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천재들(2021.6.7.)
이덕일 지음
옥당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프롤로그
신념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유쾌한 결기를 읽는다
중국의 사마천: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된 이릉장군을 옹호했다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잘 알려진 대로 궁형을 받았다. 그가 죽음이 두려워 궁형을 택한 것이 아님을 사기 본기의 순서는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섬겼던 한나라의 개국시조 고조보다 그와 싸웠던 항우 본기를 앞에 두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항우를 개국시조의 본기보다 앞세운 것은 승자의 자리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겠다는 그의 시각을 나타낸다.
그 시대와는 불화했던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로 걸어오라고 작은 오솔길을 놓았다. 그러자 주자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 양명학자임을 선언했던 정제두, 지역차별에 맞섰던 홍경래, 인조반정을 쿠데타라고 꾸짖었던 유몽인, 서얼출신으로 새 세상을 지행했던 유득공과 박제가, 오랜 귀양 생활 끝에 유배지에서 죽어간 이광사,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개청하려던 동학의 영수 김개남 등 스물두 명이 우리 시대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2016년4월 한강 변에서 천고 이덕일 기
1부 틀을 깨다
1장 왕도정치를 꿈꾼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1342~1398)
정도전은 고려 우왕 1년(1375) 북원 사신의 접대를 거부했다가 지금의 전남 나주 지방인 회진현 거평부곡에 유배된다. 그는 부친이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었지만 모친이 서녀여서 벼슬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친명외교를 추구했고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는 친구를 잃었지만 대신 민중을 발견했다. 유배지에서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정도전은 백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토지제도 개혁과 조선의 개창
정도전의 혁명이념과 이성계의 혁명무력의 만남이자 결합_1388년5월 위화도 회군으로 극도로 어수선한 정국은 정도전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전환된다. 정도전이 구상하는 토지개혁은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으로 만든 다음 백성들의 수대로 나누어주는 계구수전 방식이었다.
공양왕 3년(1391)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반포했다.
표전문 사건과 요동정벌
조선이 기마민족인 여진족과 손잡고 북벌에 나선다면 명나라로서 막기는 쉽지 않았다.
인신으로 국모의 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다고 사람을 죽인 만행에 대한 분개는 당연했다.
정도전은 태조 6년(1397)12월22일 동북면 도선무순찰사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주군 구획과 호구 정리, 성보수리, 그리고 군관의 재품 등을 파악하고 정비했다. 이 역시 전쟁 준비였다.
사병 혁파와 목전에서 좌절된 요동 수복
요동정벌에는 고토 회복이라는 역사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사병 혁파라는 국내 정치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다.
태조 7년(1398)8월 이방원은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전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남의 첩 소동의 집에서 이직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가 살해된다. 그만큼 전격적인 쿠데타였다. 정도전뿐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 북벌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됐다.
2장 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조식(1501~1572)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즉 백성들의 마음과 어긋난다고 보았다.
과거와 주자학의 굴레를 벗어던지다
세상사는 묘한 것이어서 과거를 포기한 이듬해부터 벼슬이 찾아왔다. 서른여덟 살 때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온 나라를 흔든 단성현감 사직상소
천백 가지의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문정왕후는 궁중의 과부일뿐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은거 처사 조식을 단숨에 전국 제일의 선비로 만들었다.
나라의 명운을 쥔 것은 백성이다
조식이 분개한 것은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늘의 뜻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학문의 산실 산천재로
조식은 예순한 살 되던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를 지어 이주해 죽을때까지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가지 않고 산천에 묻혀 마음을 닦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진정한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3장 사대부에 맞서 주화론을 제기하다 이경석(1595~1671)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입으로는 복수를 외쳤지만 군사력은 기르지 않았다. 이때 척화론을 배격하고 주화론을 주창한 인물이 대사헌이었던 백헌 이경석이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외에 길이 없었다.
