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바다의 아들!
①
쏴아아아.
억수같은 빗줄기가 밤바다를 난타하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빗줄기는 수도 없이 퍼부어지는 검은 작살로 화하여 천지를 사나운 혼돈 속에 빠뜨렸다.
수평선도 부서져 버렸는가. 그 빗속에 하늘과 바다의 구분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를 휘감는 거대한 악마의 검은 옷자락처럼 무서운 어둠만이 질식할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 점 번개의 섬광조차 비치지 않는 광란의 어둠!
칼바람이 불어오는 겨울밤의 망망대해였다.
이때 바다 저편에서 기음이 터지며 한 검은 물체가 빠르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사(象士)! 이상하군요. 이 해역에 들어서자 갑자기 주위가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습니다."
"흠, 그렇군."
비바람 소리에 섞여 칼끝같은 음성과 육중한 음성이 엇갈려 들려왔다 싶은 순간 번쩍! 하면서 한 줄기 금광(金光)이 검은 물체에서 쏘아져 나와 방원 육, 칠 장의 바다를 쪼개버렸다.
촤악!
바다가 갈라지면서 물결이 비산(飛散)하며 한 떼의 고기가 퉁겨지듯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솟구쳤던 고기떼들이 피와 내장을 쏟으며 바닷속으로 다시 떨어졌다.
갈라진 배를 허옇게 까뒤집은 물고기들이 해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불쑥! 거대한 손 하나가 검은 물체 속에서 튀어나오며 떠오른 물고기를 집어 들었다.
허나 이내 그 물고기는 바다로 내던져졌고, 손은 또 다른 물고기를 집어올리고 있었다.
철벅! 풍덩!
그러기를 수십 번을 되풀이 했을까?
"분명 흑해능치(黑海 )떼! 확실하다. 흑해능치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심해에만 서식하는 어종, 흑해능치가 잡히기 시작하고 주위의 어둠이 한층 짙어질만큼 시커먼 바닷물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흑해에 들어선 것이 틀림없다."
거대한 손이 튀어나온 곳에서 육중한 음성이 울리고 칼날같은 음성이 반갑게 받았다.
"이곳이 흑해?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군요."
고기떼가 떠 있는 일 장 밖쯤의 해상에는 검은 물체가 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일엽편주를 연상케 하는 소형(小型)의 검은 모피선(毛皮船)이었다.
모피선에는 한 흑포노인이 폭우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거칠게 다듬은 육중한 둔기를 보는 느낌이랄까? 심장이 그대로 짓눌려 터져나갈 듯 엄청난 중량감을 발산하는 산악같은 거구의 노인이었다. 가슴에 수놓아진 금빛 코끼리의 문양이 거대한 체구와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헌데 섬ㅉ하게도 그의 목젖에는 한 마리 구렁이 같은 흉터가 시퍼렇게 변색된 채 휘감겨 있었다.
그는 흑포 속에 한 겹의 황금빛 갑주(甲胄)를 받쳐 입고 있었다.
"그렇지, 분명 마지막 관문이네. 이 흑해를 건너기만 하면 우리의 목적지인 해란주(海蘭洲) 앞바다, 그 죽음의 해안선까지는 눈을 감고도 도착할 수 있지. 허나 문제는 두 눈을 뜨고 건너야 할 이 흑해에 있네."
흑포노인은 물고기를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후훗! 말해 봤자가 아닙니까? 상사와 저는 청도를 떠나서부터 무려 한 달 보름을 파도와 싸워 왔습니다. 이까짓 흑해 쯤이야."
흑포노인의 한 옆에서 노를 젓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흑포노인의 장대한 체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흑포노인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가슴에는 황금코끼리 대신 핏빛 한 송이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는 무거워 보이는 철립을 쓰고 있었다.
그의 철립 아래로 드러난 창백한 용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떨리게 하였다. 특히 그의 종잇장처럼 얇고 새빨간 입술에서는 탕녀와 같은 사악한 색기가 풍기고 있었다.
헌데 그의 몸에서 풍기는 체취는 백 팔십 도 달랐다. 그의 몸에서는 섬ㅉ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었다. 흡사 피를 먹고 날을 세운 칼날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기괴한 양성(兩性)의 기운을 가진 사내였다.
흑포노인이 들고 있던 물고기를 사내의 발치 아래로 던졌다.
"보게, 이 흑해능치의 몸을."
사내의 눈이 흑철립 속에서 반짝 빛났다.
"호, 아주 특이한 물고기로군요. 눈은 야명주에 가깝고, 몸은 거의 완전히 나선형으로 휘어져 있으니."
"잘 봤네. 그 흑해능치는 원래 펑범한 물고기와 다름이 없는 놈이었지. 헌데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 흑해의 어둠과 발 밑에 흐르고 있는 폭풍와류가 놈을 기형적으로 만들어 버렸네."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현장!"
