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멜랑콜리 [신미균]
벚나무 아래
아흔하나 어머니
앉아 계시네
바람 불면
벚꽃잎이
튀밥처럼 쏟아지네
이제는 가야된다고
인사드리면
밥 먹고 가라고
벚꽃을 잔뜩
주머니에 넣어주시네
늦기 전에
어서 가라고
가라는 시늉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내 옷을 꽉 잡고
놓지 않으시네
- 시사사 2022년 겨울호
꽃나무의 가계 [강지혜]
자정이 넘은 시각, 한 통의 전화.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나 좀 살려 줘. 내가 방금 뭘 치었는데, 차가 완전히 찌그러졌어. 나 여기 어딘지도 모르겠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제발 나 좀 살려 줘.
아기를 안은 여자, 어둠 속에서 사건 현장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잠든 아기를 쓰다듬으며, 낮고 침착한 목소리)......당신이 한 짓을 봐. 똑똑히 봐 둬. 그리고 기억해. 이 모든 순간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해.
남자가 눈을 뜬다. 모든 게 꿈이었던 걸까. 스스로의 구취가 역겹게 느껴진다. 그리고 찾아온 극심한 갈증. 갈증. 갈증. 집 안 어디에도 아내가 없다. 아이도 없다. 정신을 차리자. 여기는 어디지? 여기가 내 집인가? 나는 어디에 있었지? 이곳은 왜 익숙하지? 이때, 남자에게 달려드는 어둠. 맹수처럼
인적이 드문 시골 길. 여자가 구덩이를 파고 있다. 여자의 옆에는 작고 명랑한 아이. 엄마, 이거 뭐지? 엄마, 이거 나무. 나무, 안녕? 이거 꽃이네. 꽃 안녕?
여자와 아이 곁으로 벚꽃잎, 수척하고 아름답게 낙하
여자와 아이 곁으로 시간이 온화하고 날카롭게 흐른다
여자와 아이는 여자와 여자가 되고
벚꽃나무가 가로수로 늘어선 길에 서서
한 나무를 바라보는 여자와 여자
엄마,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지?
비밀 아니야. 어차피 누구도 안 믿을 거야. 아빠를 심어 벚나무를 살렸다는 말을 누가 믿어? 언제든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해도 좋아.
여자가 된 아이의 얼굴
꽃나무를 닮았다
-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지,민음사, 2022
봄밤이다 1 [장옥관]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한때나마 [허림]
가덕으로 드는 길
바람에 날리는 벚나무 꽃잎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 않다가도 문득
한때나마 몸 섞으며 살았던 그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비가 와야 생각나는 우산처럼
한때나마 몸 섞으며 살았던 도시의 한켠
연속극 보며 라면 끓이던 옥탑방
장엄한 노을 불러들이곤 했던
한때나마 꿈으로 궁색을 둘러대던 저녁
이웃집 담장에 쓴
"우리 집 개가 화나면 주인도 못 말린다"는 빨간 문장이
시처럼 따스했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그대가 기억날 때처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정표 같은 말들이어서 더 생생했다
한때나마 살아보려고 하면 된다 된다 되뇌던 문장들의 허구
중독처럼 또 라면을 끓이며
그대의 안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다만, 어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따뜻했다
- 골말 산지당골 대장간에서 제누리 먹다,달아실, 2021
윤달 [김순옥]
내 안의 날씨가 너무 어려워
중얼거리는 말을 모아 쌓으면 기다란 목이 되는
목에 쌓아 올린 새 봄을 읽느라 기린은
오늘도 지각이다
빵집 출입문에 喪中이라고 쓰인 흰 종이가 붙었다
우유를 따르던 기린이
어제는 구름을 마시고 싶다고 했는데
벚나무와 목련 사이
불쑥 밀려든 파도가 흩어져
처음부터 다시,
오늘 빵집 앞을 서성이다가
喪中이라고 쓰인 나를 꺼내 술잔에 담아두고
헐거운 신발을 고쳐 신는데
끈이 손에 닿지 않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기린
아프리카 사바나 어딘가에서 만날 법한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기린
세상에 없는 노래를 부를 때
매번 겪는 시계 방향인데
죽어 본 적 없는 나는 꽃집 앞을 지나는 기린을 본다
목이 넘치거나 다리가 긴 봄이지
내가 눈치 채지 못하는 부분이야
- 2021년 리토피아 여름호
벚꽃 잘 받았어요 [김선우]
이 봄에 아픈 내가
꽃을 놓칠까봐
당신이 찍어 보내온 활짝 핀 벚꽃 영상
여린 꽃들 피어 무거운 가지 들어 올리는 저 힘
어디에서 왔나?
