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독병(毒兵)
①
필혜슬의 꾀꼬리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긴 몰랐기 때문에 살인경주에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기는 하지. 또 이 만장석굴은 이 누나 덕분에 살아 나갈 수 있을 테고."
'쳇! 더럽게 공치사하네. 누가 구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남의 입이나 틀어막았으면서, 흥!'
자천릉이 내심 냉소를 칠 때 필혜슬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관과 집상이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무림의 세력을 전마, 총정, 연사로 구분하듯 관부무림(官府武林)과 상인무림(商人武林)의 역사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야."
"쳇! 별 것도 아니었군."
그 순간 필혜슬이 빠르게 사방을 살폈다.
"생각 좀 해라. 그럼 그 무인들이 가만히 있겠니? 그들도 야망이 있고 피가 끓는 무인들인데."
"그렇군. 당연히 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없애려 하겠지."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는구나. 해서 본루는 총정, 연사, 대관, 집상 등 수많은 무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습격과 침입을 당했던 거야."
"훗, 이 퀴퀴한 냄새와 고루들이 그들의 것이었군. 제길, 이곳의 선대들은 자신들이 중원무인들의 습격을 물리친 것을 잘난 척 하려고 습격하다 죽은 자들의 시신을 일종의 전리품처럼 후대들에게 남겨 놓은 것이군."
"호호!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본루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란다."
곤륜칠층봉소석탑은 바로 대중원무인들의 피(血)와 혼(魂)이 뒤섞인 무덤이요, 전장(戰場)이었다. 해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오대불가사의 중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그때 자천릉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헌데 왜 중원무인들이 이곳에만 죽어 있는 거지? 십만철로를 타고 올 때는 아무 곳에도 이런 시신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 멍청이 꼬마야! 너라면 본루의 어느 곳을 습격하겠니?"
"그렇구나. 이 대곤륜산맥은 워낙 넓으니...."
"바로 그거야. 물론 이곳만을 습격했던 것은 아니지. 하지만 이곳은 본루의 수많은 무역대인(武譯臺人)들이 자신들이 연구하고 파해한 무공 비급과 병장기들을 보관하는 곳이니 당연히 본루의 핵(核)이 되지."
"호! 말이 되는군. 칠십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수도 없고 이 넓은 곤륜산맥을 깡그리 뒤질 수도 없고, 더욱이 사람들을 직접 죽이는 것보다 이곳을 파괴한다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모든 무인들은 일시적이나마 우매한 후대들을 탄생시킬 것이니."
말꼬리를 끌던 자천릉이 문득 의문을 느낀 듯 빠르게 한 마디를 뱉았다.
"그렇다고 그 무인들이 모두 병장기나 비급을 가지고 들어오란 법은 없잖아?"
"그것은 인간의 얄팍한 보호 본능(保護本能) 때문이란다."
필혜슬의 음성이 다정해졌다.
"이곳에 들어오는 무인들은 승리를 얻기 위해 최강의 병장기를 가져올 수 밖에 없지. 또한 무인들이 모든 인간의 습성이 그러하듯 자신이 만든 비급이나 어디선가 얻은 무서 등 중요한 것들은 대게 품 속에 지니게 돼. 그것은 자신의 품 속이 가장 안전하다는 원시적인 보호 심리 때문이지."
고개를 끄덕이던 자천릉이 문득 필혜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허면 그대는 어떤 것을 얻으려고 이곳에 들어왔지?"
필혜슬이 왠지 움찔하며 말을 멈추었다.
"뭐냐니까!"
"응, 그건 한림사가(翰林四家) 중 소소가(蕭 家)의 소소류(蕭 類)야."
"소소류? 그게 뭔데?"
"알 필요 없어! 비밀이야."
필혜슬의 옥용이 싸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제길, 비밀이라고? 그럼 모르면 되지 뭐."
자천릉에게 그토록 친절하던 필혜슬이 비밀이라고 말한 한림사가의 소소류. 자천릉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인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엄청난 비밀의 내막을.
이 아홉 개의 하늘과 열 개의 땅 사이에서 끊임없이 역사가 흘러올 때, 무인(武人)들에게 불가사의와 신화(神話)를 꼽으라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들고, 세인(世人)들에게 전설(傳說)을 말하라면 육천(六賤)마을을 가리킨다. 허나 천하인들에게 신비(神秘)를 묻는다면 그들은 한림사가라 대답한다.
혹자는 은림사숙(隱林四宿)이라 부르는 네 가문(家門).
이들은 이름 그대로 천하의 숲 속 어느 곳엔가 깊이 숨어 있기에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단지 전해 오는 신비가 그들에 대해 몇 가지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하나가 한림사가는 무림이 탄생하기 전부터 있어 왔고 무림과는 전혀 인연이나 관계가 없는 곳이라는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이 네 가문에서 바람(風)의 기운(氣)과 물(水)의 흐름(流), 소리(蕭)의 힘(力)과 흙(土)의 뿌리(本)등 대자연의 모든 것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바람의 기운을 느끼는 문중을 풍문(風聞), 물의 흐름을 읽는 가문을 수숙(水宿), 소리의 힘을 듣는 집을 소소가(蕭 家), 흙의 뿌리를 캐는 방을 토방(土房)이라 칭했다.
