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륙의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이야기
[이글의 저자, 시카고 교외 Skokie에 거주하는
김상신님은 은퇴한후 '늘푸른나무' 를 만드는
한편 서양사와 교회사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쳔의 역사해석', '역사와 희망'등의
역서가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발견하였다는 '새로운 세계', America에는 그들보다 훨씬 먼저 정착하여 유럽인들이 '암흑'시대를 지내는 동안 훌륭한 사회와 문화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틀어서 우리는 아메리칸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근래까지만 해도 이들은 약 12,000여 년 전 아시아로부터 걸어서 미 대륙으로 건너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여러 가지 증거물들에 의해서 그들이 처음 미 대륙에 도착한 것은 적어도 30,000 내지 40,000년 전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고고학적인 발견들을 통해 추론한 일반적인 설명은 선사시대 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아시아 북쪽의 사냥꾼들로서 털이 부수수한 큰 짐승 떼를 쫓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오다가 바닷물이 비교적 낮았던 빙하시대에 그나마도 얼음으로 덮여 있던 시베리아에서 지금의 알라스키로 걸어서 건너왔다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두 대륙 사이는 완전히 바다로 갈려져 있지 않고 소위 '육교,( land bridge)라고 하는 띠와 같은 좁은 땅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빙하가 녹으면서 '육교'가 물로 덮여 러시아와 알라스키를 갈라놓은 지금의 베랑(Bering) 해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교’를 건너 미 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자연히 따뜻한 날씨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으리라는 추측인데 현재 북미 주에서 발견된 최고의 유물은 뉴멕시코의 크로비스 (Clovis)에서 발견된 것으로 11,500년 전 것이라고 합니다. 위에 설명한 것이 근래까지의 정설이었지만 최근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유물들, 특히 남미에서의 고고학적인 발굴들을 통해 여러 가지 다른 이론들이 제기되고 있으며 힘을 얻어 가고 있습니다.
*태평양 연안 루트 설. 이 이론에 따르면 북 아시아에 살던 사람들이 ‘베랑 육교(Bering land bridge)'라는 것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걸어서 또는 가죽으로 감싼 배를 타고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페루나 칠리 연안에서 발견된 12,500년 이상이 된 유물들로, 미 대륙에는 소위 아메리칸 인디언이라는 사람들이 12,000여 년 전 시베리아와 알라스카 사이를 걸어서 건너오기 이전에 이미 해양을 통해 활동하든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 대륙 서부의 워싱톤 주에서는 8,000년 내지 9,300년 된 소위 케니윅 (Kennewick) 인이라는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결과 당시의 아메리카인이 과연 아시아에서 온 것이 맞느냐? 하는 의문까지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북 대서양 루트 설. 북미 대서양 연안에서 유적지와 유물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펜실바니아와 버지니아, 그리고 사우스 캐로라이나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10,000년 내지 16,000년이나 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태평양 연안 크로비스에서 발견된 것 보다 훨씬 오래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초기의 유럽인들이 뱃길을 따라 유럽에서 얼음으로 둘러싸인 아이슬랜드 (Iceland)와 그린랜드 (Greenland)를 돌아 북 아메리카로 내려왔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오스트랄리아 루트 설. Thor Heyerdahl란 사람은 브라질에서 발견된 두개골이 남방 아시아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하여 동남아시아의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너 남 아메리카에 도달하였다는 주장을 하지만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태평양을 따라 북 아시아까지 올라갔다가 베랑(Bering)해협을 건너 남 아메리카까지 왔을 수도 있다는 반론에 부딪혀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 소개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만이 맞을 수도 있고 다 맞을 수도 있습니다.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그룹들이 신세계로 이주해 와 어떤 그룹은 멸종되기도 하고, 어떤 그릅은 계속 승계되었지만 수천 년이 지나는 사이에 모습이 바뀌기도 하였으리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칼럼버스가 신 대륙에 도착했을 당시 남, 북미주에 적어도 천만 명 이상의 첫 번째 아메리칸이나, 아메리칸 원주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물론 수백 개의 부족사회로 나뉘어서 지냈으며 그 중에 발달한 종족들이 마야(Maya)족, 멕시코의 아즈텍 (Aztecs)족 그리고 페루의 인카 (Incas)족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스페인 점령하에서 가축과 같이 죽어 갔습니다.
