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시신(屍身)의 마을
①
칠악산(漆岳山).
남북십상성(南北十三省)을 통틀어 가장 험준한 사천성(四川省)에서도 첫 손 꼽히는 험산(險山).
악마의 송곳니처럼 삐죽삐죽 날카롭게 솟아오른 삼십팔(三十八) 첨봉(尖峯)을 비롯해 태고이래 사람의 발길을 철저히 거부해 온 정봉(頂峯) 두악봉(頭惡峯)은 무림인들 조차도 오르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허나 세인(世人)들은 모른다. 바로 이곳에 그 유명한 육천마을 중 천재촌(千才村)이 있음을.
- 천재촌(千才村).
일명 천재악 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천하인들의 온갖 설움을 받으며 사해(四海)를 유랑하는 재인(才人)들이 모여 있다.
광대들의 슬픔을 아는 이 그 누구랴. 그들의 슬픔은 스스로 광대가 되어 천하를 유랑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아니 안다는 말은 오로지 감정의 사치에 불과 할 뿐이다.
둥둥둥둥!
겨울 한 날의 단조로운 적막을 깨는 북소리가 천재촌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북소리는 매우 급박했고 흥겨운 박자를 내포하고 있다. 축제(祝祭)의 북소리일까? 보라.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천재촌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있지 않는가.
"와아!"
"얼쑤!"
"좋다!"
둥둥둥!
피리와 풍령과 호금, 아쟁과 생황(笙篁)등 온갖 악음(樂音)에 맞춰 짐승탈, 각시탈, 옴중탈 등등 기기묘묘한 탈들을 얼굴에 쓴 채 쉴새없이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어찌 보니 모두 신(神)이 오른 무당 같기만 하다.
"여어차!"
"흐이!"
흥에 겨운 노랫가락과 온갖 종류의 악기와 온갖 종류의 재주가 한 곳에 모인 이곳 천재촌의 축제 한마당은 마을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신나게 휘돌아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각기 한가지 재주에 특출한 조예가 있는 광대와 재인들은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자랑하는 기예를 펼쳐 내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그 축제의 난장판 속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단연 줄타기 곡예(曲藝)가 펼쳐지고 있는 드넓은 광장이었다.
줄타기가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으며 뭇 대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줄타기는 다른 재주와는 달리 생명(生命)이 왔다갔다하는 아슬아슬한 재주였기 때문이다. 아니 재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생사(生死)의 피안에 선 일대 승부라고나 할까?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가슴 졸이는 조마조마한 긴박감과 짜릿한 전율을 만끽하기 위해 줄타기 곡예에 모여들고 열광하는 것이다.
"와아! 잘한다!"
"역시 소월랑(笑月 )이 최고다!"
군중들은 절묘한 묘기가 선보일 때마다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이 한순간 만큼은 그들도 여지껏 멸시당하고 설움 받던 한(限)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리라.
군중들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줄타기 묘기를 중심으로 둥근 원형을 그리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사천의 사막을 가로질러 온 대상(隊商)의 무리인가? 낙타를 탄 수많은 이방인(異邦人)들이 둘러서 있었다.
헌데 언제부터 였을까? 열광하는 군중들 사이에서 광대들의 줄타기 묘기를 지켜보는 화사한 미태의 궁장미부가 있었다.
자색궁장의 가슴께엔 핏빛 붉은 용이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그녀의 전신에 서려 있는 것은 오직 서릿발같은 냉기뿐이었다. 마치 드넓은 빙원(氷原) 위에 홀로 선 눈의 여왕(女王)인 양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고고함과 차가운 기품을 지닌 채 그렇듯 오연히 서 있었다. 바로 미막(迷幕)의 막주(幕主)인 백리려려였다.
백리려려는 아까부터 단 한 명의 광대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광장의 허공을 가로지른 새하얀 밧줄 위에는 십여 명의 광대들이 곡예를 하고 있었지만 백리려려가 바라보고 있는 광대는 보기에도 끔찍한 귀면탈(鬼面奪)을 뒤집어쓴 붉은 옷의 광대였다.
그의 몸놀림은 실로 신기(神技)에 가까웠다. 까마득히 높은 허공의 한구석을 가로지른 백색의 외줄 위에서 뛰며, 걸으며, 누우며, 돌며, 솟구쳐 오르는 인간예술(人間藝術)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그는 허공에 피어난 붉은 꽃인 양 뛰놀고 있다. 아름다웠다. 영혼을 울려오는 재인(才人)의 슬픈 미태가 거기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때 백리려려의 두 눈에 언뜻 미세한 파문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본 막의 정보는 확실하구나. 저 귀면탈을 쓴 광대, 자칭 달그림자라고 칭하는 저자는 한림사가 중 풍문의 천풍맥(天風脈)을 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자신(自身)을 넘어선 절대적인 확신이라 해도 좋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줄 위에서 저토록 현란하게 몸을 놀릴 수 없다.'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새하얀 치아가 반짝 빛을 발했다.
