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논쟁에 대한 몇 가지 문제
약 2주쯤 전에 이글루스 내에서 교양 개념에 얽힌 논쟁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참고적으로 당시 토론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 교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글에 "XX에 대한 몇 가지 문제"란 노교수들이나 쓰실 법한 제목을 붙인 이유는 그러한 고리타분함이 오늘날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 착실히 멸종의 길을 걷고 있는 교양이란 개념의 본성을 잘 살려주기 때문이다. 그에 걸맞게 "XX는 무엇인가" 같은 정의나 개념부터 시작하는 고루한 방법을 택해 보기로 하자.
이녁님께서 이해하고 계신 '교양' 개념은 실제 '교양'이란 개념을 구성하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양'은 영어로 'culture'이며 중고등학교 때 한번쯤은 <'교양'의 어근이 '경작'의 어근과 같으며 이것은 '교양'이 기본적으로 '인간 정신과 삶을 가꾸어나가 자기완성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는 점에서 경작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교양'의 뿌리어인 독일어 Bildung은 지적인 맥락이 좀 더 강조되어 있을 뿐 근본적으로 '자기완성의 과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다른 언어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녁님 말씀대로 일상생활에서부터 전문적인 학술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는 '교양'이란 언어들 속에서 공통된 관념요소들을 뽑아내어 종합-이것이 '개념'의 개념입니다-해보면 '교양'이란
여기서는 교양이 독일의 Bildung 개념의 번역어로서 출발하였음을 지적하면서 교양의 본질은 일종의 지행합일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며 사실 교양이란 개념에 내포된 어떤 한 측면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용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는 모든 선언적 정의가 갖는 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 그 약점은 다음과 같은 예를 떠올려 보면 분명해진다.
어떤 종교에 대해 독실한 믿음과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것으로 정평이 난 저명한 인물이 자기 종교의 경전을 가리켜 『이 세상에 유일한 참 진리를 담은 경건한 책』이라고 규정했다고 하자. 또한 그 종교나 경전에 대해 그만큼 정통한 인물은 없는게 확실하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말이 옳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다 하자. 그가 제시한 정의에서 출발해서 우리가 그 경전이나 그 종교에 대해 궁금해하던 여러가지 측면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적어도 여기서 샤피로씨가 제시한 정의는 믿음의 선언에 가깝지 스스로가 언급한 것 같이 "다양한 맥락에서 쓰이는 '교양'이란 언어들 속에서 공통된 관념요소들을 뽑아내어 종합"한 것, 즉 귀납적 실체는 아니다.
신앙선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교양의 핵심 특징에는 동질성을 향휴한 특수집단 -교양인 공동체- 의 이유없는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는 부분이 제법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이미 교양인이 된 사람에게는 자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오직 다양한 사례수집을 통해 귀납적으로만 밝힐 수 있을 뿐이다.
샤피로씨가 남긴 한 코멘트를 볼 것 같으면 "교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정리되어 서술된 책을 추천"하면서 제일 먼저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조금 인용해 교양의 특징을 살펴 보기로 하자.
반 고흐가 화가로서 왜 유명한 고전작가의 대열에 끼는지, 또 프리츠 폰 우데Friz von Uhde의 작품 『감자 까는 여자』가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못지않은 강렬한 표현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전문가들에만 알려져 있는
이제 또 하나의 차원이 열린다. 즉 교양은 신앙의 공동체다.
「저는 셰익스피어와 괴테 그리고 클래식 작품들을 믿사오니, 이것들은 하늘과 땅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빈센트 반 고흐가 신의 부름을 받은 초상화가임을 믿습니다. 이 사람은 브레다 근처의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했으며 파리와 아를에서 성장했고 고갱과 친하게 지내다가 결별했으며 고통스러운 나머지 광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살을 시도했고 하늘에 올라 신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 거기로부터 미술 전문가와 어설픈 딜레탕트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저는 문화의 힘을 믿사오며 천재들이 영원히 사는 것과 예술의 거룩한 성전과 교양인들이 교통하는 것과 인문주의의 영속하는 가치들을 믿습니다. 영원의 이름으로 아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공동체이므로, 역시 권위 있는 정전(正典, Kanon)들이 있게 마련이다. 정전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리스어로 ‘등나무 회초리’라는 뜻이었으며 ‘규칙’을 의미했다(그 당시에 사람들은 자식을 회초리로 때려가며 주입식으로 교육했다). 그 후로 그 단어는 신의 직접적인 계시로 여겼던 기록들을 의미했고 이것들이 수집되어 성서가 생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양종교에도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 경전들이 있다.
물론 오늘날 정전으로 통하는 것은 교황이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확정된 것이 아니며 역사가 진행하는 동안 서서히 정착된 것으로 이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 흐름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교양지식은 유구한 역사의 축적 결과이며 세간에 통용되는 상식의 거대한 빙하가 흘러간 뒤에 남은 퇴적물이다. 이 상식과 그 퇴적물인 신앙고백문의 내용을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때만, 정전은 공동체의 형성력을 갖는다.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을 교양 클럽의 회원과 비회원으로 나눈다. 그 경계가 분명해야만이 회원의 프로필이 부각될 수 있고, 그래야만 회원들은 자신의 소속감과 이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비회원들에게는 회원이 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은 교양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사색이나 이론을 담은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일종의 실용서로 교양인 커뮤니티에 들어가고 싶거나 적어도 교양인들처럼 노는 법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 (기성) 교양인들 앞에서 몰상식한 사람으로 망신당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기본지식, 화법, 금기사항 들을 정리한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교양인 공동체의 기묘한 행태를 다루는 귀납적 사례수집을 위한 자료집으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그럼 이 책은 교양을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이 규칙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탐구해야 할 것은 “교양이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변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몇 가지 답변을 제시해보도록 한다.