"그렇네. 흑해능치는 이 흑해의 어둠과 소용돌이에 적응하다 보니 눈과 몸이 진화, 지금의 형태로 살아가게 되었지. 허나 그런 흑해능치 조차도 흑해의 중심부에는 근접하지 못하네."
매화문양의 사내의 몸에 은은한 파문이 일었다.
"아니 도대체 소용돌이가 얼마나 거세길래 자연도태를 거쳐 진화된 물고기조차 접근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제법 무서운 곳이네. 물 속에서 태어나 물 속에서 생활하며 진화까지 된 물고기도 길을 잃으니. 아무리 수공과 자맥질의 일인자라 해도 적수공권(赤手空券)으로 이곳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나?"
"음."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은 생태계에 존재하는 가장 처절한 생존의 법칙이 아닌가. 생존 경쟁에서 적응하지 못한 형질의 개체는 도태되고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아 번식한다는 생명진화의 잔인한 섭리!
그 속에서 살아 남은 물고기조차 길을 잃는다는 흑해는 정녕 무서운 바다가 아닐 수 없었다.
헌데 단지 물고기를 잡아봄으로써 바다의 모든 것을 읽어내는 이 흑포노인은 대체 누구인가?
분명 어부는 아니었다. 어부가 갑주를 받쳐입고 고기잡이를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더욱이 잡은 고기를 다시 바다에 버릴 리도 없는 일. 그렇다면 대체 이들은 어떤 인물들이란 말인가?
그때 매화문양의 사내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며 애석한 빛을 떠올렸다.
"실수했군요. 만자방반(卍字方盤)을 가져와야 했던 것을."
"허헛. 천일매(千日梅). 자네는 노부가 왜 모피선을 고집했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는가?"
"예?"
"허허, 이 흑해에는 어둠과 소용돌이와 더불어 무서운 것이 또 하나 있네. 그것은 검은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모래지. 웬만한 철선 쯤은 가볍게 끌어 당기는 엄청난 자력을 지닌 자철사(磁鐵砂)가 바로 그것이네."
"그럼 만자방반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만자방반이 비록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도 방향을 가르쳐 주는 나침반이지만 그 또한 쇠붙이가 아닌가? 이곳에서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네."
"훗! 우리가 철선을 타고 왔다면 이미 흑해의 물고기 밥이 되어 있겠군요."
매화문양의 사내는 실소를 짓다가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이 흑해를 건널 방법은 전무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흑포노인은 껄껄 웃었다.
"가세! 방법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매화문양의 사내는 잠자코 노를 젓던 손에 힘을 더했다.
촤아아아!
검은 모피선은 처음 나타날 때와 같이 빠른 속력으로 폭우 속의 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이제 알겠군요. 해란주의 수인들이 왜 탈출을 하지 못하는지를."
"탈출? 허허허, 있을 수 없는 얘기지. 대양(大洋)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고, 천연의 함정이 천년고목의 나이테만큼이나 에워싸고 있는 해란주를 탈출하다니. 차라리 지옥을 빠져나오는 것이 훨씬 편하지."
"그렇군요. 약간 모순은 있지만 말입니다."
'모순이 있다?'
흑포노인의 두터운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지금 자네의 말은 우리가 해란주에 들어가고 있으니 또 나올 수도 있음을 뜻하는가? 허나 그것은 우리의 경우일 뿐. 해란주의 수인들에게는 나오는 길이 없네."
"......?"
"우리는 벽곡단과 모피선, 해도(海圖)등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왔지. 하지만 불행히도 해란주에는 배를 만들 나무, 가죽 따위는 없네. 오로지 모래, 바람, 바위와 난초, 그리고 철새 뿐인 불모지대가 바로 해란주일세."
"음!"
그렇다. 해란주는 바로 악마의 수용소군도였다.
- 해란주!
육천마을 중 수인의 마을. 대역죄인과 이국포로들만을 수용하는 동쪽 머언 심해선 밖 아득한 해상의 불모지대!
패전국의 불모들이 많이 유폐되어 있어 이방의 천역이라 불리우며, 철새들의 고향 또는 물고기들의 무덤으로 대변되는 곳이었다. 섬 전체를 뒤덮고 있는 난초림으로 인해 해란주라 칭해지는 곳으로서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不歸)의 지옥도였다. 헌데 그 버림받은 땅을 향해 일엽편주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이 비와 어둠을 가르며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때 노를 젓고 있던 매화문양의 사내가 무언가 의문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후훗, 상사. 해란주가 가까워 올수록 저는 더욱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죄인도 아닌 그분께서 이 지옥의 섬, 해란주에 스스로 뛰어드셨다니."
흑포노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딱딱하게 대꾸했다.
"생사지우이신 주군께서도 뜻을 알지 못하는 분일세."
