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목사 김공의 휘(諱)는 행(行)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공은 청고(淸高)하고 호매(豪邁)해서 벗들이 중하게 여겼는데, 뛰어난 재기(才氣)를 자부하며 당시 세상에 구차하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상에서도 공을 버렸다. 이 때문에 끝내 주군(州郡)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뜻을 얻지 못한 채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며, 수명도 기년(耆年 60세 )에 미치지 못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50년이 지나서 아들 충엄 시극(忠淹始克)이 묘갈(墓碣)을 세우고는 나의 글을 구해서 새기려고 하였다. 내가 뒤에 태어나서 공의 풍도를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이따금씩 나름대로 선배들을 따르면서 공의 일에 대해 꽤나 익히 들었으므로 삼가 승낙하고 명(銘)을 짓게 되었다.
공의 선조는 신라 임금의 후예이다. 신라는 천 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면서 김씨(金氏)와 박씨(朴氏)와 석씨(昔氏)가 번갈아서 왕이 되었다. 무열왕(武烈王) 뒤로 다섯 명의 왕이 나오고 나서 아들 주원(周元)이 당연히 왕이 되어야 했는데도 즉위하지 못하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해서 강릉(江陵)으로 피하여 거주하니, 그대로 봉해서 명원군왕(溟源郡王)으로 삼았다.
고려조에 들어와서 대대로 계속하여 현달하였다. 그중에서도 태부(太傅)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문정공(文貞公)인 상기(上琦)와, 대광개부의동삼사(大匡開府儀同三司) 판이부사(判吏部事) 상주국(上柱國) 문성공(文成公)인 인존(仁存) 부자가 대를 이어서 가장 저명하였는데, 여기에 또 아우 1인과 아들 3인이 모두 평장사의 지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 추(錘)가 판서의 관직에 올랐다. 증조 휘 모(某)는 사마시(司馬試)에 제 1 등으로 입격하여 관직이 참교(參校)에 이르렀고, 조부 휘 모는 모군(某郡)의 군수가 되었고, 고(考) 휘 모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비(妣)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다.
공은 나이 19세에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장원하였는데, 이는 대개 공의 시가 원래 뛰어난 데다 필획으로 더욱 인정을 받고 뽑힌 것이었다. 그 뒤에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하였는데, 천재(天災)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다시 가정(嘉靖) 무오년(1558, 명종 13)의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입격하고, 병인년(1566)의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관(分館)된 뒤에 북평사(北評事)로 나갔다.
그 뒤에 경관(京官)으로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형조와 호조의 좌랑, 예조 정랑, 한성부 서윤, 성균관 사성, 내섬시(內贍寺)ㆍ사섬시(司贍寺)ㆍ사도시(司䆃寺)의 정(正)을 지냈으며, 외관(外官)으로는 무장 현감(茂長縣監), 고양(高陽)과 서천(舒川)의 군수, 양주(楊州)와 광주(光州)의 목사를 지냈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 21) 2월 7일에 모지(某地)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7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치소(治所)에서 7리 떨어진 장포(長浦) 변두리 선조(先兆)의 옆에 안장되었다.
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참찬(參贊) 백공(白公 백인걸(白仁傑) )에게 수업하였고, 또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 선생을 섬겼다. 백공은 직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청송은 일민(逸民)으로 덕망이 높았다. 공이 소싯적에 양공(兩公)의 문하에서 노닐 때 양공이 모두 기특하게 여기며 사랑하였다. 특히 청송은 아들인 우계(牛溪 성혼(成渾) ) 선생에게 “우리 집안의 사업은 반드시 김모(金某)와 의논하라.”라고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공이 우계와 종신토록 골육처럼 지냈는데, 가르침을 청하는 여가에 그 필적까지 아울러 본받았으므로, 뜻대로 된 글씨는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공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남의 구속을 받지 않았으므로 세속을 따라 굽실거리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 성격이 강직한 데다 강개(慷慨)하여 악인을 마치 원수처럼 미워하였고 남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의 환란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는, 한결같이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거리낌 없이 되는 대로 행동하면서 사람들 속에 끼어 어울리곤 하였는데, 공이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익살이나 부리면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그의 행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로 양심에 부끄러운 점이 있지 않았으며, 주군(州郡)을 두루 거치는 동안에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취한 것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공은 대부인(大夫人)을 섬기면서 효성이 극진하였다. 가재(家財)는 물론이요 봉록(俸祿)까지도 모두 대부인에게 바쳤으며, 아무리 미세한 물건이라도 사적으로 가지는 일이 없었다. 누이동생 하나가 일찍 청상(靑孀)이 되었는데 그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가르치고 길렀는가 하면, 재산을 나눌 적에도 누이동생이 원하는 것이면 모두 주었다. 그리고 친지나 벗 중에 궁핍한 이가 있으면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은 평생토록 청고(淸苦)하게 살아가려고 스스로 힘썼는데, 이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도 공이 그러하다는 것을 그다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공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이웃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와서 보니 집안이 텅 빈 채 아무것도 없었고, 급기야 공이 죽었을 때에도 염습(殮襲)할 물건이 없어서 빈객들이 각자 옷을 벗어 염습할 정도였다.