병자호란과 도망가는 인조
인조가 향명대의(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를 위해 후금과 화를 끊는다고 사실상 선전의 교서를 내리자 그해 12월 청 태종은 여진군 7만, 몽골군 3만 등 도합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인조는 정묘년에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로 몽진(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함)하려 했으나 이미 강화로 가는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겨울의 남한산성은 농성할 곳이 아니었다. 기다리던 명나라는 원군을 보낼 형편이 아니었고, 자초한 전란에 의병의 봉기도 찾기 어려웠다. 40여 일 뒤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수많은 군사가 얼어 죽자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듬해(1637)1월30일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지금의 송파구)로 나가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그리고 훗날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불리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 자리가 수향단인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청황제공덕비 건립을 요구했다. 이것이 세칭 삼전도비인데, 누가 비문을 짓느냐가 문제였다.
사실 항복한 이상 비문 찬술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이런 외교 비문은 예문관 대제학이 짓는 법이었으나 마침 대제학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몇 명에게 비문 찬술을 명했다.
삼전도 비문의 찬술
세가지 신조
이경석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으로 부친의 임지인 제천 관아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10년(1618) 문과 별시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고, 인조1년(1623) 다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효종 즉위년 김육의 대동법 확대 시행 상소 때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은 신의 뜻으로는 먼저 홍청도(충청도)부터 시행하여 그 이해를 안 연후에 다른 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북벌계획의 책임을 지다
송시열과 시비
이경석은 현종 12년(1671)취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숙종 28년(1702) 서계 박세당이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옹호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재연되었다.
4장 북벌과 사회 개혁을 꿈꾼 비운의 정치가 윤휴 1617~1680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이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는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서인 영수 송시열로 대표되는 한 세력은 주자학 유일사항 체제와 신분제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을 걸었다.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이들에 의해 예학으로 바뀌게 된다. 예란 본질적으로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강제적 의무에 지나지 않는데 행동 규범에 불과한 예가 성리학의 주류가 된 것이다. 성리학은 이제 노골적으로 지배층의 계급이익에 복무하는 학문이 되었다.
백호 윤휴로 대표되는 일단의 사대부들은 이런 경향에 반대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효종실록 사관의 윤휴에 대한 평은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주희와 배치되는 견해
윤휴는 광해군 9년(1671) 윤효전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해군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북인으로서 서경덕의 문인이었다. 윤휴의 외조부 김덕민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 조식의 친구 성운의 제자였다. 성운은 성이학자들이 이단으로 보았던 노장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윤휴의 일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스무살(1636) 때 겪었던 병자호란이었다.
그의 학문체계가 주희와 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서인 내부에서 그를 둘러싼 사문난적 논쟁이 벌어진다. 그 계기는 윤휴가 중용주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자 송시열이 비난하며 고치기를 요구한 데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비판과 윤선거의 지지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 교리였던 것이다. 그러난 윤휴는 달랐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송시열에게는 논어, 중용보다 주희가 주를 달아놓은 논어집주, 중용집주가 더 중요한 경전이었다.
예송 논쟁
1659년 북벌 군주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효종은 승하 한 달 전쯤 송시열과 독대를 청해 북벌에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숙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예송 논쟁이 벌어졌다.
상복에는 다섯 가지가 있었다. 3년복인 참최와 1년복인 재최, 9개월복인 대공, 5개월복인 소공 그리고 3개월복인 시마가 그것이다. 부모 사망시 자식은 모두 3년복인 참최를 입게 되어 있었고,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부모도 상복을 입었는데, 장자상에는 3년, 둘째때부터는 1년복을 입어야했다. 효종은 왕통을 이었지만 가통으로 보면 소현세자 다음의 차자였다. 여기서 효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조정에서 의견을 묻자 송시열은 1년복이 맞는다고 주장했고,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 불렸던 송준길도 같은 의견이었다. 둘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당대 최고 성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조정은 1년복으로 결정하려 하였다.
이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윤휴였다. 그는 의례 참최장 주석의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 라는 구절을 인용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반론은 커다란 파문을 낳았다.
그러자 송시열은 같은 의례 참최장 주석의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으며 본부인 소생의 둘째 아들 이하는 다 같이 서자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내세워 1년복 설이 맞는다고 다시 주장했다. 송시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의정 정태화에게 의례의 가통을 계승했어도 32년복을 입지 않은 네 경우를 예로 들었다. 이를 사종지설이라 하는데 여기에 문제의 체이부정이 있었다.
