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쁘다 이 말이여
디모데후서 2:8-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6주일이다. 오늘은 마침 한글날이다. 우리 민족문화에 있어서 한글만큼 위대한 창조물이 있을까? 한글은 ‘아침글자’라고 불린다. 누구든지 단 하루면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은 얼마나 과학적인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다.
영국의 역사다큐멘타리 작가 존 맨은 <알파 베타>라는 책을 썼는데, 우리말로도 번역되었다(<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남경태). 이 책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하였다. 유네스코는 한글을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의 언어로 사용하게 하자고 제언하였다.
무엇보다 한글성경은 한글을 현대화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물론 지금 우리가 쓰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오늘의 언어관점에서 보면 너무 어렵고, 고답적인 어투여서 현대인들의 감성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 앞으로 더욱 창조적 영성으로 성경언어의 이해를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오늘 설교 제목은 ‘미쁘다 이 말이여’이다. 미쁘다는 말은 ‘미덥다’, ‘믿음직하다’란 뜻으로 쓰이는 고운 우리말이다.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과 관련해 언약을 끝까지 지키는 신실한 사람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됐다.
디모데전서와 후서에 ‘미쁘다 이 말이여’가 모두 네 번 사용되고 있다. 믿음을 지키고, 신실함을 따르라는 권면과 관련되어 있다.
1)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이다. 영적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늙은 사도가 젊은 디모데들에게 남긴 기록이다. 디모데는 바울이 두 번째 선교여행 할 때 바울에게 발탁되었다. 그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서 거둔 열매이고, 낳은 영적 아들이었다.
디모데는 엄밀하게 따지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소아시아 루스드라 지방 출신으로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러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독실한 유대인 가정이었다. 바울은 디모데가 받은 유대교 신앙교육에 대해 칭찬한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가장 늦게 쓴 편지로, 본인의 생애를 정리하는 듯한 숙연한 내용이 담겨있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를 담은 세대 간 서신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많은 기억을 품고 있다. 그 기억을 기록으로 보존하여 전해 온 것이다.
대를 물리며 연합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두 세대의 연대는 삶의 승계와 믿음의 계승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억함으로써, 계속되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겪음으로써, 이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드림으로써, 연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서신을 통해 신앙의 유산을 남기면서 “미쁘다 이 말이여”를 반복한다. ‘미쁘다’가 받는 말은 그 아래 네 가지이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11).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12).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12).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13).
바울은 네 가지를 말하면서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으나, 믿음과 신실함을 간직하여 승리의 관점을 지키라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그가 위탁받은 교회를 잘 돌볼 수 있도록 필요한 지침을 내린다. 본문은 디모데를 격려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지혜를 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잘 알려진 둘 사이 동역 관계처럼 이 편지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여기고, 크고 깊은 신뢰와 사랑을 보여준다. 또한 디모데가 직면한 도전에 대해 같은 심정으로 염려를 하고 있다. 디모데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젊다는 것이 약점이다. 젊으니 경험도, 연륜도, 깊이도 부족하게 마련이다. 젊은 사람은 그런 약점 때문에 주위의 염려를 산다. 그럼에도 나이 탓을 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은 부름을 받지 않고서는 은사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주지 않고서는 부르시지 않습니다”(칼 바르트).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게다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주위의 걱정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 분이 많았을 것이다. 종종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자주 주눅이 들었다. 친구 어머니가 내게 하신 말씀이 아직도 쟁쟁하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면 너 같은 것이 목회를 다 하니?”
그때 내가 새긴 소명이 있다. 내가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세상이 악해서구나. 그래서 선한 일을 위해, 정의와 평화를 위해, 감당해야 할 수고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을 품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무를 ‘명예로운 위임, 거룩한 직무에 대한 위탁, 약속 가운데 있는 특권’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디모데 역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바울이 기성세대를 대표한다면, 디모데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 자신의 삶을 나눈다.
지난 여름, 독일을 방문하던 중 마지막 일정으로 룻츠 드레셔 디아콘을 방문하였다. 그는 독일의 가장 남쪽 도시인 프라이부르크에 사는데, 그곳 슈바르츠발트가 고향이었다. 마지막 노년을 고향에서 보내려 40년 만에 다시 돌아가 정착하였다.
그가 내게 방문을 당부하면서 이틀간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우리 식구는 이틀동안 그와 동행하였다. 헤어지기 전날 저녁에 그는 내게 준비한 선물을 주었다. 자신이 평생 간직한 십자가 5점이었다. 자기가 청년 시절 소명을 구하러 다닐 때에 인도에서 마더 테레사 공동체에서 봉사하면서 그곳에서 구입한 인도십자가도 주었다.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 내 조카가 내 유물을 정리할 텐데, 그가 십자가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송 목사님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전달식을 하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하였다.