그 악마의 섬에 죄인도 아니면서 스스로 들어간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매화문양의 사내가 의혹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상사. 도대체 그분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이시길래 주군께서 그토록 엄청난 대업을 맡기시려는 거죠?"
"허헛! 자네는 그분에 대해 꼭 열 한 번째를 물었네. 하지만 노부의 열 한 번째 대답 또한 마찬가지네."
매화문양의 사내는 쓴 웃음을 지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후훗, 그만두시지요. 주군의 막역지우이며 함자는 자륭극(紫隆極), 십 오 년 전 개세(蓋世)의 거사를 막후에서 주재, 주군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건국일등공신으로 왕호를 하사받았으나 거절하고 후에 스스로 해란주에 들어간 신비의 인물, 그 답변은 이미 저도 완벽하게 외웠습니다."
흑포노인의 거대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피어났다.
"그렇네. 그것 뿐 일세. 열 한 번째 말하게 되는 것이지만 노부가 자네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석년에 그분의 존안을 먼 발치에서나마 한 번 뵈었다는 사실뿐이지."
십 오 년 전 개세의 거사라면 바로 대명 건국 이십 사 년 연왕이 폐위하고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등극하던 때의 그 파란만장하던 일대 변혁의 역사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바로 연왕반정(燕王反政)이다.
헌데 해란주로 스스로 들어갔다는 자륭극이라는 사내가 바로 연왕반정을 막후에서 주재한 연왕의 막역지우이며 또한 연왕조차도 정체를 모르는 신비의 인물이었단 말인가. 정녕 가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면, 상사께서는 그분이 주군의 천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매화문양의 사내의 칼끝같은 시선을 받자 흑포노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하네! 주군께서 자대인을 중원으로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이 강호에 나옴으로써 대중원 무림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믿으시기 때문이지."
"상사. 저는 자대인께서 과연 그자를 제거할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노부도 모르네. 자대인께서 천고의 신비고수이기는 하나 그자 또한 오천 년 중원무림이 낳은 사상 최강의 초마인(超魔人)! 결코 확신할 수 없는 승부이지."
매화문양의 사내는 추궁하듯 집요하게 물음을 계속했다.
"하면 자대인께서 패한다는 말씀입니까?"
노인의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아니네. 비록 주군께서 자대인께 육 할의 승률을 걸고 계시지만 노부의 우견으로는 감히 오대 오로 놓고 싶네."
"오대 오! 더구나 주군께서 자대인에게 육 할을?"
"노부의 짐작일 뿐일세. 허나 분명 노부가 알고 있는 바로는 사상 최강의 초마인인 그자와 오대 오의 승률이라도 점칠 수 있는 인물은 천하에서 오로지 한 분, 자대인 밖에 없다네."
"그분이 그토록 대단한 분이십니까?"
매화문양의 사내의 칼끝같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허헛! 대단한 분이라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 아닌가? 십 오 년 전의 대역사를 모습 한 번 드러내지 않은 채 이루어 내신 분이니."
자륭극이라는 사내가 사상 최강의 초마인과 오대 오의 승부를 논할 수 있다면 그는 곧 천하최고의 고수라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금의 황상 영락제가 자륭극이라는 사내를 불러 상대하려는 그자란 대체 누구이며, 또 황상이 친히 일개 무림인을 제거하려는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빗발이 더욱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대인이라... 나 천일매(千日梅)가 한 번쯤 겨루어 보고 싶은 인물이 또 한 명 늘었군요."
매화문양의 사내가 탄성을 터뜨리자 흑포노인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나왔다.
"허허헛, 겨루어 보고 싶다고 했나?"
"비웃는 것입니까?"
"허허헛, 비웃는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하는 것이네."
"상사! 저는."
흑포노인의 싸늘한 말이 천일매의 음성을 잘랐다.
"천일매! 하나 묻겠네. 자네는 관부십팔반무예(官府十八班武藝) 중 몇 가지를 연마했는가?"
"궁(弓), 노(弩), 추(鎚), 편(鞭), 극(戟), 박승(縛繩) 등 십 오 종을 십이 성까지 연마했고, 그 밖에도 필(筆), 부(斧), 월(鉞)의 셋은 구성 정도까지 연마했습니다만?"
천일매가 어리둥절하게 대답하자 흑포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
"허헛, 아까 자네의 광오한 말에 놀라 몇 년 전 주군의 말씀이 생각났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관부십팔반무예는 당시 약관의 자대인께서 대폭 수정을 가한 끝에 거의 창시하다시피 했다고 하셨네."
"과, 관부십팔반무예를 창시!"
천일매의 아연한 표정을 보며 흑포노인은 미소를 지울 줄을 몰랐다.
"허허, 자대인이 관부십팔반무예를 새롭게 창시할 때 자네와 노부는 겨우 십팔무예의 구결을 암기하고 있었지."
