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십팔 년 된 집, 처음엔 그토록 경탄이던 집이
기둥과 대들보, 천장과 보일러가 자주 고장 난다
새뜻하던 타일과 서까래가 금이 가도 내 힘으론 안 된다
이렇게 쓰려고 한 것이 아닌데 하고 다시 고치지 않는다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한 일이 나의 동행이므로
-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사과밭을 지나며 [나희덕]
가을엔 나비조차 낫게 나는가
내려놓을 것이 있다는 듯
부려야 할 몸이 무겁다는 듯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달았던 사과나무,
열매를 다 내려놓고 난 뒤에도
그 휘어진 빈 가지는 펴지지 않는다
아직 짊어질 게 남았다는 듯
그에겐 허공이, 열매의 자리마다 비어 있는
허공이 열매보다 더 무거울 것이다
빈 가지에 나비가 잠시 앉았다 날아간다
무슨 축복처럼 눈앞이 환해진다
아, 네가, 네가, 어디선가 나를 내려놓았구나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사과나무 그늘이 환해질 수 있을까
꿰맨 자국 하나 없는 나비의 날개보다
오늘은 내 百結의 옷이 한결 가볍겠구나
아주 뒤늦게 툭, 떨어지는 사과 한알
사과 한알을 내려놓는 데
오년이 걸렸다
- 어두워진다는 것, 창비, 2001
오후의 사과나무 [김길녀 1964~2021]
ㅡ여름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여자들
골짜기에 둥지 튼 여자네
사과밭 안 누옥에 모였네
그들에겐 고향, 몇 몇에겐 타향이었다가 고향이 되어버린
두꺼운 도시와의 인연
조금은 울다가 더 크게 웃고 있는
마흔 밖의 여자들
숨겨 놓은 열쇠와 열어둔 다락방
빈집 고요를 허락한 여자네 집
글자락으로 생을 파먹는 여자들
시간을 만지는 손길이 따뜻하다
누군가는 아주 길게
누군가는 조금 짧게
어느 계절
잡지라는 공간에 세 들어
문장이란 이름 빌려
길거나 짧았던 하루
다정한 안부로 풀어내리라
사과나무 잎사귀들 천천히
그려가는 달콤한 향기의 지도
여름비 내리는 둥근 지붕 위에
작은 깃발을 꽂고 왔다
-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월호
악수 [김희준]
비의 근육을 잡느라 하루를 다 썼네 손아귀를 쥘수록 속
도가 빨라졌네 빗방울에 공백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숨
일 것이네 속도의 폭력 앞에 나는 무자비했네 얻어맞은 이
마가 간지러웠네 간헐적인 평화였다는 셈이지 중력을 이기
는 방식은 다양하네 그럴 땐 물구나무를 서거나 뉴턴을 유
턴으로 잘못 읽어보기로 하네 사과나무가 내 위에서 머리를
털고 과육이 몸을 으깨는 상상을 하네 하필 딱따구리가 땅
을 두드리네 딸을 잃은 날 추령터널 입구에 수천의 새가 날
아와 내핵을 팠던 때가 있었네 새의 부리는 붉었네 바닥에
입을 넣어 울음을 보냈네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시간이네 찰나의 반대는 이단(異端)일세 아삭, 절대
적인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딸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들어올리는 내가 있네 빗줄기를 잡
느라 손은 손톱자국으로 환했네 물집이 터졌으나 손금에는
물도 집도 없었네 단지 여름이 실존했네
-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
우기 [최문자]
오늘 비는 아무에게나 슬픔을 나눠 준다 우기에는 네 말이 옳았다 오래오래 젖다가 수채화 같은 슬픔이 온다는 말,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사과나무 가지 끝 풋사과 옆이 무너졌다 나도 저렇게 아픈 데를 씻다가 무너졌다 슬픔이 없다면 슬픈 게 여럿이던 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줄곧 믿어왔던 이 많은 책들과 수없이 눌렀던 어두운 버튼들, 맘에 내내 서 있던 사람 서랍 속의 흉터들 모두 혼자일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저렇게 흠뻑 슬플 것이다 죽을 것처럼 들고 온 것들, 저렇게 말할 수 없어서 짧게 말할 수 없어서 슬픔은 머리카락이 길고 형용사처럼 영롱하다 우기에는 슬픈 게 슬픈 걸 찾아낸다 점 하나 없는 슬픔 언제 그칠까? 슬픔 곁을 개처럼 지키고 있다