헌데 붉은 옷의 광대가 바로 달그림자란 말인가?
이때 외줄 위에서 빙글빙글 몸을 회전시키던 귀면탈 광대의 두 눈에 번뜻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그는 본 것이다. 저 밑에서 자신을 향해 탄성을 터뜨리는 군중들 속에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궁장미부를 말이다.
누구일까? 범상치 않은 여인임이 분명하다. 그 궁장미부로부터 한 가닥 싸늘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귀면탈 광대는 불현듯 예감이 좋지 않았다. 헌데 바로 그때 그의 고막에 차가운 여인의 냉소가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달그림자."
그리고 순간적으로 새하얀 실선이 허공을 그렸다. 그것은 바로 지풍이었다.
팍!
줄이 끊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대와 장대 사이에서 허공을 격하여 팽팽히 당겨져 있던 흰색의 밧줄이 뚝 끊어졌다.
"앗!"
"아앗! 줄이 끊어졌다!"
소란스럽던 군중들의 소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고 두 눈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들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땅에 처박히며 피를 뿌리는 광대의 모습이 스쳐갔다.
헌데 그것은 기우(杞憂)였다. 귀면탈을 쓴 그 광대는 줄이 끊어진 허공을 가볍게 회전하며 그린 듯이 땅에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오!"
"와아!"
충격 뒤에 찾아온 것은 탄성과 미친 듯한 박수소리다.
"최고다!"
"와아!"
그러나 땅에 내려선 귀면탈의 광대는 조용했다. 그리고 탈바가지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을 통해 추운 겨울의 차디찬 삭풍만큼이나 으스스한 한광을 뿜어 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군중 속에 선 백리려려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싸늘한 음성이 다시 고막을 파고 들었다.
"달그림자. 본 선자는 그대가 바람의 문중인 풍문(風聞)의 문주(門主)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귀면탈의 광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부인해 봐야 소용없다. 이미 네 정체에 관해선 모든 조사가 끝났으니까."
귀면탈의 광대가 조용히 물었다.
"너는?"
"본 선자의 이름은 십왕 중의 일 인이자 미막의 막주인 구운봉 해갈선자 백리려려."
귀면탈의 광대의 신형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광대 아니, 달그림자의 두 눈에서 번뜻 이채가 피어올랐다.
주위는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 들었고 광장을 둘러선 중인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찾아온 용건은?"
"그대를 죽이기 위해서."
순간 귀면탈 밑에서 빛나던 달그림자의 두 눈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망언이군. 당신이 비록 십왕 중의 일 인이라고는 하나 감히 본인에게 그런 망언을 할 순 없을 텐데."
백리려려의 입술에 고혹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본 선자가 자격이 없다면 이 하늘 아래 어느 누가 그런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달그림자의 눈가에 차가운 한광이 스쳐지나갔다.
백리려려가 한 걸음 다가섰다.
"길게 끌 것도 없을 것 같다. 너는 무기를 들어라."
어느새 그녀는 양손에 한 자루씩의 은장도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백리려려의 애병(愛兵)이자 최강의 무기인 항아(姮娥)와 월궁(月宮)이었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문득 달그림자는 조용히 하늘을 우러르며 중얼거렸다.
"그래야 할 것 같군."
그의 음성에는 아련한 아픔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왈칵 가슴 속으로 밀려드는 서러움 같은 것이었다.
달그림자는 백리려려를 향해 서늘한 시선을 던지며 자세를 취했다. 아주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백리려려의 옥용에는 감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완벽하다. 저자의 자세는 언뜻 보기에는 무수한 허점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살(殺) 공(攻) 방(防)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
그녀는 신형을 추스리며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인적인 긴장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백리려려의 아미가 조금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저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최고 절학을 펼쳐 일 초에 승부를 내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승부는 한 순간이다!'
문득 백리려려는 왠지 모를 일말의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것은 십왕(十王)의 자존심이었다.
'내가 누구냐. 나 미막의 막주 해갈선자 백리려려, 나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십왕 중 일 인이며 나의 은천단궁파(銀天丹穹破)는 하늘과 땅을 세 번 가른다.'
백리려려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베어무는 순간이었다.
한 겹 침묵의 망사가 베어지며 두 줄기의 차디찬 일갈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단 일 초의 승부였다.
환상과도 같이 펼쳐진 백리려려의 은령비연쌍도세(銀靈飛燕雙刀勢) 중 제삼세(第三勢) 은천단궁파(銀天丹穹破)와 이에 맞부딪쳐 간 달그림자 초강의 무적절기(無敵絶技) 혼돈멸겁탈(混沌滅劫奪)!
혼돈멸겁탈(混沌滅劫奪)은 달그림자 평생의 고련으로 얻어진 필살의 절기이며 동시에 귀면탈을 무기로 사용하여 기필코 상대의 목숨을 뺏는 혈견휴(血見休)의 필살지공(必殺之功)이었다.
