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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SAMSUNG ELECTRONICS)
삼성전자(SAMSUNG ELECTRONICS)는 대한민국에 본사를 두고
전자제품을 제조하는 대한민국 최대의 다국적 기업이다.
창사 이래로 세계 시장에서 매우 큰 성공을 이루어냈으며, 현재 가장 인지도 높은
한국 대표 기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주소지 상 본사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로 129 (매탄동) 삼성디지털시티다.
이전에 본사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강남역 근처의 삼성타운에 있어
본사가 삼성타운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2016년, 미래전략실을 제외한 삼성타운에 있는 사무동까지 모두
삼성디지털시티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임과 동시에 삼성의 메인 사업부이기도 하다.
코스피 시장의 최대 거물. 신제품 판매 부진 소식만으로 NYSE, 나스닥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닛케이의 시총마저 1% 이상 쪼그라들게 하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 중 하나로 한국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일단 시가총액만 무려 600조원을 넘겼으니...
삼성전자 보통주 한 종목이 코스피 시장 전체 시가총액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삼성전자 우선주까지 합치면 삼성전자 보통주 주가가 고점 대비 75% ~ 80%대인
2015년 10월 11일 기준으로도 200조 원을 넘어 2015년 10월 11일 기준 시가총액 2위부터
5위까지 차지하는 나머지 기업들의 시가총액을 합쳐도 삼성전자를 절대 넘길 수 없고,
삼성전자 보통주를 제외한 10위까지 포진한 기업들까지 합쳐도 넘길 수 없다.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140여 개의 삼성전자 본사와 계열사와 자회사를 모두 포함한
매출을 전부 합쳐놓은 연결 매출액이다.
연결재무제표라는 것은 일단 자회사들의 실적을 지분에 상관없이 모회사의 실적에 합산하는 것이다.
이후에도 연결재무제표 상 당기순이익을 구한 후 모회사에 귀속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눠 표기하는 정도에 그친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10조원의 매출과 1조원의 순이익을 냈고, 70%의 지분을 차지하는
자회사인 A사가 5조 원의 매출과 3,000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면 연결재무제표는
매출 15조 원 / 당기순이익 1조 3,000억 원으로 계산 후 당기순이익에서 지배주주인
삼성전자의 몫 1조 2,100억원(1조원 + 2,100억원(3,000억 × 0.7)이라고
계산하고 나머지 900억원은 소수주주지분으로 처리한다.
세계 시장에서 DRAM, 플래시 메모리 및 하드디스크, SSD, 메모리 카드 등의
반도체 부분과 LCD 디스플레이, PDP 디스플레이, OLED 디스플레이 등의 디스플레이 부분,
그리고 TV, DVD 플레이어, 블루레이 플레이어 및 홈시어터 시스템, 셋톱박스 및
프로젝터 등의 영상가전 부문, 휴대폰,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 등의
휴대용 가전, 데스크탑과 모니터, 노트북, UMPC, ODD 기기, 프린터 및 복합기,
팩스, 태블릿 컴퓨터 등의 컴퓨터 사업부문,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전기오븐,
진공 청소기와 에어컨 등의 가전부분 등 60종 이상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사실 이런 이유로, 항상 반독점 규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단일기업이기도 하다.
삼성그룹 전자/전기사업부문 핵심 계열사이지만 삼성전자 자체도 상당한 문어발을 자랑한다.
삼성그룹에서도 가장 큰 계열사이며, 주력 사업분야는 B2B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및
모바일 비메모리 반도체, 그리고 B2C 분야에서는 스마트폰 및 각종 가전 부문이 뽑힌다.
무선통신장비는 화웨이, 에릭슨, 노키아 등에 이어 세계 6위 업체이다.
1968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이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으며 1969년 12월 삼성전자-산요전기-
스미토모상사와의 합작법인인 삼성-SANYO전기가 지금의 삼성디지털시티 부지에 설립되었다.