벙어리가 된 천일매에게서 시선을 뗀 흑포노인은 폭우 속의 밤바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어 독백처럼 한 줄기 낮고 육중한 음성이 또박또박 어둠을 뚫고 울리기 시작했다.
"보게. 저 바다는 파도의 고요함과 해일의 거대함을 함께 갖고 있지. 아울러 그 속에는 모래와 염수, 그리고 수없이 많은 어류 등 온갖 것들을 포용하고 있네. 허나 저 바다가 얼마만큼의 힘을 갖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모래와 염수를 포용하고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분은 저 바다와 같은 인물이라네."
이때 천일매가 노를 젓다 말고 다급성을 터뜨렸다.
"배에 물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뭣?"
흑포노인은 급히 선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럴 리가 있는가? 이 모피선은 내수성이 가장 강한 해마(海馬)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거늘."
허나 노인의 눈빛은 이내 싸늘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언제부터인가 배의 밑창으로부터 검은 해수가 번져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흑포노인의 시선이 바닥 어느 한 곳에 날카롭게 꽂혀졌다.
"칼자국이다."
천일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순간, 부욱! 하는 소리와 함께 선수가 무엇인가와 세차게 부딪치며 거칠게 찢어졌다.
"앗! 상사, 저 푸른 빛 기물은?"
천일매는 급히 선수를 바라보며 경악성을 흘렸다. 배가 가로막힌 전방에는 흡사 새파랗게 빛나는 칼날이 횡으로 누워있는 듯한 기물체가 해면에 솟아 있었다.
흑포노인의 눈은 기물체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모피선을 중심으로 방원 백 장 가량의 해상에는 마치 검은 바다에 푸른 띠를 둘러놓은 듯 무엇인가 원을 형성한 채 악마의 이빨처럼 새파랗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교살청망(鮫殺靑網)!"
흑포노인이 씹어뱉 듯 뇌까리자 천일매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일어났다.
- 교살청망!
일명 학살의 그물, 곧 학살마망(虐殺魔網)이라고 불려지는 바다 위의 죽음의 덫! 일단 표적을 가두면 수천 수만 마리의 거머리 떼가 달라붙 듯 조여들어 끝끝내 요절을 내고 만다는 그 지옥의 기병(寄兵)이 아닌가.
심해의 백색 마물(魔物)로서 백경(白鏡) 조차도 순식간에 수억 조각의 육편으로 난자되어 버린다는 푸른 빛 악마의 사선(死線)이 바로 이곳 흑해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모피선 위의 두 사람이 은은한 경악에 싸여 있을 때였다.
"많아, 아는 것이 너무 많아! 확실하게 죽어 줘야겠어."
돌연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한 줄기 사이로운 음성이 터졌다. 동시에 번개가 산산조각으로 찢어지듯 한 줄기 불붙는 유성이 암천으로 치솟아 올라 주위를 대낮처럼 밝히는 것이 아닌가.
헌데 놀랍게도 천일매와 흑포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훗, 융광섬뢰(融光閃雷)!"
"허헛, 자네와 노부는 운이 좋군. 이 어두운 뱃길에 화기(火器)의 총아라는 융광섬뢰가 등대불이 되어 주니."
- 융광섬뢰.
육천마을 중 장인의 마을, 술예범의 초약전( 藥田)에서 제조해 낸 최첨단의 특수화기를 말함이 아닌가.
폭뢰(暴雷)로서 가공할 위력을 떨칠 뿐 아니라 화공에서 예광화전(曳光火箭)으로도 활용되는 다목적화기.
흑해의 두터운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이 빛이야말로 바로 그 융광섬뢰의 신광이었다.
그 빛 아래 교살청망은 더욱 새파랗게 형광을 발하며 그물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헌데 모피선을 포위하고 있는 것은 그물의 장막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착 달라붙은 가죽옷을 착용한 일천여 명의 청영(淸影)들이 다섯 자 크기의 소형 모피선에 올라선 채 그물의 장막 너머로 겹겹이 인의 장막과 대선단의 장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선단의 중앙에 서 있는 젊고 깡마른 장발의 사내가 예의 사이로운 음성을 터뜨렸다.
"정정해 주마. 융광섬뢰는 너희들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불이 아니라 지옥으로 인도하는 유황의 불이란다."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가죽옷은 푸르죽죽한 뱀가죽을 벗겨 입은 듯 기분 나쁜 윤기를 발하고 있다. 뱀의 차가운 피와 상어의 잔인성을 합쳐놓은 듯한 음사한 사내였다.
그의 옆에 있던 사내가 말을 받았다.
"교인(鮫人)! 이해하고 들어주게. 관부의 높으신 금의위통령(錦衣衛統領) 나리와 동창(東廠)의 대영반(大英班)께서 세사에 마지막 남기는 말씀이신데."