교양은 자신의 문명화에 대한 아주 폭넓은 지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문화가 사람이라면, 그 이름은 교양이 될 것이다.
교양은 새로운 인문주의적 교육 개혁안의 이상이었으며, 과거에, 특히 독일의 시민계급이 그것을 대변했다.
물론 앵글로색슨족의 정치적 인문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이 교양 개념은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함으로써 나치즘에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그 결과, 특히 60년대에 학생운동권에 의해 배척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양은 우리 문화사의 기본적인 특징들, 예컨대 철학과 학문의 기본 구상,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의 대표작들에 대해서 통달하는 것이다.
교양은 유연하게 훈련된 정신의 상태이며, 모든 것을 한번 알았다가 다시 잊었을 때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저께 무엇을 먹었는지 잊어버리듯이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를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정신과 내 육체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리히텐베르크)
교양은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색하게 남의 눈에 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교양은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양성과는 반대로 보편적인 인격 형성을 핵심이념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서 독일 『브로크하우스 백과사전』의 정의를 보면, “교양이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인 인간이 세계, 특히 문화의 내용과 접하고 대결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됨의 완전한 실현, 즉 ‘인간성’에 도달하는 모든 정신적인 과정과 성과이다.” 그 뒤를 이어 ‘교양 장애’, ‘교양 격차’, ‘교양 마스터 플랜’, ‘교양 위기’, ‘교양 정책’ 그리고 ‘교양 휴가’라는 표제어 항목들이 설명되고 있다.
1973년에 발행된 라이프치히의 VEB 출판사 백과사전의 동의어 사전은 ‘교양’이라는 표제어 아래 “문화, 많은 독서량 그리고 매너”라는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
교양은 영어로는 ‘리버럴 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이다. “교양이 있다”는 말은 “교육을 잘 받은, 예절 바른, 문화적인”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어에서도 교양은 “다방면으로 교육받은 상태culture generale”를 뜻한다. 교양의 빈틈은 곧바로 ‘무지’ 또는 ‘지적인 공백’을 뜻하게 된다. 라틴어로 교양은 “감성과 정보를 갖춘 오성mentis animique informatio”이다. 그리스어로 교양은 역시 ‘교양paideia’, 러시아어로 교양은 ‘교양obrasowanije’이다.
따라서 교양은 복합적인 대상이다. 그것은 이념, 과정, 지식과 능력의 총합 그리고 정신적 상태다.
이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살펴보자. 이때 우선 확인되는 것은 교양이 이념, 과정, 상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게임이라는 점이다. 이 게임의 목적은 간단하다. 그것은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풍기기 위한 것이다. 그 반대가 목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게임에는 규칙이 있다. 젖먹던 시절부터 교양 게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나중에 그 규칙을 배우려면 매우 힘들다. 왜 그럴까? 그 규칙을 배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미 그 규칙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양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게임에 대해 이미 통달해 있어야 하며, 그 게임 방법은 그 클럽 안에서만 배울 수 있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p.566-568
요약하면 이렇다.
보편적 인격 형성을 위한 기본 학문, 즉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의 대표작들에 대해서 통달하여,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할 때 어색하게 남의 눈에 튀는 일 없이, 잘 교육받았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회적 게임을 노련하게 운영하되, 그렇다고 해서 먹고사는데 써먹는 [예를 들어 이공계나 재테크 지식 같은] 전문가적 지식을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전형적인 엘리트-유한계급의 자기정체성 확립을 위한 고급사교술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 견주자면 선비들끼리 모여서는 학문과 시에 대해서 논해야지, 농사일이나 노름에 대해서 말해서는 체통이 서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미묘한 숨은 규칙들이 많아 젖먹던 시절부터 교양 게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뒤늦게 그 규칙을 배우려면 엄청나게 힘들다는 진입장벽까지 있다. (My Fair Lady에서 여주인공이 겪는 특훈 과정을 생각해 보라. 그나마 기연을 만나 고수의 무공을 전수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더라면 여주인공은 그 장벽을 자력으로는 결코 넘지 못했을 것이다.)
교양에는 분명히 훌륭한 인격 형성을 향해 나아가는 지행합일이라는 목표이자 대의명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전체상을 크게 왜곡하게 된다. 명분은 명분이고 실제는 실제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을 잘 지적한 것이 다음 질문이라 하겠다.
누군가에게 '왜 이렇게 교양이 없니?'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질이 낮은 사람으로 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교양이라는 것이 정의상(?) 대졸자(고학력자)와 부르주아를 기준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
교양이 잡학적 지식이거나 약간 양보해 최소한의 지식이 바탕된 채 유기적이고 삶과 일치된 세계관을 갖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화용론적인 딜레마를 느끼게 한다.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과연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 아마 정치적으로 좌파이거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수록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동네 청소노동자 아저씨는? 학교의 경비노동자 아저씨는? 냉정한 사람이라면 '그들은 교양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겠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일 수록 그런 식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알기 떄문에 함부로 내 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사실 교양계층이 별로 할 것 같지 않은 행동이다.