팟!
한 개의 태양이 잘게 잘게 부서지는 듯한 현란한 빛의 축제가 있었다. 그리고... 승부는 끝났다.
서로 자리를 바꾼 자세로 서 있는 두 사람의 신형이 휘청하였다. 백리려려의 입가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이 이런 일이!"
그녀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백리려려의 패배였다. 백리려려의 은장도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온 귀면탈을 막았다. 그러나 그 귀면탈이 알알이 부서지며 그 파편의 한쪽이 날카롭게 그녀의 심장을 파고드는 것은 막지 못했다. 백리려려의 얼굴에 최초로 떠오른 감정은 불신(不信)이었다.
"왜 내가...?"
달그림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실수는 귀면탈을 피하지 않고 막았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귀면탈을 막는 순간 귀면탈은 폭발한다. 그리고 일단 조각난 파편들은 원래보다 수백 배의 빠르기로 비산되며 가공할 열기가 담겨 있어 천하의 그 어떤 신병(神兵)이나 호신갑으로도 막을 수 없다."
"그.. 런..가!"
"그것이 네 죽음의 이유다, 해갈선자 백리려려."
쿵!
백리려려의 몸이 엎어지듯 땅 위에 처박혔다. 그녀의 손은 핏물이 터져나오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이때 귀면탈이 벗겨지고 나타난 달그림자의 얼굴을 보라. 차마 인간의 얼굴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둘러선 중인들 중 몇 사람이 구역질을 시작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붉고 푸르고 누런 형형색색의 반점들로 가득 덮인 그의 얼굴은 실로 처절한 것이었다. 한없이 일그러져 검은 주름이 잡힌 그의 얼굴 피부, 눈썹도 없고 눈도 보이지 않으며 코와 입의 구별이 없다.
달그림자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온갖 것을 토해 내는 중인들을 바라보았다. 슬픈 시선이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왼쪽 귀 밑의 움푹 뚫린 구멍 하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너희들은 모른다. 곤륜산의 아늑한 곳에서만 살아온 너희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무인(武人)들은 모른다. 천하를 유랑하는 우리 광대들의 슬픔과 나 달그림자의 서러움을."
②
현성평(玄星坪).
중원의 최남단(最南端) 복건성(福建省)과 무이산(武夷山)의 경계에 위치한 거대한 대평원(大平原). 하늘(天)과 땅(地)이 맞닿은 대지(大地)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광활하다.
타는 듯이 붉은 진홍빛 석양은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도 모자라 이곳 현성평까지 잔광(殘光)으로 채색하고 있다.
그대는 가이없이 드넓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평원 한 가운데에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들판의 모든 초목(草木)과 화조(花鳥)가 석양에 물들어 대홍야(大紅野)로 화한 것을 목도한 적이 있는가?
그것이야말로 인세에서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절대의 장관이다.
저 멀리 아스라한 대평원의 끝에서 하나의 점이 나타났다.
그 점은 점차 거대하게 확대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짐에 따라 확연히 드러난 점의 정체는 바로 사람이었다.
일신에 청의가사(靑衣架裟)를 걸치고 목에는 백팔 염주(念珠)를 걸고 있는 젊은 미승(美僧)이었다. 미승의 기태는 진정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자도(子都)와 반안(潘安)을 능가하는 웅준영정(雄俊英廷)한 옥안(玉顔)에는 불타(佛陀)의 오의(奧義)를 깨달은 듯 신비스러운 미소가 서려 있고, 전신에서 서기(瑞氣)처럼 뻗어나오는 기운은 엄정(嚴正)하면서도 보상장엄(寶相莊嚴)한 불기(佛氣)였다.
뿐인가? 부리부리한 호목(虎目)에서 뿜어지는 신광(神光)은 그대로 뇌전(雷電)이었으며, 한 걸음씩 내 디딜 때마다 발산되는 엄청난 위세는 해일(海溢)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태산마저 사정없이 짓누르는 듯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극강(最極强)의 기도요, 패혼(覇魂)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토록 한 몸에 불기(佛氣)와 무혼(武魂)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이 미승은 누구란 말인가?
미승의 얼굴 또한 석양에 반사되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진홍빛 석양을 바라보며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문에 의하면 십왕 중의 하나인 비왕 율리새는 매일 석양 무렵이면 이곳 현성평에 나와 연무(鍊武)를 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확인된 바는 없으나 그것은 비왕 율리새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라 제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철칙처럼 지킨다고 했지."
미승의 얼굴은 점차 그 어떤 굳건한 결의로 굳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율리새를 찾아야 한다. 아미타불, 만일 이곳 현성평에서도 그 자를 만나지 못한다면 나 무인(無印)은 영원히 그 자를 못 만날지도 모른다."