한 마리 핏빛 고래를 연상케 하는 근육질의 체구를 가진 자였다. 헌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실로 충격적이지 않은가.
천일매와 상사라 불리운 두 사람이 바로 연왕의 측근으로 연왕반정의 선봉에서 대업을 완성하고 대명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해 권력의 핵을 거머쥔 황금상사(黃金象士) 금간천력(金干天力) 사마우치(司馬愚痴)와 천일매 초보단미(初步斷眉) 은탄린(殷呑麟)이란 말인가?
하늘의 신력을 갖고 있는 황금코끼리, 황금상사 금간천력 사마우치!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상대의 눈썹을 쪼갠다는 천일매 초보단미 은탄린!
그들은 당금 대명관부에서 서열 일, 이 위를 다투는 초일류고수였다.
②
이때 사마우치는 뱀같은 사내를 직시하고 있었다.
'우리의 신분을 알면서도 막는가? 그것은 곧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을 의미하는 것, 저자들이 누구길래 갑자기 흑해 위에서 우리를 막아선단 말인가?'
천일매의 얼굴에도 싸늘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훗! 말세로군. 강호의 떨거지들이 감히 관부의 무인을 능멸하려 하다니!"
"크ㅋ! 떨거지라, 입이 더럽게 재수없는 놈이군. 입이 더러운 놈은 주둥이를 놀리지 못하게 하는게 상책이지."
교인이라 불리운 사내가 뱀가죽처럼 푸르죽죽한 그의 옷빛깔 만큼이나 징그럽고 기분나쁜 음성으로 천일매의 말을 받았다.
이때 사내를 직시하는 사마우치의 눈은 더없이 싸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위험한 놈이구나. 나는 칠십여 년을 죽음과 싸워 죽음의 냄새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비를 맞고 서 있는 살모사같은 저놈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내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강렬한 죽음의 냄새다. 죽여야 한다!'
사마우치의 눈에서 별빛처럼 차가운 살기가 솟구치는 순간 교인이라 불리운 사내의 입에서 잔독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ㅋ! 애들아, 꿰어라!"
순간 인(人)의 장막을 치고 있던 청피인(靑皮人)들이 일제히 양손을 수평으로 뻗었다. 그러자 흡사 수만 개의 비늘이 연이어 폭사되듯 청피인들의 소매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백광이 폭출되는 것이 아닌가.
"이따위 미꾸라지나 잡는 낚싯줄로!"
천일매의 몸이 검과 함께 팽이처럼 회전하며 쏘아오는 백광들을 그대로 잘랐다.
"크ㅋ, 미친 놈. 호박 써는 검으로 감히 사린교아(死鱗鮫牙)를 끊으려 하다니!"
교인이라 불리운 사내의 비릿한 조소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탕! 하는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맨 처음 쏘아져 나간 백선이 천일매의 검에 맞으며 퉁겨졌다. 헌데 놀랍게도 퉁겨졌던 백선은 더욱 맹렬한 속도로 방향을 바꾸더니 화살처럼 천일매의 흑포에 그대로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파파파팍!
모피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수한 백선들이 모피선을 요란한 음향을 터뜨리며 꿰뚫고 있었다.
"치잇, 천하에서 가장 질기다는 백경(白鯨)의 힘줄 끝에 상어 이빨을 박아 만들었다는 흉병, 사린교아였을 줄이야!"
천일매의 입에서 낭패한 음성이 터졌다.
사마우치와 천일매가 처해 있는 광경을 보라. 고래 힘줄과 상어이빨로 만들었다는 사린교아에 묶인 그들의 모습은 흡사 거미줄에 감겨 있는 곤충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사마우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낭패다! 사린교아를 사용하는 자들은 오직 하나! 저 두 놈이 그 악명 높은 악마의 상어떼, 학살교단(虐殺鮫團)을 이끄는 학살교인(虐殺鮫人) 척군차(尺君車)와 사형혈경(死形血鯨) 을주발도(乙州拔道)였다니, 으음!'
- 학살교단!
학살교인 척군차와 사형혈경 을주발도가 이끄는 악마의 상어 떼. 바다 위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유령처럼 나타나 해상의 모든 것을 폭풍처럼 쓸어버리고 어디론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유령선단.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단 한 척의 나룻배를 공격할 때에도 전단(全團)이 동원되어 휩쓸어 버리는 그들의 공격습성 때문에 바다의 자객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학살교단이 지금 이 흑해의 검은 폭우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척군차가 음침하게 웃었다.
"크ㅋ! 보기 좋구나. 꼭 실이 풀리고 있는 누에고치 같은 몰골이군. 얘들아! 저 누에고치들의 번데기를 천천히 찢어 주거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청피인들이 사린교아의 줄을 사정없이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사린교아가 팽팽해지는 순간이었다.
"윽!"
천일매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터졌다. 그의 어깨살 한 부분이 뭉턱 뜯겨져 나가면서 피화살이 튀어올랐다.
