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싸움 / 오은
싸우기도 전에 질 것을 안다
숨을 데도
도망칠 데도 없다
상대는 나를 단번에 쓰러뜨릴 것이다
믿음은 확신으로 뿌리내리고
불안은 공포로 확산된다
질 것을 알면서도
문을 열고
창 앞에 선다
창 안으로
후려치듯 들이치는 것이 있다
흐드러지고
지고
사라지고
눈을 감았다 뜨면 국면이 달라져 있다
불리한 쪽에서 불합리한 쪽으로
불합리한 쪽에서 불가능한 쪽으로
비바람이 불어
창이 없어질 때까지
바람비가 내려
창이 없어졌음을 깨달을 때까지
이미 졌는데도
창밖에서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 <애지> 2023년 여름호
* 오은 시인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석사학위
2002년 『현대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없음의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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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의 동지보다도
더욱더 강력한 적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지란 기껏해야 조언자일 뿐, 그의 고귀하고 위대한 꿈에 대한 경쟁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와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후벼파는 것은 물론,
수많은 반칙과 살해음모마저도 그의 발전에 무한한 도움을 주고,
그를 더욱더 고귀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만일, 그의 적이 셰익스피어이고 호머라면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 신나는 일일 것이고,
또한, 그의 적이 소크라테스이고 칸트라면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 신나는 일일 것인가?
니체의 말대로 “자기의 적은 자기 행복의 결과”라면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과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더욱더 강력한 적을 찾아나설수록 더욱더 고귀하고 위대해지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불가능은 없다’라는 믿음 하나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고,
전인류의 스승의 힘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면 되는 것이다.
고귀하고 위대한 사람은 그의 사상과 이론(전략과 전술)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고,
더없이 비천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어떠한 전략과 전술도 없이 싸우기도 전에 이미 항복을 선언해버린다.
모든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앎의 크기의 차이이고, 따라서 모든 고등교육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수많은 전략과 전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 천하를 단 하나의 문화제국으로 통일하고 전쟁이 없는 나라를 꿈꾸었던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법전으로
유럽연방을 꿈꾸었던 나폴레옹 황제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꾸었다고 할 수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듯이,
승자는 언어의 소유권을 장악하고 모든 말을 다할 수가 있지만,
패자는 언어의 소유권을 다 빼앗기고 그 어떠한 말대답도 할 수가 없게 된다.
오은 시인의 [지는 싸움]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자의 넋두리이며,
그 불안한 심리를 묘사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패자는 언어의 소유권을 다 빼앗기고 말할 권리마저도 없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신세한탄의 넋두리이고,
말이 되지 못한 입속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도덕적으로는 정의롭고 선량한 입장에 있지만, 그러나 그 입장과는 다르게 불리한 쪽에 있으면
불합리한 것이 되고, 이론과 논리상으로는 옳지만 한번 불합리한 쪽으로 몰리게 되면
그는 불가능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게 된다.
“싸우기도 전에 질 것을 안다”는 것은 힘과 힘의 싸움에서 싸움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을 뜻하고,
이미 패배가 예정된 사람은 “숨을 데도/ 도망칠 데도 없”게 된다.
앎의 투쟁에 있어서 전략이란 그 싸움을 전반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말하고,
다른 한편, 전술이란 그 싸움에서 사용되는 기술과 방법을 말한다.
사상과 이론의 정립을 둘러싼 싸움은 전략에 해당되고,
사상과 이론의 장점과 약점을 파헤치며 싸우는 방법은 전술에 해당된다.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전략과 전술이 없는 어중이 떠중이들은 이미 싸우기도 전에
“상대는 나를 단번에 쓰러뜨릴 것”을 알고, 그 “믿음은 확신으로 뿌리내리고/ 불안은 공포로 확산”되는
‘죽을맛’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는 질 것을 알면서도 문을 열고,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비바람이 불어/ 창이 없어질 때까지” “흐드러지고/ 지고/ 사라지고” “이미 졌는데도/ 창밖에서는/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싸움은 사생결단식의 싸움이며, 무조건 이겨놓고 그 다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이 만물의 아버지이듯이, 싸움에서 진 자는 말대답 한 번 못하고 그 모든 것을 다 잃고
노예민족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는 ‘생명 있는 도구’로서 1회용 소모품같은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오은 시인의 [지는 싸움]은 앎의 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싸움이며,
그 어떤 전략과 전술도 없는 자의 넋두리라고 할 수가 있다.
승리보다는 패배를 선택하고, 명예보다는 굴욕을 선택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논리이고, 싸우기도 전에 이미 자포자기와 노예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싸움 중의 싸움은 사상과 이론의 정립, 즉, 전인류의 스승의 지위를 둘러싼 싸움이고,
이 싸움이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며 전체 인류의 역사를 이끌고 나가게 된다.
세계정복을 둘러싸고 싸우는 강대국의 싸움들이 그렇듯이, 이 전인류의 스승들의 싸움에는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으며, 상호 적대적이고 상호 경쟁적인 그 싸움을 통해서
최고급의 명예와 영광을 주고 받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싸움이 있는데,
첫 번째는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식의 싸움이고,
두 번째는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식의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첫 번째의 싸움은 부모형제와 모두가 다 죽더라도 나 하나만은 살아 남아야 한다는 유아론적인 승자독식구조의
싸움이고, 두 번째 싸움은 그 어떤 도덕과 윤리를 떠나서 ‘생사불명의 진흙탕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디지털 자본주의 싸움은 ‘승자독식구조의 싸움’이면서도 ‘진흙탕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모두가 다같이 적이며, 이 ‘만인 대 만인의 진흙탕 싸움’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식의
싸움이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스포츠(오락) 중에서 바둑이 가장 지적이고 정신적인 스포츠이며, 바둑판처럼 전략과 전술이
너무나도 즐겁고 기쁘게 펼쳐지는 곳도 없다.
하지만, 그러나 이제 바둑판을 지배하는 것은 인공지능이고, 모든 세계챔피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인공지능에게 전략과 전술을 묻고 그 대리전쟁을 수행해 나간다.
인공지능은 바둑판을 지배하는 전제군주가 되었고, 바둑기사나 해설자마저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인공지능 앞에서 ‘차렷자세’를 취하고 그 충성경쟁을 해나간다.
돈은 인공지능의 정신이 되었고, 인공지능은 돈의 육체가 되었다.
우리 자본가들마저도 돈(인공지능)을 위해 살고 돈을 위해 죽으며, 돈을 위해 사생결단식의 전투를 벌여 나간다.
우리 자본가들이 하루빠삐 인공지능에게 이렇게 물어 봤으면 좋겠다.
지구촌의 적정 인구는 얼마이고, 한 60억 명 쯤 살처분하면 이 지구촌은 살기 좋은 지상낙원이 될 수 있겠는가?
‘인간 70 수명제’를 실시하면 ‘저출산 고령화 현상’을 극복하고, 지구촌의 가장 더럽고 추한 혐오시설인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대청소할 수가 있겠는가?
앞으로 모든 진료와 처방은 인공지능이 맡아하고, 모든 재판과 판결마저도 인공지능이 담당하면
더욱더 공정하고 맑은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돈과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들의 구세주이지, 예수와 부처 따위는 돈과 인공지능의 충복에 지나지 않는다.
- 반경환 (평론가) 명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