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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화합.기본이 있는 대구경북3040산악회(http://cafe.daum.net/jydo3040)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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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3040산악회에서 부끄러움을 담당하고 있는 재은입니다.
국가의 수치러움을 담당하셨던 ‘또라가라장군님’의 행적을 옮겨와 게시한 내용에 어느 산우님이 단 댓글이 약간의 요동을 일으켜서 급조하게 3시간여 정도 인터넷파도타기 하고 나니 생각 의외의 흥미가 일어나 늦은 시간에 게시글을 올립니다.
우선 ‘안중근 아들’로 검색하니 오마이뉴스에 걸린 자료가 괜츈하여 여과 없이 긁어와 옮겨봅니다.
며칠 후, 위령제가 열렸다. 얼마 전부터 떠돌던 믿어지지 않는 소문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박문사'는 엄청나게 붐볐다.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미나미 총독의 연설이 끝나고 이토 히로쿠니가 무대에 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라는 소개에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미나미 총독이 안준생을 불러 안중근의 아들이라 소개했다. 장내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미나미 총독은 둘을 무대 가운데로 인도했다. 마주보고 섰다. 이토 히로쿠니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준생은 허리를 숙이고 두 손으로 악수를 받았다. 환호와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일본 신문들은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자식이 아비 대신 용서를 구했다'고 전했다. 준생은 미나미 총독의 양아들이 되었다. 이토 히로쿠니와 함께 일본 곳곳을 돌며 '눈물의 화해'를 재현했다. 일본은 환호했고 한국은 땅을 쳤다.
-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 '준생' 중에서
박문사는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기념하여 남산 동쪽에 세워진 절로, 명성황후를 지키다 죽어간 조선 군관들의 넋을 기리는 장충단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지어졌다. 현재의 신라호텔 구내 영빈관 자리이다. 일본은 경희궁을 헐고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절 이름 박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이등박문에서 딴 것이다. 박문사는 해방 후 헐렸다.
영웅 안중근의 아들 준생, 개처럼 살다
한국을 극심하게 탄압한 최악의 총독으로 손꼽히는 미나미 총독(제7대)은 창씨개명, 일본말 사용, 조선민족문화말살정책을 펼친 장본인이다. '내선일체'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고 주장하는 미나미 지로의 민족말살정책이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안중근의 히얼빈 의거(1909년 10월 26일), 그 30년 후인 1939년 10월 16일에 일어났다. 나라와 아비를 판 더러운 자식, 변절자, 친일파…사람들은 안준생을 호부견자(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개 같은 자식)라고 손가락질했다.
김구 선생은 이런 안준생을 "더러운 변절자라 처단해야 한다"며 암살을 시도한다. <백범일지>에 해방 후 중국 경찰에 그곳에 거주하는 안준생을 죽여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 근대 최고의 영웅의 아들이었던 그는 왜 이렇게 가슴 아프고 치욕스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IWELL 펴냄)는 안중근 사후 그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학자 이태진과 조마리아(안중근의 어머니)의 후손인 조동성이 쓴 글에 저자가 소설의 형식으로 쓴 것이다.
책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투쟁 중 인간애 때문에 일본군 포로들을 살려주지만 이 포로들이 위치를 알려줘 대부분의 동지들이 죽는 등의 패배를 겪은 안중근이 자신 때문에 죽어간 동지들을 떠올리며 자책하는 모습, 이를 계기로 하얼빈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습, 재판과 처형 이후 조국으로부터 버려지는 그의 가족, 안준생의 변절 과정 등을 담았다.
안중근의 큰아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7살 때 누군가 준 과자를 받아먹고 동생들에게도 과자를 먹이고 싶어 집으로 돌아오던 중 쓰러져 죽는다. 안준생은 서른 살 가까운 청년이 될 때까지 변변한 밥벌이를 하지 못한다. 안중근의 의거 후 일본이 그 가족들을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일자리를 얻는 족족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다. 안준생의 이런 처지를 이용, 일만 시켜먹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그 자리에서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고 잡혀 죽어야 했나요? 영웅 아버지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왜 나는 안준생으로 살 수 없었죠? 왜 나는 내 삶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이런 운명에 던져져야 했죠?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거잖아요, 그래서 죽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내 선택이 아닌 아버지의 선택 때문에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버지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통째로 망가져야 합니까?…우습지 않나요? 영웅의 아들은 개 같은 삶을 살고, 그 변절자의 자식은 다시 성공하고…아버지는 나라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에겐 재앙이었죠. 나는 나라의 재앙이었지만 내 가족에겐 영웅입니다. - 책 속에서
그의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 가족을 버려야 했지만, 조국은 그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 사람들까지 모두 떠나버린 상해에 버려진 그의 가족들의 사정이 얼마나 처참했으면 그의 어머니는 변절 후 상해로 돌아온 안준생, 아버지를 팔고 돌아온 아들을 "고생했다"며 위로했을까. 가장을 잃은 김아려가 큰아들마저 독살로 잃고 남매를 부여잡고 고생하는 장면이 연상되어 가슴이 아리고 먹먹하게 읽힌 부분이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을?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란 제목을 보는 순간 '역사적 사실을 뒤집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일본의 방해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안준생은 어느 날 미나미와 이토 히로쿠니(이토 히로부미 아들)에 의해 납치당해,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협박을 받는다. 안준생의 변절에는 그를 이용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바꾸려는 일본의 검은 야욕이 숨어 있었다. 결국 죽은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과 우리 민족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인가, 안중근 장군인가?