체이부정은 효종처럼 아버지를 계승했으나 가통을 이은 적장자가 아닌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경우 3년복을 입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정태화는 깜짝 놀라 자고의 왕가의 일은 비록 처음에는 심히 작은 일이라도 훗날 그것으로 큰 화를 입는 수가 있다며 이를 인용해서는 안된다고 만류했다.
삼번의 난과 북벌
오삼계는 청나라와 싸우던 명나라의 마지막 주력군이었으나 1644년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청나라와 손잡고 이자성을 멸망시켰다. 오삼계는 이 공로로 청나라로부터 평서왕에 봉해지고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정남왕 경정충, 평남왕 상가희도 그런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강희제는 1673년(현종14년) 11월 윈난성에서 명의 부흥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같은 처지의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도 호응하면서 삼번의 난으로 발전했다. 윈난, 구이저우, 쓰촨, 후난, 광시 등 여러 성이 합세해 삽시간에 중국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변했다. 바로 효종이 예견하더 상황이었다.
이때 북벌의 기치를 든 인물이 윤휴였다. 조선은 삼번의 난이 일어난지 4개월 뒤 사신들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 오삼계의 난이 하늘이 준 기회라며 즉각 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윤휴는 병사 1만 대를 뽑아 북경을 향해 나가아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의 한쪽 길을 터 정인과 힘을 합쳐서 심장부를 교란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당황한 것은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들이었다. 좌의정 정치화는 현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윤휴의 밀소 때문에 바깥이 꽤 시끄럽습니다. 인조조에서는 저들(청나라)과 관계된 문제이면 상소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단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윤휴의 북벌론은 상당한 반향을 낳았으나 다음 달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집권당의 책임 있는 중진이 된 윤휴는 북벌을 계속 주장했다.
호포법 주장과 좌절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 넘어가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숙종은 윤휴를 賜死시키고 말았다. 예송 논쟁에서 왕가를 높이고 북벌을 주창하고 호포제로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주려했던 학자 관료의 죽음치고는 허무한 것이었다.
숙종은 청나라의 승리가 명확해진 시점에서 북벌론자 윤휴를 사사함으로써 종전 뒤 청나라의 의혹에서 벗어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5장 주자학 세상에 저항한 중농주의 실학자 박세당(1629~1703)
박세당은 인조7년(1629) 부친 박정이 부사로 있던 남원에서 태어났다. 박정은 광해군 11년(1619) 정시 문과에 급제했지만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해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에 오르면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공신까지 되었으니 미래는 보장된 셈이었다.
박세당이 네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일곱 살 때는 형 박세규까지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박세당이 여덟살 때인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부 박동선이 강화도에서 왕세자를 호위하고 있는 동안 박세당은 남은 두 형과 함께 조모 이씨, 모친 윤씨를 모시고 원주와 청풍, 안동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열여섯 살 때인 인조 22년(1644)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 이듬해 박세당은 의령 남씨와 혼인해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 모친 윤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간장을 입에 대지 않아서 삼년상을 마쳤을 때 비장과 위장이 손상되어 평생의 고질병이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박세당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두살 때인 현종 1년(1660)이었다. 장원급제자인 박세당의 벼슬길은 보장된 셈이었다. 서른 네 살에 대간인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그의 처남 남구만이 대간의 인사권이 있는 이조전랑으로 있었기 때문에 상피제에 적용되어 대간 임명이 늦어졌던 것이다. 상피제란 서로 인척관계에 있는 사이는 서로 관련 있는 부서에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현종 호종 사건
박세당은 마흔 살 때인 현종9년(1668) 달마다 제출해야 하는 문신 월과를 세 번이나 내지 않아 파직당했다. 그런데 그는 자찬묘표에 재주와 역량이 많이 않아서 큰일을 하기에 부족한 데다 세상도 날로 도가 쇠해져 바로잡을 수 없다고 여기고 마침내 관직을 벗어버리고 물러났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월과 제출을 거부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사임한 것이다.
석천동에서 찾은 소박한 삶
그는 양주 수락산 석천동에 은거했다. 송시열이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는 조정 현실에 한계를 느끼고 관직을 내놓고 은거했다는 것이다.