그리고 이들이 꼭 하나의 자손에게만 맥을 잇게 한다 하여 각각 천풍맥(天風脈), 수류전(水流傳), 소소류(蕭 流), 금목토일종(金木土一種)이라 불렀던 것이다.
헌데 천하인들은 무림과 연관시켜 하나의 파문을 던지니, 총정과 연사등이 삼천 년 동안 도전해 오던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이들 네 가문이 힘을 합해 도전한다면 그 승부는 점칠 수가 없다는 비어(蜚語)를 발한 것이다.
곧 한림사가의 맥을 누구든 한 사람이 잇는다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꺾고 천하무림을 영구히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헌데 지금 필혜슬의 입에서 그 한림사가의 소소류가 뱉아진 것이다. 더욱이 필혜슬이 소소류를 찾고 있다면 소소류의 맥을 이은 자가 이곳에 죽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봐, 헌데 우리는 왜 이곳에만 숨어 있는 거지? 저 여자가 중요한 것은 모조리 가지고 가면 어쩔려고."
자천릉이 뭔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섰다. 순간 필혜슬이 황급히 자천릉을 끌어 앉히며 속삭였다.
"이 바보야! 어서 몸을 숙여."
"놔! 저기 봐. 저 여자가 품 속을 모조리 뒤지고 있잖아?"
"어휴, 이 꼬마야! 누가 아까운 줄 모르니? 하지만 이 이층은 겨우 시작이란 말야. 정말 중요한 곳은 사층(四層)이야. 그때까지 우리는 몸을 아껴야 한단 말야."
"사층?"
"그리고 주위를 훑어봐."
"응? 우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군."
"그래. 지금 이곳에는 너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들어온 자들이 적어도 이십여 명은 진을 치고 있어. 그건 힘이 없어서가 아니야. 그들도 지금 뭔가를 찾고 있고 또 함부로 나서기엔 저 여자가 너무 두려운 존재기 때문이야."
이 순간 어둠 너머로 비쳐 보이는 수십 개의 동굴 속에는 약 이십여 명의 인영들이 뭔가를 찾는 듯 소리 없이 오가고 있었다.
"흥! 그렇다면 우리도 여기서 뭔가를 찾아야 할 것 아냐!"
"꼬마!"
필혜슬이 불렀을 때는 자천릉은 이미 냉교채가 있는 이층의 중앙까지 다가서고 있었다.
냉교채는 자천릉이 다가온 것에는 관심도 없이 계속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천릉도 냉교채의 존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으며 시체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흠! 이건 종남파(終南派)의 종남십일검예(終南十一劍藝)로군."
자천릉의 중얼거림에 힐끗 쳐다보던 냉교채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자천릉은 이미 냉교채의 존재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는 듯 어떤 서책 하나를 들어 열심히 읽고 있었다.
"호! 그랬군. 그래서 이 검법을 제비가 나는 것을 보고 창안했다 하여 창연십일비(蒼鳶十一飛)라고도 칭했군."
자천릉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꼬마. 네가 그 화제의 주인공 자천릉이구나."
냉교채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상냥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쳇! 큰소리만 쳐 놨군. 결국 이곳에서 꼼짝도 못하고 죽었으면서."
자천릉은 계속 동문서답처럼 무어라고 투덜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꼬마. 너의 얼굴은 정말 예쁘게 생겼다. 그 쌍도끼를 메니 참 귀엽구나."
냉교채가 계속해서 말을 걸자 그제야 자천릉이 힐끗 냉교채를 쳐다봤다.
"제길, 재수없게 꼬마, 꼬마 하지마. 나는 이미 열 두 살이나 된 사내란 말야, 어?"
"왜 놀라지?"
자천릉의 눈에 은은한 당황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이, 이건 정말 큰일이다! 나를 꼼짝 못하게 하던 아까 저 여자의 몸에서 나던 향기보다 더욱 짙은 향내가 나잖아? 그리고 더욱 예쁜 것 같구!'
냉교채가 천천히 다가오며 자천릉의 긴 청포를 매만져 주었다.
"릉아, 너처럼 어린아이가 이곳을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 이 누나가 너를 보호해 주마."
자천릉의 미간이 묘하게 찌푸러졌다.
'왜 이러지? 이젠 뿌리칠 힘조차 없으니. 저 황금 눈빛 때문에 그런가, 젠장! 할아범은 이럴 때 대항하는 법은 왜 가르쳐 주지 않았지?'
이때 아리따운 교소와 함께 어느새 필혜슬이 자천릉 곁에 다가와 섰다.