말을 하면서도 미승은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바로 총정 최후의 기재요, 대소림의 꿈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이었다.
"기필코 나 무인의 손으로 십왕 중의 하나인 율리새를 제거해야 한다. 그 길만이 내게 고귀한 피(血)를 주신 천세미륵 대사부께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다."
무인은 비왕 율리새를 죽이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란 말인가?
"죽인다. 반드시, 그로 인하여 살계(殺戒)를 범해 내 죄 많은 영혼이 무간지옥(無間地獄)의 연화(煙火) 속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인은 자신의 양손을 으스러져라 힘껏 말아 쥐었다.
십왕 중의 일인이며 흑룡강의 문주인 비왕 율리새는 오랫동안 천지를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석양을 바라보며 늘 피(血)와 죽음(死)을 연상한다.
그는 석양이 무공을 연마하는 데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보조자라고 생각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금방 죽음을 느끼게 하는 석양은 언제나 그의 피를 미친 듯이 들끓게 했으므로.
율리새의 입술이 달삭였다.
"이제 나 율리새의 비검혈란구주황(飛劍血亂九州荒)은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해졌다."
비검혈란구주황.
"영원히 파해 시킬 수도 파해 되지도 않는 영세불멸(永世不滅)의 무적초식(無敵招式)을 완성시켰다. 이제 나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인가."
율리새의 꿈이라면 바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태대각이었다.
율리새의 얼굴에는 무한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백 이십 팔 자루의 비수(匕首)를 일제히 쏘아 내어 하늘과 땅을 뒤바꾸는 대파천(大破天)의 신예(神藝), 비검혈란구주황은 설령 천신(天神)이라도 결점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 완벽한 것이 결점이 될 지도 모르겠군."
율리새의 두 눈이 기이한 번들거림으로 깊숙히 가라앉았다.
"이제 십왕 중 어느 누구도 본좌의 적수는 될 수 없다. 남은 일은 나 율리새를 위해 준비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위대한 의자에 앉는 것뿐."
헌데 그때 어디선가 장중한 불호성과 함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율시주는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구료. 십왕만이 천하최강의 고수는 아니오. 그리고 율시주는 그 위대한 의자에 앉기 전에 이곳에서 죽을 것이오. 아미타불...."
순간 율리새의 눈에서 냉전 같은 신광이 폭사되며 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누구냐?"
"율시주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오. 빈승은 소림의 무인(無印)이라 하오."
그 말과 동시에 총정 최후의 기재 무인이 물 흐르듯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은 신법으로 율리새의 삼 장 앞에 나타났다.
율리새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스쳤다.
"무인?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대소림의 꿈이자 소달마(小達摩)로까지 지칭되는 무인이란 말인가?"
그의 음성에는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짙게 서려 있었다.
"그렇소."
무인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율리새는 나타난 무인의 전신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예리하게 훑어보았다.
'음! 뜻밖이군. 이름은 들었으나 총정 최후의 기재라는 무인이 이토록 젊을 줄은.'
율리새가 진심 어린 감탄을 하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타난 것은 물어 볼 필요가 없겠지."
"그렇소. 빈승은 그대에게 비무를 청하오."
무인이 짧게 대답했다. 그때 율리새는 느릿하게 걸치고 있던 자포(紫袍)를 벗었다. 순간 율리새의 전신에서 눈이 멀어 버릴 듯 휘황찬란한 은광(銀光)이 폭사됐다. 놀랍게도 그는 몸 전체가 비수였다. 아니 전신을 온통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수로 칭칭 휘감고 있어 그렇게 보인 것이다.
어느새 무인의 오른손에는 한 자루의 목검(木劍)이 힘껏 쥐어져 있었다. 바로 무인의 독문기병인 단목천검이었다.
"먼저 손을 쓰게. 그대에게 아마 단 한 번의 기회밖에는 없을 테니까."
율리새는 유유자적한 태도로 여유 있게 말했다.
"그대는 본좌가 완성한 비검혈란구주황을 최초로 견식하는 행운을 누릴 것이다."
순간 무인의 입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우렁찬 사자후(獅子吼)가 터져나왔다.
"극락열반검(極樂涅槃劍) 제 일절(一絶) 원(元)!"
팟츠츠츳!
대기를 양단하는 끔찍한 괴음과 함께 무인의 단목천검이 찰나간에 육합(六合)을 수천 수만 갈래로 나누어 버렸다.
천지는 가공할 검막(劍幕)에 모든 빛(光)이 차단되어 암암(暗暗)해지고 그 속에서 소름끼치는 예기(銳氣)가 칼날처럼 비왕 율리새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허나 율리새의 안색은 무표정했고 일 점의 동요조차 없었다. 그저 가볍게 한 발짝을 앞으로 내디뎠을 뿐이었다.
