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조(洪萬朝, 1645~1725)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당(晩退堂),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작자 미상의 야담집《좌계부담(左溪裒談)》에
“홍만조가 팔도 감사를 두루 역임 또는 재임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성호 이익이 쓴 「판돈녕부사 정익 홍공 만조 묘갈명 병서」에 따르면
「관찰사로는 강화(江華), 호서(湖西)와 호남(湖南), 관서(關西)와
관동(關東) 및 관북(關北), 영남(嶺南)과 경기를 맡았는데,
호서의 경우는 재차 안찰(按察)하였다.」 고 8도관찰사 역임을 기록하고 있다.
만퇴당 홍만조가 죽은 십여년 후에도
임금의 전교가 여러차례 내려서 은총이 깊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아들 화은 홍중인이 짓고 오천 홍중징이 써서 세운
「만퇴홍공 양조은포비(晩退洪公 兩朝恩褒碑) 」의 비문에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홍만조를 아꼈다는 사실과
여덟 차례 감사를 지낼 정도로 명성과 업적을 쌓고
더구나 매우 청빈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의 홍만조의 졸기에 “8도(道) 감사를 역임(歷任)하면서”라고 기록하였다.
홍만조가 팔도관찰사를 모두 지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기초로 검증해본다.
1690년(숙종 16) 6월 충청도관찰사, 1691년(숙종 17) 12월 전라도관찰사,
1693년(숙종 19) 6월 충청도관찰사, 1698년(숙종 24) 12월 평안도관찰사
1701년(숙종 27) 4월 전라도관찰사, 1703년(숙종 29) 7월 강원도관찰사,
1704년(숙종 30) 11월 함경도관찰사, 1708년(숙종 34)) 2월 경상도관찰사
1713년(숙종 39) 1월 경기도관찰사, 1714년(숙종 40) 9월 한성판윤,
1717년(숙종 43) 7월 한성판윤, 1693년(숙종 19) 12월 강화유수
이상과 같이 홍만조는 황해도관찰사를 제외한 7도 관찰사 9회와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한성판윤을 2회 역임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8도관찰사를 역임한 인물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8도관찰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으로
이택, 반석평, 함부림, 정응두, 심수경, 남선, 홍만조등 7명이 나타난다.
이는 부풀려지거나 과장된 기록으로 보인다.
따라서 7도관찰사를 역임한 인물은 회곡 남선과 만퇴당 홍만조 뿐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지리적·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황해도관찰사·
개성유수·강화유수는 관찰사로 동등하게 제수하는 사례가 많았기에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지 않고 7도관찰사와 황해도관찰사 대신
개성유수와 강화유수중 하나를 역임하면 팔도관찰사를 역임했다고 인정한 경우가 있었다.
이를 적용하여 판단해도 팔도관찰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에 근접하는 인물은 7도관찰사 9회와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한성판윤을 2회 역임한 만퇴당 홍만조 뿐이다.
만퇴당 홍만조(洪萬朝, 1645~1725)는 8도관찰사를 지냈는가?
최종적인 답은 만퇴당 홍만조(洪萬朝, 1645~1725)는
8도관찰사를 지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단, '홍만조(洪萬朝)'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후기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홍탁(洪𩆸)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주천(洪柱天)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78년(숙종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거쳐 지평·정언을 지냈다.
그 뒤 1688년 부수찬, 이듬해 부응교를 거쳐 1690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돌아와 승지·전라도관찰사·도승지가 되었다.
1693년 강화유수가 되고, 169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전라도·강원도·함경도·경상도 및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대사간·형조참판·한성부판윤·좌참찬·형조판서를 거쳐,
1718년 우참찬을 지낸 뒤 이듬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판의금부사·좌참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충청남도 아산에서 활동하였던 문신.
홍만조(洪萬朝, 1645~1725)는
충청도관찰사를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지낸 문신으로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있는 자은영당(自隱影堂)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홍만조가 1719년(숙종 45)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던 당시의 모습을
그린 『기사계첩(耆社契帖)』은 국보 제3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홍만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이다.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천안군수를 지낸 홍탁(洪𩆸)이고
아버지는 홍주천(洪柱天)이다.