이들 원주민들에 대한 평가는 다릅니다. 이들은 아주 야만족이며 난폭하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온건하고 이웃과 자연과 잘 조화하여 살던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만 고집한다면 인간 본성을 망각한 비현실적인 주장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은 농사나 집짓기, 수학이나 여러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그들에게 공통된 치명적인 약점은 어느 사회도 문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문자로 기록된 자료들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으며 그나마 그들에게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구전(口傳)으로 전해 오던 것을 초기 유럽 이주자들이 자기들의 문자로 기록한 자료들을 통해서입니다.
유럽의 이주민들이 미 대륙에 온 이후 90%의 원주민들이 죽었습니다. 강력한 무기와 문명의 이기들을 앞세워 발전을 위해서, 문명화를 위해서 그리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위하여 무자비한 착취와 압박이 자행되었든 것입니다. 물론 원주민들이 죽은 가장 큰 요인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자연면역성이 없는 상태에서 전염병에 걸린 원주민들은 그냥 죽어 갔고 후속 유럽 이주민들은 초기의 원주민 정복이니, 퇴치니 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월하게 식민지를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 식민지 북미 대륙에서의 인디언 이야기
북미 대륙에서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만남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1607년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제임스타운에 상륙하여 캠프를 세운 다음입니다. 제임스타운 정착 초기에 이들 이주민들을 이끌었든 사람은 John Smith 대위였습니다. 스미스 대위는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도끼에 목이 날아가려는 순간 당시 11살이었든 인디안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Pocahontas)의 간청으로 죽음을 면하고 그로부터 인디언들과 잘 어울리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군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어려운 처지의 제임스타운을 지켜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능란하게 인디언들을 다루어 초창기 어려울 때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서로 상거래를 트기도 하면서 한때 인디언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디언들을 약탈하는데도 악랄한 수완을 보이며 무자비한 싸움도 불사하여 인디언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후 제임스타운을 떠나 동북부 연안으로 가서 대구(Cod)잡이로 재미를 보았으며 영국으로 돌아갈 때는 26명의 인디언들을 스페인에서 노예로 팔려고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제임스타운 이주자들 가운데 John Rolfe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1살 때 스미스 대위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든 인디안 추장의 딸 Pocahontas가 17살 때 인디언들과 정착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납치되어 왔는데 인디언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통해 정착지의 안전을 돕자는 뜻에서 추장의 딸과 결혼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디안 추장의 딸과의 결혼을 통해 제임스타운의 안전을 이루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필그림 (Pilgrim)들은 1629년 12월 16일에 Plymouth에 상륙하였는데 제임스타운에 처음 도착한 정착 자들과 마찬가지로 여건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혹독한 날씨와 감기 등으로 겨울을 나는 동안에 102명의 일행 중 5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자 원주민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어떻게? 라는 수수께끼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이 지역의 인디안 추장이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인디언들의 도움 아래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첫 수확을 축하하는 축제를 필그림들과 인디언들이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미국에서는 첫 번째 감사절 축제라고 부르며 기념합니다. 필그림들은 열심히 농사를 짓고 인디언들과 상거래(주로 그들이 사냥한 모피를 사들여 영국으로 수출) 를 하면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네델랜드 정부는 1621년 유럽과 신세계간의 무역을 관장하기 위하여 서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당시 폴츄갈이 갖고 있던 노예무역과 사탕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현재 뉴욕주의 서쪽에 있는 알바니를 인디언들과의 모피무역의 전진기지로, 허드슨강 입구에 자리하여 후에 뉴욕으로 개명한 뉴 암스텔담 (New Amsterdam)을 교역의 중심지로 건설하였습니다.