사실 삼성이 동양방송을 소유하던 시절이니까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대규모로
만들어 팔면 TV 수상기와 라디오의 대수가 늘어나게 되고 삼성전자에서
생산된 TV와 라디오를 구입한 고객들이 TBC 프로그램을 시청/청취하면
삼성에게 더 많은 광고료가 들어오는 구조가 되어 삼성이 이중, 삼중으로 이득을 보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자기업을 설립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삼성과 럭키금성은 사돈 지간이었다.
1957년 삼성 이병철의 차녀 이숙희가 럭키금성 구인회의 3남 구자학과 결혼했다.
이병철과 구인회는 같은 경남 출신이면서(이병철은 의령, 구인회는 진주)
진주 지수보통학교 동문 관계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자녀끼리 혼사도 맺었지만
삼성의 전자 사업 진출을 계기로 양가의 밀월 관계가 망가진다.
삼성은 과거부터 비료, 조미료, 설탕, 밀가루, 모직, 언론 등의 사업에 진출하며
중앙정보부의 비호 아래 정경유착으로 세를 확장하던 대표적인 기업이다.
동시에 LG의 전신인 럭키금성은 화학, 전자 등 삼성과 다른 분야에 진출해 있었다.
그런데 이병철이 1969년 4월 27일자 중앙일보에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이란
칼럼을 기고해 전자 산업에 진출하겠다고 하자 럭키그룹의 구인회는 사돈이 하는
분야에 끼어들어서 경쟁하려 한다며 진노했다고 한다.
이숙희는 이 상황 때문에 집안에서 곤란한 상태에 빠져, 여러 차례 친정에 와서
아버지 이병철에게 전자 사업에 대해서 하소연을 했고 이병철은 딸이 시가(媤家) 편만 든다며
분노해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이때 데릴사위처럼 계열사 중앙개발 및 호텔신라 대표를 맡았던 구자학도 삼성을 떠나 럭키로 복귀했다.
1970년 삼성-산요전기 측은 흑백 TV (모델: P-3202)를 생산해 이듬해
파나마에 처음 수출했고, 1972년에는 내수용 흑백 TV를 생산 하였다.
삼성전자도 1970년 백색가전 및 음향기기를 생산했다.
1973년 삼성전자는 삼성일렉트릭스를 합병하였다.
이듬해 12월 삼성은 한국반도체의 주식을 매입함으로써반도체산업에 진출하였다.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였다. 당시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모든 자재를 수입하여
단순 조립한 후 수출하는 방식으로 반도체 산업을 유지하였다.
즉,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기지로써 한계를 가졌으나 삼성전자의 시도를 통해
한국 반도체는 단순 조립을 넘어 웨이퍼를 가공하는 데 이르렀다.
1975년에는 6기능 LED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인 KS-5001 LED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를 개발하면서 축적된 경험과 인력을 토대로 1980년대
이후에 첨단 반도체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1977년 컬러 TV 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1978년 업계 최초로 미국에
현지법인(SEA)을 뒀고, 1979년 한국 최초로 VTR과 전자레인지를 생산했다.
같은해 반도체 개발에 적극 나서며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하였다.
참고로 당시 한국 내 라이벌은 금성사와 대한전선-대우전자, 화신소니, 화신전기, 아남전자 등이 있었다.
흑백TV(이코노)와 냉장고(하이콜드), 세탁기(은하)같은 백색가전을 만드는
정도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는 대일무역 정상화 이전 시절, 즉
수입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 시절이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 직접 한국에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때문에 삼성과 같은 기술력이 없는
기업도 일본 기업의 기술과 제품을 라이센싱하여 제조해 판매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일제보다 품질이 떨어졌지만 애초에 한국 내수시장에는
일제 제품이 없으니 당연히 한국 제품끼리만 경쟁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냉장고 방식에 대한 일화가 상당히 유명했는데 삼성과 금성은
간냉식, 대한전선은 직랭식을 채택했었다.
