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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묵상글 ( 부활 제4주간 토요일. - 이중 충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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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이중 충만
부활 4주 토요일-2019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을 뵌 것으로 이미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뵌 것이라고
하시자 필립보는 뵙긴 무엇을 뵈었다느냐는 뜻에서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고
하면서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겠다고 합니다.
필립보 사도뿐이 아니겠지만 주님 입장에서는 필립보가 답답하실 겁니다.
기껏 당신을 본 것이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했는데 뵙게 해달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답답하긴 필립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주님과 필립보 사이에서 누가 더 답답할지 모르겠습니다.
필립보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를 뵙지 못했는데도 이미 뵌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이미 뵙는데 왜 또 뵙게 해달라고 하냐고 야단맞을 때는
야속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주님 편이 아니고 필립보 편이고
필립보의 그 심정을 이해하고 다른 한 편으로
필립보의 그 뵙고 싶은 열망을 높이 사고
뵙는 것으로 충분하겠다는 그 말의 뜻을 십분 백분 공감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못 뵈어서 그렇지 뵙기만 하면
너무도 충분하고 다른 것은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는 것쯤은 저도 압니다.
제가 장가 안 것이나 살면서 늘 형제들이 불만인 것은
어떤 여자도 충분치 않고 어떤 형제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지요.
충분할 만큼 만족을 주는 존재와 사랑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받지 않기로 하였고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받는 사랑은 나를 만족케 할 수 없기에 하는 사랑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래야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사랑인 거지요.
하느님이 이런 분이고 하느님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을 필립보는 알고
그래서 하느님을 뵙기만 하면 충분하고 남을 거라고 얘기한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필립보처럼 저도 이것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이 하느님과 그 사랑을 만나 뵙지 못하여 답답할 따름이지요.
아무튼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은
오늘 바오로 사도와 같이 성령과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고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어떠한 것에 좌우되지 않을 겁니다.
모욕을 줘도 모욕을 받지 않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모욕을 주는 사람을 피하고
그래서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인간의 사랑이나 칭송을 바라지 않고
그래서 미움이나 모욕도 받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나 칭송을 받으려는 사람이 미움과 모욕도 받는 것입니다.
사랑과 칭송을 받고 싶기에 미움과 모욕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기에 그 두려운 미움과 모욕에 사로잡히고 마는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받아서 충만하고 함으로써 더 충만합니다.
이중으로 충만케 되는 것인데 이런 충만함 때문에
앞서봤듯이 미움이건 모욕이건 인간의 그 무엇도 범접치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는 것으로 충분한 제가 되고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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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10)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는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이 이어집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고서도 보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니 꿰뚫어 깨달아 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헤험쳐다니면서도 자신이 헤험쳐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듯,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은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쉬는 줄을 모르듯,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입니다. 곧 지금 ‘와 있는 곳’, 보고 있는 것이 서울임을 모르는 꼴입니다. 거기에는 받아들이고 승복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됨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의 무지를 꾸짖으신 후, 참을성 있게 이전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십니다. 당신이 그들과 함께 보낸 긴 시간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참조:3,34;8,18.28.38.47;12,49)이시고, 당신이 하신 일은 모두 아버지께서 하신 일(참조:5,19.36;9,3-4;10,
25.32.37-38)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눈’, 그것은 감각의 기능과 지성의 기능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만남이 벌어지는 것으로, 존재자체로 보는 눈입니다.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일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시면서,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
주님!
제가 여전히 이루지 못함은 여전히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을 이루려 한 까닭입니다.
사랑으로 죽게 하시어,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루소서!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음은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도 늘 저보다 더더더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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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분과 하나 되어야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요한 1장1절이하를 보면,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1,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과 먹고 마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과 함께 지내신 모습들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실행하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상 주님께서 함께 계셔도 주님의 얼굴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길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면 사랑이신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됨으로써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갈라2,20-21).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무엇보다도 주님께로 향한 마음으로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챙기고 싶은 것도 많지만 공허한 만족보다는 예수님을 차지해서 누리는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진심으로 간절히 청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상기합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야고 1,6-8).