2)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전할 믿음을 강조한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여전히 그들의 믿음 안에는 아직 유대교적인 열심과 예수 그리스도 신앙이 뒤섞여 있다. 이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분명히 가르치고, 율법과 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가르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이심을 고백하도록 할 사명이 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를 모태로 하여 태어났지만, 다시 유대교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신앙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하는 법’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사흘 만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주님이었다.
유대교 신앙과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에는 연결점도 많지만, 분명한 단절이 필요하였다. 그런 구분을 하지 못한 채, 여전히 혼동하는 히브리인들을 향해 예수가 누구신가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시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된 것이다. 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는가? 영혼을 구원하려는 사명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택한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결신함으로써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지금 바울이 몸이 갇혀있다고 해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의 사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리라”(9).
바울은 당장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나갈 것이다. 디모데와 같은 젊은 종들과 새로 태어난 교회들이 그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세계교회는 2천 년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전통을 이어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한다. 우리 스스로 2천 년 전의 기억을 복기하여,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 세대의 교회가 우리 세대의 교회에게 가르치고 전해준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언약을 기념하며, 구원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교회는 기억하고 보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기억의 종교이다.
신앙계간지 <성실문화>와 함께 ‘기록하여 기억하다’란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맨 처음 과제는 어머니 이해남 장로가 남긴 자전글에 해설을 달아 출간하는 일이다. 어머니가 대단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역사를 발굴하여 그 시대에 생활 속의 신앙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지금 기록이 없다면, 기억도 잊혀질 것이다. 그래서 1960년대와 70년대의 이야기 신앙을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를 기억하라’고 부탁하면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로 예수를 기억하게 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복음 전도의 사명이다.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감당할 사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다, 라고 고백한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10)다.
예수를 기억하라는 것은 참되게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를 기억하라는 것은 바르게 배우라는 것이다.
예수를 기억하라는 것은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3)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의 박해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고난과 희생을 겪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당장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을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강조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11-13).
그리스도교에서 기억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매주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항상 기억한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날마다 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게 주신 구원의 선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또 장차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고백한다. 성경은 거듭거듭 기억을 훈련하게 하고, 기념하게 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한다.
믿음을 지키는 일은 바로 ‘오늘’, 즉 매일매일 결단해야 할 문제이다. 세계 가톨릭교인들이 날마다 같은 내용의 ‘성무일도’를 드린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첫 구절이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히 3:13)란 말씀이다. 이렇게 노래한다.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성무일도, 초대송).
금요일 오전이면 안양 1번가 근처에서 열리는 금요평화기도회에 참석한다. 여러 교단이 함께 하는 목회자 모임인데, 지난 금요일에는 만안구에 있는 빛된교회 30주년을 맞아 함께 축하하였다. 아주 작은 복음교단 교회로 의미 있는 회고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짧지 않은 역사 동안 교회가 자주 흔들렸다. 10여 년 전에 어떤 교인이 묻더란다. “언제 교회가 문을 닫나요?” 아무래도 중간에 나가면 무책임한 것 같아서 교회가 문을 닫으면 나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떤 심경일까 궁금하였다. 작은 교단이고, 또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이다 보니 교회를 그만둘 구실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목사가 수염을 기른다고 해서 그만둔다고 하고, 목사가 청바지를 입는다고 그만둔다고 하였다. 목회가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부부 사이도 불안하였다. 3년 전 송구영신예배 때 참석자들에게 새해 소원기도문을 적으라고 제안하였는데, 어쩌다 아내의 기도문을 보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적혀있었다. “주님, 제 남편을 돌려주십시오.”
목사는 아내의 기도문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기도에 일일이 응답을 줄 수 없으나, 적어도 내 아내의 기도만큼은 내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때부터 아내의 말을 잘 듣고, 친절하고, 함께 지내다 보니 지금은 부부 사이가 좋아졌다고 고백하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원로 목사들이 웃으며 이런 농담을 하였다. 우리 아내는 “제발 좀 떨어져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니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예수님을 든든히 붙잡으라고 한다. 신앙은 날마다 걷는 믿음의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길을 떠난 순례자들이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인생이다. 우리는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과거의 선수가 아니라, 내일부터 달려야 할 미래의 선수도 아니라, 지금 나는 달리는 중에 있다.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의의 최후 승리의 관점을 간직하라고 한다.
바울은 권면한다. 그러므로 기억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을 지키고,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분별하라고 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15).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잊고 사는 사람은 쉽게 불안에 빠지고, 유혹에 흔들리기 쉽다. 나와 같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라.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나를 사랑하는 주님을, 내게 구원을 베푸신 그 이름을, 내 삶의 마지막에 내 이름을 불러주실 그리스도를!
“예수를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보령 갈매못 순교성지).
하나님의 은혜가 내 믿음과 기억을 새롭게 하셔서 미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신실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