이후 박세당은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현종 11년(1670) 8월 통진현감에 제수되자 지방관은 내직과는 다르다면서 나가 때마침 흉년 극복에 앞장섰다. 그러다 현종 12년 내직인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자 사양하고 석천동으로 돌아갔다. 현종 14년(1673) 효종의 능인 영릉 천장도감에 제수되자 나가서 목공을 감독했다. 이처럼 박세당은 모두가 바라는 내직은 거부하고 다들 꺼리는 지방관이나 목공 감독 같은 험한 일을 기꺼이 수행했다. 이후에도 사간원 사간 등의 청요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계속 은거했다.
그는 호까지 서계에서 나무꾼 늙은이라는 뜻의 초수로 바꾸었다. 그가 호를 나무꾼 늙은이로 바꾼 것은 손으로는 낫 한 번 잡지 않으면서 관념만으로 산림처사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숙종 2년(1676) 농업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색경을 저술했다. 색경에서 그는 곡식과 채소, 각종 나무 재배법은 물론 가축을 기르는 방법과 양어, 양잠 등에 이르기까지 농사에 관해서 광범위한 주제를 서술했다. 학문이 이 백성의 삶의 질 향상에 직접 이바지해야 한다는 사상에서 나온 저술이었다.
그의 저술은 논어사변록, 맹자사변록, 중용사변록처럼 유학 경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숙종 7년(1681) 노자도덕경을 주해하고 이듬해에는 장자를 주해했다. 주자학이 유일사상의 지위를 획득해가던때에 도교서적까지 손을 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관란정과 괴산정을 열고 제자를 받자 문생들이 대거 몰려온 것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들 박태보에게 날아든 화
그런데 숙종 15년(1689)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기사환국 때 박태보가 화를 입는다. 희빈 장씨에게서 바라던 아들(경종)을 얻은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고 장씨를 왕비로 승격시키려 했다. 박태보는 같은 소론이었던 오두인 등 70여명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 작성을 주도했고, 연명상소의 대표격인 소두를 맡았다. 박태보는 숙종에게 갖은 악형을 당한 끝에 유배 가다 죽고 말았다.
이후 박세당이 예순여섯이 되던 숙종 20년(1694)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벼슬이 내려졌는데, 이해 숙종은 왕비 장씨를 내쫓고 민씨를 다시 왕비로 삼는 갑술환국을 단행했다. 왕비 교체 과정에서 아들 박태보를 잃었던 박세당은 이제 소론뿐만 아니라 노론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숙종 21년(1695)에는 특지로 정2품인 공조판서가 제수되었고, 이듬해에는 홍문관 제학이 제수되었다. 예순아홉 때인 숙종 23년(1697)에도 정2품인 의정부 우참찬이 제수되었고, 판서 중에서도 핵심 부서인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나가지 않았다.
그가 일흔 네 살 때인 숙종 28년(1702) 백헌 이경석의 비문을 찬술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경석은 젊은 나이에 고위 관직에 올라 당시 무명이던 송시열을 끌어준 인물이었다. 현종이 신병 치료차 충청도 온양의 행궁에 갔을 때 이경석은 근처에 있는 신하가 와서 뵙지 않는다는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충청도 회덕에 낙향해 있던 송시열은 이것이 자신을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적으로 돌변한 송시열은 이경석이 병자호란 패전 후 항복 문서인 삼전도 비문을 쓴 것을 빌미로 공격했다/
송시열은 이경석이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것을 축하하는 글을 써주면서 오래 장수하라는 뜻의 수이강 이라고 썼다. 이경석은 그 숨은 뜻을 몰랐지만 이는 금나라에 항복문서를 쓴 송나라의 손적을 수이강지라고 비웃은 것을 빗댄 것이었다.
박세당은 이경석에 대한 이런 비판들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신도비문의 마지막 명에 이런 시를 남겼다.
세 조정을 섬긴 원로요, 한 시대의 충성스런 신하였네
나라 생각에 집안은 잊었고, 임금을 위해 몸은 돌보지 않았네
붉은 정성은 해처럼 빛나고, 흰 절개는 서리처럼 매서웠네
험하고 어려운 일, 또한 두루 겪었네
소현세자를 심양까지 따라가서 모신 것도 이경석이었다.