문제는 직랭식은 구조적 특성 상, 성에가 끼기 쉽고 냉동 효율이
무지막지하게 떨어졌는데 삼성에서 당시 간냉식을 채택한 하이콜드 냉장고를 내놓으면서
"서리가 없어요"란 캐치프레이즈로 대한전선을 디스했고 금성도 눈표냉장고로
미투 마케팅을 펼치면서 결국 혼자 직랭식을 택한 대한전선은 경쟁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가전사업부가 대우그룹에 인수되어 대우전자가 된다.
초기 대우전자 냉장고가 직냉식을 채택했다는 증거는 대우 로얄 120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코노TV도 순간수상이란 점을 강조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지금이야 스위치 켜면 화면이 바로 나오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 진공관식 흑백TV는 브라운관 전자총 부분을
20초 ~ 1분정도 예열시켜줘야 화면이 나오는 방식이었는데
당연히 전기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당시 생활 수준과 소득 수준을 감안하면 제 아무리 TV를 가질만한
수준의 가정이라도 열뻗치는 건 당연지사.
그런데 처음으로 스위치 켜자마자 화면이 나오기 시작하는 TV를 내놓으니
절전형TV라며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즉 삼성은 이때부터 상당한
마케팅 수완과 광고전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80년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후 반도체 개발에 적극 나섰다.
1980년대만 해도 삼성이 일본의 전자기업들을 추월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일본이 트리니트론과 워크맨, VHS 등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뽐내던 시기였다.
이건희는 "양은 우리가 제일인데, 기술은 소니가 최고다.
언제 따라가겠나?"라고 말했고 삼성전관(현 삼성SDI) 사장에게
"다른 요구는 아무것도 없으니 오직 하나, 소니를 따라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이 완전한 디지털 기반으로 바뀐 오늘날 삼성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자산업의 아이콘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30년 전 삼성에 기술이전을 해준 산요전기는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83년 2월 8일 이병철 회장은 소위 ‘동경(東京) 구상’을 통해
반도체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공표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 국내 반도체 산업은 선진국과의 기술격차, 막대한
투자재원조달의 부담, 고급 기술인력의 부족, 특수설비
공장건설의 어려움 등으로 수많은 우려가 제기되었다.
심지어 “삼성이 반도체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안 된다.
사업성도 불확실한 그 돈이 많이 드는 반도체를 왜 하겠다는 것인가.
차라리 신발산업을 밀어주는 게 낫다”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발간된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며 첨단반도체에 도전을 강행한다.
인구가 많고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길은 무역입국(貿易立國)밖에는 없다.
삼성이 반도체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세계적인 장기불황과 선진국들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값싼 제품의 대량수출에 의한 무역도 이젠 한계에 와 있어
이를 극복하고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 주변의 모든 분야에서 자동화, 다기능화, 소형화가 급속히 추진되고
여기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반도체 비중이 점차 커져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피나는 반도체개발 전쟁에 참여해야만 한다.
반도체는 제철이나 쌀과 같은 것이어서 반도체 없는 나라는
고등기술의 발전이 있을 수 없다.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내 나이 칠십삼 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반도체는 제품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각 제품이 요구하는 기술수준이나
시장의 크기가 매우 다르기에 어느 제품을 투자하는 것에 따라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되었다.
당시에는 삼성 내부적으로 비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는 삼성이 가전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었으며, 그 동안
기술개발을 추진해 온 분야도 가전용 중심의 비메모리 반도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를 선택하였다. 내부적인 수요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품목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 삼성의 생각이었다.
당시의 예측에 의하면 메모리 반도체는 1982-1988년에 연평균 28%의 고성장을 통하여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해 나갈 것으로 보였다.
또한, 메모리 반도체는 비메모리 반도체와 다르게 투자회수기간이 짧아
재투자의 여력이 높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아울러 메모리 반도체는 원천기술에 비해 응용기술이 비중이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후발국도 선진국과의 경쟁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이후 메모리 반도체 중에서 시장진입이 쉬운 S램(static RAM)을 주력 제품으로
결정할 것으로 보였으나 가격 변동성이 크고 미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D램을 주력 제품으로 선택하였다.