헌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비(飛) 검(劍) 혈(血) 란(亂) 구(九) 주(州) 황(荒)!"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벽력성 속에서 실로 가공할 변화가 율리새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믿을 수 없게도 온몸의 모든 비수가 성난 독사(毒蛇)처럼 꼿꼿이 곤두서는가 싶더니, 곤두섰다고 느낀 순간 그것은 이미 천지십방(天地十方)으로 탄환처럼 무섭도록 빠르게 쏘아져 나갔고, 쏘아졌다고 느낀 찰나 무수한 비수들은 어느새 무인의 온몸을 벌집처럼 쑤셔 오고 있었다.
슈슈슈슛!
무인은 자신이 아는 모든 신법을 생각해 내어 칠백이십방위(七百二十方位)의 빠져나갈 허점을 찾았으나 헛수고에 불과했다.
'이, 이럴 수가? 천하(天下)에 이토록 완전무결하고 악랄한 무공(武功)이 있었다니!'
그는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다.
'율리새! 과연 무서운 인물이다. 이자는 놀랍게도 천하의 모든 검공(劍功)과 암기수법(暗器手法)의 장점을 단 일 초로 융합시켜 놓았다. 으음 그렇다면?'
무인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보리천수(菩理千手) 사망인(死亡人)!"
무인의 왼손이 돌연 허공에서 무수한 수영(手影)을 환출했다.
휘류류륭!
보리천수 사망인이라면 그 위력이 너무도 패도적이고 극악무도하여 달마(達摩)조차 익히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전설의 불예(佛藝)가 아닌가.
까까깡!
시퍼런 불꽃이 작렬하며 무수한 비수(匕首)들이 수영(手影)에 스치자 마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뿐이 아니다. 현란한 수영은 비수 사이를 뚫고 여지없이 율리새의 몸에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율리새의 두 눈이 휩뜨여졌다.
"미, 믿을 수가 없다! 본좌의 비검혈란구주황이 이토록 쉽게 파해되다니!"
율리새는 안색이 급변하여 황급히 신형을 뒤틀어 무수한 수영의 막(幕)을 벗어나려고 했다. 허나 그가 채 몸을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극락열반검 제 삼절(三絶) 명(冥)!"
무인의 자목천검이 그의 정수리를 도끼로 장작패듯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불가(佛家)에도 이런 잔인한 살예(殺藝)가 있었던가?
실로 백정(白丁)의 도(刀)보다도 더욱 정확하고 악랄하며 신속하지 않은가.
보리천수 사망인이 율리새의 몸에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큭!"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서히 무릎을 꿇으며 주저 앉는 그의 표정에는 자신의 패배를 믿을 수 없다는 불신과 회의의 빛이 가득하였다.
그는 왈칵 한 모금의 핏덩이를 토해내더니 맹렬하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은 불꽃같은 율리새의 야망(野望) 또한 허무하게 땅 속에 묻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무인은 허공을 쳐다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만약 얼마 전 내가 극락열반검의 마지막 삼절과 보리천수 사망인을 극성으로 터득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땅에 누워 있는 자는 나 무인이었을 것이다."
십왕 중 또 한 명이 죽어간 이곳은 중원의 최남단에 위치한 대평원 현성평이었다.
③
백마사(白馬寺), 고도(古都) 낙양(洛陽)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명찰(名刹)이다.
사시사철 단 하루도 분향객(焚香客)이 끊이질 않고 주변에는 이름난 명승고적(名勝古蹟)들이 널려 있어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야반 삼경(三經), 백마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오르는 백팔계단(百八階段)에 으스름한 잔월(殘月)위 월광(月光)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백팔계단은 불가(佛家)의 백팔번뇌(百八煩惱)를 상징하는 조형들인데 거대한 청옥석(靑玉石)을 깎아 만든 계단 하나마다 장인(丈人)의 혼(魂)과 정성이 스며 있는 듯하다.
게다가 백팔계단의 측면을 따라 화려한 연화문(蓮花紋)이 섬세하게 아로 새겨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불심(佛心)에 젖게 한다.
헌데 오늘 따라 백팔계단은 장엄한 느낌보다는 왠지 모르게 스산한 기운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한 청년이 유령처럼 백팔계단 위에 나타났다. 미세한 기척도 소리도 없는 불가사의한 신법이었다.
월광에 반사되어 푸르스름하게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바로 자천릉이 아닌가? 그가 무엇 때문에 이곳 낙양 백마사까지 온 것인가?
자천릉은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어두운 빛을 발했다.
"역시 이곳에 있던 난세십보는 아버님에 의해 십팔만사천만장석굴의 만천무보로 옮겨진 것이었나?"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곤오풍우의 말대로 아버님은 곤오풍우에게 죽었음이 확실하다는 것인가?"
허나 그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기나긴 탄식을 터뜨렸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그토록 강하신 아버님께서 곤오풍우에게 죽음을 당하셨다니,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믿지 않을 수도 없고."
