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pp.127~128 : “원대부터 명대 전반까지 출판의 질과 양은 향상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락하고 있었다. 먼저 원대에는 출판되는 서적물의 종류가 빈약해졌고, 명대 전반에는 양적으로도 퇴보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명대 전반에는 주자학의 주석에 의한 사서오경, 대전류, 혹은 두보의 시 등을 제외하고는 『사기』나 『문선』조차도 구하기 힘들어졌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서오경과 대전류는 당시에 성리학의 유행과 과거에서의 필요성에 의해서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두보의 시는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로 찾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 중국 사상을 대표하는 유가 사상은 질서와 조화를 인간 삶의 규범으로 삼았고 세계를 움직이는 법칙으로 여겼다. 율시의 격률을 결정하는 기본 원리가 질서와 조화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시의 격률 속에는 동양인의 도덕관과 세계관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보는 질서와 조화의 원리를 격률뿐만 아니라 시의 내용 전개 방법인 장법에도 적용하여 한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두보의 시는 후세에 시의 전범으로 받들어져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많은 주해서가 나왔다. 두보의 시문집은 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 후인에 의해 편집되긴 하였으나 전래가 순조롭지 못하다가, 송나라에 들어서 인쇄술의 발달과 도서 유통망이 번창하여 왕수(王洙) 등 일련의 문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수많은 주석가가 시문에 상세한 주석을 담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이러한 작업은 송나라 이후 원ㆍ명ㆍ청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그 주석서의 종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되었다.
출처
최명일, 「두보의 삶과 시를 바라보는 시선」. 『인문논총』 70,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3, pp.43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