가?"
추량의 고개가 슬며시 들려졌다. 그의 움푹 꺼진 눈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광채가 떠올랐다.
"무엇 때문이냐고? 한 번...... 언제일는지 몰라도 한 번쯤은 이 칼이 필요할 때가 올 거야. 그때를 기다리고 있지. 후후...... 그래서 포기하지 못하는 거야. 네놈이 그 의미를 알 리가 없지만."
"그때란 언제를 말하는 건가?"
죽립인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추량은 귀찮다는 듯 더 이상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탈진하여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듯했다.
"......."
죽립인도 침묵했다. 그는 한동안 추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봉두난발에 땟국이 줄줄 흐르는 얼굴. 일신에 걸친 의복은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커멓고 그나마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어 고약한 냄새마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도무지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참담하기만 한 추량의 몰골을 한동안 바라보던 죽립인이 사뭇 달라진 음성으로 말했다. 침중한 음색이었다.
"청풍당의 일등검사가 어찌하여 이런 폐인이 됐지? 이 혁유백 때문인가?"
"......!"
추량의 전신이 진동을 일으켰다. 썩어가던 그의 영혼이 일순 벼락을 맞은 듯했다.
그의 고개가 홱 들려졌다.
생기를 잃었던 눈에 광선과 같은 빛이 일어났다. 그는 죽립인을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죽립인 혁유백은 슬쩍 죽립을 들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추량의 눈이 잔 경련을 일으키며 그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불신의 빛이 감돌았으나 차츰 그의 눈에는 등불과도 같은 밝은 빛이 떠올랐다.
"이...... 이런 제기랄."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곧 격동에 찬 말을 흘러 나왔다.
"틀림없군요. 분명 당주님이셨군요!"
"그렇네. 낙혼검 혁유백이야."
혁유백의 어투가 바뀌었다.
추량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당주님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 하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추량의 음성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주체하기 힘든 격동으로 인해 그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추량, 어쩌다 이렇게 됐나?"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던 혁유백도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과거 그를 따르던 충직한 수하가 이런 모습으로 거리에서 죽어 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코끝이 저려오며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당주님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의욕을 잃었습니다. 다시 낭인생활로 돌아왔으나 아무것도 절 지탱해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
"그 후 제갈성과 부엽이 소인을 찾았었지요."
혁유백은 흠칫했다.
"소공자님과 부검사가?"
"이제는 무황가의 가주와 청풍당의 당주지요."
"음, 소문은 들었지. 한데?"
"소인과 절 따르는 삼십여 명의 무사들을 회유하더군요. 청풍당이 와해될 지경이니 다시 무황가로 돌아와 달라더군요."
"그래서?"
"소인은 낙혼검에게 매료되어 무황가의 식솔이 됐을 뿐이라고 말씀드렸지요. 때문에 그분이 없는 무황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지요."
여기까지 담담하게 말하던 추량의 눈에서 문득 분노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들은 그냥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추량의 얼굴에 증오의 빛이 떠올랐다.
제갈성과 부엽은 추량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자 그를 따르는 무사들을 상대로 회유에 나섰다. 그들이 돌아온다면 상승된 직분과 후한 봉록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추량을 따르는 무사들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 역시 낙혼검 혁유백 때문에 무황가에 몸을 담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집요한 유혹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어느 날 추량은 자신이 외톨이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십여 년간 그를 따르며 동고동락했던 수하들이 결국 영화를 좇아 떠나 버린 것이다.
그는 허탈했다.
그를 매료시켰던 인생의 지표, 혁유백이란 사나이가 가고 없는 지금 그는 더 이상 삶의 지향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가 마시는 술에 독(毒)을 풀었다.
그로 인해 추량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간신히 소생하게 되었다. 명의(名醫)로 소문난 한 의원이 그를 구한 것이었다.
의원은 그에게 한 건의 청부를 맡기러 왔다가 그를 중독에서 구해 준 것이었다. 추량은 그로 인해 목숨만은 간신히 건지게 되었다.
의원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청부를 들어줘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폐인이 된 것이다. 이제는 칼자루를 들 힘도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다시 일어설 수 있겠나? 자네가 필요하다."
혁유백의 말이었다.
그러자 추량의 얼굴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찡그림에 가까웠다. 너무나 오랫동안 웃어본 적이 없기에 마음대로 얼굴 근육이 움직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지요. 지난날처럼 말입니다."
"......."
혁유백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원하고 있었다. 지난날 청풍당의 일급검사, 아니 당주로서 강북무림을 위진시켰던 화려하고 당당한 낙혼검의 모습을 그는 보고 싶다는 것이다.