헌데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음랭한 음성이 들려오며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자천릉.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한다. 하늘과 땅은 뒤바뀔 수 있어도 아버지가 죽은 것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자천릉은 가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 이런 일도 있군. 이토록 내 주위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고수가 있었다니.'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경악 이전에 경이(驚異)였다. 허나 자천릉은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신형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오십 세 가량의 한 중년인(中年人)이 들어왔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결코 얼굴이 흉악하게 생겨서가 아니었다. 아니 그의 용모는 오히려 극히 청수(淸秀)하여 단아한 기품까지 풍겼다.
그가 공포스럽게 보이는 것은 얼굴에서 쏟아져나오는 지독한 살기(殺氣)때문이었다. 중년인의 얼굴은 차라리 살기(殺氣) 그 자체였다. 오관(五官) 모두가 살기로 어우러져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칼날처럼 느껴진다. 일신에 걸친 것은 혈룡이 수놓아진 자포, 그리고 몸에서는 극패(極覇)의 기운이 태풍처럼 휘몰아쳐 나온다.
"그대는 누구인가?"
중년인의 입가에 흐릿한 괴소가 떠올랐다.
"그대? 천하에서 본좌에게 그대라고 부른 자는 네가 처음이다."
"그대가 누구냐고 물었는데."
"본좌는 바로 초왕사성의 성주 뇌도 신농궁일세."
자천릉의 눈에 번쩍 섬광이 스쳤다.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한 걸물이구나.'
신농궁이 입을 열었다.
"너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무인이겠지."
"흠,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자천릉은 그를 쏘아보았다.
"왜 나를 막아서는 것이지?"
"본좌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를 막아야만 한다. 아니면 죽여야 하던가."
"헛! 재미있군, 무엇 때문인가?"
"허허, 모르는 채 죽는 것이 머리가 편하지. 죽어 가면서조차 머리가 복잡할 필요는 없지."
자천릉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대가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가?"
"허허, 먼저 말하지 않았던가. 본좌는 막는데 목적이 있다고?"
자천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훗! 됐군. 그대가 초왕사성의 성주임을 감안해 도전을 받아들이겠다. 덤벼라. 그대가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무학을 발휘하여."
신농궁의 검미가 꿈틀했다.
"허허, 그대가 먼저 손을 써야겠군. 반복하여 말하지만 나 신농궁은 그대를 막는데 목적이 있으니까."
"훗, 본좌가 먼저 손을 쓰면 그대는 이미 죽어 있을 텐데."
자천릉이 담담히 대꾸하며 좌수를 천천히 천뢰금부 쪽으로 향했다. 신농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다면 고맙군. 늙은이가 먼저 공격을 하겠네."
그의 몸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간다! 멸(滅) 극(極) 뢰(雷)!"
꽈르르릉!
귀청을 찢는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산천초목을 뒤흔들었다.
번쩍!
새파란 번갯불이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자천릉이 빙긋 웃었다.
"후후, 훌륭하군. 단지 뇌성만으로도 이런 위력이 있다니."
그 순간 섬뢰(閃雷)를 동반한 수만 가닥의 칼날 같은 도강(刀 )이 자천릉의 전신을 짓쳐들어왔다.
파츠츠츳!
찰나 자천릉의 입에서 대갈이 터졌다.
"자! 가라! 벽은월과 천뢰금부, 생사뇌섬일천쌍월(生死腦殲一千雙鉞)!"
자천릉의 입에서 낭랑한 대갈성이 터져나오는 순간 그의 양손에서 벽은월과 천뢰금부가 빛살 같은 속도로 허공을 찢었다.
꽈드드등!
드디어 벽은월과 천뢰금부로 펼치는 최고 절학 생사뇌섬일천쌍월이 펼쳐진 것이다.
금강불괴(金剛不壞)고 뭐고 닥치는 대로 천참만륙(千斬萬戮)내며 종내에는 상대를 흔적도 없이 피곤죽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백정 쌍월견의 도끼 수법이 아닌가!
벽은월과 천뢰금부는 허공에서 서로 맞부딪치며 처음보다 수백 배의 빠르기와 위력으로 신농궁을 향하여 벼락같이 쏘아 갔다.
파파파팍!
멸극뢰의 가공할 섬뇌도기(閃雷刀氣)를 뚫고 자천릉의 천뢰금부와 벽은월이 섬전처럼 신농궁의 가슴을 짓쳐 들었다.
퍼퍼퍽!
"크윽!"
짧은 비명성이 신농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며 자천릉과 신농궁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신농궁의 모습은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사지(四肢)는 이미 벽은월과 천뢰금부에 의해 처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벽은월은 가슴에 그리고 천뢰금부는 어깨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그 사이로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회생불능의 치명적인 중상이었다.
"크으윽!"
신농궁의 몸이 짓밟힌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후후, 신농궁. 알아둬라. 본좌의 앞길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막는다면 죽음뿐이다."