어머니는 증(贈) 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진(權瑱)의 딸이다.
아들로 홍중휴(洪重休), 홍중인(洪重寅), 홍중징(洪重徵)이 있다.
1669년(현종 10)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고,
1678년(숙종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검열(檢閱)을 거쳐 지평(持平)·정언(正言)을 지냈다.
그 뒤 1688년(숙종 14) 부수찬(副修撰), 이듬해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1690년(숙종 16)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에 돌아와 승지, 전라도관찰사, 도승지가 되었다.
1693년(숙종 19) 강화유수가 되었고, 1696년(숙종 22)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전라도·강원도·함경도·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대사간,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좌참찬, 형조판서를 거쳐
1718년(숙종 44) 우참찬을 지낸 뒤 171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좌참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문집으로 『만퇴당집(晩退堂集)』이 있다.
홍만조의 묘소는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 풍산홍씨(豊山洪氏) 묘역에 있다.
홍만조 묘비는 1727년(영조 3)에 세워졌으며,
묘 전면 양쪽에 묘비와 1742년(영조 18)에 건립된 양조은포비(兩朝恩褒碑)가 각각 세워져 있다.
묘비는 이수(螭首)[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를 올린 형태로,
전면에는 ‘조선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 세제좌빈객 홍공만조지묘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 부우
(朝鮮崇綠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世弟左賓客洪公萬朝之墓贈貞敬夫人安東權氏附右)’라 쓰여 있다.
묘소 앞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장방형 대좌(臺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옥개형(屋蓋形) 이수를 올린 형태이다.
정·측면 1칸 규모의 비각 내부에 보존되어 있다.
비문은 권이진(權以鎭)이 찬(撰)하고, 홍양한(洪良漢)이 서(書)하였으며, 전서(篆書)를 홍명한(洪名漢)이 썼다.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증 영의정 시 정익 만퇴홍공 신도비명
(崇綠大夫判敦寧府事贈領議政諡貞翼晩退洪公神道碑銘)’이라 쓰여 있다.
아산시 배방읍 세교리에 있는 자은영당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사실, 정치적 격번이 많은 숙종 대에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고
중앙에 있으면서 흠을 잡힌 일 없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니
참 복 많은 신료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홍만조의 업적을 기린 신도비가 서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터라 비문 상당수는 잘 보이지 않는데
비석의 글씨는 위에 상술한대로 집안의 증손들이 쓴 것이라고 한다.
바로 옆에 자리한 몇개의 비석을 스치고
뒤쪽 언덕을 돌아서 가면 홍만조의 묘역에 이른다.
본래는 아무련 등급이 없었지만
최근 아산시에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상태이다.
무덤의 양식은 일반적인 사대부의 묘와 비슷하나
봉분을 받치는 호석(護石)을 두른 것이 차이가 있다.
상석과 호석의 전면에는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주는 문구가 새겨졌는데,
호석 전면에는 '判敦寧府事洪公墓夫人附右'가 적혀 있고,
상석에는 '判敦寧府事豊山洪公之墓良坐贈貞敬夫人安東權氏~'라고 적혀있는데, 이후 부분은 잘 안보였다.
봉분 옆에는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흉상과 묘비
만퇴홍공 양조은 포비이 있는데, 흉상은 초상에 나온 형태보다는 좀 후덕해보인다.
바라보는 전경은 좀 괜찮았다.
바로 옆에는 홍만조의 넷째 아들인 홍중징(洪重徵, 1682~1761)의 묘소가 자리잡았는데
형태는 아버지 홍만조의 묘와 비슷하다.
묘역 옆에는 후대에 세워진 시비가 하나 있는데
그가 사직을 청할 때 영조가 쓴 시로 보인다.
홍중징의 묘 앞에는 신도비가 서 있는데
일족인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 쓴 것을 한참 후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참고로 홍만조는 평생 아산에 산 적이 없었고
그의 집안에서 아산으로 내려온 건 바로 아들 홍중징 때라고 하는데
지금 두 부자의 묘역이 있는 이 땅이 홍중징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이 되면서 받은 사패지라고 한다.
