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
허 열 웅
고추잠자리의 출현은 한 여름 속에서 다가올 가을을 느끼게 하는 희망메시지다. 한편의 서정시처럼 계절을 전달하는 우편배달부인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꿈을 꾸듯 날다가 좌선하듯 멈춰서 깊은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나부끼는 우리의 꿈과 사랑 과 희망처럼 하늘을 맴돌고 있다. 김홍도는 그림 하화청정荷畵蜻蜓에서는 활짝 핀 한 송이 홍련紅蓮위에서 고추잠자리 한 쌍이 짝 짓기를 시도하며 공중잽이를 하고 있는 황홀한 모습을 그렸다.
햇살 밝은 오후 바람도 없는 날 하늘에 홀연히 나타난 고추잠자리는 가을빛이 듬뿍 물들어 있다. 참 맑고 가벼운 모습이다. 햇빛을 통과시키는 삽상한 날개, 창자를 토해낸 듯 홀쭉한 배, 청자 빛 눈동자 그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 같은 건보이지 않는다. 한 소절 노래 소리도 바람을 깨우는 날갯짓도 없이 침묵이 전부다. 내 마음 그가 떠 있는 높이만 올려놓고 내려다보아도 세상사에 흔들리는 일 절반쯤 줄어들지 않았을까, 얼마를 덜어내고 비워야 저 만큼 홀가분하고 가벼울지 부러울 뿐이다.
투명하고 진실한 것들은 오래 침묵한다. 무엇을 설명하고 해명하랴. 우리는 많은 말이나 큰소리가 삶의 큰 의미를 실을 수 없고,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어 줄여야 할 때가 많다. 침묵보다 나은 말이 있을 때만 비로소 입을 열어야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언어와 소리가 사라진 뒤에야 보이기 시작되고 설화도 사라지고 맑은 향기가 퍼지리라. 고추잠자리의 맑고 투명한 침묵은 고행승의 게송偈頌처럼 무겁지도 지루하지도 않을 것 같다.
초등학교시절 곤충채집을 위해 숲 속을 헤매다가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파닥이는 것을 보았다. 작은 생명 하나가 파문이 일으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 숲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거미가 어디에 숨어서 지켜보다가 금방 달려올 것 같아 성급히 놓아주었다. 줄에서 풀려나자 허공을 가르며 하늘 높이 나르는 것을 보며 내 몸도 함께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 몸을 쥐어 짠 은실을 풀어 씨줄과 날줄로 망을 쳐놓고 숨어서 한 없이 기다렸을 거미에겐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푸른 하늘에서 저공비행을 하다가 가을 꽃잎에 잠시 내려앉는다. 외로이 홀로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암자의 선방에서 묵언정진 하는 스님의 모습 같기도 하고,십자가 앞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성자의 자세다. 졸졸 흐르는 개울이나 늪에서 흙수저로 태어나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귤빛으로 번지다가 짙은 황색으로 물들며 춤추듯 맴도는 모습은 온 몸으로 무대를 수놓는 무희舞姬의 모습이다.
잠시 머물다 공중부양 하듯 저공비행을 하며 찌들고 험한 세상을 내려다본다. 한 계절을 성자인양 천사처럼 살아가는 저 가벼운 삶에 비해 우리 세상은 어떨까? 백년도 어려운 주제에 천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꾀 많은 장사꾼이 되어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일상화가 되어가는 삶들이다. 고추잠자리의 가벼운 무중력의 날개가 아니라 밀납蜜蠟으로붙인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고공비행을 하는 이카루스가 되어간다. 거리두기를 모르고 태양을 향해 치솟다가 추락하는 모습이 인간들의 현주소가 되어버렸다.
고장 난 돛단배처럼 흰 구름 몇 점 떠 있는 청자 빛 푸른 하늘에 가득했던 고추잠자리가 요즘엔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분수처럼 뿜어대는 농약 살포와 높은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매연으로 많은 곤충은 물론 동물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잠자리가 줄어들면 모기, 날 파리가 득세하는 혼탁한 세상이 될 것이다. 여우, 늑대는 물론 노루도 줄어들어 갓난아이 울음소리 끊긴 마을 같이 숲속은 쓸쓸해져갈 것이다. 모든 생명의 낙원이었던 백두대간은 식구들이 점점 줄어드는 슬픔에 조용히 안으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이 내려주신 아름다운 지구를 인간들 스스로가 병들게 하고 파괴하며 존속마저 위태롭게 하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햇살이 기울고 노을이 짙어져도 동요하지 않고 하루를 조용히 내려놓는 저 성자와 같은 고추잠자리의 삶을 닮고 싶다. 가벼운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거룩하게 떠나는 법이다. 100근도 넘는 내 몸뚱이와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낡은 탐욕을 훌훌 털어버리고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가 되고 싶다. 가볍고 아름다운 소멸을 위해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 고추잠자리는 꿈속에서도 청명한 가을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다. 고추잠자리가 무리 져 날아다니는 꿈은 “귀한 사람을 만나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해몽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꿈결에 고추잠자리 떼가 나타나 하늘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첫댓글 성자와 같은 모습의 고추잠자리, 잠자리를 보는 회장님의 모습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