그때 신농궁은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허허, 이제 본좌는 죽어도 후회는 없다. 시간을 벌고자 하는 본좌의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되었으니 말이다."
자천릉의 얼굴에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신농궁은 죽어 가고 있었으나 입가에 서린 득의의 미소는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허나 본좌는 애당초 그대를 꼭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본좌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온 것이다. 너의 발목을 붙잡아 놓겠다는 한 가지 일념 하에."
신농궁은 무척이나 통쾌하다는 듯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자천릉! 너는 이제 십팔만사천백와마루로 들어가려면 꽤나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끊어진 십만철로를 다시 잇고 부서진 전각들을 세워야만 잠을 잘 수 있을 테니까...."
신농궁은 그 말을 끝으로 절명하고 말았다.
"무슨 말인가? 신농궁."
자천릉은 불현듯 뇌리를 스쳐가는 예감이 있어 황급히 신농궁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침묵뿐이 아닌가? 자천릉은 모르고 있었다. 십팔만사백와마루가 이미 초왕사성의 공격을 받아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천릉은 잠시 동안 신농궁의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훗, 신농궁. 그대는 착각을 했군. 나 자천릉을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인물로."
죽은 신농궁이 만약 지금 자천릉이 한 말을 들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게다가 그대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 자천릉 또한 그대와 목적이 같다는 것을 말이다. 나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백마를 죽이고 십왕을 제거하려고 했었다."
자천릉의 신형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④
세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로써 불리우는 여섯 개의 마을이 있다.
광대와 곡예사의 마을 천재촌(千才村).
장인들의 마을 술예벌(術藝閥).
하늘의 저주로 불리우는 문둥이의 섬 부나비도(不癩卑島).
죄인들의 지옥 해란주(海蘭州).
유령과 영매의 언덕 매당파(魅堂坡).
그리고 망자의 대지와 시신의 내(川)로 불리는 시망상천(屍亡喪川)!
시대의 산물로 이어지며 인간이되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배척받으며 철저한 모멸과 천대 속에서 한(限)을 가슴에 간직한 채 살아온 사람들만이 모여 만들어 낸 여섯 개의 천민촌(賤民村).
누가 있어 부인할 텐가? 육천마을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천한 땅이자 저주와 죽음만이 존재하고 있는 땅임을 말이다.
천남(天南) 시망상천(屍亡喪川).
산자의 지옥(地獄)이요, 죽은 자의 낙원(樂園)이라 불리는 그곳은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이 연접해 있는 대류산(大流山)에 존재하고 있었다.
음삼삼(陰森森)한 월광이 창백한 빛을 토하며 아리하게 사물을 밝혀주고 있는 밤.
울창한 숲이 흑암덩어리인 양 또아리를 틀고 있는가 하면 가도 가도 끝없이 예리한 난석(亂石)만이 깔려 있는 황무지(荒蕪地)와 오직 잡초 몇 개만이 생명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황량한 황토 벌판이 이어져 있는 대류산은 흡사 죽음의 침묵만이 존재하는 듯 음삼삼한 정적 속에 묻혀 있었다.
헌데 이때 삭았던 무엇인가가 힘없이 으깨어지는 듯한 음향이 너무도 고요한 정적 속에서 섬뜩하게 울렸다.
그 섬뜩한 소리만큼이나 양철판이 깨지는 듯 날카로운 음성이 울린 것은 바로 다음이었다.
"제길, 해골을 밟았군. 온통 시퍼런 인광(燐光)... 좌우간 기분 나쁜 산이야."
"흑나비, 잊었는가? 대류산의 지산(枝山)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 시망산 전체가 부골토(腐骨土)라는 것을?"
부골토(腐骨土)라면 그것은 곧 뼈가 삭아 흙이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헌데 그 한 마디의 대화와 음성은 바로 자천릉과 흑나비만이 소유하고 있는 독특한 웃음소리와 목소리가 아닌가.
산(山)의 허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완만하여 그 정상까지 비스듬한 언덕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곳에 자천릉이 흑나비를 동반한 채 정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헌데 세상에 이처럼 기이하고도 사이하게 느껴지는 땅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밟고 서 있는 땅은 은은한 녹광을 발하고 있었고 그 녹광은 정상에서 더더욱 사이하게 빛을 토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망자(亡者)의 천국(天國)이다. 이곳에서 우리들이 할 일이 있단 말이오?"
"만화무대주의 말을 따르면 그 썩은 시체가 이곳의 녹시천(綠屍川)을 이용하여 무슨 독강시(毒 屍)인가 하는 장난감 인형을 만들려고 한다더군."
"썩은 시체(屍體)?"
"상관목수 잔기사의 이명(異名)이지."
"훗! 그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자가 이곳에 있다는 말이오?"
"썩은 시체는 아마 지금쯤 녹시천(綠屍川)에서 배를 띄우고 시독주(屍毒酒)를 마시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찬양의 시를 읊고 있을지도 모르지."