일상의 사교적인 모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상대방에게 자신이 교양이 있다고 꾸며 보인다. 그리고 상대방은 그것이 꾸민 것이라고 가정한다. …… 사람들은 보편적인 품격을 항상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예컨대 저녁의 한 사교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아주 어색할 것이다.
“세브레히트 박사님, 말씀 좀 해보십시오. 당신은 강도짓을 한 적이 없습니까? 정말 없습니까? 강간도 안 해 보셨습니까?”
이처럼 교양인 클럽에서는 화제로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568
즉 누군가를 적시해 "교양이 없다"고 정면으로 밟는 특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교양인이 아니라고 폭로하는 셈이 된다. 그들은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대충 알 만 하다는 표정 정도를 짓고 넘어갈 테고, 심해지면 은근한 풍자의 소재가 되거나 시쳇말로 '은따'시킬 수도 있겠지만 정면으로 적시하고 나서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교양인은 당연히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대답을 "함부로 내 뱉을 수 없을 것"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치적으로 좌파이거나 마음이 따뜻한" 또는 "그런 식의 발언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알기 때문"같이 남을 배려함에서 나온 동기일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이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는 무엇은 교양에 속하고 무엇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음 주장은 거의 모든 지식은 교양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엄마친구 아들'이 아니고서는 다 수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요즘 대학생들은 교양이 부족한가? 무슨 교양?
슬프게도 문과바보인 나는 과학이나 기술 등에 대해서 무지하다. 고백하건데 컴퓨터도 잘 못 다루고, 음악이나 미술에도 별로 조예가 깊지 못하다. 반면 전형적인 공대생인 내 친구 K군은 역사나 철학, 문학 등에 대해서 무지하다. 한문도 더 잘 못 읽는다. 하지만 나보다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훨씬 박식하며, 피아노에 취미가 있어서 고전 음악에 있어서 나보다 조예가 깊다. 과연 나와 K군중 누가 더 교양이 부족하며 무지한 대학생일까?
한마디로 '교양있는 대학생' 은 환상이다. 사람들의 평가를 모아보면 현재의 '교양있는 대학생' 은 대략 이렇다. 한달의 5권 정도의 책, 그것도 전공도서나 자기계발서가 아닌 책들을 읽어줘야 하고, 영어나 한문은 기본적으로 술술 읽으며 역사와 철학 문학에 박식하고, 현대 과학에 대해서도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컴퓨터도 다룰 줄 안다. 거기에 예술에도 조예가 깊다. - 이건 완전 '엄마친구 아들' 수준이다. 장담컨데 이런 대학생은 이 세상이 없다.
이녁, 교양있는 대학생의 환상
앞서 교양은 "신앙공동체이므로로, 역시 권위 있는 정전(正典, Kanon)이 있다"고 하였다. 만약 대부분의 지식이 교양에 속할 수 있다면 정전과 정전이 아닌 것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교양적인 대화에서 수많은 약어(略語)들이 쓰이는 이유다. 이는 모든 패거리 집단이 언어를 개발해서 사용하는 인지 시그널이며, 그 코드를 모르는 외부인은 그 뜻을 알 수 없게 됨으로 내부와 외부 사람을 구분하는 목적에 이용된다. 교양언어에서는 이 목적을 위해 인용문(引用文)들이 쓰인다.
물론 과거의 모든 인용구들이 영원히 바다 속에 수장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말들은 전혀 손상을 받지 않고 남아 있다. 그리고 서구의 이웃 나라들은 당연히 자기들만의 정전을 보존하고 있다. 특히 영어권에서는 은폐된 인용을 좋아한다. 여기에 자료를 제공하는 사람은 대부분 셰익스피어다.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사람들은 고전작가의 작품들에서 발췌해서 책 제목을 정하기를 좋아한다. 헉슬리Huxley의 유명한 반(反)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Tempest』(“오, 기특하고 새로운 세상이여, 이와 같은 사람들을 너는 갖고 있구나”)에서 인용한 것이다. 워런Robert Penn Warren의 소설 『왕의 모든 신하All the King's Men』은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의 거울속 여행』(“모든 왕의 말들과 모든 왕의 사람들은 험프티 덤프티를 다시 한군데로 모을 수 없었다”)에서, 그리고 스페인의 시민전쟁 시기를 다룬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존 던John Donne의 헌시(獻詩) 제목(“그런 고로 이 종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려는 전령을 절대로 보내지 마라. 바로 너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에서 따온 것이다.