사마우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피화살이 솟고 있었다.
모피선의 이곳저곳도 천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순식간에 온몸이 피바가지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변해버렸다.
'으, 끝났다! 아무리 내력을 끌어올려도 이 악마의 힘줄은 더욱 세차게 살점을 죄며 파고들고 있으니, 원통하구나! 하필이면 해란주를 눈앞에 두고, 아!'
사마우치의 눈에 죽음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교인! 무례를 범하지 마라. 본좌를 찾아오신 분 같다."
돌연 긴장된 공기를 자르며 어디선가 한 줄기 청량한 음성이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천명!"
"옛! 태상!"
놀랍게도 척군차와 을주발도를 필두로 청피인들의 허리가 일사불란하게 직각으로 굽혀졌다.
천일매의 눈에 의혹이 떠오르는 순간 사마우치는 번개를 맞은 듯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오! 이 목소리는 바로 자대인의 음성이다! 허면 노부의 짐작대로 이 자들의 주인은 바로 자대인? 으음!
사마우치의 판단이 사실이라면 실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교살청망과 사린교아를 사용하여 폭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바다의 학살자 학살교단. 그 피에 젖은 공포의 이름이 바로 천세의 신비고수 자륭극의 휘하였다니.
그 순간이었다.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전신에 박혀있던 사린교아들이 일제히 피와 살점을 뿌리며 뽑혀졌다. 동시에 융광섬뢰의 빛이 꺼지며 삽시간에 주위는 칠흑같은 어둠으로 되돌아갔다.
사마우치가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천일매에게 전음을 던졌다.
(어서 예를 취하게. 저분이 바로 우리가 뵙고자 하던 그분...)
그의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예의 청량한 음성이 재차 어둠을 울렸다.
"하하! 그만 두시게. 나는 강호의 일개 무인, 어찌 관부의 대인들에게 예를 받을 수 있겠나?"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앞쪽 약 삼 장쯤의 어둠 속에 언제부터인가 한 척의 배가 고요히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은 나룻배라기 보다 난초줄기를 엮어 만든 허름한 뗏목이었다.
뗏목 위에는 은빛 우산으로 폭우를 가리고 서서 길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한 청의문사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보였다.
단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뿐인데도 청의문사의 모습은 대해 전체를 딛고 서 있는 듯 무상(無上)의 위엄을 흘려내고 있었다.
대략 사십 줄의 나이로 보이는 청의문사의 외관은 마치 몇 줄기 힘찬 선으로 담백하게 그려진 수묵화 속의 인물을 보듯 탈속하고 유유자적해 보였다.
헌데 특이하게도 두 눈썹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날 만큼 희디흰 백미여서 그의 신태에 한층 중후한 기도를 더해주고 있었다.
'저분이 바로 자대인. 흡사 모든 것과 싸워 이긴 후 스스로 다시 그 속에 머물고 있는 해탈의 거인을 보는 듯하다. 아아!'
천일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경탄의 빛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는 저 모습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저 분을 존경하게 될 것만 같다.'
이 탈속한 청의문사가 바로 사마우치의 입을 통해 무한의 찬사와 외경을 들었던 자륭극이란 말인가?
어둠 속에서 연왕반정의 거대한 역사를 주재했고 하사받은 왕호를 거절하면서 스스로 악마의 섬 해란주에 들어간 기인이며 최강의 초마인과 유일하게 오대 오의 승부를 결할 자격이 있는 천하제일인이라고까지 말하여졌던 바로 그 사람.
사마우치가 천천히 허리를 펴며 하례를 올렸다.
"허허, 자대인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십이 년 전에 뵈었던 그 웅풍과 위엄이 오히려 한층 짙어지신 것 같습니다."
"하핫! 그래, 무슨 일인가? 대명 관부의 대인들께서 어찌 이 후미진 바다의 한 구석까지 왕림하셨나?"
자륭극은 가벼운 웃음으로 예를 대신하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헌데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왠지 선뜻 대답을 않은 채 난처한 표정으로 자륭극의 뒷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뗏목 위에는 자륭극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한 자그마한 흑영이 자륭극을 등지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 챈 자륭극이 돌연 청량한 대소를 터뜨렸다.
"괜찮네. 나의 아들 천릉(天 )이라네. 이 아이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하고 설사 기억했다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괴벽을 가진 아이니까."
자륭극이 힐끗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릉아야. 이 두 분께 인사를 드리려무나."
흑영의 고개가 천천히 전면을 향해 돌려졌다.
그 순간 음산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섬ㅉ하게 울리더니, 번쩍! 하면서 얼굴이 나타나야 할 곳에서 네 개의 불빛이 퍼뜩 빛나는 것이 아닌가.