혹시라도 열심히 청하는데도 얻지 못한다면 두 마음을 품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 건설과 관련된 것인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여 청하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보다 늦게 응답하시거나 오히려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내어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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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평화신문 4월 16일 지면에서 두 분의 사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한분은 유의배(루이스 마리아 우리베) 신부님이고, 다른 한분은 지정환(세스테벤스 디디에) 신부님입니다. 한국 이름이지만 두 분 모두 외국에서 오셨습니다. 유의배 신부님은 1980년에 왔으니 43년째 한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산청의 성심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성심원은 ‘한센인’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신부님은 한센인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43년이 넘도록 그분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한센인들이 사망하면 염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지정환 신부님을 ‘임실 치즈의 아버지’로 기억합니다. 더 소중한 그분의 삶의 향기는 사람에 대한 애덕과 장애인 가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무지개 가족(1984)’, 학업에 대한 열정이 있는 장애인 대학생들과 가족을 위한 ‘무지개 장학재단(2007)’ 설립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신 사제로서의 사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한국에 오셔서 60여 년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형제적인 사랑을 나누신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달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렀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로 공동체는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로 이스라엘을 넘어서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선포하였지만 사도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교회는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유의배 신부님과 지정환 신부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공생활 하셨지만 유의배 신부님은 43년이 넘게 한센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정환 신부님은 60 동안 사랑을 베풀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신부님들은 멀리 한국까지 와서 사목하였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말의 힘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기와 질투에 가득차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비난의 말을 하였습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말입니다. 인격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나오는 말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한 말로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들을 시기하고 배척하였던 것처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바벨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물질주의이고, 자본주의이고, 이기주의입니다. 모든 것을 경쟁과 이윤으로 판단하려는 신자유주의입니다. 바벨탑이 무너졌던 것처럼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신앙인들도, 성직자들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참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몸은 세례를 받아서 신앙인이 되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오늘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은 어떤 말인지 생각합니다. 욕망을 채우려는 말이었는지, 시기와 질투를 나타내는 말이었는지, 비난과 험담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말이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생명을 살리고, 신뢰를 주고, 평화를 주고, 참된 진리를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뛰어넘는 말과 행동이 되면 좋겠습니다.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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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 갑곶성지 개발을 위해 강화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성지 안에는 그래도 잘 정리된 잔디밭이 있어서 성당이 없는 관계로 이 잔디밭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래서 잔디밭 관리를 잘해야만 했습니다. 유일하게 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리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잔디만 있어야 멋진데, 봄부터 잡초가 잔디 사이에서 삐죽삐죽 나오는 것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잔디를 뽑았습니다. 넓은 잔디밭 안의 잡초를 이제 다 뽑았다 싶었는데, 처음에 뽑았던 그 자리에 또다시 잡초가 잔디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것입니다. 할 일도 많은데, 매일 쪼그려 앉아서 잡초를 뽑아야 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느 날, 잡초를 뽑고 있는 제게 어떤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잡초는 뿌리까지 뽑아야지 그렇게 위만 잘라내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맞습니다. 조심조심 땅을 해쳐서 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급하게 힘으로만 잡아당기다 보니 윗부분만 잘려 나간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뿌리까지 뽑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시간과 힘을 절약하는 것입니다.
잡초의 뿌리까지 뽑아내야 한다는 어느 자매님의 말씀이 문득 생각납니다. 우리 죄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도 뿌리째 뽑아버려야 다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뿌리보다 순간을 모면하는 데 급급합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보지 못하면서, 반복된 죄의 무게에 힘들어할 뿐입니다.
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어느 편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 편을 믿느냐에 따라서 나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단체 스포츠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편을 믿지 못하면 결코 경기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어느 편에 속해 있어야 할까요?