몇뼘 둘레와 몇자 키와 몇근 무게로 측정될 벚나무 속에
두근거리는 저 기운은
벚나무 형상 속, 벚나무 형상 너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무언가
꽃으로 밀려와
오늘
당신과 섞였구나
활짝 핀 꽃나무 아래에서는
마음 섞이는 일이
몸 섞는 일이구나
기운을 내요
전해오는 당신의 마음
향기로운 살을 받아먹는다
응, 기운 낼게요
-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
얼음이 산벚나무 발목을 꽉 [배한봉]
비음산 용추계곡 소沼가 허연 얼음으로, 늙은 산벚나무 발목
을 꽉 붙잡고 있다
연분홍 봄날을 계류로 흘러보내기만 했던 소沼가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고 겨울부터 미리 산벚나무를 온 힘
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제 더는 용서 못한다고 이웃 영진이 할매가 바람난
영감님 허리춤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이다
수태가 저승꽃같이 말라붙은 산벚나무
그래도 역정 한번 내지 않는다, 뼛속 바람 소리가 거칠게 꺾
어져도 뻐적 마른 팔로 시린 하늘이나 휘휘 젓는
산벚나무
그 발목 붙잡고 입 꽉 다문 용추계곡
그러니까 소沼의 허연 얼음은 아무리 추워도 우리 오래오래
사랑하자는 굳센 맹서인 것이다
- 주남지의 새들, 천년의시작, 2017
봄꿈, 진해 [정일근]
꽃피는 봄밤의 꿈은 자음으로 꾼다
연로하신 어머니 곁에 누워 자는 잠 속에
진해의 36만 벚나무 한꺼번에 꽃 만개했다 날렸다
즐겁고 향기롭고 선명하였다
잠 깨면 그 꿈 이야기를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어머니에게 지난밤 꿈이 참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꺼냈다가 횡설수설하다 만다
나이 들면서 꿈에서 모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어머니 그 꿈 다 아시는 듯 빙그레 웃는다
맞다, 그 미소가 어제 내가 꾼 봄꿈이었구나!
- 시인동네, 2020. 5월호
봄, 짧은 봄 [곽은영]
봄
풍성한 벚나무 두 그루
향기는 없는데도 내리막길 끝까지 코를 킁킁거리게 만든다
짧은 봄
모양이 달라졌다면
달처럼 말이에요
있는 걸까요 있었던 걸까요
- 관목들, 문학동네, 2020
밟을 뻔했다 [황동규]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 하다
마스크 산책 나갔다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
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
그리고 아니 벌써 라일락!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
밟을 뻔했다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 쬐그만 풀꽃 둘이
시멘트 블록 터진 틈 비집고 나와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
둘 다 낯이 익다.
노랑은 민들레, 그런데 연분홍은 무슨 꽃?
세상 사는 일이 대개 그렇듯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
알든 모르든 둘 다 간질간질 예쁘다
어쩌다 지구 사람들 모두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서로서로 거리 두는 괴물들이 되더라도
아는 풀 모르는 풀이 함께 시멘트 터진 틈 비집고 나와
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
-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
초대 [전영관]
사람은 사람으로 지우듯
새 사람을 가져야 옛일을 잊는다
비린 새우젓으로 콩비린내를 잡는다
벚나무 가지에 앉은 동고비가
뛰쳐나간 후의 흔들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듯 바라보는데
거실 그득히 비린내가 넘실거린다
물건마다 때 묻는 자리가 있는 것처럼
나와 같은 자리가 아픈 사람을 불러다가
콩나물국에 밥 먹이고 싶다
김치 얹어주고 싶다
비린내는 캄캄한 시루에 갇혔던 후유증
무엇이든 불가능할 것만 같이 단단한 콩이
사각거리는 미래로 자란다고 달래야지
건드리면 안 되는 곳이 있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살피겠지
바람의 발목이 가늘어져 나긋해지거든
아욱국 한번 끓여보자 약속한다
이른 봄비는
눈물 많은 전생을 돌아온 사람인 듯이
잘 마르지 않는다
- 슬픔도 태도가 된다,문학동네, 2020
소리의 거처 [조용미]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 빛이 은
밀히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