이 책의 목적은 다음 3가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첫째, 안중근은 의사가 아니라 장군이었다는 것. 개인이 아닌 독립군 장군으로서 거사를 치른 것이고 스스로도 법정에서 수차례 그런 주장을 밝혔으므로, 그 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중략*** 셋째, 거인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조국으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결국 가슴 아픈 선택을 하고 만 안준생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 단죄하고 묻어버리기보다, 지켜주지 못하고 변절자로 만들어버린 우리의 책임을 반성해봐야 할 듯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이 중 첫 번째에 대해, 이제까지 우리들이 자랑스러워하며 무심코 써온 '의사'라는 말에는 하얼빈 의거가 민족적인 차원이 아닌, 독립을 위한, 독립군에 의한 조직적인 거사가 아니라, 한 개인(테러리스트)의 충동적인 복수에 불과한 사사로운 사건으로 처리하려는 일본인들의 의도가 깔려 있는 만큼 '장군'이란 호칭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이었다. 안중근은 몇 차례의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이라 밝히고 "독립군으로서 민족적인 차원에서 거사를 단행했다"고 주장, 최후 진술에서도 "나를 처분하는 데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의해 처분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들의 목적 때문에 이를 묵살, 개인적인 일로 깎아내리고 만다. 당시 재판정 속기 자료를 근거로 이태진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제시한다.
"흔히 쓰고 있는 안중근 의사라는 호칭은 독립군 장군이었던 안중근을 개인이자 테러리스트로 격하시키기 위해 일본에서 사용을 유도한 잘못된 표현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안준생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 안중근 의사라는 호칭을 한 번도 의심해 본 적도 없다. 아니 자랑스럽게 붙였던 호칭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지 않을까.
지난 8월 안중근의 일대기를 그린 <안중근 불멸의 기록>이란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책을 읽은 후 한 달 가까이 영웅 안중근의 삶이 시시때때로 떠오를 만큼. 그럼에도 단 한 번도 그의 사후 가족의 삶을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참으로 쓰라리게 읽혔다. 안준생의 변절엔 우리 모두 책임이 있다는 자책과 함께라면 지나칠까.
하지만, 안준생을 무턱대고 비판하기도 힘들다. <나는 너다> 속의 안준생이 절규했듯이, 일본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압력을 가했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이를 감안하면 그에게 연민의 정이 생길 여지도 있다.
안준생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고국을 떠났다. 안준생이 세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버지는 한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안준생은 가난과 설움과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들이, 아버지로 인해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ㅡ 이상까지는 오마이뉴스 발췌 ㅡ
어떤 털보 아저씨가 그캐쓰요...
‘너희에게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
이 이야기의 배경을 돌려서 제 이야기도 잠시 하겠습니다.
저는 백일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란 단어의 뜻을 알게 된 것은, 궁민핵교에 입학하고 나서였습니다. 그런 그 분은 전염병에 걸린 제자를 병문안 하고 나서 전염이 되어 그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그 분이 제 손에 남긴 유품은 두 권의 일기장이었습니다. 낡고 닳은 일기장이 다칠세라 조심조심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제 이름 ‘재은’이란 단어가 두 번 나오는 부분을 보고 또 보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중학교를 다니던 즈음부터는 미움과 원망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냥반이 살아 있었으면 우리 집이 이 모냥 이 꼬라지로 살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자리 잡을 즈음해서부터 저는 아버지의 묘소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청춘의 칼바람을 비껴내고, 결혼을 하여 큰 아이 발해를 가지고 나서 창고에 두었던 아버지의 그 일기장을 다시 끄집어내었습니다.
그 당시는 제가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아버지의 문체는 아주 단아했고, 익히 들어왔던 온화한 성품이었다는 것과는 달리 매우 단호한 시선을 가진 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군 생활 제대말년에 휴가 나와서 아버지의 묘소를 10년 만에 찾아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해서 공원묘지를 관리하시던 공무원분과 함께 온 산을 뒤지다가 결국 해질녘에 포기하고는 길가에 주저앉아 들고 갔던 소주 두 병을 연달아 병나발로 불었었습니다.
아버지 한 병, 나 한 병...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려고 했었는데 묘소를 못 찾으니 별 수가 없더군요. 근데 사실 저희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술을 입에도 대지 않으셨다던데... 저도 참...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는데 속이 너무 쓰라려서 들고 갔던 하얀색 국화꽃을 안주 삼아 뜯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부제를 뿌려서인지, 원래 국화꽃의 맛이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안주로 삼은 꽃의 맛이 무지하게 썼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다행이도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 콧물의 짠맛이 뒤집어 지던 속에 요긴한 술안주가 되어 주었네요.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지긋이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그 때는,
비로소 저도 아비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첫댓글 재은님! 내게는 은하수 친구로 기억되어 있는것 같은데~~~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었는데 이제 내가 애들의 애비가 되어보니 그냥반이 쪼금은 이해가 되기도~~~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네 은하수 친구 맞아요 ^ ^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사는 거죠..
무거워 집니다.
제가 좀 답답한 놈이라서 그래요...^ ^
어쩐지 문체가 좋드라~ 재은대장님은 소설가세요? 우와~~
소설가가 아니라, 전기공사 노동자입니다.
그저 취미로 즐길뿐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