"호호호, 처음 뵙겠어요, 냉언니!"
냉교채의 은빛 아미가 싸늘하게 모아졌다.
"이미 오래 전에 우리는 만났던 것 같은데."
"그래요. 오랜 전에 만났지요. 호호, 그 오래 전에 만난 친구의 자격으로 충고 하나 드릴까요? 릉아의 보호자는 나예요!"
그 순간이었다. 번쩍! 하면서 어디선가 한 줄기 금광(金光)이 자천릉을 향해 폭사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냉교채가 싸늘한 음성을 흘렸다.
"그럼, 그 보호자를 이렇게 죽여 버리면 되겠군."
냉교채의 손에서 빙월척이 금광을 그대로 횡으로 쓸어버렸다.
쏘아져 오던 금광이 혈광(血光)으로 변하며 새빨간 피보라가 어둠 속에 뿌려졌다. 누군가가 자천릉을 암습하려다 냉교채의 빙월척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필혜슬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냉교채에게 다가들었다.
"호호호,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예요. 릉아를 둘로 나눌 수는 없으니 당연히 둘 중 하나가 죽어 주면 되겠죠."
자천릉이 의아한 듯 두 여자의 입씨름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왜들 싸우고 난리지. 헌데 보호자라니? 릉아에게는 엄연히 아버지가 계신데.'
자천릉은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손발을 가리도록 큰 장포 위에 금도끼와 은도끼를 어깨 너머에 동여맨 채 총명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그 모습은 지독히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훗! 싸우든 말든, 나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
자천릉의 천진한 두 눈에 무심하도록 담담한 빛깔이 가볍게 스쳐갔다. 자천릉은 한 시신의 청포를 찢어 냉교채가 던져 놓은 서책들을 주섬주섬 주워담기 시작했다.
'쳇!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습격할 정도면 중원에선 초절정 고수일텐데, 그들이 전력을 다해 완성시킨 절기들이 적혀 있을 무서들을 버리다니. 그래도 딴에는 최선을 다했을 텐데 말야.'
자천릉은 귀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더욱이 돌할아범은 말했지. 강호에선 자신에게 해가 되는 물건만 아니라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보호자가 되겠다고 서로 솔선해서 나서는 두 여자의 품에서 자천릉은 닥치는 대로 강호의 기연(奇緣)들을 주워담고 있었다.
"응? 저 해골은 웬 비늘을 다 달고 있지?"
썩어 버린 시신의 잔해 사이를 헤치던 자천릉의 눈빛이 다시금 빛났다. 자천릉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마치 허물을 벗은 뱀이 뼈만 남긴 채 죽어 있는 듯한 검붉은 미광을 발하는 비늘 더미에 감싸인 고루 하나가 있었다.
"어! 이건 묘한 비늘인데? 곤산현철보다도 더 단단해 보이는 데다가 이 글씨는 또 뭐지?"
비늘 하나를 떼어 들던 자천릉이 문득 탄성을 터뜨렸다.
<당(唐).>
칼로 찔러도 흠집 하나 그어지지 않을 듯 단단한 암적색 비늘의 후면에는 단정한 해서체로 당자 한 자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쳇! 이건 또 뭐길래 나를 이렇게 귀찮게 만드는 거지?"
투덜거리며 몇 개의 비늘을 떼어 내는 자천릉의 눈에 잇달아 <비(飛)>, <십(十)>, <용(龍)>, <루(樓)>, <린(鱗)> 등 불규칙한 해서체 한자들이 쏘아져 들어왔다.
"호, 이건 잘만 배열하면 어구(語句)가 될 수도 있겠는데?"
자천릉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떠올리며 돌연 비늘들을 깡그리 떼어 내더니 동굴 바닥에 바둑돌을 놓듯 이리저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닥에 배열된 글자들은 서로 연결된 자구가 되면서 무언가 기묘한 글귀들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처절한 한으로 점철된 하나의 비밀서한(秘密書翰)이었다.
<십칠년(十七年) 전,
본파(本婆)의 다섯 아들, 당우(唐宇), 당량(唐梁), 당역치(唐易致), 당손(唐孫), 당하문(唐 門)이 봉래(逢萊), 발해(渤海), 형산(衡山) 등 새외오파(塞外五派)의 기라성 같은 영재 아흔 여덟 명과 더불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로 출발했다.
면면을 살피매 모두 강호의 최첨단을 달리는 초일류고수들이다. 더욱이 큰 아이 당우는 본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십 일 대 가주(家主)로서 전신에 자령오공(紫靈蜈蚣), 세엽백리비편(細葉百里飛鞭)등 본문 최대의 절예인 당문만기(唐門萬技)를 모두 연성한 본가 초유의 기재였다.
헌데 아이들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소식 한 번 없이 흡사 사막에 한 잔의 물을 뿌려 놓은 듯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사천당문(四川唐門).
