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시집 『우리 동네』
[표4]에서
오탁번 시인은 생쥐나 까치 같은 미물과도 공존하는 우리네 토박이 삶의 너그러운 풍정을 살가운 토박이말로 감칠맛 나게 표현했다. 날카롭게 칼금을 긋고 사는 지금의 각박한 삶과 비교해보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들겠지만 "조붓한 우리 집 아침 두레반"으로 표상되는 그 안온한 화평의 시간이 분명 우리에게 존재했었다. 마음의 안쪽에서 지펴져 나오는 그 따뜻한 화합과 공존의 숨결이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사라져가고 있고,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여러가지 해악을 낳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의 강팍한 심성에 온화한 숨결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 이숭원(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오탁번의 이런 ‘無의 길’, ‘無心의 길’, ‘一心의 길’은 그가 지닌 현자의 안목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이에게 현자까지의 길이 참으로 멀면서도 가깝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탁번의 시세계 속에는 이런 부분이 존재함으로써 그의 시가 밥과 성이라는 물질적, 생리적 욕망의 세계 속에 한정되지 않는 정신적 높이와 넓이를 지닐 수 있게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밥과 성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이, 늙음, 죽음, 존재 등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을 실존의 차원에서는 물론 형이상학적으로도 풀어보고자 하는 시인이다. - 정효구(평론가,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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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내가 사는 愛蓮里의 三絶은
제비, 수달, 반딧불이다.
나는 이제
제비똥, 수달똥, 반딧불이똥이나 돼야겠다.
2010년 여름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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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 1943년 충북 제천 출생.
• 원주중고교, 고려대 영문과, 대학원 국문과.
•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아침의 豫言』『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생각나지 않는 꿈』『겨울강』『1미터의 사랑』『벙어리장갑』『손님』『우리 동네』.
• 한국문학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 한국시인협회 평의원,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북 리뷰>
오탁번 시집 <우리 동네>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셨고, ‘아침의 豫言’,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등 다수의 시집을 낸 바 있는 오탁번 시인이 최근 다시 <우리 동네>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내가 사는 愛蓮里의 三絶은
제비, 수달, 반딧불이이다.
나는 이제
제비똥, 수달똥, 반딧불이똥이나 돼야겠다.
시집을 펴자 마자 목차 앞에 쓰여진 짧은 ‘시인의 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집 전체의 풍경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시인 스스로를 愛蓮里의 四絶에 포함시키지 않고 겨우 “제비, 수달, 반딧불이의 ‘똥’이나 돼야겠다”니, 역시 오탁번 답다. 오 시인은 늘 이렇다.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등 신춘문예 3관왕을 기록했고, 고려대 교수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 학자이면서도 스스로를 낮춰 ‘헛똑똑이’라고 말하는 시인. 그 오탁번 시인이 젊잖은 어른이 아니라 천둥산과 박달재를 바라보며 ‘어린 소년 시절의 탁번이’, ‘개구쟁이 탁번이’로 돌아갔다. 막걸리 몇주전자 마셔야 겨우 나올까 말까 한 얘기들을 애련리 사랑방에서 걸쭉하게 쏟아 놨다.
시인의 고향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이다. “야생화가 나비와 벌을 유혹하고 제비가 날아와 새끼를 치는 곳,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수놓고 백로가 산허리를 베며 날아가는 곳, 박달재와 천둥산 사이에 수줍은 야생화가 숨어 있는 곳”이 그곳이다.
오탁번 시인은 2003년 3월 자신이 다녔던 백운초등학교의 폐교된 애련분교를 사들여 아담하고 멋진 문학관을 꾸미고 遠西軒이란 이름을 붙였다. 遠西는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으로서 ‘제천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몇십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의 옛이름을 찾아준 셈이다.
교실 3개 짜리 건물을 사무실, 자료전시실, 강의실로 개조하고 정원에 나무와 꽃을 심고 조그만 연못도 꾸며 창작분위기가 절로 나게 만들었다. 문학관 입구에는 400년된 느티나무도 있어 시골정취를 더한다.
감곡에 사는 여자들이
꽃 피는 원서헌에 놀러왔다
국수 말아 점심 먹고
술기운이 노을빛으로 물들 때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내 옆에 선 여자가 살갑게 말했다
-이래도 되죠?
내 팔짱을 꼭 꼈다
-더 꼭!