"옛날처럼...... 명을 내리십시오. 아직도 참혼도부 추량이 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혁유백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추량, 일어나라. 촉각을 다투는 일이다. 네가 처리해 주어야겠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반송장이나 다름없었던 추량이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돌변한 것이다.
"존명!"
번개같은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그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시립했다.
그런 그에게서 폐인의 모습은 조금도 볼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핫......!"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그들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한과 눈물이, 분노와 증오가 서리서리 배어 있었다.
2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초운설이었다.
그녀는 슬며시 자리를 옮겨 황보중악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몸을 기대 오자 황보중악은 황홀감에 젖으며 슬며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수십 년 이래 이런 느낌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긋나긋한 여체가 그의 가슴에 기대 오자 황보중악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짜릿한 느낌, 뿌듯한 느낌이 그의 머리를 산란하게 만들었다.
"사랑하오, 설매."
"안아주세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옹했다. 초운설은 고개 들어 황보중악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황보중악은 전신을 떨며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남녀가 거꾸로 된 듯했다.
감히 먼저 입술을 맞출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는 황홀감에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도 비로소 온몸이 타올랐다. 그는 초운설의 허리를 껴안으며 서툴게나마 그녀의 입술을 더듬었다.
쏴아.......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
황보중악은 슬며시 얼굴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한 척의 괴선이 지척에 다가온 것을 발견한 것이다.
초운설도 괴선을 발견했다.
그녀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무슨 배죠?"
"글쎄......."
문득 초운설의 미간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감히 우리의 일을 방해하다니....... 어떤 버릇없는 작잔지 가만 두지 않겠어요."
"......."
황보중악은 눈살을 찌푸렸다. 간신히 초운설을 품에 안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한낱 한 척의 배로 인해 좋은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분노의 눈으로 괴선을 바라보았다.
괴선이 그저 스쳐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괴선은 그의 희망을 무시하고 더욱 다가왔다. 이제는 삼 장 정도로 간격이 좁혀져 있었다.
마침내 그는 참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누구냐? 거기 멈추지 못하겠느냐?"
초운설이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계세요. 제가 저놈들을 혼내줘야겠어요."
"운......."
황보중악이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초운설은 벌써 한 마리 야조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피식 실소했다.
'아무튼 성질은 여전히 팔팔하구나.......'
황보중악은 느긋한 마음으로 괴선을 바라보았다. 초운설 정도의 무공이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악!"
괴선에 떨어지는 순간 외마디 비명이 울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 초운설의 비명이었다.
"아니?"
황보중악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3
기세등등하게 날아갔던 초운설은 흑선의 갑판 위에 맥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무황가의 사대 당주 중 일 인이자 강북무림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여걸 초운설이 잠깐 사이에 이런 낭패를 당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사지를 맥없이 늘어뜨린 채 갑판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여인은 분명 초운설이었다.
황보중악은 주위를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갑판을 딛기 무섭게 초운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설매!"
하지만 황보중악은 중도에 몸을 틀어야만 했다. 주위 사방에서 덮쳐오는 예리한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검기였다.
"죽일 놈들!"
황보중악은 노성을 터뜨리며 신형을 빙글 회전시켰다.
우르릉!
황보중악의 쌍장에서 위맹한 장력이 날아가 갑판 위를 휩쓸었다. 아름드리 거목이라도 뿌리째 뽑아 버릴 듯 무시무시한 잠력이었다.
"흣! 도만 쓰는 줄 알았더니 장력에도 일가견이 있었군."
문득 어디선가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황보중악의 장력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다.
황보중악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먼저 초운설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는 경악성을 발했다. 놀랍게도 방금 전까지 갑판에 쓰러져 있던 초운설이 사라진 것이다.
"이놈들이......!"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황보 대협,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어둠 속에서 등불 두 개가 나타났다. 두 명의 흑의인이 등불을 들고 있었고 선두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검은 장포를 걸친 칠 척 장신의 중년인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황보중악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상대는 침착했다. 창백한 안면에 가느다란 실선을 그리고 있었다.
"초 여협은 무사하오. 본좌가 잠시 혈도를 짚었을 뿐이오."
황보중악은 상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며 노갈을 터뜨렸다.
"어서 풀어주지 못하겠느냐?"
"그럴 순 없소. 당분간은."
"뭣이? 오냐, 그렇다면 노부의 힘으로 되찾겠다."
쩡!