두 묘역 사이에는 홍만조의 영정을 봉안했던 '자은영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묘역에 비해서 좀 실망이었다.
1970~80년대 시멘트 벽돌로 둘러친 것으로 보이는 담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갈라지거나 무너졌고,
지붕에는 이끼에 잡초까지 섞여 잘못하면 위태로워 보였다.
그나마 안에 있던 영정은 제를 지낼 때만 건다고는 하지만...
이젠 박물관으로 가야 정상일 꺼고
이제 아산시 문화재가 된 만큼 제대로 된 정비를 건의해 보는 건 어떨까?
홍만조묘표(洪萬朝墓表)
조선 숭록대부 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 지춘추관사 세제좌빈객
(崇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知春秋館事世弟左賓客) 홍만조의 묘
증 정경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오른 쪽에 부장함.
공의 이름은 만조(萬朝)이고,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만퇴당(晩退堂)이다.
풍산(豊山) 홍씨로서, 시조는 고려에서 직학(直學)을 지낸 홍지경(洪之慶)이다.
고조부인 홍유(洪脩)는 증 좌찬성이고,
증조부 홍이상(洪履祥)은 대사헌을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 되었으며 호는 모당(慕堂)이다.
조부인 홍탁은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 홍주천(洪柱天)은 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을 증직 받았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증 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공은 인조 을유년(인조 23, 1645년)에 태어났다.
기유년(현종 10, 1669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무오년(숙종 4, 167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과 예문관에 들어갔다.
그 뒤 대관(臺官)을 거쳐 승정원에 들어갔고 관찰사가 되었으며 한성부윤을 한 번 지냈다. 공
조판서와 형조판서,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목사, 현감, 낭청, 관서의 두 번째 자리와 겸직은 기록하지 않았다.
을사년(영조 1, 1725년) 12월 2일에 사망하였다.
부인 증 정경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증 참의 권진(權瑱)의 딸이고
길성위(吉城尉) 권대임(權大任)의 손녀이다.
계미년(癸未年)에 태어나 을미년(乙未年)▨월1일에 사망했다.
장지는 온양(溫陽) 동쪽 세교(細橋) 축좌(丑坐 : 남향)의 산에 있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홍중형(洪重亨)은 좌랑을 지냈고, 홍시보(洪蓍輔), 홍신보(洪藎輔)라고 하는 두 아들을 두었다.
홍시보는 아들 홍규한(洪奎漢)을 두었고, 딸은 최숭운(崔崇運)에게 출가하였다.
홍신보의 두 아들은 홍위한(洪緯漢)과 홍기한(洪紀漢)이다.
둘째 아들 홍중휴(洪重休)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은 홍택보(洪澤輔), 홍제보(洪濟輔), 홍준보(洪濬輔)이며,
딸은 심상관(沈尙觀)에게 출가하였다.
셋째 아들 홍중인(洪重寅)은 참봉이고, 홍정보(洪正輔)라고 하는 아들을 두었다.
넷째 아들 홍중징(洪重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正)이 되었다.
아들은 홍유보(洪裕輔)이고 딸은 목성리(睦聖履)에게 출가하였다.
첫째 딸은 정자(正字)인 목천현(睦天顯)에게 출가하여 목성관(睦聖觀),
목성항(睦聖恒), 목성함(睦聖咸), 목성익(睦聖益), 목성정(睦聖鼎)을 낳았고,
둘째 딸은 남하성(南夏成)에게 출가하여 남질(南耋)을 낳았다.
내손, 외손, 증손, 현손이 50여 명 된다.
공은 세 임금을 모시면서 지위는 1품까지 올랐고, 수명은 80을 넘겼다.
언행과 사업이 기록할 만한 것이 많지만,
일단 입언(立言) 할 만한 군자를 기다리기로 하겠다.
숭정갑신년 후 84년(영조 4, 1728년) 정미일(丁未日)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