"헛!"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나 그들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린 소년은 품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이 본 것은 바로 소년과 고양이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괴물을 본 것같은 느낌에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도 등골에 오한이 드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검은 고양이의 눈빛과 저 아이의 눈빛이 똑같구나. 어찌 사람의 눈빛이 고양이의 그것과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소년의 용모였다.
'저 얼굴은 계림인(鷄林人)인 같기도 하고 동영인(東瀛人)을 닮았는가 하면 서역인과 천축인(天竺人)과도 흡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중원인의 얼굴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너무도 특이한 모습이구나.'
소년은 지독히도 괴이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인종의 얼굴을 닮아 있으되, 결코 그 어느 한 가지로 꼬집어 말할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사마우치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것은 신의 얼굴이 아니면... 저주받은 악마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이때 안색이 핼쓱하게 질려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천릉이야."
소년은 그 한 마디만을 내뱉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리고 있었다.
헌데 소년의 눈과 마주쳤던 사마우치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기, 기이한 일이다. 저 아이의 눈빛을 마주 본 순간 왠지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하지 않은가! 흡사 악마에게 영혼을 빨아 먹히고 있는 것처럼!'
사마우치는 순간적이었지만 소년의 눈을 마주보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온몸이 축 쳐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헌데 이때 더욱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타고 있는 모피선은 소년이 고개를 돌린 방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는 맹렬하게 자신의 고개를 젓고는 다시 한 번 소년과 모피선을 번갈아 보았다. 역시 모피선은 소년의 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맙소사!'
그는 너무나 놀라 천일매를 돌아보았다. 천일매의 얼굴을 본 사마우치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천일매의 표정은 사마우치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역시 이 기괴한 현상에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이때 사마우치와 천일매가 탄 모피선은 일 장 앞까지 나아가다 멈추어 있었다.
자륭극이 두 사람의 넋나간 얼굴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신경 쓸 것 없네. 배가 파도에 휩쓸린 것 뿐이니까."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동시에 마음 속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분명 배는 움직였다!'
'저 아이의 눈빛은 틀림없이 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 배는 움직였다. 그것도 파도 따위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분명 소년의 눈빛에 의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이 불가사의한 기현상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기괴한 상념을 자륭극의 온화한 음성이 부드럽게 깨뜨렸다.
"이제 본좌를 찾은 이유를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네만?"
사마우치는 그제서야 자신의 임무를 경각한 듯 품 속에서 하나의 금낭을 꺼내들었다.
"주군께서 이것을 자대인께 드리고 그자를 제거하라는 천명을 내리셨습니다."
"그자를!"
금낭을 받아드는 자륭극의 얼굴이 미소짓던 표정 그대로 석고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상(上)께서 드디어 용단을 내리셨다니... 그렇다면 이제 때가 왔다는 말인가?"
헌데 그 순간 금낭의 매듭을 풀던 자륭극의 손길이 돌연 칼로 자르듯 멈춰섰다.
"이, 이것은 청룡소(靑龍簫)와 홍황적(紅凰笛)!"
금낭 속에는 한 자 정도의 길이로 보이는 두 개의 피리가 어둠 속에 황홀한 빛을 뿌리고 있지 않은가.
비취색을 발하는 용을 새긴 퉁소와 구름에 물든 노을빛처럼 부드러운 홍광에 감싸인 봉황 문양의 피리였다.
그것을 쳐다보던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눈도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오, 저것은 난세십승(亂世十僧)의 이국십보(異國十寶)!'
'난세십승 중 청룡성승(靑龍聖僧)과 홍황요니(紅凰妖尼)의 유물이 금낭 속에 있었다니.'
- 난세십승(亂世十僧)의 이국십보(異國十寶).
그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꼭 일천 오백 년 전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원에 역사 문명이 탄생한 이후 두 번째 통일황조인 진나라가 건국되기 직전, 그 미증유의 핏빛 전란기(戰亂期)인 전국시대(戰國時代).
중토(中土)에서 시작된 난세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먼 이역의 열방제국(列邦諸國)으로 거침없이 번져갔다.
그 위기의 시대에 서천축의 기승인 천룡성승이 불타의 힘으로 난세의 불길을 진화하고자 애불륵사봉(埃佛勒斯峯)을 나와 불교의 요람이며 중원 최초의 사찰이라는 낙양 백마사를 향해 고행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헌데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와 같은 시기에 남황, 서장, 계림, 동영, 영하, 북국 등 아홉 변방의 이국(異國)에서도 아홉 명의 불제자들이 각각 중토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일러 세인들은 동서남북 천지사방에서 시작된 십국불자(十國佛者)의 십주대장정(十洲大長征)이라 칭하고 그 이국승인들을 난세십승이라 불렀다.
불타의 힘을 희구하는 불제자들의 염원 때문일까?
사상 미증유의 혼돈이라 칭해지던 전국시대의 난세는 마침내 종식되고 말았다.