마지막 시련
전라도 옥과 유배령이 떨어졌는데, 토혈병으로 와병 중인 몸이었다. 박세당이 병든 몸을 이끌고 유배지로 가려고 할 때 판윤 이인엽이 일흔다섯의 병 있는 박세당은 조만간 숨이 끊어질 것인데, 유배지로 보낸다면 반드시 길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상소를 올려 겨우 유배는 면하게 되었다. 다시 석천동으로 돌아온 박세당은 그해 8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자학이란 하나의 사상만을 정설로 만들려는 세상에 박세당은 저항했다. 박세당의 사변록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 효시이자 실학의 선구라는 평을 받았다.
6장 나는 양명학자로소이다 정제두 1649~1736
조선후기는 주자학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대학은 주희가 대학장구라는 주석서를 내면서 사서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주자의 해석이 경문 본래의 뜻을 어기었으니, 또 고쳐 해설하지 않을 수 없다.
친민과 신민의 차이
퇴계 이황이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을 사문(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양명학자임을 밝히다
정몽주의 11대손인 정제두는 종형이 영조의 부마이고, 부인이 윤선거의 종질이었던 서인 명가의 후손이었다. 이런 그가 시대의 이단이던 양명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고단했던 개인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16살 때는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주던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연보는 백부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종손마저 어려서 그가 초상과 장레를 주고나하여 치렀다고 전한다. 열일곱 살 때 맞이한 부인 윤씨는 스물세 살 때 잃고 말았다. 어린 아들도 잃은 데다 그 자신마저 병들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단의 딱지
군자의 싸움은 오직 그 의리를 위한 것이지 자기의 사욕 때문은 아닙니다. 공론의 결정은 옳고 그름에 달린 것이지 세력의 강하고 약한 것으로 정할 것이 아닙니다.
7장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다 유득공 1749~1807
소중화 사상 속에서 민족사의 영역은 극도로 협소해졌다.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라고 인식하던 시절에 유득공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했다. 유득공이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북방 강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불운한 유년시절
혁명적 역사 인식의 소유자 유득공의 유년시절은 불운했다. 유득공은 영조 25년(1749)에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서얼로 태어났는데, 출생 직전에 전염병이 돌아 가족이 여덟 명이나 사망했다. 게다가 부친 유춘은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부친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그러자 유득공까지 죽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모친 남양 홍씨는 큰물은 피하는 것이 좋다면서 그를 데리고 남양 백곡의 친정으로 데려갔다.
모친의 외가는 무인집안이었는데 유득공은 외가에서 무술을 익히는데 몰두했다. 열 살 때 유득공은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경행방(낙원동 일대)에 터를 잡았는데 그곳은 고관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정조, 서얼의 등용을 허하다
혁명적 역사 인식
정조때 성장한 세력들에 대한 정치 보복이 자행되는데 남인들은 천주교 신자로 몰려 대거 사형당하고, 유득공과 가까웠던 박제가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득공은 비록 유배 가지는 않았지만 풍천부사에서 파직됐다.
8장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를 짓다 이긍익 1736~1806
환란 속에 꾼 꿈
그 후 내가 궁하게 숨어 살게 된 뒤로는 그 꿈을 전연 잊어버렸다. 요즘에 와서 문득 생각하니, 초야의 신하가 붓을 잡다란 시 구절은 늙어서 궁하게 살면서 야사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어릴적에 꿈으로 나타난 것인 듯 하니, 실로 우연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운명으로 미리 정해진 것일 게다.(연려실기술) 의례
역사가가 되기로 마음먹다
다른 시각의 역사서 서술
기사본말체: 사료만 제공하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서술 방법이다.
연려실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실의 승자인 노론쪽에서 저술한 역사서밖에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노론과 다른 시각의 역사서 서술은 시대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긍익은 객관성이란 명분 아래 집권 노론뿐만 아니라 야당인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의 견해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 편찬자를 둘러싼 의문
2부 죽음으로 맞서다
9장 사대의 나라에서 황제를 꿈꾸다 이징옥 ?~1453
태조 7년(1398) 요동정벌을 진두에서 지휘하던 정도전을 이방원이 주살한 뒤 명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가장 큰 외교정책이 되었다.