12 마일 길이로 길쭉하게 뻗어 있는 지금의 만하탄에 네델랜드 사람들이 처음 정착하던 때인 1624년 이곳 정착민들의 지도자로 선출된 Peter Minuit란 사람이 그 지역의 인디안 추장을 만나 맨하탄 섬 전체에 대한 매매 계약서와 함께 주로 도끼, 의류, 양은 그릇, 빤짝이는 구슬 등이 들어 있는 상자 둘을 건네주었는데 그 가치가 당시 가격으로 $24에 해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맨하탄을 인디언들에게서 $24에 사들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북미 대륙을 둘러싼 열강들의 전쟁과 인디언
17세기 말 북미 대륙은 유럽의 강대국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매우 가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담배 생산지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매우 값진 상품이었든 비버(Beaver) 털의 공급처로서의 가치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여기에 관심을 가졋던 나라들이 네델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이었으며 영국 왕실도 한 몫 하였습니다.
북 아메리카에 진출한 나라들 사이에는 심심치 않게 북미대륙을 장악하려는 전쟁이 일어났는데 1689년부터 독립전쟁이 일어나기까지 4번의 큰 전쟁이 북미 대륙에서 일어났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를 통틀어 프랑스와 인디안 전쟁들(The French and Indian Wars)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프랑스가 인디언과 대항해서 싸운 전쟁이란 뜻이 아니라 영국이 프랑스와 인디안 연합군에 대항하여 싸운 전쟁이라는 뜻이며 더 정확하게는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 네델란드를 몰아내고 북미대륙을 장악하려는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전쟁의 특징가운데 하나는 물론 소수 인디언 부족들이 영국군을 도와 싸우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The French and Indians War이라는 이름이 말하듯이 다수의 강력한 인디안 부족들은 프랑스를 도와 영국군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북미에서 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고 인디언들은 거의 멸종을 당하거나 아니면 서쪽으로, 또는 오지로 쫓겨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로 이주한 영국의 이주민들은 신대륙에 올 때 이곳에 영구히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만든다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정착에 필요하다면 원주민들과의 목숨을 건 싸움도 불사하였고 더 많은 영지획득을 위하여 인디언들을 더 깊은 숲 속으로 쫓아내었습니다만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은 무역을 통한 돈벌이 아니면 탐험이나 선교를 위하여 온 사람들(주로 제슈잇 선교사들)이였으므로 인디언들과 충돌할 필요가 별로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이 볼 때에는 프랑스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보다 덜 위협적일 뿐 아니라 덜 나쁜 사람(less evil)이었고 때로는 무역거래 등을 통해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식민지나 군대를 공격할 때에는 프랑스와 인디언들이 쉽게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 식민지 대륙에서의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숫자는 너무나 차이가 많았습니다. 마지막 프랑스와 인디안 전쟁이 일어날 당시에 북미 대륙에서의 영국인이 150여 만 명에 이른데 비해 프랑스인은 고작 9만 여명에 불과하였다 합니다.
테쿰세의 인디언 연방의 꿈
미국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인디안 지도자중 하나로 평가되는 Ohio Valley의 Shawnee 족 추장인 Tecumseh 가 서쪽으로 몰려오는 백인들이 Ohio River 서쪽으로의 진출을 막고 그것으로 인디언과 백인들의 경계를 확정 지으려는 생각으로 위스컨신에서 후로리다까지 산재해 있는 인디안 부족들을 방문하여 중서부와 남부의 인디안 부족들의 연합체를 구성하고 젊은 용사들을 뫃아 Tippecanoe 와 Wabash River 가 만나는 곳에 집결시켰습니다.
미 정부는 William Henry Harrison (당시 인디안 지역의 지사요 후에 대통령이 되었음) 장군으로 하여금 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진압하도록 하였습니다. 해리슨은 1811년 11월 테쿰세가 다른 부족들을 방문하려고 캠프를 비운 사이 이들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며 테쿰세는 남은 인디언들을 데리고 영국군에 합류하여 아메리카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1813년 10월 전사함으로 그가 계획하였든 인디안 연방의 꿈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테쿰세의 사건이 서부로의 진출을 꿈꾸는 아메리칸들 에게 반 영국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디안 연방이란 것이 영국이 꾸며낸 음모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북미 대륙에서 영국군을 완전히 쫓아내야 한다는 반 영국감정이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든 것입니다. 호전적이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하원 의장 Henry Clay 의 주도하에 매디슨은 재선 선거운동 와중인 1812년 6월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합니다.