사천당문을 아는가? 천하에서 유일한 혈족방파(血族幇派).
그래서 더욱 강한 단결력과 투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욱 꾸준히 암기(暗器)의 외길을 걸어와 이제는 총정의 십대문파와는 또다른 무파(武派)의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전통의 명가(名家).
꼭 칠백년(七百年)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세살박이 꼬마로부터 팔순 노파까지 암기를 쓰고 또 만들 줄 아는 암기의 달인들이라 알려진 가공할 암기가족(暗器家族)들.
헌데 그 사천당문의 흔적을 여기 만장석굴 속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삼년전(三年前),
나머지 두 아들, 당평(唐坪). 당수전(唐秀全)과 당취(唐鷲), 당표(唐彪), 당가유(唐可有) 등 열 여덟 명이나 되는 손자 아이들이 이른바 총정의 초일류고수라는 개방( )의 팔전취개(八全醉 ) 적용숙(狄容宿)과 소림(少林)의 숭광불성(崇光佛聖), 무당(武當)의 환엽진인( 葉眞人), 아미(峨嵋)의 패하선자(佩荷仙子)등 무려 이백 십 칠 명이나 되는 군웅들과 함께 또 다시 십팔만사천백와마루로 갔다.
헌데 삼 년하고도 백 삼십 오 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의 두 아들과 십 팔 명의 손자, 그리고 이백여 군웅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의 불민한 아들과 손자들은 젖혀놓고라도 소림의 숭광, 무당의 환엽, 아미의 패하, 개방의 팔전취개, 이들이 누구인가. 모두 자파에서 영수이거나 영수 이상의 위를 지녔던 개세의 고수들이 아닌가. 헌데 그들도, 나의 아들들도, 나의 손자들도 돌아오지 않는다.>
"쳇! 개세의 고수 좋아하는군. 뼈도 못 추리고 죽어 갔을 이름들인데."
자천릉은 코웃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결코 모르고 있었다. 비늘의 글귀 속에 나열되고 있는 이름들이 오백 년 전의 강호에 얼마나 큰 비중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십대문파는 얼마나 빠르게 몰락의 일로를 치달려야 했던가를.
<그렇게도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강하단 말인가. 그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불가사의의 금자탑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천하에 영원한 무적이란 있을 수 없듯이 그들도 언젠가는 머리가 작고 몸통만 큰 공룡(恐龍)이 굶어 죽듯 그렇게 무너지고 말 때가 올 것이다.
우리 대가 안되면 그 다음 대, 그 다음 대가 안되면 또 그 다음 대, 넘어지고 깨어지고 쓰러지더라도 기필코 죽음으로 도전한다면 말이다.
켈켈, 지난 십 년 전부터 당문만기(唐門萬技), 암술학(黃暗術學), 자오세문비록(子五細紋匕錄) 등 본문의 모든 암기에 관한 비급들을 나는 깡그리 모았다.
그리고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비무에 있어 승부는 생(生)과 사(死)를 가늠하는 것에 불과하거늘, 왜 나의 아들과 손자들이 죽어 가야 하는가.
죽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검이나 칼로 찌르고 베는 것보다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이 날아가는 본문의 병장기 암기(暗器)가 훨씬 유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더욱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있는 무인들은 대부분 검, 도, 비수, 창, 그리고 장(掌)이나 권격(券擊)등만을 사용한다 했거늘, 헌데 왜 만병의 으뜸이요, 살병(殺兵)의 최고봉인 암기를 사용하는 본가의 아이들이 죽어 가야 하는가.
결국 본파(本婆)는 한 가지 결론을 얻었다. 절기와 병장기에는 문제가 없다. 있다면 다만 그 절예를 익히고 병장기를 든 사람의 자질과 전술이 문제였을 뿐이다. 하여 이제 본파는 나의 증손자들을 위해 여기 본문의 모든 암기들을 종합, 팔천팔백개(八千八百個)의 철편(鐵片)으로 나누어진 용린천갑(龍鱗天甲)을 남긴다. 진정한 천하최강의 인물이 언젠가는 본가에 태어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천당문 제구대(第九代) 총호법(總護法) 귀당태태(鬼唐太太) 일체만기(一體萬器) 당요(唐瑤) 서(書).>
- 귀당태태 일체만기 당요.
사천당문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라 칭해지는 이 여인, 한 몸에 일만 가지의 암기를 지녔다 하여 일체만기라 불리며, 사천당문의 모든 절예와 암기제조술을 한 차원 높은 초극품기예의 경지로 승화시킨 희세의 여걸.
헌데 그녀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대한 처절한 한과 분노를 씹으며 사천당문의 모든 암기를 모아 탄생시킨 용린천갑을 우연처럼 자천릉은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②
"어지간히 허풍이 센 노파로군. 이까짓 녹슨 고철 덩어리를 갖고 천하최강이 어쩌구 난리를 부리려 들다니."