사대의 나라, 문약의 나라 조선에서 경상도 양산 출신 이징옥은 특이한 존재였다.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명나라 사신의 횡포
이징옥은 세종 14년(1432) 병조참판에 임명되어 오랜만에 서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세종 14년 윤봉이 다시 사신으로 왔을 때 접반사(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직 벼슬)로 임명된 인물이 이징옥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충신
수양대군을 토벌하라
단종1년 10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상호군 송취를 의금부 진무로 삼아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체포해 평해에 안치하라고 명령했다.
대금을 세우고 황제에 올랐다?
이징옥은 단종 1년 종성 판관 정종과 이행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10장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 허균 1569~1618
교산 허균의 생애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순탄치 못한 운명
허균이 스무 살 때인 1588뇬(선조21년) 허봉은 끝내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병사했다. 허균은 스물여섯 살 때인 선조 27년(1594) 정시 문과 을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됐을까?
이이첨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도모한 것이다.
인목대비 폐출 논의
정말 율도국을 세우려 했는가?
허균은 8월24일 하인준 등과 함께 사형당하는데, 이를 기록한 사관은 그의 죽음에 의문이 있음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11장 폭정이 낳은 영웅 홍경래 1780(정조4년)~1812(순조12년)
조선 말기 관변 쪽은 홍경래를 서적, 또는 경적이라고 불렀다. 서적은 그가 봉기한 관서 지역의 역적이란 뜻이고 경적은 그의 이름 가운데 자를 딴 것이다.
스승도 놀란 기질
혁명의 도모
거사
정주성에 갇히다
오지 않는 원병
순조12년 4월19일 화약이 폭발하면서 관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와 정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홍경래전은 성이 함락될 때 관군들은 함부로 총질하고 창질하여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죽여서 쌓인 시체가 성중에 가득하였다.라고 전한다. 이때 2,000명 가까운 봉기군이 참살당했다. 바로 이런 폭정이 홍경래를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다.
12장 천주교를 지키다 정하상 1795(정조19년)~1839(헌종 5년)
부친 정약종과 이복형 정철상이 사형당하던 순조1년(1801년)2월25일 정하상은 여섯 살에 불과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수렴청정하게 된 정순왕후는 정조 때 성장한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순조1년(1801년) 천주교도를 역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사학 엄금 교서를 내렸는데, 정하상의 부친이 이때 사형당했다. 재산은 몰수되었고 옥에서 풀려난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정하상은 세례명을 바오로를 따서 정보록이라 불리는데, 1890년 홍콩 주교 약망이 정하상이 쓴 상재상서(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간행하면서 정보록 일기를 덧붙였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기초 사료이다.
천주교를 버리지 않다
정하상은 모친 류소사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수받았다. 중국인 신부였던 주문모는 신유박해때 국경 부근까지 도주했다가 신자들을 버리고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의금부에 자수해 1801년 5월 순교했다. 이후 조선에는 신부가 없었다.
베이징을 오가며 신부 파견을 요청하다
정하상은 만 스물한 살 때인 순조 16년(1816) 드디어 북경에 들어가 북경교구의 신부들을 만났으나 신부 파견을 약속받지는 못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북경으로 가서 신부파견을 요청했다. 1805년 중국에서도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나 성당과 신학교 들이 파괴되고 중국인 신부들이 살해됐기 때문에 조선에 신부를 파견할 여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드리운 박해의 그림자
풍양 조씨들이 세력을 잡으면서 다시 천주교 억압 주장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조만영이 홍문관 대제학, 조인영이 이조판서, 그의 조카인 조병현이 형조판서가 되어 조정을 장악하고, 우의정 이지연까지 이들 편에 붙어 풍양조씨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다. 헌종 5년(1839)4월18일 사학토치령(사학은 천주교)이 내려졌다. 40여년 만에 다시 중앙 정부 차원의 천주교 박해가 재개된 것이다.
양심선언이자 신앙고백, 상재상서
이벽의 성교요지, 부친 정약종의 주교요지와 더불어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조선 천주교도들의 인식과 신앙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현종 5년(1839)8월14일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정하상은 역관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에서 사형당했다. 세 명의 프랑스인 신부 범세형(앙베르), 나백다록(모방), 정아각백(사스탕)은 새남터에서 사형당했다.