……
문학은 사회적 과정과 개인들의 구체적인 인생살이 사이의 복잡한 관련성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 무척 많아서 인용하기에 아주 좋다. 문학의 인물들, 예컨대 햄릿, 돈 후안, 파우스트, 샤일록, 로빈슨 크루소, 돈 키호테, 오이디푸스, 레이디 멕베스, 안나 카레리나, 로미오와 줄리엣,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프랑켄슈타인 등은 인간 삶의 전형적인 운명들의 문학적인 구체화이며, 보통은 꿰뚫어보기 힘든 인생살이에 하나의 선명한 얼굴과 주소를 배정해주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구체화된 등장인물들은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같이 속해 있는 사교 동아리의 멤버들이 된다. 따라서
……
반면에 이른바 제2차 문화의 영역은 중립적이다. 그 개념은 영국의 스노C.P. Snow가 40년 전에 촉발시킨 교육정책 관련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노는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였다. 영국에서 통합형 고등학교의 도입에 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두 문화’란 제목의 강연으로 유명해졌다. 두 문화 개념으로 그는 1차 문화로 고전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문학적·인문학적 문화와 2차 문화로 이공계의 문화를 이해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영국은 신사문화와 아마추어 문화의 전통 때문에 항상 문학적·인문학적 교양을 자연과학에 비해 우대하고 있으며 이로써 영국을 미국과 일본 따위의 기술 열광국에 뒤처지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그는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이학 및 공학 지식을 강조하는 교과과정과 수업 개념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연설은 양 교양영역 간의 관계에 대해 폭넓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두 문화론은 독일에서도 일반화되었다. 그럼에도 스노의 호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즉 자연과학적 지식은 초등학교에서 교육되고 있으며 자연의 이해에 기여하지만 문화의 이해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렘브란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비교양인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열역학 제2법칙(일정 부피의 고립계에서의 변화는 언제나 엔트로피가 증대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한다 - 옮긴이)내에서 무엇이 문제되며 전자기장과 중력 사이의 약하고 강한 상호 작용의 관계가 어떠한지, 그리고 쿼크(핵물리학에서 특정한 속성들을 나타내는 가설적 미립자 - 옮긴이)가 무엇인지 모르더라도(물론 이 단어는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교양 없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감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을지 몰라도 자연과학 지식은 숨길 필요는 없어도 교양에 속하지는 않는다.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p.577-578, 579, 685-686)
슈바니츠는 좋든 싫든 간에 세상 사람들은 이공계 지식을 교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여기 옮겨적지는 않았지만 스포츠, 텔리비전, 연예계 소식 같은 것도 교양이 아니거나 교양인들 사이에서 언급하면 좋지 않은 테마들로 분류한다. 즉 '교양=인문 교양'인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프리츠 폰 우데에 대해서는 모르더라도 반 고흐를 모르면 안된다는 식의 보다 미묘한 규칙들이 있다. 이는 어떤 장르가 인문 교양의 범주에 속한다고 해서 그에 관련된 지식들이 자동적으로 교양이 되는 것은 아님을 뜻한다.
이런 특징들은 교양이 순환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기성 교양인 공동체가 교양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현 시대의 교양이고, 그렇게 규정된 교양을 일정 수준 이상 몸에 익힌 사람만이 새로 교양인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교양인 공동체의 구성원이 바뀌면서 교양의 범주가 변하기도 하지만 그 변화는 묵시적이고 느리다.
2. Bildung 개념의 수입, 일본의 사례
그럼 이제 근대화 시기에 독일의 Kultur-Bildung을 수입 번역해 교양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던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은 유학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문화주의란 이름을 내걸고 1910년대 말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이 개념을 수입, 보급하는데 노력했는데, 이들의 사례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일본과 비슷한 경로로 서구의 근대 문명을 수입했던 한국에도 큰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소다 키이치로와 문화주의
에 걸쳐, ‘문화주의’라는 말이 하나의 표어처럼 내세워지는 상황이 생겨났다. 1919년(대정 8), 제1회 여명회 강연회에서, 소다 키이치로(左右田喜一郞)가 ‘문화주의의 논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고, 또 쿠와키 겐요쿠도 같은 해에 ‘문화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제창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 다음해에 걸쳐 ‘문화주의’를 둘러싸고 갖가지 논의가 이루어졌다.
‘문화주의’라는 말은 소다와 쿠와키 두 사람이 각각 독자적으로 고안한 말이었다. 그러나 ‘문화’라는 그 말은 분명 독일어 Kultur(문화)의 역어이며, 제3장에서 보았듯이, 독일 지식인의 가치 이념이었던 ‘문화’의 내실을 그대로 의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다 키이치로는 1904년(명치 37) 도쿄고상(東京高商)을 졸업하고 곧바로 독일에 유학하여, 신칸트 학파의 리케르트 등에게 배우고 1913년(대정 2)에 귀국하기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유럽에서 보냈다. 이 사이에 그가 당대 독일 지식인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던, ‘문화의 위기’에 대한 사상적·정치적 대응에 깊이 영향받았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 …… 당시 독일 아카데미의 공통된 특징은, 학문 분야의 여하를 불문하고, 관념론(이상주의)적 전통에 서서, 정신(Geist)이 만들어내는 ‘문화(Kultur)’와 그 문화를 창조하고 향수할 수 있는 내적 통일을 지닌 ‘인격’의 형성(교양, Bildung)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리적 산업 문명과 대중화에 대항해서 지키고 유지해야 할 가치였다. 이것은 그 비판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의 독일에서 10년을 보낸 소다에게 있어서 ‘문화 가치’는 단순히 학문상의 귀결이 아니라, 하나의 ‘인생관’이었다. 그는 『경제학 인식론의 몇 가지 문제』(대정 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인류의 역사 생활이 역사의 대상으로서 자연과학과 떨어져, 일개의 인식 목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미 말한 historischer Idealismus(역사적 관념주의)에게는 내재적이어야 할 그리고 선천적인 일개의 logisches Sollen(논리적 당위)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논리적 Sollen이 역사에 관해서는 그 역사적 생활의 중심사상인 Kultur(문화)에 의해 그 내용이 제약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에 있어서, 일개의 문화 가치(Kurtur Wert)이지 않으면 아니 됨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다는 이 ‘문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노력’을 ‘문화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에 있어서 문화의 옹호가 그랬듯이,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소다는 요코하마(橫浜)에서 가업인 소다 은행 행장을 지내는 동시에 ‘요코하마 사회 문제 연구소’와 ‘요코하마 사회관’을 주재하여, ‘사회사업’을 행했다. 그것은 “일개의 사회 조직으로서의 무산계급은 사회정책의 실행을 그 사회에 요구할 권리를 갖고, 그 사회는 이를 실행할 의무를 진다”고 하는 입장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자선주의에 의한 것이 아닌, ‘사회정책’의 실행을 제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플라톤, 괴테, 칸트, 뉴턴, 렘브란트, 베토벤, 바쇼(芭蕉),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를 포함하지 않는 제4계급의 사회민주주의에 의해, 결국 빵의 문제를 위해, 이들 일체의 문화가 그 발아래에 유린됨을 보는 것은 도저히 우리의 참을 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보다 높은 입장의 ‘문화’에 기초하는 ‘문화주의’에 의해서만, 단순한 보수주의, 단순한 진보주의 양자를 초월한 ‘인격 있는 사람으로서의 모든 능력을 자유롭게 발당시키는 것’이 가능한 참된 ‘문화 국가’가 가능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쿠와키 겐요쿠의 ‘문화주의’도 그 근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의 정치성을 지닌 것이었다.