철그렁!
자천릉은 차갑게 웃으며 막 무슨 암기 구결 같은 글귀로 이어지던 용린천갑의 비늘들을 걷어차 버렸다.
헌데 용린천갑(龍鱗天甲)이라면 팔천 팔백 개 용의 비늘(鱗)로 이루어졌다는 지상 최고의 호신갑이 아닌가?
또한 비늘을 이루는 낱낱의 철편(鐵片)들이 그대로 사천당가의 모든 암기의 결정체와도 같다는 암기의 보고(寶庫).
그것이야말로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향한 중원무인들의 꺼지지 않는 투혼과 도전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상이요, 단적인 증거였던 것이다.
허나 자천릉은 그 엄청난 용린천갑의 기연을 무관심하게 걷어차 버리고 있었다.
"쳇! 별것도 아니었잖아. 뭐 좀 좋은 것이 없나?"
자천릉은 다시 허리를 굽히며 시신들 사이에서 흩어진 책자들을 주섬주섬 주워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 각쯤 흘렀을까?
"응? 이건 뭔데 이리도 단단히 숨겨 뒀지?"
시체와 뼛조각들을 마구 뒤적이던 자천릉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거의 썩어 가루가 된 채 형해(形骸)만 앙상히 남아 있는 고루의 허리 어림에 손바닥만한 검은 가죽 주머니 하나가 삐죽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이 주머니는 너무 작아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안 뜨였나 보군."
자천릉이 흑낭(黑囊)을 집어들자 끈이 힘없이 부스러지며 그 곳에서 조그만 책자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세상에 이렇게 조그만 책도 있었나?"
책자는 손바닥 속에 흔적 없이 감춰질 만큼 작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두께는 웬만한 불경 세 권을 합쳐 놓은 것처럼 두툼했다.
검은 빛 표지에는 금빛과 은빛을 섞어 놓은 듯 아주 미묘한 광채를 발하는 빛깔로 <소(蘇)> <소( )> <천(天)> <총(叢)>이라는 전자체(篆字體)가 겉장 가득 아로 새겨져 있었다.
"소소천총(蘇 天叢), 소리의 모든 것이라고?"
헌데 자천릉이 막 소소천총이라 쓰인 표지를 넘기려는 순간 갈피 사이에서 한 장의 조그만 양피지가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뭐지?"
자천릉은 누렇게 바랜 양피지에 시선을 가져갔다.
양피지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고 그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딸, 매아(梅兒)에게.>
"또 서찰이군."
자천릉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안력을 돋우어 깨알같은 글씨들을 읽어 내려갔다.
<단풍(丹楓)이란 저녁 바다의 낙조(落照)와도 같아 아름다울 수록 더욱 사람의 가슴을 쓸쓸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나 보다.
이곳 무당산(武當山)의 가을을 불사르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을 바라보며, 지금쯤 매아가 사는 서해(西海)의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을 차가운 겨울 눈송이를 그리게 됨은 왜일까?
매아야, 이 아비가 너를 시집보내고 도가(道家)의 명문인 무당(武當)에 출가한 지도 벌써 사십년(四十年).
원래 이 아비가 출가한 것은 매아가 알고 있듯 도(道)로써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단다.
다만 서해의 파도와 싸워 보지 않고 바다에 살았다고 말하는 어부처럼 그저 겉껍질의 무예(武藝)만을 핥았을 뿐인 이 아비가, 배운 바 무예로써 주제넘게도 하늘(天)에 도전하고자 마음을 먹고 우리들의 고향 서해를 벗어났던 것이었단다.
서해 바다를 두들기는 빗소리, 파도 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던 이 아비의 알량한 무예를 믿으며 말이다.
허허, 허나 아비가 이고 있는 하늘은 너무도 크고 높았구나. 사십 년의 고련과 대무당파의 모든 진산절예를 합해도 겨우 그 끝자락에 다다르기가 힘들만큼.
오늘은 아비가 그토록 염원하던 그 위대한 하늘,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도전하기 위해 곤륜으로 떠나는 출정(出征)의 날이다. 밖에서는 장문사형(掌門師兄)을 비롯한 오천(五千)의 제자들이 창검을 닦으며 부산하고, 간혹 소림(少林)과 화산(華山), 아미(蛾嵋)와 개방( ) 등 다른 구대문파의 사람들도 출정가를 부르며 오가는데, 매아야, 슬프도록 처절하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만 이 아비가 설 땅은 어디냐.>
"이 사람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도전하려고 자신의 집을 버린 채 무당에 입산했던 사람인가 보군. 그리고 십대문파의 이름들이 나오는 걸로 보아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쓴 서찰인 것 같고."
양피지를 보던 자천릉의 입가에 돌연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의 말대로 어지간히 무예에 소질이 없었나 봐. 결국 여기에서 이렇게 백골로 딩구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야."