13장 새로운 남조선을 열다 김개남 1853(철종 4년)~1894(고종31년)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을 동학3걸이라 한다. 동학은 교주 최제우가 철종 11년(1860) 고향인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몸과 마음이 떨리는 새로운 경지를 체험하고 창시한 민족종교였다.
동학이 처음 집단적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교조 신원운동이었다. 고종 1년(1864) 사도로써 바른(성리학)도를 어지럽혔다는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사형당한 교주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운동이었다.
농민혁명의 시작
탐학에 대한 분노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로 뭉친 동학농민군 앞에 관군은 허수아비처럼 무너졌다. 부안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그해 5월 황토현에서 다시 관군을 대파하고 정읍을 점령했다. 조정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을 급파했으나 동학농민군은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했다.
6월 전주화약이 성립되어 잔라도 53개소 관아 안에 일종의 민정기관인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전봉준은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하고 탐관오리 처벌, 노비문서 소각, 천인들의 처우 개선, 토지 분할 등의 폐정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다른 나라를 세우는 혁명을 꿈꾸다
전봉준과 김개남 사이에는 노선 대립이 존재했다. 전봉준이 조선의 국체는 보조한 채 고종 주위의 벼슬아치들을 처벌하고 자신들이 실권을 잡는 개혁을 꿈꿨다면 김개남은 조선을 무너뜨리고 다른 나라를 세우는 혁명을 꿈꿨다.
북상
전봉준은 고부, 태인 방향으로 남하했고, 김개남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본거지인 남원 방향으로 퇴각했다.
개남을 두려워한 사람들
김개남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란 물론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기에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양반 사대부들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3부 가난을 구제하다
14장 죽어서도 대동법을 외치다 김육 1580(선조13년)~1658(효종 9년)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정치가 최고의 정치_김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법은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주장했다.
백성을 구할 계책, 대동법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을 대체한 법으로서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시범 시행되다가, 인조 원년(1623) 강원도로 확대되었지만 더 이상의 확대는 어려웠다.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전호는 안 내게 된다.
대동법이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된 것은 남인 정책 이원익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이원익이 경기도에서는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쌀 12말을 걷는 대동법을 싱해하지고 주장했는데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당했던 사림파 김식의 증손자였던 김육은 성균관 유생이던 광해군 때 북인 정권의 실력자 정인홍을 비판했다가 정거(과거 응시 금지)조치를 당하고 경기도 가평에서 10여 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숯을 팔아 생계를 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양반 지주들의 반대
대동법 시행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아전들, 그리고 방납으로 배를 불리던 방납업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명목을 들어 반대했다.
100년 만에 전국에 시행되다
김육은 효종 2년(1651) 영의정에 임명되자 드디어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시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다가 효종 5년(1654)다시 영의정이 되자 시행세칙인 호남대동사목을 구상해 대동법을 호남에 확대하려 했는데, 그 시행을 앞두고 효종 9년(1658)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 대동법은 전라도 해읍에 확대 시행됐다가 현종 3년(1662)에는 전라도 산군에도 시행됐다. 드디어 숙종 34년(1708)에 황해도까지 시행됨으로써 전국적인 세법이 됐다. 꼭 100년 만에 전국적인 세법이 된 것이다.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국가경제도 발전시킨 대동법은 조선의 역사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대동법이 시행됨으로써 조정은 과거 공납으로 충당하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새로운 물자공급 체제를 수립해야 했는데, 이런 필요성에 따라 생겨난 직업이 공인이었다. 관청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들은 선불로 받은 물품값으로 수공업자에게 자본을 대주고 제작케 하는 선대제를 시행했다. 이는 상업자본의 수공업 지배 형태로서 자본주의 발달사 초기에 나타나는 상업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대동법이 촉발한 이런 변화는 조선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 즉 근대화를 지향하는 씨앗이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5장 혁명을 꿈꾸며 농사를 짓다 이익 1681(숙종7년)~1763(영조 39년)
성호 이익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이 기반이던 남인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 부친 이하진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지낸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에서 쉰다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숙종실록 8년(1682) 이한진이 분한 마음에 가슴 답답해다가(유배지에서) 죽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갓 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 형 이잠이 숙종32년(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당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들었다.