눈물의 행진
이미 언급하였습니다만 콜럼버스가 산 살바돌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유럽인들과의 관계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습니다. 우수한 무기와 인원을 가지고 회유와 무자비한 살육 그리고 약속파기와 배신으로 인디언들을 몰아냈습니다. 후에 미국의 7대 대통령이 된 앤드류 짹슨은 인디언들과 맞서 용감하고도 잔인하게 전공을 세움으로 1814년경부터 전사(戰士)로 명성을 날리게 된 인물인데 인디언들에게는 "날카로운 칼'이라는 불릴 만큼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지금까지 내려 왔던 인디언들에 대한 국가정책을 바꾸어 그의 후임자 밴 부렌에게까지 이어졌는데 그것은 인디언들을 싸워 죽이거나 쫓아 내는 것이 아니라 거주지를 아주 옮겨버리는 이주(移住)정책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정책변경이라고 두둔하기도 하지만 인디언들에게는 "눈물의 행진"이었습니다.
북미의 동남부지역에는 쵹토 (Choctaw), 치카소 (Chickasaw), 크릭(Creek), 체로키(Cherokee) 그리고 세미뇰 (Seminole) 등 5개 인디안 종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유럽인들에 필적할만한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당시 갑자기 수요가 폭등하게 된 담배와 목화농장을 일구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들 5개 개화된 인디안 종족들을 대상으로 1831년부터 1833년 사이에 제1차 '이주'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명목은 '이주' 이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는 살육을 감행한 강제적인 이주였습니다. 한 겨울에 미시시피 에서 알칸소 서쪽의 변방으로 도보로 이주하는 이들에게 음식도, 주거시설도 열악한 상태에서 뉴모니아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더운 여름철에는 콜레라로 죽어 가는 죽음의 행진이었습니다.
이주를 거부한 Creek 부족들은 1835년 전쟁으로 대항하였으나 결국 14,500여명이 붙잡혀 그 가운데 2,500명은 쇠사슬에 묶인 채 오크라호마까지 이송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 가장 개화되었던 체로키 종족은 독립된 인디안 국가를 세우고 대법원에 법적 소송을 제기하면서 저항하였으나 밴 부렌 대통령시절인 1838년 15,000명 이상이 강제로 이주되었으며 4,000여명이 이주하는 동안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애트란타에서 테네시와 켄터키를 거쳐 오하이오와 미주리 강을 건너 지금의 오크라호마로 가는 그 길을 "눈물의 발자국"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든 부족은 후로리다의 Seminole 족이었는데 이들과의 전쟁에서 1500여명의 미국 군인들이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저항을 하였지만 결국은 이들도 인디안 지역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서부로!”의 진출과 인디언 정벌
이주, 개척 초기에 인디언들과 맺은 계약이나 약속은 종이조각에 불과하였고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몰아냈던 것도 부족하여 앤드류 짹슨 대통령 때에는 인디안 이주정책을 강행, 소위 말하는 눈물의 행진을 통해 중동부의 인디언들을 서부 사막지대인 아리조나, 유타, 그리고 서부 미네소타에서 몬타나, 다코다등 대 평원으로 쫓아 내고 그곳에서 자유로 사냥하며 살라며 그들의 거주를 정식으로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이곳에서도 편히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19세기 말, 영토의 확장과 "서부로!"의 물결이 어울리면서 변방 사막지대였던 인디안 보호지역이 서부로 가는 길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길을 만들고 동네가 들어서고, 철도가 부설되고 카우보이들이 소떼들을 몰아오는 길목에서 인디언들의 영원한 삶터로, 자유로 살라고 한 잭슨 대통령의 약속은 휴지조각에 불과하였고 서부 인디안 영화에서 흔히 보는 서부로 이주하는 백인들을 보호하는 미 연방군대와 인디언들의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우스 다코다의 브랙 힐스(Black Hills)라는 인디안 보호지역을 통과하던 커스터 (Custer)란 군인이 이끄는 일단의 백인들이 그곳에서 금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인디언들에게 그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명했고 이에 그 지역의 시욱스 족 (Sioux) 인디언들이 합세하여 저항하자 커스터는 250여명의 백인들을 데리고 이 지역에 먼저 처 들어가1876년 6월 25일 리틀 빅혼 (Little Bighorn)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커스터가 이끄는 백인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이 때마침 미국 독립 백 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들떠 있는 동부에 전해졌습니다. 