이는 D램의 시장규모가 S램의 두배가 넘어가며 D램의 기술을 선도하는 것이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64K D램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으며 이임성, 이상준, 이일복,
이종길, 박용의 등과 같이 미국의 우수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료하고
반도체 관련 업계에서 실무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1983년 7월 미국 산호세에 현지법인을 설립하였다.
이후 1983년 5월부터 양면적 전략(dual strategy)을 사용하여
64K D램 개발기간을 단축시켰다. 양면적 전략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조립공정기술은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한편, 국내에 전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설계기술과 검사기술은 선진국으로부터 도입하는
전략으로 해외 선도 기업들과 기술 격차를 줄이는데 중요한 전략이였다.
아울러 삼성이 이를 위해 미국과 일본의 선진업체들에게 기술연수를 받기로 하였다.
이때 기술개발에 대한 각오와 팀워크를 다지는 특별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유명한 '64km 행군' 이 실시되기도 하였다.
결국 삼성은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지 6개월만인 1983년 11월에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한 국가가 되었다.
64K D램의 개발을 계기로 선진국과 10년 이상의 격차가 났던 우리나라의
반도체 기술수준은 3년 정도로 크게 단축되었다.
반도체 생산을 위해 설립된 양산공장은 1983년 9월 경기도 기흥에서 기공식이
진행되었으며, 이병철 회장은 “6개월만에 공장건설을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도체 장비는 매우 민감하기에 선진국에서는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데
18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해당 지시로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에 선도업체들와의 기술
격차를 줄이고자 하는 의지를 알 수 있다.
약 2개월 후인 1983년 11월에는 제2라인 생산라인으로 당시에
3개 업체 밖에 갖추지 못한 6인치 웨이퍼 공정을 선택하였다.
256K D램 생산기술이 개발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6인치 공정라인을 만든다는
시도 자체가 우려가 샀으나, 선진업체를 하루빨리 따라잡기 위해서는 보다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삼성의 입장이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1984년 3월에 256K D램을 개발하는 데 착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256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은 1985년 9월에 이일복 상무를 중심으로 하는 현지법인팀과
박용의 박사를 팀장으로 하는 국내팀이 동시에 1M D램을 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팀이 동시에 연구개발에 착수하면 비용은 두 배로 소요됨에도 진행한 이유는
두 팀이 경쟁적으로 연구개발을 추진함으로써 시간을 단축하며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효과가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국내팀은 1M D램의 개발에
착수한 후 11개월만인 1986년 7월에 양품에 성공하였다.
삼성은 1M때 사용하였던 국내팀과 현지법인팀의 경쟁체제를 4M개발때
다시 사용하였는데 두 팀모두 1986년 5월에 4M D램의 개발에 착수했지만
1988년 2월에 국내팀이 먼저 양품을 생산하는데 성공하였다.
국내팀이 현지법인팀과의 경쟁에서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내팀이 보여준 엄청난 성실성이라며 당시에 삼성전자 회장을 맡고 있었던
강진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미국 현지법인에 스카우트된 개발요원들은 모두가 메모리 반도체의 디자인부문과
공정부문에서 경험을 쌓아온, 말하자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
나이도 40대가 대부분이었다. … (그들은) 미국의 생활양식에 익숙해 있으며, …
일과 시간 중에는 자신에게 부과된 연구개발에 몰두하지만, 일과 시간 외엔
자기의 개인생활을 철저히 지킨다. … 그런데
국내의 분위기는 그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밤낮의 구별조차 없다. 일단 개발에 착수하면
몇 달씩 연구소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 미국의 현지팀은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에서처럼 24시간, 아니 몇 개월씩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연구개발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이에 비해 국내의 젊은 팀은 전문지식이나 기술의 핸디캡을 젊음을 불사르며 극복할 수 있었다.