이와 같이, ‘문화주의’는 당대 독일 지식인의 가치 이념을 이입한 것인 동시에, 명치 40년대 이후 전개된 ‘인격 본위의 실천주의’가 도달한 한 결론이며, 그것은 일본 지식인의 자율에 대한 이념이기도 했다. ‘교양’ 계층으로서의 문화인, 즉 지식인이 만드는 ‘문화’를 기초로 하는 문화 국가라고 하는 이미지는, 명치 국가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대의 이념(Idee)이었다.……
교양주의
그런데 앞에서 본 ‘문화주의’의 제창은 커다란 반향을 부른 반면에, 곧장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오야마 이쿠오(大山郁夫)와 하세가와 뇨제칸, 혹은 사카이 토시히코 등이 ‘민중’의 대두를 배경으로, ‘문화주의’의 고답성·관념론적 기반·선량(選良)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담당자, 즉 지식인에 의한 문화적 사회의 실현이라고 하는 이념은 성립과 동시에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의 정신적 가치와 그 창조와 향수를 담당하는 자의 자격으로 간주된 ‘교양’의 관념은 ‘문화주의’ 비판에 의해 상실되는 일 없이, 오히려 더한층 일반화되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모든 문화적 영위의 근원에 ‘철학’이 있으며, ‘철학’은 일체의 학의 기본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정착된다. 1920년대는 철학이 ‘교양’과 결부되어 ‘철학 연구’의 황금시대가 된 ‘교양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교양주의’는 이미 보았듯이 독일 이상주의에 뿌리박은 ‘문화주의’ ‘인격주의’와 불가분의 것이었다. 독일에 있어서 ‘교양(Bildung)’은 문화적 환경의 수단에 의해 영혼을 형성하는 것이며, 개성의 도야를 문화 가치의 체득을 통해 보편성에까지 드높이는 것으로 생각해, 그 개인성과 보편성의 내적 통일을 지닌 전체성으로의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 고전철학과 낭만주의의 시대에, 즉 헤르더(J. G. von Herder, 1744~1803), 야코비(F. H. Jacobi, 1743~1819), 피히테, 헤겔, 프리스(J. F. Fries, 1773~1843), 실러, 괴테, 훔볼트(K. W. von Humboldt, 1767~1835) 등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따라서 ‘교양’은 무엇보다도 문예와 철학에 있어서 추구되었다.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이념의 추구는, 제3장에서 본 ‘인격 본위의 실천주의’가 요구한 것에 응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생의 번민’에 해결을 부여하려는 노력 속에서 큰 사조가 되엇다. 그 사조를 대표하는 철학자는, 헤겔에게 깊이 영향받고, 또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을 나온 사람들인데, 특히 아베 지로, 그리고 와츠지 테츠로가 그 대표적 존재였다.
宮川 透, 荒川幾男, 『日本近代哲學史』, 1976
이수정 역, 『일본근대철학사
』, 생각의 나무, 2001, pp.383-385
교양이란 "관념론(이상주의)적 전통에 서서, 정신(Geist)이 만들어내는 ‘문화(Kultur)’와 그 문화를 창조하고 향수할 수 있는 내적 통일을 지닌 ‘인격’의 형성"이란 생각은 앞서 살펴본 "대상을 곱씹어 자기맥락화한 뒤 그것을 보편화시켜 자신의 세계관으로서 제시하고 그것에 삶을 일치시키는 과정"(샤피로)이란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의명분과 결부된 실제는 어떠하였는가?
교양이란 "‘문화’의 정신적 가치와 그 창조와 향수를 담당하는 자의 자격"이며, " ‘교양’ 계층으로서의 문화인, 즉 지식인이 만드는 ‘문화’를 기초"로 "문화 국가"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근대 국가 건설에 있어서 지식인의 역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험삼아 "무산계급은 사회정책의 실행을 그 사회에 요구할 권리를 갖고, 그 사회는 이를 실행할 의무를 진다"는 개념을 앞서 다루었던 "이마트 파업 노동자들은 과연 교양이 있을까? 없을까?"란 질문에 적용해 보자.