주님을 굳게 믿고, 주님과 같은 편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당신의 말씀과 많은 표징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약속해주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뿌리까지 뽑는 방법은 주님을 굳게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의 힘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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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약점을 단련하라, 너의 강점이 될 때까지(크누트 로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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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우정의 여정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이다”-
지난 5월3일 베드로 광장에서 주중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 강론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헝가리 사목 방문중 얼마나 많은 겸허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뿌리들과의 결속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알게 되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뿌리들중 최우선의 뿌리들은 바로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생명을 바친 성인들이요, 사랑의 복음의 증거자들인 성인들이요, 어둠의 시대에 빛들이 되었던 성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바로 우리의 뿌리들인 과거의 성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임을 기억하면서 패배주의의 위험과 내일의 두려움을 극복할 것을 간곡히 타이르고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자주, “기억하라,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앞으로 계속 힘차게 전진하라.” 강조하십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미래임을 굳건히 믿을 때, 비로소 패배주의의 위험과 내일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일뿐 아니라 우리의 현재이자 과거임을 즉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과의 좋은 우정 관계의 본보기가 바로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더불어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어질 것입니다. 과연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형제들간의 우정의 관계인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제가 자치수도원이 되던 해인 2014년부터 지금까지 9년 동안 늘 해 온 일이 있습니다. 피정지도시나 면담성사중 휴대폰에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 드린 일입니다. 사실 제가 1988년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요셉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본 대상이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이었습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수없이 되뇌었던 다짐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하늘과 산입니다. 저절로 떠오르는 다음 시편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수도원 로고의 “하늘과 산”의 그림은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 보고 사람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를 연상케 하는, 참으로 상징성이 깊은 로고입니다.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 좌우명 애송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나눴는지, 그러나 늘 반복해도 새롭게 와닿는 좌우명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하늘과 산의 관계는 얼마나 좋습니까! 바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무려 26년전 1997년 이 자리에서 쓴 시이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살아있는 시입니다. 과연 하늘과 산처럼, 날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우정관계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다음 주님의 질책을 보면 필립보의 주님과의 우정 관계는 여전히 미흡함을 느낍니다. 필립보는 다음 말씀에 부끄러움과 더불어 크게 깨우침을 받았을 것이며 깊은 충격과 더불어 심기일전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새로이 했을 것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아버지와 얼마나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 예수님인지 깨닫습니다. 흡사 우리를 향한 질책처럼 들립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수십년 정주해오면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주님의 절친(切親)으로 주님과 우정을 깊이해 왔는데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고 질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예수님과 믿음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주님과 우정의 절정의 일치 관계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의 우정이 우리의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역경중에도 굴함이 없이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으로 멋진 말씀의 사람, 믿음의 용사인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유다인들의 박해에 쫓겨날 때,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미련없이, 바람처럼, 가볍게, 훌훌 떠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자유로운 모습은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지요! 세상 떠날 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니 말 그대로 성령에 따라 살았던 성령충만한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제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과 더불어 날로 당신과의 우정은 물론 도반 형제들과의 우정도 깊이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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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6.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오늘 한참을 이 구절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고 들었던 많은 성인의 이야기가 또 올랐습니다.
특히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녀님이 계신 곳의 촌장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촌장이 와서 수녀님께 ‘우리 마을에도 와서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들을 도와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촌장의 마을은 힌두교인들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곳에 가서도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없이는 저는 어디도 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 작은 경당을 짓고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제와 수녀님께서 그 촌장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 성체를 모시고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일화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쁠 때는 우리 손을 잡고 함께 기뻐해 주시고, 슬플 때는 우리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울어주십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모욕하는 자들과 싸워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분과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입니다.
그리운 마음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시작했을 뿐인데
한 여인이
성당 저 끝 구석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강론을 하는데
아직도 그 여인은
울고 있습니다.
미사가 끝나갑니다.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한
그 여인은
고개 들기를 포기하고
울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립나 봅니다.
보고 싶나 봅니다.
너무너무 보고 싶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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