사진 찍는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럴 때면 나는
마냥 달콤한 생각에
푹 빠진다
-나랑 사랑이 하고 싶은 걸까
헤어질 때
또 팔짱을 꼭 꼈다
나는 살짝 속삭였다
-나랑 同寢이 하고 싶지?
속삭이는 내 말을 듣고
그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치미 먹고 싶으세요?
허허, 나는 꼭 이렇다니까!
<시 동치미>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먼저 웃음부터 나온다. 우리 말의 同音을 멋진 유머로 엮어 낸 시, 오탁번 시인의 시 중에는 이런 농담조의 시가 하나둘이 아니다. '우리 동네'를 가보면 안다. '술레잡기'를 하다 언뜻 보면 '고추잠자리'도 보이고 '遮日' 친 잔치집도 있다. 박달재 마루 도토리묵을 파는 식당 앞에는 길쭉하고 뭉툭한 '男根'이 석양 아래 반짝 반짝 빛나고, '고얀 년 같으니라구!' 큰 소리치는 엄하디 엄한 '할아버지'가 자주 다니시는 '별다방'도 있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을 끼고 옆마을을 찾아가면 시인이 좋아하는 '굴비'도 구할 수 있고, 과속질주 음주운전 신호위반이 허용되며 고속도로 통행료도 면제되는 遠西賓館, 이른 바 '파 웨스트 러브호텔'이 있는 동네가 그곳이다. 우리 말의 오밀조밀한 뜻과 소리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면서도 결코 고고한 척 하지않고 유머, 性的 표현도 전혀 마다하지않는 시인, 오탁번 시인은 그런 분이다.
잣눈이 내린 겨울 아침, 쌀을 안치려고 부엌에 들어간 어머니는
불을 지피기 전에 꼭 부지깽이로 아궁이 이맛돌을 톡톡 때린다
그러면 다스운 아궁이 속에서 단잠을 잔 생쥐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살강 위로 달아난다
배고픈 까치들이 감나무 가지에 앉아 까치밥을 쪼아 먹는다
이 빠진 종지들이 달그락대는 살강에서는 생쥐들이 주걱에 붙은
밥풀을 냠냠 먹는다 햇좁쌀 같은 햇살이 오종종 비치는
조붓한 우리집 아침 두레반
<시 두레반> 전문
문학평론가인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오탁번 시인은 생쥐나 까치같은 미물과도 공존하는 우리네 토박이 삶의 너그러운 풍경을 살가운 토박이말로 감칠맛 나게 표현했다”고 말한다. 이숭원 교수는 “날카롭게 칼금을 긋고 사는 지금의 각박한 삶과 비교해 보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들겠지만 ‘조붓한 우리집 아침 두레반’으로 표상되는 그 안온한 화평의 시간이 분명 우리에게 존재했었다. 마음의 안쪽에서 지펴져 나오는 그 따뜻한 화합과 공존의 숨결이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사라져가고 있고,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해악을 낳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의 강퍅한 심성에 온화한 숨결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고 평한다.
음력 4월 15일
夏安居 結制날 아침
백담사 극락보전 부처님께
三拜 올리는 스님을
멀찌가니 뒤에서 바라보다가
한 瞬間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섬돌 위에
스님이 벗어놓은
힌 고무신 한 켤레가
뇌성벽력 치는 하늘로
노 저어가는
작은 돛배처럼 보였다
三拜 올릴 때
무슨 생각했느냐는
나의 물음에
-아무 생각 안 했어
스님은 덤덤히 웃었다
은하수 물녘까지
한 瞬間에 다녀온 듯
袈裟 자락이 서늘했다
<시 瞬間> 전문