공은 문사(文詞)의 실력이 워낙 뛰어났는데도 사람들에게 전할 생각이 없어서 한 편을 짓고 나면 번번이 진한 먹으로 지워서 내버리곤 하였다. 공의 필법(筆法) 또한 호방하고 장쾌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래서 한 시대의 명필들 모두가 공을 따라갈 수 없다고 인정하였다. 공이 무장 현감으로 있을 적에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쓴 증도가(證道歌)를 판각한 원본(元本)에 닳아서 없어진 부분이 절반이나 되었으므로 공이 직접 써서 보충하였다. 이것이 간행되어 세상에 유행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달라진 글자가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광주(光州)에 와서 며칠 동안 공과 함께 활쏘기를 하였는데 끝내 공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 상이 수령 중에서 장수가 될 만한 자를 하문하자, 신립이 대답하기를 “광주 목사 김모는 사예(射藝) 솜씨가 무적이고 지략이 또한 출중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묘(宣廟)가 공을 전라도 절도사로 임명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공은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 이공(李公)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공의 집에 불이 났을 적에 청강이 별당(別堂)의 기와를 수습하여 공에게 보냈으므로 실어 온 기와가 뜰에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이 그 기와로 지붕을 덮지 않자 어떤 이가 그 기와를 쓰라고 권하니, 공이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이 집은 이미 풀로 덮었으니, 어찌 꼭 기와를 써야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청강이 죽었을 때에 집안이 빈한해서 상을 치를 수 없게 되자, 공이 타고 다니던 말을 부의(賻儀)하였다. 대개 청고(淸苦)한 절조와 기개가 상호 비슷했기 때문에 서로 좋아하게 된 것이다.
선부인(先夫人)은 종실(宗室) 순평령(順平令)의 딸로,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모(某)는 목릉 참봉(穆陵參奉)이고, 딸은 각각 모인(某人)과 모인에게 출가하였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다. 후부인(後夫人)은 증 병조 판서 윤모(尹某)의 딸로, 1녀 2남을 낳았다. 딸은 학생(學生) 이호영(李昊英)에게 출가하였고, 아들 모(某)는 모관(某官)이고 그다음 모(某)는 모관이다. 손자 3인과 손녀 2인이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탁월하여라 우리 공이여 / 卓犖惟公
청고한 절조에 드높은 풍도로다 / 淸節高風
밖으로는 되는 대로 어울렸지만 / 放浪其外
안으로는 그 마음이 확고하였나니 / 確爾其中
지위와 같은 저들을 부끄러워하며 / 恥彼脂韋
용납되지 않음을 편안하게 여겼도다 / 安於不容
시시한 관직에 외방의 직책으로 / 冗官外職
끝내 곤궁 속에 생을 마쳤지만 / 卒困以終
오직 내면을 성찰하는 공부만은 / 惟其內省
하늘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도다 / 無愧昊穹
비루한 자들이 으쓱거리면서 / 沾沾鄙夫
모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는 / 靡不登庸
의기양양하게 교만을 부리며 / 揚揚志滿
공교한 그 솜씨를 뽐낸다마는 / 自誇其工
슬프다 그 마음은 이미 죽었고 / 哀其心死
오직 그 몸만 살았을 따름이니 / 唯免其躬
군자의 안목으로 살펴본다면 / 君子視之
누가 통했고 누가 궁했다고 할까 / 孰通孰窮
파산의 서쪽 / 坡山之西
장포의 동쪽 / 長浦之東
초목이 무성한 쓸쓸한 언덕 / 荒原萋萋
이곳이 바로 공의 영원한 안식처 / 是惟公宮
여기 빗돌에 이 글을 새겨서 / 刻此片石
공이 계신 곳을 알려 주노라 / 以志其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