<... 중략(中略)....
매아야, 나의 어머님, 곧 너의 할머님께서 당신의 곁을 떠나올 때 주셨던 말씀을 이 아비는 오늘에야 깨달았구나.
- 무인으로서 명예를 떨치고 싶으냐? 그렇다면 가문을 떠나 무인의 길을 걸어라. 허나 무인으로서 대성하여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꺾고 하늘이 되고자 한다면, 가문의 가업(家業)속에 너를 묻어라.
그랬었구나. 이 어리석은 아비는 지금 한 권의 책을 가슴에 안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천하 그 어느 곳을 헤매어도 그곳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하늘 밑, 결국 돌아갈 곳은 내 고향 아름다운 소소가(蕭 家)의 언덕일 뿐인 것을.
출정까지 한 시진을 남겨 둔 이 시각,
어머님의 말씀을 되씹으며 까맣게 잊고 있던 본가의 비서인 소소천총을 들춰보던 이 아비는 부끄럽고 비통함에 자결이라도 하고픈 심정이 되고 말았구나.
대대로 소리의 힘을 연구해 온 본가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소소천총, 아비가 깨끗히 무시해 버렸던 이 조그만 책자야말로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깨뜨리기 위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초극의 절예들을 담고 있는 엄청난 무경이었던 것이었단다.
허나 이제 출정하면 백중백(百中百), 아비는 이슬로 지고 말 터이니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겠느냐.>
"소소가(蕭 家)... 소리의 힘? 이건 아까 저 여자가 말했던 그 한림사가인지 뭔지 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 아냐!"
자천릉이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꺾고 영구히 천하를 지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칭해지는 가공 할 네 개의 가문, 한림사가(翰林四家)중 하나인 그 이름이 지금 이 조그만 책자 사이에서 떨어진 양피지 속에 거론되고 있는 것이었다.
<허허, 매아가 그토록 조르던 산호초(珊瑚礁) 한 뿌리를 끝내 못 구해 주고 온 일이 마음에 걸려 밤마다 잠이 오지 않더니만 아비가 벌이라도 받는 게로구나.
부디 이 글과 소소천총이 사랑하는 딸 매아의 손에 전해져 본가의 삼천 오백 년 가맥(家脈)이 절전되지 않기를.
해서 언젠가는 본가의 인물이 소소천총의 모든 것과 본가의 가업을 정리하고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오만한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기를 바라며....
대송(大宋) 총력(總力) 삼백팔년(三百八年), 출정을 앞둔 구월(九月) 십일(十日)의 노을 속에서 어리석은 아비가 이 글을 쓴다.>
"대송시대라... 거기에 삼천 오백 년 가맥이라고 그랬으니, 이 소소가라는 가문은 십팔만사천백와마루보다 적어도 천년(千年)은 더 된 곳이로군."
자천릉이 양피지에서 눈을 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천 년의 불가사의라 불리우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보다 천 년이나 더 오래된 가문이라니, 실로 엄청난 말이 아닌가? 헌데 이때였다.
"호호호, 냉언니! 이곳이 너무 어두워 낮잠이라도 주무시나요? 어서 말씀대로 소매의 목을 베어 보시죠!"
자천릉이 용린천갑의 글귀와 양피지를 읽는 동안 계속 냉교채와 살기 등등하게 대치하고 있던 필혜슬이 교소를 터뜨리면서 오현금파의 머리부분을 비틀었다.
그녀의 손에 금빛 비단폭 같은 연도(軟刀) 하나가 꺼내졌다.
냉교채의 옥용에 싸늘한 미소가 번지며 초승달 같은 빙월척이 천천히 세워졌다.
"흥! 비체인을 꺼내다니, 그래도 본녀의 말에는 변함이 없다."
실처럼 흐느적거리던 필혜슬의 연도인 비체인도 일직선으로 팽팽하게 펼쳐졌다.
"약속대로 한다. 백변척영(百變尺影)!"
냉교채가 교갈과 함께 백여 개의 초승달 무리가 땅에 떨어지듯 그대로 필혜슬의 전신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찰나 필혜슬의 교구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한 바퀴 원을 그렸다.
"호호, 냉언니! 먼저 지옥에 가서 소매를 기다리시죠. 비체인 제사초(第四招), 무지개의 장벽이예요!"
비체인이 무지개를 뿜듯 찬란히 어둠을 아로새기는가 싶더니, 카카캉! 하는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초승달과 무지개의 무리가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부딪쳤다. 어느새 냉교채와 필혜슬이 서로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제길! 되게 시끄럽군."
자천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응? 싸움을!"
막 자리를 바꿔 내려서는 냉교채와 필혜슬의 모습에 시선이 닿은 자천릉이 문득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군. 이곳의 율법이 싸움과 살인이라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좀 조용히 싸워 줬으면 좋겠어."