황보중악의 어깨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그에게 패도한 별호를 안겨준 애도 철혈도(鐵血刀)가 발출된 것이다.
백전백승의 신화를 창조하고 황보중악을 당대 무림의 도존으로 자리매김시킨 철혈도가 칙칙한 어둠을 일시에 물리치는 듯했다.
철혈도는 보통 칼에 비해 한 뼘은 더 길고 세 치는 더 두터운 대도(大刀)였다. 철혈도의 도기가 사방으로 뻗자 주의의 공기는 일시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돌변했다.
"노부는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막아야 할 것이다."
황보중악의 음성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초운설을 납치한 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구나 좀처럼 뽑지 않았던 철혈도를 뽑은 지금 피를 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의 전신 장포가 팽팽히 부풀어올랐다.
"후후! 대단한 기도군. 과연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 해도 과언이 아니로군."
사내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좋아, 기꺼이 상대해 주지."
장신의 사내의 몸에서 칙칙한 예기(銳氣)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검을 뽑은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의 검에서는 묵광이 발산되고 있었다.
그는 묵검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소개는 해야겠지. 본좌는 사사루(死死樓)의 십이대 루주 냉무기라 한다."
냉무기라면?
바로 무황가의 뇌옥에 혁유백을 살해하러 왔던 사신 냉무기가 아닌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사루......!"
황보중악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철석간담의 노영웅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황보중악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무림의 영웅이었다. 그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목적이 뭐냐? 단지 초 당주를 납치하기 위해 무림에 나타난 건 아닐 텐데?"
냉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화후를 잠시 본루로 모셔 가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다. 기실 그 정도 일에 본좌가 친히 나선 것은 천하제일도로 불리는 귀하와 고하를 가려 보기 위함이지. 당대 무림에서 불사천존 단리목에 이어 제 이인자로 인정받는 귀하를 통해 본루의 필살검학인 일점혈(一點血)의 위력을 검
증받고 싶은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하면 믿을까?"
황보중악의 눈썹이 성큼 치켜 올라갔다.
"일점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쾌(快)와 력(力)을 겸비한 실전검법이라고 들었다."
"후후! 제대로 알고 있군. 고마운 일이야. 백도무림의 성역인 무황가의 최고 고수가 본루의 절학을 그토록 높이 평가해 주니 감격이라도 해야겠군."
황보중악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무공에는 정사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 노부의 지론이다. 무공은 사용하는 자에 따라서 그 성향이 구별될 뿐이다."
냉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했던 대로군. 자칭 협사라 거들먹거리는 위인들 중에서 본좌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무인이 귀하임을 이 기회에 고백해야겠군."
냉무기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황보중악은 마음이 화급했다.
"노부는 더 이상 잡담을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그는 철혈도를 번쩍 치켜들며 자세를 취했다.
냉무기도 바로 반응했다. 시종 여유 있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으나 기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냉무기의 묵검이 상단으로 이동했다. 그의 검극은 황보중악의 미간을 향해 겨냥됐다.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 십여 개의 등불이 갑판 위에 밝혀진 것이다. 등불을 든 흑의인들은 원진을 만들어 두 사람을 에워쌌다.
황보중악은 사사루의 무사들을 일별하고는 다시 냉무기에게 시선을 못박았다.
"노부의 처지가 다급한지라 먼저 출수함을 양해하시게."
황보중악이 먼저 움직였다.
"물론."
냉무기는 순순히 수긍했다.
우우웅!
철혈도가 밤 공기를 갈랐다. 장중한 파공음과 함께 번쩍, 섬광이 작렬했다. 섬광은 냉무기의 좌측 어깨를 사선으로 그었다.
냉무기의 안면에 비로소 긴장이 어렸다. 그의 거구는 이미 우측으로 소리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두 무릎이 꼿꼿이 펴진 채 유령처럼 움직이는 그의 신법은 기괴했다.
콰직!
터럭 하나 차이로 냉무기를 놓친 철혈도가 갑판을 쳤다. 갑판이 박살나며 나뭇조각들이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놀라운 파괴력이군. 힘만으로 말하면 일점혈을 능가하겠어. 하지만......."
냉무기의 반격이 시작됐다. 수세에서 공세로 돌변한 그의 몸놀림은 지극히 패도적이었다. 곧바로 황보중악의 심장을 향해 검을 짓쑤시며 정면으로 날아온 것이다.
츠츠츳!
예리한 파공음이 황보중악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황보중악의 대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묵검이 쏘아오는 방향을 향해 정면으로 철혈도를 휘둘렀다.
카캉!