그것도 '용감한 우리의 군대가 피에 굶주린 인디언들에게 무참하게 공격 당하여 장열 하게 전사하였다'는 선정적인 보도에 정계와 일반시민들은 격앙하였고 분노하였으며 군대는 당시 전 미 연방 군대의 절반을 투입하여 시욱스 인디안 토벌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작전을 ‘시욱스 전쟁’이라고 부르며 아직까지도 전설적인 이름을 전해 주는 크레이지 홀스(Crazy Horse), 씨팅 불스(Sitting Bull) , 레드 크라우드(Red Cloud) 등 인디안 추장들이 인디안 부족들을 이끌고 대항하여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 연방 군대는 시욱스 인디안 토벌의 여세를 몰아 북서부에서는 넷츠 펄스(Nez Perce) 족, 남서부에서는 아파치(Apache) 족에 대한 토벌작전도 함께 수행하였습니다.
물론 인디안들 가운데는 용맹스럽게 저항하여 승리를 거둔 곳들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을 뿐 결국은 증원된 연방군에 의하여 몰살당하거나 아니면 보호지역에 연금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19세기 말 끝까지 저항하는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끝에 북미대륙에서의 대 인디안 전쟁은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 까지는 슬픈 사연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1888년 인디안들 사이에서는 ‘Ghost Dance’라고 하는 종교적인 운동이 퍼져갔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이 곧 닥쳐 오고 그때에는 인디언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올 것이니 인디언들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백인들의 것은 일체 배격하라며 그들의 습관대로 춤을 추는 종교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 종교는 남서부지역을 중심으로 서부로 번져 나갔고 일부 부족들 가운에서는 춤을 출 때 입은 옷을 입으면 백인들의 총탄을 피할 수 있다며 전의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동향에 위험을 느낀 연방군대는 1890년 12월 보호지역에 수용되어 있는 영향력이 강한 대 추장 씨팅 불스(Sitting Bulls)를 체포하여 죽이고 또 다른 부족의 추장 큰 발(Big Foot)를 추적 그의 일행 350여명을 사로 잡아 사우스 다코다에 있는 운디드 니(Wounded Knee)라고 하는 수용소에 입소시켰습니다. 무기들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한 인디언이 오발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300여명의 인디언들이 기관총에 의해 무차별 학살되었는데 그것이 1890년 12월 29일이었고 운디드 니는 북미 대륙에서 인디언들의 마지막 저항의 상징이요, 마지막 집단 학살의 장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칼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미 대륙(남,북을 아울러)의 역사는 원주민인 인디안 정벌의 역사였습니다. 수천 년 이상을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돌아 다니며 평화롭게 지내던 이들에게 백인들의 도래는 하나의 재앙이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에 그들에게 붙잡혀 당한 노역이나 린치, 땅을 뺏기 위해 저지른 횡포와 착취는 물론 그들이 가져온 병에 대한 면역성이 없어서 속수무책으로 죽어 간 인디언들도 부수기수였습니다. 또 미 합중국이 건립된 이후에는 잘 계획된 인디안 말살 정책에 의하여 정벌, 강제 이주, 학살 등으로 인하여 1500년대 100만이 넘든 인디언들이 1900년대에는 25만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인디언 보호정책과 인디안 지도층의 의식변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미 대륙의 인디언들은 학살로 멸종할 것이고 그들의 문명이나 생활 습관들은 백인들의 문명에 압도되어 이 대륙에서 사라져 버릴 것 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1980년도 센서스에 의하면 인디언들이 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직자가 많은 인종임에는 틀림없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소수민족이라고 합니다.
