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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부 2장 현대 철학의 주제와 문제l연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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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학사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 지음, 박민수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8년 9월
제 7부 20세기 철학 사상의 주요 방향
제 2장 현대 철학의 주제와 문제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과 긴밀할 뿐 아니라 긴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7부 2장을 지금까지와 달리 인물이 아닌 주제 영역에 따라 나눈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정말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저자의 취향과 편향 때문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Ⅰ. 인간의 모습 (철학적 인간학)
칸트에 의하면 철학이 답해야 하는 세 가지 물음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
Ⅱ.언어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언어는 철학의 핵심주제가 되었다. 언어는 인간의 인식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데, 칸트는 이것을 간과했다. 칸트와 동시대인인 하만(1730~1788)은 “내게 중요한 문제는 ‘이성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언어란 무엇이냐?’ 이다. (....)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다면 이성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칸트를 비판하며 인식비판에서 언어비판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 다른 동시대 사상가인 헤르더(1744~1803)는 이성은 언어에 구속되어 있으며, 이성은 원칙적으로 언어적이라고 말했다. 이성은 경험과 역사 그리고 관심의 구속을 받는다. 실제로 언어에 관한 자립적 학문은 이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최소한 5000개의 언어가 있다. 언어의 다양성보다 철학적으로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모든 언어에 일정한 본질적 특징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언어적 보편자가 존재한다.
훔볼트(1767~1835)는 철학의 중심물음이 칸트가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인간이란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이다” 고 주장했다. 인간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또 세계 안에서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 행위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이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으로 오직 개개 인간의 생생한 발화 행위에서만 존재한다.
소쉬르(1857~1913)는 언어 고찰에 있어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쉬르는 파롤parole 과 랑그langue를 구분한다. 파롤은 개인이 순간순간 사용하는 일회적이고 생생한 언어를 가리키며, 랑그는 기호와 규칙으로 이루어진 언어체계, 즉 모든 개인이 공유하고 있지만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개인들의 총체에서만 완전하게 실존하는 체계를 가리킨다.
소쉬르에 의하면 모든 언어적 기호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모든 언어에는 음성 형태, 즉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é)가 융합되어 있다. 두 요소의 결합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다. 소쉬르는 구조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언어가 철학의 중심이 된 것은 오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비트켄슈타인(1889~1951) 만큼 커다란 기여를 한 철학자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철학에서 ‘언어적 전회’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는 것은 그의 사상 때문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모든 텍스트를 독일어로 썼지만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영국이다. 이것은 비트켄슈타인을 현대 영미철학자의 대표자로 간주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의 서문에서 “본질적인 점에서 문제들을 최종적으로 해결했다”고 쓰며, 자신이 2000년 이상 지속 되어온 철학의 난제를 해결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기 비트켄슈타인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세계와 사상 및 명제에 의한 그 모사 사이에 명백한 관계가 있다는 『논고』의 생각 (그림이론)을 버린다. 사후 출간된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를 이루는 단어와 문장들은 대개가 다의적이고 모호하며 부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에 달려있다.(놀이이론)
‘언어적 전회’ 라는 간명한 표어는 철학적 문제들이 철학적 언어의 문제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이런 철학의 대표적 집단은 빈학파이다. 그들에게 철학이란 명제나 그것들의 논리적 상호 관계를 명확히 하고 의미 있는 명제를 의미 없는 명제와 구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다. 의미 있는 명제란 참, 거짓이 명확하게 구분 가능한 명제이다. 예를 들어 칸트처럼 “현상 세계의 이면에는 사물 자체의 영역이 있다”는 식의 명제는 무의미하다. 無나 영혼, 세계정신 같은 단어들도 무의미하다. 빈학파는 이렇게 형이상학의 뿌리에 도끼날을 박았다.
오스틴(1911~1960)은 언어의 수행성을 주장했다. 언어에는 진술적인 것도 있지만 수행적인 것도 있다. “내가 약속한다”는 말은 곧 약속의 행위 자체이기도 하다. 오스틴은 이것을 ‘언어행위 Speech Act’ 라 불렀다.
Ⅲ. 인식과 지식
칸트의 활동에서 신칸트주의 번영에 이르기까지 100년 이상 인식론은 철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후 철학은 인식 문제를 외면하지는 않았지만, 그 초점을 두 가지로 이동시켰다. 하나는 언어, 특히 인식에서의 그 역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과학 즉 인식이 계획적, 방법적으로 추진되고 점진적 성공을 거두는 영역이었다. 이렇게 해서 인식론은 과학론이 되었다.