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
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
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갈 듯하다
비 오는 날의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2011
주인 [김수우]
무청시래기, 햇살을 꼬며 빈 암자를 지킨다
주둥이 풀린 양파자루, 금간 대야, 홀로 핀 수선화를 지
킨다
옹색한 부처를 이해하는 보살보다 기적을 기대하지 않
는 주지보다
퍼질러 앉아 당당한 것들, 산사의 고요를 알처럼 품었다
흘러오던 물소리, 흘러가며 봇도랑을 지킨다
며칠 째 바람을 물고 당기던 산벚나무, 종일 고무슬리퍼
를 지키고 있다
번갯불 가지고 다닌다는 금강역사가 따로 없다
- 몰락경전, 실천문학사, 2016
산복도로들 [성윤석]
자산동에서 월영동까지 산복도로 불빛들이 흘러내려
바다로 들어갈 때 흘러내리며 무슨 짐숭처럼 꾸불텅거리는
저 어두운 길들이
지나온 모든 길들로 남겨질 때
오징어튀김집 여주인도 재고가 생기면 슬픈데
남겨진 옛일들이야
월영동 벚꽃길에 벚나무들은 하안거에
들어가 골목 골목 무슨 무슨 가정집 같은 절들과
불상만으론 못 살아 무슨 무슨 점집들도 가려주고
속까지 더워지는 병을 비닐봉지에 담아 부둣가에서
통발이나 바다에 던져두는 것은 그깟 장어 몇 마리
기다리려고 한 건 아닌데
자산동에서 교방동까지 산복도로 불빛들이 말하지 못한
문장들을 일기장처럼 감출 때
지나가는 개를 불러서라도 길을 물어보지 못한 일도 아쉬운데
잠처럼 쏟아지던 쓰지 못할 시들이야
- 멍게,문학과지성사, 2014
개심사 가는 길 [곽효환]
구부러진 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개심사 범종각 보러 갔다
소나무 왕벚나무 배롱나무 줄지어
허리 굽힌 여윈 겨울 나무들 아래에서
떨쳐낼 수 없는 너를 보낸다
때로는 가파르고 때로는 좁은
호젓한 숲길에 햇살 비껴 들면
그림자가 같은 너를 보내고
그늘 깊은 가슴으로 돌계단을 오를 것이다
장방형 연못 가로지른 나무다리 건너
고졸한 대웅보전 앞을 서성이다
해 질 무렵 범종 소리 울리거든
굽고 휘고 옹이진 못난 것들의
밀어낼 수 없는 단단한 중심에
널 보낸 내 마음 홀로 들 것이다
오늘 밤늦게 빈 몸으로 터덜터덜
해탈문 밖을 나서는 이 보거든
나인 줄 알아라
- 너는, 문학과지성사, 2018
성자 성자, 벚나무 [권정남]
구룡령 아래 현서 분교 마당엔
오랜 벚나무 한 그루가 있네
달빛 쏟아지는 밤이면
꽃피움을 위하여 명상에 잠겨있는나무
그 나무 아래 놀던
아이들 눈동자 생각이 나네
오래된 벚나무를 보면
평생 한자리에 자신을 가두어 놓고
묵상에 잠긴 봉쇄수도원 수도사가
인도의 성자 싯타르타가 생각이 나네
몸 안의 자신을 갉아먹으며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사람들
만개한 벚나무를 만나러
분교 마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수천의 곷잎들이
지상에 아름다운 말씀 전하기 위해
나비가 되네, 꽃비가 되네
허공을 흔드는 꽃들의 눈짓
하르르 하르르 땅을 적시고
세상 어두운 곳 적셔주고
벚꽃 잎 떨어지듯 봄날이 가면
차르륵 차르륵
성자들의 옷이 지상에 끌리는 소리
- 월간<태백>2018.04. 아트인라이프
은빛 병어, 진해(鎭海) [서림]
장복산 이내가
여인의 엷은 한숨 풀어지듯
지붕들 위로 무시로 내려앉음
양수(羊水) 찰랑이는 진해만 안개가
길고 흰 팔로
벚나무 미끈한 허리를 휘감음
여인처럼 누워 뒤척이는 소도시
팽만한 가슴 안에서
벚꽃 이파리 난분분
그 꽃이파리 떨어진 경럭마다
배롱이 점점 피어오름
저녁 바다에 튀어오르는
은빛 병어, 진해가 파닥거리며
배롱의 묽은 입술로
떨어지는 햇살을 쪽쪽 빨아먹고 있음.
-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문학동네, 2000
봉지 쌀 [고영민]
벚나무 밑에 꽃잎이 하얗게 쏟아져 있다
봉지 쌀을 사오던 아이가 나무 밑에 그만 쌀을 쏟은 것만 같다
아이가 주저앉아 글썽글썽 쌀을 줍는 것만 같다
집에는 하루 종일 누워만 지내는 병든 엄마가 있을 것만 같다
어린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속이 썩을대로 썩은 늘 우는 엄마가 있을 것만 같다
배고파도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는 착한 동생들이 있을 것만 같다
날 저무는 문밖을 내다보며 그저
왜 안 오지? 왜 안 오지?
중얼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벚나무야, 내게 쌀 한 봉지만 다오
힘껏 나무를 발로 차본다
쌀을 줍고 있는 아이의 작은 머리통 위로
먹어도 먹어도 배부를 리 없는 흰 꽃들이
하르르, 쏟아진다
- 구구, 문학동네,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