답은 자명하다. 이마트 파업 노동자는 교양지식인계급보다는 무산계급에 가깝고, 따라서 이들에겐 교양이 없지만 교양계층에게 사회정책을 만들어 내놓으라는 요구를 할 권리는 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은 교양인의 의무(Noblesse oblige)이다란 것이 된다.
당대에도 이러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이 교양주의는 결국 높고 잘나신 분들이 무지렁이들에게 베푼다는 선량(選良)주의에 불과하다고 격렬히 비판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3. (일본과 한국 같은) 변방문화가 서구근대문화를 수입하면서 겪게 되는 일
이와 같이 일본은 근대화 과정의 일부로 서구, 특히 독일로부터 교양 개념을 수입하였다.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수입한 서구 학문이나 문화는 달라진 토양 위에서 원산지에서는 없던 문제를 겪게 된다. (물론 한국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그것을 파편화 현상이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을 다음과 같은 두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종종 들어왔던 이야기 중에 젊을 때 유학을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교수까지 되어 외국에서 왕성한 연구를 하다가 귀국해서는 후진양성에 힘쓴다는 패턴이 있다. 이는 국내가 물리적으로나 경제적 연구 환경을 받쳐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귀국함으로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주류 학계의 흐름에서 단절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문제는 지금도 상존하는 것이지만 교통과 통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훨씬 더 큰 문제였음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단 한번 유학생을 보내어 서구 학문을 몽땅 수입해 올 수 없는 이상 유학생을 계속 보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골치아픈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1920년대의 문화주의가 그 후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문제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그 문제를 생각해보기 위하여, 조금 얘기를 바꿔서 일본의 사회나 문화의 유형이라는 것을 아주 도식화해서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사회와 문화의 유형을 둘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는 묘한 말입니다만 부챗살 유형(ササラ型)이라 하고, 그것에 대응되는 또 하나의 형태를 문어항아리 유형(タコツボ型)이라 잠정적으로 불러두겠습니다. 부챗살이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대나무의 끝을 가늘게 여러 개로 쪼갠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말하면 이런 식으로 밑부분이 공통되고. 거기서부터 손가락이 뻗어나가고 있는, 그런 유형의 문화가 부챗살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문어항아리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각각 고립된 문어항아리가 늘어서 있는 유형입니다. 근대 일본의 학문이라든가 문화라든가, 아니면 다양한 사회의 조직형태라는 것이 부챗살 유형이 아니라 문어항아리 유형이라는 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이미지의 거대한 역할이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학문으로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제가 여기서 새삼 자세하게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본에 유럽의 근대과학이 한꺼번에 유입된 19세기 후반이라는 것은, 때마침 유럽에서는 사회조직에서도, 혹은 문화형태에서도 전문화 현상, 즉 분업과 스페셜리제이션(specialization)이 급속도로 진행된 시대입니다. 가령 사회과학을 예로 든다면, 19세기 전반의 학문 형태와 후반의 학문 형태는 그 모습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19세기 전반을 보게 되면, 예를 들어 헤겔이라든가, 슈타인이라든가, 마르크스라든가, 혹은 벤담, 콩트와 같은 학자들을 들면 알 수 있듯이 법률학이라든가, 경제학이라든가, 사회학과 같은 개별 과학의 분류에서 본다면 어디에 넣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런 아주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체계가 잇달아 배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세기의 후반에 접어들면 급격히 바뀌게 됩니다. the social science가 붕괴되고 갖가지 social sciences로 바뀌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겨우 스펜서의 사회학이 종합적이라는 형용사를 스스로 붙이고 있을 정도인데, 그것은 스펜서의 사회학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밀이나 스펜서 같은 사람은 그 분수령에 서 있는 학자입니다. 그런 변화를 매우 상징적으로 학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19세기 말 형식사회학(形式社會學)의 성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별 과학이 매우 발달하여 법률, 정치, 경제, 심리와 같은 학문 각 분야의 전문화, 독립화가 진행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회학’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의 사회의 학문으로서 대단히 종합적인 사회의 운동법칙이나 발전법칙과 같은 것의 구명(究明)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만, 개별 과학이 앞으로 나아가게 되면 사회학의 독자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무래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다른 법률학이나 경제학과 같은 개별 과학은 사회의 내용을 각각 문제삼는데 반해서, 사회학은 인간관계를 형식에서 파악한다는 데 특질이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 형식사회학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가 경쟁이라는 관계로 맺어질 때와 투쟁이라는 관계로 맺어질 때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그런 형식을 문제삼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경쟁의 실체가 무엇인가, 예를 들어 경제적인 시장의 자유경쟁인가, 아니면 사회적 승진을 위한 경쟁인가 하는 그런 것은 모두 사상(捨象)되고 순수하게 경쟁이라는 인간관계의 형식의 특색을 문제삼으며, 그런 데에 사회학의 임무와 독자성이 있다는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입장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그런 생각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 자체는 학문이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급격히 개별화되고, 또 전문화했다는 것의 반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흔히 저는 농담으로, 일본의 메이지(明治) 이후의 내무성이라는 것의 운명을 근대 사회학의 운명에 비유하곤 합니다. 즉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내무장관이 되었을 무렵의 내무(內務)라는 의미는 국내의 거의 모든 분야의 일을 포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후 일본의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국가기능이 복잡해짐에 따라, 예를 들어 철도라든가, 체신이라든가, 상공이라든가, 농림이라든가 하는 그런 각 부분이 전문화해서 각각 독립된 성(省)이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내무성이라고 할 때의 ‘내(內)’라는 것의 내용이 점점 축소되고 빈약해집니다. 마지막까지 내무의 관할에 속하고 이른바 그 본연의 내무업무였던 것은 경찰입니다. 내무의 주된 역할로서 끝까지 남은 것이 경찰 -- 즉 사회의 교통정리였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비유이긴 합니다만, 19세기 사회학의 운명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근대 일본이 학문을 받아들인 방식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일본이 유럽의 학문을 받아들였을 때는 마침 바로 학문의 전문화, 개별화가 아주 분명한 형태를 취하게 된 그런 단계였습니다. 따라서 대학제도 등에서는 그처럼 학문이 세분되고 전문화한 형태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그런 개별 과학의 뿌리는 모두 공통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중세-르네상스라는 오랜 공통된 문화적 전통이 뿌리에 있고 그 말단이 많이 분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부챗살 유형입니다. 그것이 공통된 뿌리를 잘라버리고 부챗살 끝쪽의 개별화된 형태가 일본에 이식되고 그것이 대학 등의 학부나 학과의 분류가 되었습니다.