물론 “병 주고 약 주기”란 비난을 면키 어렵습니다만 거기에는 20세기 들어서면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한 정부의 특별한 배려와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는 자신들이 직접 참여하여야 한다는 인디안 지도층들의 의식 변화가 중요한 몫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운디드 니의 대학살로 끝난 인디안 소탕전쟁 이후 연방 정부는 강압적인 합병에 의한 인디언 말살정책을 더 이상 고집할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더 이상 백인 이주민들이나 연방정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백인이 아닌 타 인종들이 이민의 불결을 타고 몰려온 것도 한몫 하였을 것입니다. 문제는 백인들과 같은 조건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가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융합하도록 할 것이냐? 아니면 그들만의 보호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면서 그들의 생활양식을 고수하고 자치적인 통치형태를 유지하도록 할 것이냐? 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부로 이주해 온 백인들과 그곳에 살던 인디언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일정한 토지들을 나누어주고 필요 없는 땅들은 사고 팔 수도 있게 하면서 정부나 선교기관을 통하여 학교 교육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정착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고 농사 기술도 없으며 땅은 신의 소유이지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디언들에게 이러한 정책은 도리어 백인들의 착취수단으로 바뀌었으며 그들의 전통이나 생활양식을 거부하고 백인들의 문화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학교교육은 분노와 좌절만을 안겨 주어 인디언 젊은이들 가운데는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하는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이후 백인들의 착취와 천대와 차별가운데서 좌절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권리를 허용하고 특정지역에서 자치적으로 그들의 생활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며 자신들의 종교와 생활 습관과 전통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은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서이며 이것을 인디언들을 위한 뉴 딜(New Dea)l 정책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 특별한 권리라는 게 도리어 차별일수 있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바꾸고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인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과 같은 미국의 시민권이 주어진 것은 1924년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인디언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남자들이 전장으로 빠져나간 공장의 인력들을 충원하기 위하여 보호지역에 있던 많은 인디언들이 도시로 옮겨졌으며 2,5000여명의 인디언들이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2차 대전 중 인디언들만이 사용하는 어휘들을 미군의 암호로 사용함으로 독일군들이 미군의 암호를 전혀 해독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전쟁 일화입니다. 그들의 2차 대전 경험은 인디언들로서는 처음으로 겪은 외부세계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후에도 보호지역에 돌아오지 않고 도시에 정착하였으며 보호지역으로 돌아 온 인디언들은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들의 환경에 절망하는가 하면 새로운 정치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야겠다며 분발하는 지도자들로 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1944년 북 미주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40여 부족들의 대표 100여명이 덴버에 모여 <아메리칸 인디언 전국회의>(The National Congress of American Indians, NCAI)를 결성하고 인디언 권리회복의 하나로 미국정부를 상대로 빼앗긴 토지를 찾기 위한 소송운동을 제기하기도 하였는데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1970년대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보호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한편 주거지역을 옮기기 원하는 인디언들에게는 도시로 가는 교통편과 정착에 필요한 지원을 하도록 하여 많은 인디언들이 도시에 가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였으나 통계에 의하면 그 중 3분의 1은 다시 보호지역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1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전국의 70여 개 부족들의 대표 500여명과 카나다와 멕시코의 옵서버들이 참가한 모임에서 참가자들은 ‘인디안의 목적 선언”(a Declaration of Indian Purpose) 이라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는데 그들은 “(정부의) 자선행위나 보호주의를 거부하고” 경제발전이나 교육, 보건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정책에 대한 ‘재정적, 기술적 지원을 요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964년에 조직된 The National Youth Council은 “정부 안의 인디안 전담 부서를 폐쇄하고 인디언들을 조정(control)하는 것이 아니라 조언(advice)하고 협조(help)하는 기구로 대치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인디언 자신들의 의식의 변화와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케네디와 쟌슨 대통령 때인 1960년대에 와서는 미국의 인디안 정책이 부족들의 자치정부를 장려하고 보호지역의 자원들을 개발하는 것으로 다시 바뀌어 갔습니다. 1968년 처음으로 나바조 부족 인디언들이 인디언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는 컴뮤니티 칼레지를 세웠으며 1970년 대에는 인디언 아이들의 87%가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그 숫자는 3만 5천명을 넘었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인디언의 전통문화