자천릉은 빠르게 양피지를 접으며 소소천총이라 이름 붙여진 시커먼 나무토막 같은 책자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호, 지독히도 얇고 날카로운 종이군. 아니 종이는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자천릉이 은은히 놀라며 빠르게 사방을 훑어보았다.
'이, 이건 굉장한 책인 것 같다! 돌할아범에게 배우기만 했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갑골문자(甲骨文字)로 시작되고 있잖아!'
흡사 거북 등에 번지는 균열을 옮겨 놓은 듯 엉성하고 볼품없는 서체로 또 하나의 글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은(殷) 탕왕(蕩王) 일년(一年).
내가 학문을 벗삼은 지도 육십사년(六十四年) 째, 이제 하(夏)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왕조(王朝)가 시작됐다. 나의 벗 한월(寒月)도 적송(寂松)도 추국(秋國)도 모두 새 임금 탕왕의 곁으로 갔다. 하지만 왜 나는 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과연 나 소소자(蕭 子)의 조그마한 학문으로 천하창생을 위하고 성군(聖君)을 보필할 수 없는 것일까? 의문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은 탕왕 삼년(三年).
어젯밤 늙은 내 두 손을 꼭 잡고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많은 벗들이 다녀갔다. 진심 어린 위로와 당부를 하고 갔다. 좋은 벗들이다. 이제 나는 결심을 했다. 자신의 아내가 죽어 가는 것조차 막지 못한 내가 어찌 천하창생의 앞날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이 번잡한 세상을 떠나 인적 없는 그 어느 곳에 들어가 한평생을 보내리라.
은 탕왕 오년(五年).
내가 자리잡은 이곳은 정녕 대자연의 천혜를 받은 땅이다. 못난 내가 뼈를 묻기에는 벅차리만큼 아름다운 땅이다. 바람소리가 들릴 때면 친구들의 그 호탕한 목소리와 환한 웃음이 떠오르고, 파도가 느껴 올 때면 형님의 목소리가, 갈대 잎이 흔들릴 때면 아내의 고운 목소리가, 끝없이 환상으로 일어나 내 여생에 추억의 향기를 더한다. 아아, 나의 마음을 언제나 감싸고 있는 이 모든 소리들을 한꺼번에 담을 수는 없을까? 붙잡아 둘 수
는 없을까?
은 탕왕 육년(六年).
실패다. 벌써 몇 날 며칠을 파도와 바람, 새들의 울음과 갈대 잎의 흐느낌, 바다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 기울여 왔건만 그 많은 소리들, 대자연의 노래이자 친구들의 음성이며 신들의 목소리인 그 웅장한 합주(合奏)를 담아 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아무리 훌륭한 악기(樂器)라 할지라도 엉뚱한 일이다.
나의 다정한 친구들과 형님의 음성,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보기 삼 개월, 뜻밖에도 성대가 변하며 타인의 음성만을 자유자재로 모방할 수 있는 기능이 생겨났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가련한 기능이 말이다.>
"타인의 음성을 자유자재로 흉내낼 수 있는 변성술(變聲術)? 이건 어딘가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자천릉은 기묘한 느낌에 빠지며 누군가의 일기를 발췌해 놓은 듯한 글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은 탕왕 십이년(十二年).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도 어언 이년(二年)째, 아버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도 당신의 일기를 목격, 당신께서 생전에 소리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지니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떠나간 벗들을 그리워하고 어머님을 애타게 보고 싶어하다 결국 대자연의 소리 속에서까지 가까웠던 분들의 음성을 상기하려 하셨던 아버님. 나는 한 분 뿐인 그 아버님을 병마로부터 지켜 드리지 못한 불효자로서 작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생전에 그토록 염원하시던 일, 바로 대자연의 소리를 합하여 한꺼번에 발할 수 있는, 이 지상에서 가장 풍부한 음계(音階)와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악기를 만들어 보기로.
그리고 아버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변성술에는 천변소(千變 )라는 이름을 달아 가문의 책에 적어 놓았다.
은 탕왕 육십사년(六十四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모으기 위해 꼭 설흔 두 번째 천하를 떠돌았다. 그리고 대자연의 모든 소리를 듣기 위해 천산(天山)을 백 아홉 번, 홍택호(洪 湖)를 여든 두 차례, 액제납하(額濟納河)를 구십 사 회, 등격리사막(騰格里沙漠)을 마흔 세 번 등 천하의 모든 지형을 외울 듯이 찾아다녔다.
그러기를 오십 이 년. 이제 나는 알았다. 소리,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신의 창조물인가를!
소리에는 시작은 있되 끝이 없었다. 또한 소리는 작게는 벌레들의 잠을 깨우는 낙엽 소리부터, 크게는 인간의 고막을 뚫고 종내 인간을 살상하기도 하는 천공을 찢는 천둥소리까지 천변만화의 힘을 지녔다.