아주 유형화해서 말씀드린다면, 그런 기술화되고 전문화된 학과라는 것이 처음부터 아카데믹한 학문의 존재형태로 간주되었던 셈입니다. 그것은 때마침 개국의 시기가 19세기 후반이었다는 것 외에,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재주, 혹은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기술 같은 이분법을 이데올로기 적으로 받아들인 메이지의 국가체계에는 그런 학문형태 쪽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만, 그것은 어쨌든 그런 식으로 되어, 처음부터 몹시 개별화되고 전문화된 형태로 근대의 학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학자라는 존재는 그런 의미의 전문가이며 개별화된 학문의 연구자라는 것이 적어도 학계에서는 당연한 전제가 되었습니다. 즉 유럽 학문의 밑바닥에 있으면서 학문을 지탱해주고 있는 사상 혹은 문화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분화하고 기술화된 학문의 틀 속에 처음부터 학자가 쏙 틀어박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대학교수도 포함하여 학문 연구자가 서로 공통된 컬쳐나 인텔리전스를 가지고 맺어져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학문을 파내려가 보면 공통된 뿌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각 학과가 모두 문어항아리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아카데믹한 학문의 본연의 자세라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무를 띠고 있다는 연대의식이라는 것이 매우 결핍되어 있습니다. 아니, 대학이나 학계의 철학과 사회과학이라는 것 사이에도 내면적인 교류가 거의 없습니다. 철학이라는 것은 본래 제 과학을 관련시켜주고 기초지어주는 것을 임무로 합니다. 그런데 근대일본에서는 철학 자신이 - 적어도 아카데미의 세계에서는 전문화되고 문어항아리처럼 되었습니다. 철학 자신이 전문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입니다만,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철학자는 사회과학에 무지하고, 사회과학자는 철학자가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의 일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헤겔철학이라는 것은 법률학에도 역사학에도 사회학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화과학의 그룬트(Grund)가 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 가장 독창적인 철학이라 일컬어지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太郞, 1870-1945)의 철학이 사회과학의 각 분야를 기초지어주는 원리로서 어느 정도 유효성을 갖겠습니까. 각 사회과학 상호간, 예를 들어 법률학, 정치학, 경제학과 같은 본래 밀접한 관련을 가진 학문분야 사이에서조차 커뮤니케이션이 그다지 없는 상태입니다. 하물며 문학 부문과 사회과학 부문 사이에서는 그 소원함이 훨씬 더 심각합니다. 문학자와 사회과학자가 공통된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현재에도 매우 어려운 일이며, 사회과학자라든가 문학자라든가 하는 간판을 내리고 한 잔 같이 마신다거나 하지 않으면 좀처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각각 사회과학자로서, 혹은 문학자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서로 이야기하려고 하면, 서로에게 공통된 언어가 너무나도 부족한 것입니다.
丸山眞男,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1961
(김석근 역, 『일본의 사상』, 한길사, 1998, pp.209-214)
부채살과 문어항아리 유형을 그림으로 나타내 보면 대충 이런 식이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다. 학문을 가능한 빨리 수입해 가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수면 밑에 존재하는 거대한 뿌리까지 통째로 옮기는 것 보다는 잘개 쪼개진 개별 학문을 하나씩 배워가는 것이 훨씬 편리할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두 패턴을 종합해 보자.
같은 시대의 분과학문들이 잘개 쪼개져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현상과, 지난 시대에 수입한 학문이 낳은 씨앗이 이번 시대에 꽃을 피우는 대신 매 시대마다 새 유학생들을 보내어 학문의 새 조류를 직수입해오는 현상을 합치면, 문명의 변방지역의 학문은 세로축(시대별)으로도 단절되고, 가로축(학제간)으로도 토막이 나 연결이 안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 결과 각각의 분과학문의 시대별 사조가 바둑판 모양으로 촘촘히 쪼개진 단절의 벽 안에 문어항아리를 짓고 틀어박혀 교류 없이 자기 할 일만 하는 현상이 정착된 것이다.