시인은 '술레잡기', '별다방', '동치미' 얘기를 하고 어릴 적 '두레반' 추억을 더듬다가 갑자기 백담사 스님 얘기로 엄숙해진다. 정효구 충북대 교수는 “오탁번의 이런 ‘無의 길’, ‘無心의 길’, ‘一心의 길’은 그가 지닌 현자의 안목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어린이에게 현자까지의 길이 참으로 멀면서도 가깝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부언한다. 정 교수는 또 “ 오탁번의 시세계 속에는 이런 부분이 존재함으로써 그의 시가 밥과 성이라는 물질적, 생리적 욕망의 세계 속에 한정되지 않는 정신적 높이와 넓이를 지닐 수 있게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밥과 성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이, 늙음, 죽음, 존재 등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그것을 실존의 차원에서는 물론 형이상학적으로도 풀어보고자 하는 시인”이라고 평한다.(정리/임윤식)
안행雁行
오탁번
해 설핏 기운 북녘 하늘로
나울나울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고래실 논바닥에서 벼이삭 쪼아 먹고
미꾸리도 짬짬이 잡아먹어
날갯죽지에는 보동보동 살이 올랐겠다
휴전선 넘어 날아갈 때는
형제끼리 총 겨누는 사람들이 미워서
물똥도 찍찍 내갈기겠다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황해도 연안 갯벌에 내려앉아
북녘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
천수만 갈대밭 흔드는
겨울바람 소리도 전해주겠다
압록강 건너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이 씨 뿌리던
광막한 만주벌 날아갈 때는
기럭기럭 기럭기럭 슬피 울면서
천오백 년 전 고구려 때
흙 속에 깊이 묻혀
여태껏 눈도 못 튼 볍씨의
긴긴 잠을 흔들어 깨우겠다
나볏이 줄지어 날아가는
이웃 형제처럼 수더분한 기러기 떼여
고구려 사람들의 鳥羽冠 깃털같이
못자리에서 쑥쑥 자라는 모를
마을 사람들이 두렛일로
한 모숨 한 모숨 모내기하듯
몇 천만리 아득한 북녘 하늘을
나울나울 정답게 날아가겠다
안해
오탁번
토박이말 사전에서 어원을 찾아보면
‘아내’는 집안에 있는 해라서
‘안해’란다
과연 그럴까?
화장실에서 큰 거 하고 나서
화장지 다 떨어졌을 때
화장지 달라면서
소리쳐 부를 수 있는 사람,
생일 선물 사줘도
그냥 지나가는
그냥 그런 사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그런 사람인데
집안에 있는 해라고?
천만의 말씀!
어쩌다 젊은 시절 떠올라
이불 속에서 슬쩍 건드리면
-안 해!
하품 섞어 내뱉는 내 아내!
봄편지
오탁번
무당새가 우편함에 또 알을 깠다
올해는
큰 우편함 작은 우편함
양쪽에 다 둥지를 틀었다
주근깨 나란한 하늘빛 알이
다섯 개씩
앙증맞은 둥지 안에
반가운 편지처럼 다소곳하다
무당새가 우편함에 둥지를 틀면
우체부 아저씨는 골치 아프지만
할아버지는 싱글벙글한다
우편함 대신으로
대문 옆에 갖다 놓은 항아리 안에
편지를 넣던 우체부가
우리 할아버지 흉을 본다
— 어르신은 꼭 애들 같아요
예쁜 무당새가
아기자기 봄소식 전해주는
애련리 198번지
우리 할아버지 집
小春
오탁번
된서리 내린 깊은 가을 해거름
삐약삐약 핸드폰이 울더니
‘버선코 같은 초저녁별 한 접 보냄다’
어느 미운 여류시인이 보낸
간질간질한 메시지가 오네
명왕성 근처 과수원에서
퀵 서비스 광속으로 보내 온
능금처럼 잘 익은
초저녁별 한 접 받아 드네
사라져간 젊음의 피톨 하나하나
서럽게 불러내어
반짝이는 등불을 켜듯
별 하나 하나 맛있게 까 먹네
봄날처럼 따듯한 햇살이 비추는
기러기 혓바닥만한
小春의 들녘에는
알맹이 다 털어버린 볏단이
면도도 하지 않은
흰 수염 다붓한 내 턱처럼 시린데
그대와 나
아직 못다 한 인연이라도 있는지
그렇고 말고 시늉하듯
초저녁별 깜박깜박 빛나네
스톤헨지 세우고 피라미드 뚝딱 만들던
선사시대의 거인처럼
별 한 접 다 먹고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보는 하늘에는
되똥되똥 길 잘못 든 살별 하나
능금껍질처럼 곡선으로 사라지네
안 되겠다 안 되겠다
그대와 나
버선코마냥 오똑오똑한 새끼를 낳자
앙증맞은 小春의 햇볕 아래
토실토실하게 키운 새끼가
깡충깡충 태양계 너머로 달아나면
우리는 그냥 팔짱을 끼고
새끼 따라 은근슬쩍 잠적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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暴雪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