1. 신실증주의
실증주의란 특정한 철학이론이나 학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철학적·과학적 기본 입장을 가리킨다. 철학과 관련해서 합목적적인 태도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것, 명백히 지각될 수 있는 것, 감성적 경험에 의해 확인될 수 있고 관찰될 수 있는 것만 중시하는 태도이다.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실증주의란 명칭을 철학에 도입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내용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정신사에 등장한 사상조류 중에서 주어진 것만을 중시해야 한다는 일반적 요청을 내세우고 또 우리 인식에 주어지는 것은 감각적 인상들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표방하는 조류는 모두 실증주의라 불릴 수 있다. 실증주의는 언제나 형이상학을 거부해 왔다.
신실증주의란 명칭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하나의 철학적 학파를 지시한다. 이 학파는 ‘논리실증주의’나 ‘논리경험주의’라고도 불린다. 이 학파에 속하는 모든 사상가에게 논리학은 각별한 역할을 한다.
2. 새로운 논리학
기호논리학은 다른 모든 사실과학들과 달리 하나의 이론 체계가 아니다. 기호논리학은 하나의 인공 언어에 비교될 수 있다. 기호논리학은 기호들과 이 기호들의 사용규칙을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다. 그러나 이런 언어구성에서는 개별 기호들이 우선은 해석되지 않고 있으므로 기호논리학은 차라리 언어의 골격 내지 도식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이 기호들은 응용논리학의 영역에서야 구체적 내용을 지니게 된다. 기호논리학은 수학의 새로운 토대 정립에 제일 먼저 활용되었다.
간단히 말해 기호논리학은 우리가 수학시간에 배운 이런 표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3. 러셀에서 분석철학까지( 신실증주의 : 빈학파 → 분석철학 : 일상언어철학)
러셀(18721970)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인식수단은 자연과학뿐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는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라 과학에서 차용되어야 한다. 러셀은 만년에 이를수록 점점 더 실증주의로 기울어졌고 실증주의에 의해 인정되지 않은 모든 지식영역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러셀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물질도 없고 정신도 없고 자아도 없으며 오직 감각자료만이 존재한다. 우리 지식의 유일한 원천인 자연과학은 감각자료 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20세기 철학유파의 하나로, 통일적이고 강력한 집단이었던 신실증주의학파는 ‘빈학파’라고 자처했던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빈학파는 1938년 이후로는 대개 ‘분석철학’으로 지칭되며 때로는 ‘토대연구’라고도 불린다. 현대 논리학과 결부된 모든 철학은 분석철학이다. 이 학파는 기호논리학을 체계화했으며, 철학자들로 하여금 언어라는 현상에 주목하게 하여 새로운 통찰을 얻어냈다. 이들은 인식의 문제를 공공연하게 구호로 내걸고, 증명가능하고 확실한 인식, 즉 과학을 주장했다. 과학적 인식의 이론, 즉 과학론은 이 학파의 주요 관심사의 하나였다.
4. 두 명의 회의주의자
과학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명백히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가진 사상가로는 쿤(1922~1996)이 있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진보는 단계적·연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변혁과 비약의 형태로 수행된다. 패러다임에 접합되지 않는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와 이론적 발상을 요구하며 결국 패러다임의 교체를 강제한다.
5. 포퍼와 비판적 합리주의
포퍼(1902~1994)에 의하면, 세계 사건은 엄격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면에서 확실하게 예정되어 있지도 않으며(비결정론) 완전하게 인식될 수도 없다. 지식이란 언제나 잠정적, 가설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이유에서 포퍼는 확증 대신 반증을 내세운다. 가설이란 확증에 의해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증을 통해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이론적 개념들은 우선 인간의 정신, 인간의 상상력에서 자유롭게 창조되며 이것이 나중에야 경험에서 검증되는 것으로 보았다. “내 확신에 의하면, 우리의 사유와 언어적 표현에서 등장하는 개념은 모두가 사유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며 감각적 체험에서 귀납적으로 획득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일정한 개념 및 개념 연관들을 습관적으로 감각적 체험에 굳게 결부시키며 그 결과 감각적 체험의 세계와 개념 및 언명의 세계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일 뿐이다. 예컨대 모든 계열의 수란 분명히 인간 정신의 고안물, 다시 말해 일정한 감각적 체험의 정리를 편리하게 하려고 인간이 창조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의 개념을 체험 자체로부터 이를테면 자연스레 생성시키는 방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수의 개념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과학 이전의 사유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구성적 성격의 인식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의 가설들은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깨달음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이것이 추후에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가설로 변환된다고 보았다.