검과 도가 충돌했다.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두 사람의 병장기는 마주쳤다.
충돌의 여파로 냉무기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반면 황보중악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냉무기의 미간에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놀라운 내력을 지니고 있군!"
그는 긴장을 한층 높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황보중악은 그가 자세 잡기를 기다렸다가 일갈을 토했다.
"일 초에 승부를 걸겠다."
초조한 황보중악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차앗!"
우람한 황보중악의 신형이 바닥을 차고 떠올랐다.
냉무기는 의아해했다.
'고수의 대결에서 저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이며 허공에 몸을 날리다니.......'
냉무기의 의혹은 당연한 것이었다.
백중지세의 고수들끼리 격투를 벌일 때는 좀처럼 신형을 띄워서는 안 된다. 그 자세에서 공격이 실패한다면 곧바로 전신의 요혈이 무방비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냉무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일 초에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이군. 그만큼 초조하다는 뜻이겠지. 쯧...... 화후의 안위로 인해 천하제일도가 흔들리고 말았군.'
냉무기는 상황을 정확히 짚었다. 때문에 그의 반응 또한 적절한 것이었다.
빙글!
냉무기의 신형이 절반 정도 회전하며 뒤로 미끄러졌다. 황보중악이 펼쳐낸 필살의 일도를 무위로 돌리자는 것이 그의 심산이었다.
가가가가각!
철혈도는 허공을 후리며 갑판을 일 장 가량 갈라 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합!"
황보중악은 바닥에 떨어지려는 순간 일성폭갈과 함께 재차 도약했다. 그의 거구가 거꾸로 처박히며 철혈도를 거세게 휘둘러 댔다.
그야말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는 공격이었다. 냉무기는 흠칫했으나 묵검으로 가슴을 보호하며 신출귀몰한 보법으로 철혈도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카카카캉!
도와 검이 몇 차례 부딪쳤다.
황보중악의 필살의 공세는 가히 경세적이었다. 무려 십여 차례가 넘게 연속적인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그것도 허공에서 몸을 띄운 상태로 폭풍 같은 공세를 연발했다.
'숨돌릴 틈도 없군!'
냉무기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반격을 하려 해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저 전력을 기울여 자신을 보호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보중악도 인간이었다.
허공에 내내 떠 있는 상태에서는 호흡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신형은 아래로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냉무기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그의 허리가 용수철처럼 퉁기는 듯하더니 쏜살처럼 앞으로 내달았다. 아니, 그도 날아갔다.
"일점혈!"
묵검이 자취를 감추었다. 초극의 쾌(快)가 만든 현상이었다.
황보중악은 눈을 부릅떴다. 그는 묵검의 방향을 파악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전면으로 쇄도해 오는 냉무기의 신형을 볼 수 있었으나 그가 전개하고 있는 묵검의 향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력을 다해 철혈도를 휘둘렀다.
가가가각!
두 사람의 신형이 엉겨붙었다 갈라졌다.
이번 격돌에서 뒤로 밀려난 것은 황보중악이었다. 냉무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신형을 휘청거리며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황보중악은 칠팔 보를 연속 밀려나면서 중심을 잡지 못했고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뿐만 아니라 가슴 부위의 의복도 길게 베어진 채 선혈을 뿜고 있었다.
묵검을 완전히 피해 내지 못한 것이었다.
황보중악은 어렵게 중심을 잡으며 냉무기를 노려보았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아직도 투혼이 타오르고 있었다.
냉무기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하의 조급함이 오늘의 결전을 형편없게 만들었소. 따라서 오늘의 승패는 의미가 없소. 훗날 다시 한 번 자웅을 겨뤄 봅시다. 머지않아 기회가 올 것이오."
냉무기는 몸을 돌렸다.
"멈춰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보중악은 다급히 외쳤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한 걸음도 떼어놓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이다.
"정중히 보내드려라."
냉무기는 선실 안으로 들어가며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안돼! 난 갈 수 없어! 설매, 설매를 내놓으란 말이다!"
황보중악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딛다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등불을 들고 있던 흑의인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황보중악은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하듯 외쳤다.
"차라리...... 날 죽여라! 결코...... 혼자 돌아가진 않겠다. 결코......."
말꼬리가 급격히 사그라졌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분루(忿淚)였다.
황보중악의 불패신화는 이렇게 깨지고 말았다. 막 사랑의 결실을 맺으려는 찰나 불상사가 발생한 것이다. 사랑을 강탈당한 슬픔보다도 큰 것은 무인으로서의 첫 패배에 대한 충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의식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피를 토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첫댓글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