난세십승은 각자 지니고 있던 열 개의 기보에 다시는 이땅에 난세가 도래해선 안된다는 염원과 함께 그들의 모든 절예를 담아 낙양 백마사에 남겼다.
헌데 공교롭게도 난세십승이 본국으로 돌아간 직후 중원천하는 다시금 걷잡을 수 없는 난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난세를 막기 위해 남긴 열 개의 기보가 오히려 난세를 만드는 거대한 불씨로 화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중 서천축의 청룡성승이 남긴 청룡소와 남황의 홍황요니가 남긴 홍황적이 뜻밖에도 황제가 내린 금낭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헌데 지금 자륭극의 시선에는 사마우치와 천일매가 이국십보의 출현에 경악하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어떤 복잡한 감정의 격랑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침묵 속에 흘렀을까?
문득 자륭극의 시선이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혀졌다.
"본좌 또한 대명의 신민, 황상의 천명을 완수할 의무가 있는 몸, 더욱이 상께서 친히 청룡소와 홍황적까지 내리셨거늘 어찌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서겠는가."
"현안이십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긴장하고 있던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얼굴이 일시에 환하게 피어났다. 자륭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밝아오는 밤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본좌는 상의 지기로 새로운 대명황조를 건국하는데 미력하나마 일조를 했던 사람. 국가대사와 관련된 일에 응당 책임이 없을 수 없지."
순간 천일매의 얼굴이 터져오르는 흥분으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드디어, 시작됐다. 오천 년 무림사가 낳은 사상 최강의 초마인과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무서운 신비의 무인 자륭극대인 간의 그 천세의 용쟁호투가. 과연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일까? 숨이 막혀올 듯 하구나.'
자륭극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한쪽은 늙을대로 늙은 거목, 다른 한쪽은 새로운 힘을 얻어 뻗어나가는 어린 나무. 어린 나무가 장성하기 위해서 늙은 거목이 베어져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숲의 섭리!"
사마우치가 빙그레 웃으며 받았다.
"허헛, 그렇습니다. 주군께서는 그 늙은 거목을 베어낼 목수를 오랜 세월동안 찾고 있었지요. 허나 종내 주군께서는 자대인을 지목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셨겠지. 상께서는 만의 하나 그자에게 본좌가 패한다면 가장 절친한 지기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하셨을 것이네. 그래서 누구보다도 상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는 본좌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네."
"...!"
"허나, 대신 본좌 또한 부탁이 있네. 오늘로부터 정확히 달포 후 한 인물이 해란주를 탈출할 것이네. 그자를 죽이게."
"탈출을?"
"아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달포 후 그 있을 수 없는 일은 분명 있게 되네. 그자는 필시 상의 대업 앞에 거대한 마의 장막을 칠 인물, 관부의 전력을 걸고서라도 기필코 그자를 죽이게."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일순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관부의 운명을 걸고서라도 제거해야 하는 인물!'
'대체 그자가 어떤 자이기에 대인께서 저렇게 말씀하신단 말인가?'
실로 엄청난 말이 아닌가. 천연의 함정이 천 년 고목의 나이테 만큼이나 에워싸고 있는 해란주. 수천 년 동안 유폐되었던 기라성같이 쟁쟁한 인물들조차 단 한번도 탈출에 성공한 예가 없었던 그 해란주를 탈출하는 인물이 있단 말인가.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색됐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합(合)!"
목례를 올리는 순간 그들을 태운 모피선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흑해 위로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촤아아!
빗줄기는 악마의 파멸곡을 연주하며 순식간에 그들의 뒷모습을 삼켜 버렸다. 그 순간 착각이었을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륭극의 고요한 얼굴에 칼날같은 한기가 덮여지는가 싶자 무섭도록 싸늘하게 돌변한 음성이 어둠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중원이 탄생시킨 오천 년 무림사 불세출의 기린아. 하늘 없는 땅, 십팔만사천백와마루(十八萬四千白瓦魔樓)의 지존이며 명실공히 하늘의 삼분지 이를 떠받들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대 만세제일신마(萬歲第一神魔) 곤오풍우(棍吾風宇)!"
꽈르릉!
어디선가 은은한 개벽성이 폭우를 뚫고 휘몰아쳤다.
"그대는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중원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제 이 시대는 더 이상 그대의 일인독주를 원하지 않는다. 영원히 은막의 저편으로 사라져 줘야 할 때가 왔다!"
번쩍!
두 눈에서 솟구친 안광이 섬전으로 화하기라도 한 것일까?
연이은 벽력성을 가르며 한 줄기 새파란 섬광이 흑해의 혼돈을 양단해 버렸다.
헌데 들었는가? 그 광란하는 대자연의 합주(合奏)속에서 너무도 또렷하게 울려퍼지고 만 저 항거할 수 없는 공포의 이름을!
첫댓글 잼 납니다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