-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민음사, 2019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 [다니카와 슌타로]
하느님이 땅과 물과 햇빛을 주고
땅과 물과 햇빛이 사과나무를 주고
사과나무가 빨갛게 익은 열매를 주고
그 사과를 당신이 나에게 주었다
부드러운 두 손으로 감싸서
마치 세계의 기원 같은
아침 햇살과 함께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당신은 나에게 오늘을 주고
잃어지지 않을 시간을 주고
사과를 가꾼 사람들의 웃음과 노래를 주었다
어쩌면 슬픔까지도
우리 위에 펼쳐진 푸른 하늘에 숨은
그 정처 없는 것을 거슬러서
당신은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가장 맛있는 부분을
나에게 주었다
- 사과에 대한 고집, 비체, 2015. (요시기와 나기 역)
비가 와 [최승자]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사과나무에서 사과 한 알 떨어질 때
바람은 왜 살짝 멈추는 걸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구룡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없는 코스모스들이 왜 늘 마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삼천포에서 모슬포까지는 아주 먼 시간
(그 무슨 메아리들이 왜
아주 아주 멀리서 들릴는 걸까?)
비가 와-
삼천포에 비가 와-
카페 창가를 다 적시고 있네
넋없이 많은 인생들을 다 적시고 있네
- 물 위에 씌어진, 천년의시작, 2011
사과의 기분 [정익진]
아침에 일어나서 유리컵에 든 차가운 우유 한 모금 마시고
냉장고에서 꺼낸 사과 한 입을 베어 먹습니다.
혹, 이 맛을 아시는지요?
행복처럼 느닷없이 찾아온 이런 사과의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애인을 만나 빵집에서 점심을 먹고
과일 도매 상가로 사과 한 상자를 사러 갈 것입니다.
사과 향기에 어울리게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데
비가 오지 않아도 뭐, 상관없어요.
사각, 사각, 사각, 이런 사과의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사과나무 농장의 여인에게서
사과 따는 방법을 배우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그들의 애틋한 애플 스토리.
하지만, 인생은 사과 맛처럼 혹은 사과의 기분처럼 항상
달콤할 수는 없다는 것, 아니, 아니, 당연히
생의 태반을 썩은 사과를 씹어 삼키는,
삼켜야만 하는...... 그런 ......썩을 맛이겠죠.
사과나무에서 바로 따낸 사과를
옷소매에 슥슥 문질러 한 입 베어 먹죠
입 안에서 폭발하는 사과, 사과의 즙이 입가로 흘러내리지요.
언제 날아왔는지 벌들, 나비들이
내 얼굴 주위를 맴돌고 있었죠. 어차피 오늘은
이런 사과의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근처 바닷가로 가서
사과를 씹으며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봐야겠죠.
- 스캣, 문예중앙, 2014
과수원에서 [마종기]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 이슬의 눈, 문학과지성사, 1997
뺄셈의 춤 [이성미]
뺄셈을 계속 하니 나만 남았어요.
혼자 먹는 식탁.
연필심처럼 뾰족해지는 저녁.
옛날 고독한 왕이 식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었죠.
구두를 따가닥거리면
많은 발이 있는 것 같았죠.
식탁이 부서졌지만 계속해서 춤을. 단일한 밤이여,
단일한 공기여.
밤에는 검푸른 고등어와 까치만 돌아다녀요.
사과나무에 빨간 전구를 가득 켰어요.
버찌를 먹고 까매진 이빨은 빼버릴래요.
뺄셈. 마이너스 부호만 남을 때까지.
뺄셈. 리듬이 태어날 때까지.
달은 다시 나타나 나를 내려다 보았죠.
하얀 밤도 풋사과도 없이
삼만 개의 밤을 건너가려고?
뺄셈을 그만두면 잇몸이 근지러웠죠.
고집스러운 뺄셈. 나를 뺄 때까지.