대단한 야유조였으나 거기에 서려 있는 것은 으시시한 살기였다.
"우리는 먼저 그 찬양시에 소재를 주기 위해 그의 계획과 수하들에 대한 대폭적인 수술을 단행해야 하네. 그래서 나의 요리가 잠시 필요하기도 하지."
"물론 그것 또한 죽음을 위한 요리겠지?"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파앙!
자천릉의 신형은 흡사 유성처럼 포물선을 그으며 정상을 향해 쏘아 갔고 그 뒤를 예외 없이 흑나비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그때 방울 소리가 울리며 시망산 아래로부터 몇 개의 인영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관을 떠메고 있었으며 그 행색으로 볼진대 장의사(葬儀社)들이 시신을 시망산에 묻고자 왔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곧장 정상을 향해 달리듯 올라오고 있었는데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식은 땀이 이마에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장지(葬地)를 찾았는지 적당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들의 주위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음산한 것이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매장되지 않아 부패된 시신들, 이제 막 뼈가 드러나기 시작한 해골, 다 삭아가 흙으로 화하고 있는 잔뼈, 그리고 그 해골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인광(燐光)과 허공에서 재차 폭발하여 바람결에 사이하게 난무하는 푸르른 인화(燐火)!
실로 모골이 송연하도록 전율스런 광경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허나 그들 네 장정들은 평소 이곳에 대한 공포의 면역이 있는지 이어 관을 내려놓았다.
선두에 있던 자가 동료를 돌아보며 그들 세 사람 이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큼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자자, 빨리 끝내고 내려가세."
"제기랄, 이곳만 오면 술맛이 없어진단 말이야."
"나는 마누라를 품을 때 그녀가 시체로 보일 때도 있다네."
"우리들이 이것을 직업으로 삼아와 전전하지만 정말 이곳처럼 무시무시한 곳은 어디에도 없...."
"왜 그래?"
한 명이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자 한 동료가 미간을 모으며 물었다.
"저기."
그자는 손을 들어 가장 음습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대부분 오래된 해골들만이 쌓여 있는 곳으로 기이하게도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나무를 중심으로 일곱 개의 관이 원을 그리듯 묻혀 있었는데 관의 삼분지 일이 밖으로 드러나 있으며 관은 전부 선혈을 묻힌 듯 핏빛으로 으스스한 괴기마저 토해내고 있었다.
"저, 저 것들은 못 보던 관인데?"
"혹 시신의 마을에서 누가 죽어 관에 넣어 이곳에 묻은 것이 아닐까?"
"헌데 왜 완전히 묻지 않고 관의 뚜껑이 드러나 있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던 인물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시신의 마을 사람들은 반드시 관이나 시신을 해골로 묻어 주었는데 이처럼 관이 밖으로 드러난 일은 처음이군."
"내 한 번 가보지."
제법 간이 큰 인물이 나서며 천천히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걸음은 처음의 호언과 달리 갈수록 느려졌는데 스스로 자신의 간담을 자랑하고자 했던 행동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 자는 더 이상의 용기가 없는 듯 한 발을 미처 내려놓지 못하고 망설이다 이마에 식은 땀을 한 방울 또르르 흘리며 허공에서 망설이던 발을 과감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아니, 이게 무슨 고기 냄새냐?"
놀랍게도 해골더미에서 음산한 괴소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발을 내려놓으려던 사내의 눈이 휩뜨여지며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자는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발을 빼려는데 그 순간 해골 더미 속에서 앙상하고 시커먼 손이 하나가 튀어나오며 그자의 다리를 덥석 잡았다.
뭉턱!
그자의 정강이 살점이 베어져 나갔다.
"으아악! 귀, 귀신이다!"
그자는 너무나 놀래 자신의 고통과 중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이 황급히 몸을 돌려 그대로 밑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남은 세 사람도 기겁하여 허공으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나 살려라 전력을 다해 밑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때 해골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면서 하나의 핏빛 관이 붕 떠올랐다.
"건시마자(乾屍魔子), 일 년 동안 이곳에서 시신들을 지켜 왔지만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건드려서야 되느냐?"
"흐흐흐, 활시토마(活屍土魔), 네놈은 마누라마저 쓱싹하고 배부른 소리하고 있구나."
해골 더미가 와르르 무너지며 또 하나의 혈관이 허공에 떠올랐다.
"앞으로는 저 녀석들이 오면 모조리 그냥 두지 않겠다. 자칫 시신들이 상하면 우리의 목이 위험하니 아예 시린수(屍燐樹)에서 지키도록 하자. 이틀후면, 흐흐! 뼈에 붙은 썩은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겠군."
놀랍게도 허공에 뜬 채 대화를 주고 받던 두 개의 혈관은 허공에서 선회하며 괴목(怪木), 시린수 밑에 내려섰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