자신과 가족의 희생도 당연시하는 그런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문자 그래도 ‘불철주야’ 강행군이 가능했던 것이다.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우며 같은 해 세계
최소형/최경량 4mm VTR을 개발했고, 1987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에
삼성종합기술원을 열었다.
1988년 미국 마이크로 파이브 사를 인수하며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하고
1989년 부문별 대표이사제 개편 후 광주전자를 설립하였으며, 정보통신부문에서
컴퓨터사업을 별도 부문으로 독립시켰다.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웠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지금 잘 쓰이지 않지만 오늘날도 삼성 주관의
휴먼테크 논문 대상 등에 알게 모르게 남아있다.
4M D램 개발까지는 외국의 기술을 도입하거나 신제품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여
선진업체를 신속히 추격하는데 초점이 주어져 있었다.
1990년 8월에 16M D램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991년 3월에 상용 제품을 개발해냈다.
당시에는 16M D램의 시제품을 생산하는 해외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설계기술과 공정기술을 독자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물론 감광재료나
노광장비의 일부도 자체적으로 개발해야 했다.
16M D램의 개발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의 업체들은 삼성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에 16M D램의 개발을 주도했던 진대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삼성의 16M D램 개발 성공은 회사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의의를 지닌다. …
노동집약형 산업에만 강세를 보여 온 한국이 선진국의 전유물이라 불리던
최첨단기술 분야인 반도체에서 제1군에 합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의 기술을 빌려오지 않고 오직 우리의 독자적 기술로 개발한
첫 메모리 반도체 제품이라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비교하기조차 낯 뜨거웠던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는 이제 ‘제로(O)’.
마치 마라톤에서 꼴찌를 달리던 선수가 갑자기 막판 스퍼트를 내 순식간에
선두를 차지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삼성은 1992년 12월에 16M D램의 선폭을 0.28㎛으로 축소하는 기술을 확보한 후
1994년 8월에는 선폭이 0.25㎛인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삼성은 1996년 10월에 선폭이 0.18㎛인 1G D램을 개발하였고, 2001년 2월에는
선폭이 0.13㎛인 4G D램의 시제품을 성공적으로 완성해 냈다.
이로써 삼성은 64M, 256M, 1G, 4G D램의 4세대를 연속해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업이 되었다.
삼성은 경쟁업체보다 1년 내지 1.5년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품의 생산 시기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아래 <표 1>은 삼성의 D램 개발사를 개발시기, 소요시간, 개발비용,
선진국과의 격차, 그리고 선폭으로 정리 하였다.
삼성은 일본의 도시바를 제치고 1992년부터 D램 분야에서, 1993년부터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최고의 생산업체로 부상하였다.
삼성은 D램에서 기술기반을 확보한후에 S램, 비디오램, 마스크롬, EEP롬 등
다양한 제품에도 투자를 진행하였다.
삼성은 1992년 5월에 4M S램을, 같은 해 8월에는 4M 슈도 S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S램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수준을 확보하였다.
삼성은 S램에서 1992년의 세계 7위, 1993년의 세계 6위를 거쳐 1995년부터는
히타치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부상하였다.
삼성은 D램에만 치우쳐있는 제품 포토폴리오의 협소성을 해결하기 위해
플래시 메모리시장에도 진입하였다.
이중에 하나는 모바일 기기에 많이 사용되는 플래시 메모리 사업에서 선도하기 시작하였다.
플래시 메모리는 인텔의 노어(nor)형과 도시바의 낸드(nand)형로 이분화 되어 있었는데
삼성은 이중에 성장성이 높은 낸드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하였다.
이후 1996년에 64M, 1998년에 128M, 1999년에 256M 제품을 잇달아 개발하였으며
차후 플래시메모리의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삼성은 1996년에는 기존의 마이크로 사업부를 시스템LSI사업부로 개편하면서
비메모리 분야에도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1996년에 500M Hz 알파칩에서 시작한 후 1998년에는 1G Hz로 성능이 향상되었다.
이와 같은 신제품을 매개로 삼성은 1998년부터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흑자를 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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