인디언들에 대한 정책이 합병과 자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한때는 위험하다고 하여 그들의 종교의식을 금한 적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부족들의 집단생활에서 떠나 대도시로 들어감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이나 문화를 포기하기도 하였지만 미국의 지방들을 여행 하노라면 다행히도 인디언들이 모여 사는 지역마다 그들의 전통을 간직하며 소개하려는 노력들이 비록 관광차원이기는 하지만 붐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Ghost Dance” 종교운동이 있은 뒤 30여 년 동안 인디언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이 금지되고 기독교 선교사들을 보내어 학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종교의식을 강요한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통적인 종교의식들을 자유로 하고 있습니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인디언들에게는 기독교에서와 같은 유일신 사상이나 뚜렷한 신 개념은 없었던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 선교사들이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하였을 때 쉽게 받아들였고 그들의 신앙과의 모순이나 충돌 없이 쉽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인디언들의 종교에는 지난 수 백 년간 기독교와 접촉하면서 받아들인 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는 그들의 신앙을 인디언이라는 이름 때문에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푸에블로 부족들 가운데는 그들의 종교의식을 행하면서 가톨릭 성당에도 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종교에 같이 나가는데 대하여 전혀 갈등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 뉴욕주와 카나다에 있는 이로키 부족들은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지금은 대부분들이 영어를 사용하지만 종교의식에서는 그들의 전통 언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현대 아메리칸 인디안들 가운데 가장 널리 전파되어 있는 종교는 The Native American Church 인데 전통적인 인디언의식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합쳐서 신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나 십자가, 세례의식 등을 행하면서 동시에 중요한 성만찬 의식에서는 환각제의 일종의 선인장 싹들을 나누어 먹으면서 초자연적 존재와의 접촉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대평원에 자리하고 있는 인디언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The Native American Church는 19세기에 한때 성행했었던 ‘Ghost Dancing’ 과는 달리 미 대륙에서 백인들을 쫓아 낼 날이 반드시 온다는 주장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즈음 인디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고대 치료술과 언어, 공예품과 예술품, 노래와 춤과 구전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서부 지역에 모여 사는 나바조 부족의 의술사들은 노래와 의식을 통한 치료행위를 아직도 계속하는데 그 심리적인 효과가 인상적이라 하여 현대의학에서도 관심을 가진다고 하며 부족들을 위한 헤스티발이나 주술외우기는 부족들의 결속과 유대감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행하여 지고 있다고 하는데 8월에 몬타나에서 거행되는 Crow Agency Powwow는 전국적으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있습니다.
1930년대부터 미 정부는 인디언들을 적극 지원하여 그들의 공예품들과 예술품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고 시장을 확보하도록 장려하였으며 1962년에는 싼타 훼에 아메리칸 인디안 예술 학교를 설립하여 인디언들의 예술전통 개발에 노력한 덕분에 특히 나바조와 푸에블로 부족들이 중심이 되어 은과 터크와이저등으로 만드는 보석 류는 미국시장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1969년에는 인디언 출신 소설가 N. Scott Momaday가 제2차 대전 재향군인 인디언의 경험과 고민을 그린 소설 ‘House Made of Dawn’ 으로 푸리처 상을 타기도 하였으며 문화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스미소니안 통계에 의하면 1970년대에 인디언들에 관한 출판물들이 수 백 여권 출판되었으며 그 수는 상승세에 있다고 합니다. 많은 백인들이 언젠가는 멸종되거나 아니면 어는 구석에선가 아무도 모르게 명맥을 이어가리라고 생각하였던 아메리칸인디언들이 온갖 시련가운데서도 살아 남아 그들의 전통을 되살리면서 그들의 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Melting Pot 에서 녹아서 사라져 버리지 않고 Salad Bowl에서 그들의 색 갈을 분명하게 드러낼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여봅니다.
신이 내려 준 자연을 형제와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르며 사랑하면서 욕심 부리지 않고 필요한 것들만 서로 주고받으며 자유롭게 자연을 누비며 살던 그들의 평화롭고도 순수한 마음바탕은 무엇보다도 위기에 직면한 21세기 아메리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기대하는 마음은 더욱 절실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