그 많은 소리는 한 사람의 한평생으로서도 결코 한꺼번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고 소리의 폭은 너무 깊고 넓고 영원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쳐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몇 가지의 잡다한 수법 뿐. 어이없게도 아버님의 천변소를 조금 바꾼 데 불과한 복화술(腹話術)과 전음술(傳音術), 짐승의 울부짖음에서 착안한 사자후(獅子吼)와 맹룡포(猛龍咆)등 실로 조잡한 기술만을 얻는 데 그쳤던 것이다.>
"전음술, 사자후? 놀라운 일이군. 고작 일천 년 전에 탄생한 비예들로 알려져 있었던 그 소리의 무학들이 기실은 은왕조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니."
자천릉은 탄성을 흘리며 거푸 몇 장을 넘기다 고개를 삐딱하게 꼬았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찾기 위해, 아니 만들기 위해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대대로 사람들이 혼을 바쳤다니 어지간히 할 일도 없는 가문이군."
책장이 하나하나 넘어갈 때마다 은(殷)에서 주(周)로, 다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로, 무려 백 수십 여 명의 인물들이 대대로 선조의 꿈을 이으며 하나의 목적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득 자천릉이 손을 멈춘 책장에는 <대한(大韓) 고조팔년(高祖八年) 칠월(七月)> 이라는 날짜가 이번에는 전자체(篆字體)로 적혀 있었고, 역시 전자체로 누군가의 글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길! 숙부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매일같이 넋 나간 사람처럼 바람소리나 들으며 해를 넘기고, 아니면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밤낮을 걷더니, 오늘 숙부는 왠일인지 자신이 만든 악기들을 한 곳에 황급히 모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비파(琵琶)와 해금(奚琴), 경(磬)과 아쟁 등 천하의 모든 악기를 모아 오라고 했다. 그후 그것들을 일일이 연주해 보다 갑자기 깡그리 때려 부셨다. 하기야 꼭 열 번째 되풀이되는 일이라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긴 하다.
대한 고조 십년(十年) 이월(移越) 초아흐레.
숙부의 몸이 점점 허약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악기를 때려 부시는 일은 멈추려 하지 않는다. 오늘로서 꼭 스물 다섯 번째 그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을 들으면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선대들이 떠맡긴 무거운 짐! 지상에서 가장 풍부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라는 그 말도 안되는 짐, 숙부를 폐인으로까지 만들어 버린 그 저주스런 짐을 벗어 던지기 위해 나는 이 하늘 아래 가장 듣기 싫고 파괴적인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대한 고조 이십칠년(二十七年) 시월(十月) 스무 이틀.
드디어 나는 해냈다. 정확히 십 칠 년하고도 절반이 더 걸린 세월이다. 사천(四川)의 흑탄철(黑炭鐵) 한 근을 깎고 깎아 만든 시커먼 호각(胡角)에 소소오각(蕭騷烏角), 또는 소소사각(蕭騷死角)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정말 그것이 하늘 아래 가장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가볍게 입에 대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지독한 소음을 토해 내는 악기임에는 분명하다.>
"풋! 재미있군. 선조들이 남긴 무거운 짐이 싫어서 그것을 파괴한다? 아주 건전한 생각이야."
묘한 미소를 떠올리던 자천릉이 돌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소소오각이라니? 내가 가진 이국십보중 섬라국의 대자불승의 유품과 이름이 같잖아! 허면 혹시?"
자천릉이 어찌 알겠는가. 소소오각이 우연히 섬나라국에 전해지고 다시 대자불승이 십주대장정에 사용함으로써 난세십승의 이국십보중 하나로 중원에 알려졌으며 마침내 그의 손에까지 흘려 들게 됐던 것임을 말이다.
그것은 이미 우연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대와 공간마저 초월하는 위대한 만황(卍皇)의 탄생을 위해 모아지고 있는 화려한 필연(必然)의 전주곡(前奏曲)이었다.
<그리고 나는 소소오각을 위해 네 장의 악보를 만들어냈다. 사탄악율(四彈惡律)이라고 하는데, 음의 기본 원리를 깡그리 파괴하여 한 소절만 들어도 귀청을 찢어 버리는 지독히도 악랄한 반역의 소리들이다.
제일탄(第一彈) 일소파청(一 破聽).
일성 호각은 귀청을 뚫고,
제이탄(第二彈) 십소쇄인(十 碎人).
열 번을 이어 불매 사람의 몸을 가루로 만들다.
제삼탄(第三彈) 지옥백소(地獄百 ).
백 번째의 호각은 이미 지옥 끝에서 들려오고,
제사탄(第四彈) 흑주천봉(黑주天峯).
오오! 검은 오추마가 대지를 치달리니 그 굉음 하늘을 무너뜨리도다.>
그때 책갈피를 넘기던 자천릉의 손 끝이 돌연 멈추어 졌다.
'살기, 그것도 피냄새가 지독하게 배인 강렬한 살기다!'
자천릉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