6. 해석학
해석학Hermeneutik이란 말은 헤르메스 신에서 유래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달할 뿐 아니라 이를 이해할 수 있게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헤르메스란 이름은 ‘설명하다, 해석하다, 석의하다’ 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해석학은 철학의 고유한 학파를 형성하는데, 대표적 사상가는 가다머(1900~2002)이다.
가다머에게 해석, 즉 이해란 보편적 현상이다. 해석 내지 이해란 전승된 문헌과 정신적 산물의 수용은 물론 모든 인간 지식과 관련해서 기초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에는 기초적인 ‘선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다머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은 언어이다. “언어적으로 구성된 우리의 세계 정향에 속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의 모든 세계정향은 언어 습득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우리라는 세계-내-존재의 언어성은 결국 경험의 전체 영역을 표현한다.”
7. 구성주의
구성주의자들의 사유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고안한 무엇, 우리 자신의 구성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구성주의의 사상적 선구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현실이란 바깥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장치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8. 진화론적 인식론
진화론적 인식론자들은 이른바 ‘가설적 실재론’을 기본으로 공유한다. ‘인간에게는 궁극적 확실성을 지닌 지식이 허락되지 않는다. 인간은 틀릴 수 있으며, 인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은 학문의 전체 영역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는 테제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그 타당성을 엄밀하게 입증할 수 없지만 필연적이며 참된 것이라고 전제되는 ‘요청’이 필요하다.
9. 인식의 한계
20세기 후반에는 사유의 중심이 인식의 한계에 대한 물음으로 옮겨진다. 괴델(1906~1978)은 『수학의 원리』에서, 전개된 자연수의 공리체계는 비록 참이기는 하지만 이 체계의 틀 내에는 입증될 수 없는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간파했다. 어떤 공리체계에서 우리 인식을 확정짓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 괴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과학이란 현실을 정확하고 완전하며 일관되게 서술할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한편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양자역학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확인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한 미립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둘 중 하나가 정확하게 측정될수록 다른 하나의 측정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측정 행위 자체가 미립자의 상태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정확한 진술이 불가능하다. 다만 아주 많은 미립자의 상태에 대해서만 타당한 통계적 진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우리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연사건에는 불확실성의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라 인과성 개념은 상대화되며, 빈틈없는 결정론이란 견지될 수 없는 이론으로 전락한다.
Ⅳ.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잡다한 이야기가 있는데, 포퍼와 공리주의에 대해서 짧게 요약하고 넘어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20세기는 철학의 ‘다성적 세기’ 라 너무 많은 학파들과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다지 눈이 가는 사람은 없다. 다만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매우 인상적이다. 체계 혹은 세계는 불완전하다. 세계에 대한 우리 인식의 한계는 세계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인식론에 관한 철학이고, 여기서 곧바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포퍼는 역사주의를 비판했다. 역사 발전의 근본 법칙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발전에 관해 근거 있는 진술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로부터 올바른 정치적·사회적 행위의 지침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역사주의다. 계시된 신의 의지나 선택받은 민족의 승리, 변증법적 법칙 또는 필연적인 사회경제적 발전이 역사의 시작과 끝을 이룬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그런 예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권은 이런 견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플라톤 사상을 공박하고 있으며, 2권은 헤겔과 마르크스 및 그 후계자들을 비판한다.
영미의 공리주의는 처음 들을 때는 매우 윤리적으로 들린다. 벤담이나 밀은 어떤 행위의 모든 당사자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 내지 최소의 피해를 가져오는 행위는 선하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이로움이란 적극적으로는 행복이나 쾌락을 얻는 것에서 존재하며, 소극적으로는 고통이나 불쾌를 피하는 데서 존재한다. 따라서 언제나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익, 유용성, 행위의 결과를 기준으로 고안한 벤덤의 판옵티콘은 푸코의 해석처럼 감시와 처벌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윤리적 의도가 가장 비윤리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특히 결과를 최고로 중시하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다.
Ⅴ.뇌, 의식, 정신
플라톤 시대와 기독교적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상에서는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대립은 인간도 반으로 갈라 놓았다. 일상적 욕구로 가득 찬 신체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극장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왔고, 20세기 혹은 20세기 후반의 철학사상의 특징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신경과학, 뇌과학 등의 발전으로 정신의 비밀은 풀릴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세기의 철학이 경험과학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세기 철학 전체를 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성향이 있지만, 그 역시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라 전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