과거 공부에 뜻을 접고 성호농장으로 가다
이익은 선영이 있는 첨성촌으로 이주했다. 성호라는 호는 여기에서 딴 것인데,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서해 가까운 안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일치의 삶을 살았다.
한전제는 한 집안에서 생활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정 규모의 농토는 일절 매매할 수 없게 해서 생활에 안정을 기하고 파산을 막자는 것이었다.
최고의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다.
당쟁의 연원은 이익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주위의 여럿이 이에 응하여 화답하지만 싸움 끝의 이익은 정치인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를 아는 자가 정치해야
당쟁의 문제점에 대한 이익의 해결책은 신선하다. 이(利)가 나올 구멍을 막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벼슬아치의 사익을 창출하는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이를 탐해 벼슬을 하려는 자가 적어지리라는 것이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인사)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까지 주장한 것이다.
주자학을 뛰어넘어 서학도 수용
영조 39년(1763) 여든 세 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 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16장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유수원 1694(숙종 20년)~1755(영조 31년)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리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유수원은 노론에 의해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경종과 연잉군의 세제 책봉
유수원은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1694)에 출생했다. 이 무렵 집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데,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유수원이 문과 별시에 급제해 조정에 나갔던 때는 숙종 44년(1718)이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옹립하기 위해 왕세제 책봉을 추진한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였다.
경종독살설과 흔들리는 정국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서 더 큰 풍파를 일으킨다.
경종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용하는 탕평책을 표방했다.
백성 중에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라
나주 벽서사건에 연루되다
유수원은 처형되었고 가족 또한 모두 연좌되어 집안이 폐고 되고 말았다. 경종에 대한 충심을 간직했던 한 선구적 실학자의 비극이었다.
17장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다 박제가 1750(영조26년)~1805(순조 5년)
박제가가 열한 살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백탑파 친구들
청나라의 장점을 흡수해 국부 증진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북학의를 저술했다. 북학의 서문에서 박제가는 무릇 이용과 후생은 하나라도 닦지 않으면 위의 정덕을 해치게 된다라며 이용후생으로 국부를 증진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학이란 맹자에 남쪽 지식인 진량이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는 뜻에서 나온 용어다.
규장각 사검서의 탄생
정조는 재위 3년(1779)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리수 등 네 명의 서얼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전격 임명해 고식에 적은 조선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사상계를 주도했다.
무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다
문관의 길이 막히자 박제가는 무과로 방향을 전환해 정조 18년(1794)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
서울 근처에 일정한 땅을 마련해 농업전문가를 두고 농사꾼 수십명을 뽑아 농사 지휘를 받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농사꾼들이 최고의 농업전문가가 되면 다시 전국에 파견해 한 사람당 열 명씩 농업 지도를 하자는 것이다.
정조 사후에 유배당하다
정조 재위 24년(1800) 6월 갑자기 승하/
4부 절개를 지키다
18장 통곡하며 책을 불태운 천재 김시습 1435(세종17년)~1493(성종24년)
승려가 되다
스물한 살 때부터 스물아홉 살 때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송도를 거쳐 관서(평안도)와 관동(강원도), 그리고 호남을 유람했다. 인생의 황금시기를 유람으로 소비한 것이다.
금오신화를 쓰다
김시습은 서른 한 살 때 경주 남산 금오산 남쪽 동구 용장사에 머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바로 금오산실이며 당호가 매월당이었다. 서른 일곱 살까지 이곳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해 여러 시문집을 지었다.
사대부의 상식 주리론을 거부하다
19장 흔들리지 않는 사관의 길 김일손 1464(세조10년)~1498(연산군8년)
무오사화는 애초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기사관(정6품) 김일손과 직속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다.
사관이 비사를 아는 연유
조의 제문의 해석
서른넷에 능지처사 되다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
20장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유몽인
임진왜란의 충격
광해군 즉위 도우며 승승장구
시어 파문
금강산으로 들어가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순 없는 법
21장 정말 오랑캐에게 투항했을까? 강홍립
싸움터로 나서다
투항
8년의 억류생활
고국에 돌아오자 병에 걸리다
22장 유배 속에 살다 이광사
당쟁의 소용돌이
위기에 빠지다 유배, 유배, 유배
신기 어린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