고독해진 나는 자전거에 올라 바퀴를 돌렸어요. 미
세한 오르막과 미세한 내리막이 다리로 전해질 때,
눈을 감고 달려.
사람들의 말소리가 햇빛 속에서
부서져 귀를 스쳐갔어요.
까만 개미들......
까만 이빨들......
뺄셈의 춤을 느끼는 까만 밤에는 책을 읽었어요.
까만 글자들이 방 안을 떠다니며 내게 물었죠.
당신 어때요?
나는 아직 흑백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밤을 끄덕끄덕 건너가보려고요.
- 칠일이 지나고 오늘, 문학과지성사, 2013
사과밭엔 가지 않겠어 [정진규]
슬픈 사랑의 代行이여, 서로 간절해 있으면서도 몸을 내밀 수 없는
비극을 사과꽃 필 때 사과나무 밭으로 가면 볼 수가 있지 그게 사과의
몸이야 벌들이 떼지어 날아다니면서 사랑의 가루받이를 하는 걸 볼
수가 있지 벌들이 사과의 사랑을 떼지어 약탈하고 있지 이제 사과나
무 밭에는 가지 않겠어 잔인해, 비극의 몸은 그래서 맛이 나겠지만 그
래서 싱겁지 않겠지만 비극의 풍요를 보는 게 무서워, 당신도 그동안
약탈당한 사랑의 결실을 사랑해 오셨겠지 껍질도 벗기지 않고 우적
거리셨겠지 단순한 살이 아니니까 우여곡절의 살이니까 맛이 있었겠
지 처음부터 충만이었던 사랑은 싱겁지 그런 결실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싱겁지 그래도 사과꽃 필 때 사과밭에는 가지 않겠어 잔인해, 겁
탈당한 결실이 맛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무서워, 그런 사과들을 上等
品으로 비극의 아름다움을 上等品으로 팡팡 도장 찍는 세상이 무서워,
비극의 몸에 한번 맛들면 헤어나지 못하지 싱거운 게 몸에 좋다니까!
금단이라니까! 나는 알아버렸어
- 모던포엠, 2019년 7월호
시인의 사랑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과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 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나를 찾아서 [조동례]
기르던 사과나무에 꽃이 지거든
미련 없이 여행을 떠나라
꽃을 피웠던 힘으로 사과는 열릴 것이니
쓰다 만 편지는 가슴에 쓰고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
누구와 약속도 하지 말아라
산 그림자가 마을을 보듬는 저물녘
가슴에서 별이 지거든
용서할 일은 흐르는 강물에 풀어
누구나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귀띔해 주어라
산봉오리 징검다리 삼아 건너던 걸음이
느티나무 아래 민박 들거든
낯선 바람에게 길을 물어라
가장 투명한 말로 답할 것이니
기다림이라는 시간에 속지 말고
사과 꽃이 다시 피기 전에
미련 없이 여행을 떠나라
- 어처구니 사랑, 애지, 2009
풋사과를 먹다가 [박선희]
풋사과를 먹다가 혀를 깨물었다
순간, 혀끝에 사과꽃이 얼얼하게
만개하는 것을 느꼈다
풋사과 한 알에
함부로 마음을 빼앗겼던 罰이다
혀가 있는 줄도 몰랐던
허튼 시간까지 꽉 깨물렸다
시간의 살점도 얼얼하다
많이 아파야 돌아본다는 거
그게 통증이라는 거
마른침을 삼키며 깨닫는다
꿀꺽 하는 순간
내 몸 속 먼길 가버린 풋사과처럼
아픔도 꿀꺽 삼키면
먼길 가 버릴까
사과나무 한 그루에 풋내 나는
내 가여운 虛가 깨물렸다
- 여섯째 손가락, 현대시, 2004
첫댓글 올해 과일값이 많이 높았지요.
그와중에 사과가 제일.
금사과 나눠 먹으며 다정한 안부 풀어나는 날 곧 있기를 바랍니다^
사과나무를 더 심으면 될 것을,
사과나무를 줄이고 있으니 사과 먹을 일이 없을것 같군요.
점점 열대화가 되어가니 북한과 통일이 되어야 사과를 실컷 먹게 되지 않을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