이것이 교양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양의 내용이 되는 지식들은 무엇이 교양의 정전(正典)에 속하고 무엇이 아닌지에 대해서 미묘한 기준이 적용되기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통의 지식(common knowledge)에 기반을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문화/학문의 직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변방에서는 파편화된 각각의 문어항아리 사이에 공통의 지식이나 대화의 소재가 별로 없다. 그러니 공통의 지식에 의존하는 응집력있는 교양 개념의 정립이 매우 힘들어지고, 당연히 그 개념을 공유하는 교양인 공동체도 존립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앞선 슈바니츠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교양은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양성과는 반대로 보편적인 인격 형성을 핵심이념으로 하는 (19세기의) 새로운 인문주의적 교육 개혁안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교양Bildung’ 개념은 원래 1968년 이전까지는 대학 전공으로서의 독어독문학과 중·고등학교의 실제 수업간의 괴리를 이른바 ‘정전(正典, Kanon: 독일 문학에서는 괴테, 실러의 고전적 작품들이 여기에 속했음 - 옮긴이)’들로 메운다는
Schwanitz, Dietrich., 같은 책, p.41
이런 교육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인가? 우리의 대학은 기본적으로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충분히 세분화된 전문가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교육기관이지 않은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이상을 표방하는 기관이 있기는 한가?
우리의 대학은 마루야마가 묘사하는 일본의 대학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도쿄에도 교토에도 그 외의 대도시에는 종합대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과계, 이과계의 다양한 학부를 가지고 있는 대학을 종합대학이라 부릅니다만 종합이라는 말은 실로 아이러니이며, 그 실질은 전혀 종합이 아닙니다. 법과라든가 경제라든가 다양한 학부가 있어서 그것이 지리적으로 하나의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각 학과의 교실이나 연구실이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것을 종합대학이라 부르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종합적인 교양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각 학부의 공동연구가 항상 조직화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丸山眞男, 같은 책, p.219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대학에서 교양 문제를 거론할 때 반드시 따져봐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대학에 교양인의 양성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 필요하며 또한 우리가 현재 보유한 기반문화 위에서 달성가능한 것인가라는 점이다. 19세기에 정립된 교양인이란 개념은 오늘날의 사회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서브컬처에 지나지 않는 교양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로마 문명, 기독교 문화, 셰익스피어나 괴테 등의 고전문예 등을 주축으로 한 서구의 교양 개념은 점차 쇠퇴하고 있지만 응집력있는 일군의 공유된 지식과 그 지식의 보유를 스테이터스 심벌로 삼는 사회적 엘리트 집단의 결합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찾는다면 성리학 중심의 전통 학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문으로 된 고전문예를 익숙히 읽고쓸 수 있는 능력에서 출발해 철학, 윤리, 문학을 통합한 학문체계를 거쳐 문학적 자질을 시험쳐서 뽑는 관료제도와 사농공상의 신분제까지가 하나의 패키지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후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성리학 체제를 버리고 서구학문체제를 수입했는데, 마침 이 시기가 학문체제가 다수의 분과학문으로 분화된 이후여서 새로 수입한 서양학문체제를 갖고는 과거 성리학의 지위를 대체할만한 응집력있는 중심을 확보할 수가 없었고 성리학으로 이론 무장한 사회적 엘리트 집단도 해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학문의 분화와 고도화가 더욱 더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현재 조만간 학문의 대통합이 이루어질 전망은 매우 낮다.
우리 사회에도 많지는 않더라도 서양에서 사용되는 교양인의 기준에 부합할 만한 문예 지식과 에티켓을 겸비한 인물들이 있을 게다. 그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이 한 가지 문제기는 하나 더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녁님, 장담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당장 제 주위만 해도 이녁님이 생각하시는 '엄마친구아들' 수준의 '교양있는 대학생'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는 있습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속한 공간에서는 교양이 후배에게 되물림되면서 '교양있는 대학생'들이 재생산되고 있구요. 당장 제가 아는 사람들만 따져봐도 이녁님이 재학 중이신 학교에도 이녁님이 말씀하신 '교양있는 대학생'이 있군요. 이녁님이 그런 대학생들을 못 보셨다고 해서 그런 학생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지에 호소하는 오류'라는 가장 초보적인 오류를 범하고 계시군요.
진정한 문제는 이들이 가진 지식은 서구의 기준으로든 우리의 기준으로든 하이컬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들의 지식이 하이컬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브컬쳐처럼 대우를 받는다는 데 있다.
앞서 언급된 적이 있는 가보 문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적재 적소에 염상섭이나 황석영의 소설의 경구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사회적 엘리트 계층의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공동체에 진입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건담이나 에반게리온의 명대사를 멋지게 패러디하는 아니메 오타쿠나 밀리터리 매니아, 철도 프리크 등과 동급의 서브컬쳐그룹에 들어가기 위한 재능일 뿐인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교양이란 자연도태의 과정을 거쳐 착실히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고 언급했었는데, 그것은 학문의 발전 경향으로 보나, 현 한국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문예적 동질성으로 무장할 가능성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전망이 전혀 밝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열심당원들이 교양의 복원을 위해 기를 쓴 결과 하이컬쳐의 지식과 매너로 무장한 怪서브컬쳐 집단이 하나 생길 가능성 정도는 배제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