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아들의 고백(告白)
김 상 립
어머니, 제가 젊은 날, 서울에서 통영까지 가는 길은 결코 수월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 길이 멀기도 했지만, 교통편이 지금보다는 너무 낙후되었기 때문이지요. 서울서 저녁 기차를 타면 밤새 달려 겨우 새벽에야 부산역에 닿는답니다. 저는 빠른 걸음으로 부두로 내달려 남 먼저 표를 사야 했고, 제대로 요기도 못하고 시간을 재다가 첫 출항하는 여객선으로 갈아타고 4시간을 뱃멀미에 시달리며 가야 했습니다. 저로서는 바쁜 일상에서 어렵게 짬을 낸 것인데 가고 오는데 3 일을 써버리고 나면, 고향에서 머무는 날이래야 고작 하루나 이틀뿐이었답니다.
짧은 시간에 얽매여 허둥대다가 떠날 시간되어 어머니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설 때면 당신은 꼭 한길까지 따라 나와 “얼른 가거라. 시간 늦겠다”하시며, 잡은 손을 뿌리쳤지요? 그러나 한참을 내려와 뒤돌아보면 언제나 당신은 동네 입구에 서 있는 우체통처럼 꿈쩍도 않으셨지요. 아마 제가 부두에 닿아 부산가는 배에 오를 때 까지는 그대로 서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 긴 기다림이라면 차라리 다른 어머니들처럼 여객선 터미널까지 내려와 손을 흔들며 이별하면 좋을 터인데 종내 그러시지는 않더라고요.
군부정권하에서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선두에서 이끌고 있던 대학시절에, 그 위험하고 불안했던 자식을 지켜보면서도, 얼른 집으로 내려오란 연통도 넣지 않으셨던 어머니셨지요. 제가 쫓기는 몸으로 딱 하루 어머니 곁에서 잔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아무 말 없었고, 어머니 또한 말없이 제 손만 잡아주셨지요. 새벽녘에 잠이 깨어 슬쩍 어머니를 훔쳐보니,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입술이 붙어버렸는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에도 예상치 못한 계획의 차질로 힘들게 시작된 서울생활에서 1년에 잘해야 한 두어 번 밖에 어머니를 뵙지 못했지만, 짬 내어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도 없었던 어머니십니다. 건강하셨던 당신이 어쩌다 병원출입을 해야 할 일이 생겨도 소식을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요. 나중에 내용을 알고‘왜 연락하지 않았냐’고 불평이라도 하면, ‘서울에서 예까지 거리가 어딘데…’ 하시며 전화를 끊어 셨습니다. 그 후, 제가 직장을 서울에서 대전으로, 또 대구로 옮겼어도 굳이 이유를 묻지 않으셨답니다.‘새로 이사한 곳이 지나기는 어떠냐?’ 하고 물어주시기 은근히 바랐지만 말입니다. 저의 객지 생활이 너무 길게 이어진 까닭으로 끝내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못했지요. 비록 말씀은 없으셔도 당신의 삶은 저를 기다리시느라 많은 날을 초조하게 보내셨을 터인데, 저는 막내라는 핑계를 앞세워 그런 당신을 잊고 산 날이 더 많았으니, 제 자신을 불효자라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제가 자식 둘을 출가시키고 명절이라도 돌아오면, 괜히 거실을 서성이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날이 쌓여가자, 당신이 보여줬던 침묵의 의미가 더욱 커져갔답니다. 당신의 말없는 기다림은 무조건적 믿음이요, 사랑이었던 것을 이제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저를 보내놓고 못 밖은 듯 서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등신불(等身佛)처럼 굳어져 줄곧 내 잠재의식에 자리잡고 있었던 사실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형상은 늘 저를 향해 뜨거운 사랑의 기운을 보내셨고, 제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을 때도 저의 발길을 독려했지요. 더러는 헛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직접 이끌어 주기도 하셨고, 진정 용기를 내야 할 상황 앞에서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답니다. 성정이 불 같은 제가 인내의 꼬리를 붙들고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당신의 말없는 기다림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살면서 어머니의 기다림을 정말 깊이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39세에 보셨으니 아무래도 세대차이의 단단한 장벽을 쉽게 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 한 것은 제가 살면서 아무 말도 없이, 또 바라는 것도 없이 간절히 누구를 기다려본 일이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지 싶습니다. 생전에 당신의 속 마음을 살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했어야 했는데, 어머니를 미쳐 몰랐던 어리석은 행위가 이렇게 제 가슴을 치게 합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싶어도, 저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너무나 그립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유언 따라 유골을 통영 항구가 한 눈에 잘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뿌리고 나서, 얼마나 울었던지 해가 기울고 있었지요. 하지만, 세월이 하 많이 흘러 이제는 어머니의 육신은 자연에 완전히 녹아 들어 나무와 꽃, 들풀이나 흙으로도 바뀌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곳을 찾을 때마다 주변 자연에서 어머니를 진하게 느끼게 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 10년 전쯤에 이 곳은 시(市)에서 지정한 공원이 되어 도로는 물론이요, 주변환경마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으니 참으로 보기에 좋습니다. 만일 어머니와 여기 이 아름다운 산책길을 함께 걸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길가에 주저앉아 시간도 잊고 혼자 이렇게 넋두리를 쏟아내고 있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어머니 생전에 그렇게 저를 기다리도록 만든 이 불효자식도 어느새 짙은 황혼 속에 서 있으니, 제가 살아서 어머니를 그리워할 시간이 얼마 없다는 현실입니다. 요즘 잠자리에서 매일같이 어머니를 기다려보지만 꿈 속에서조차 모습은 고사하고 작은 흔적마저 보여주지 않으시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어머니의 존재는 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었지만, 나는 어머니에게 그저 그런 아들이었다는 후회뿐입니다.
첫댓글 선생님의 고향 통영을 무척 좋아합니다.
호수 같은 물결과 작은 섬들이 모형처럼 떠있는 남해는 늘 동해만 봐왔던 제게 새로운 바다였지요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당숙께서 그칠 줄 모르고 우는 조카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남은 것이 후회뿐이라고요
부모는 기다림을 숨기고 자식은 후회를 품게 되는 모양입니다.
애틋한 마음이 깊게 전해집니다.
자식들이 모두 외국에 나가 살아 눈감는 순간까지 걱정하시던 저의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 마음 헤아리지 못한 자식들. 후회의 눈물만 뿌렸지요. 작품이란 공감을 통해 아픔을 치유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우둔하여 60이 넘을 때까지도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했지요.
맛난 것도 좋은 것도 모두 당연했습니다.
퇴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님의 소중함이 번개처럼 뒷퉁수를 때립디다.
오늘날까지 제가 누려온 이 모든 평화가 어디서 온 것이겠는지요?
깊이 뉘우치고 '고맙다'고 말하려니 부모님은 이미 저 세상 가시고 ~.
일회담 반대데모가 일어난 시기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려고 하던 1965년 즈음일 것입니다. 해방 후 20년 쯤 지난 때이니 국민 감정이 절대로 일본을 용서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더 컸을 것입니다. 나라는 육이오 사변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희망이 보이 질 않았지요. 한일 협정 이후, 월남전 파병, 서독 광부와 간호사 송출 같은 "먹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던" 역사적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고 10월 유신이 일어나고, 박정희가 서거하고, 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5,6공 청산과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일어나고, 그렇게 소용돌이 치는 역사 속에서, 5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상은 공산당보다 더 공산당스러운 말도 안되는 억지와 거짓이 횡횡하는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 되었고,
부모 소중하게 여기는 자식들 보기가 하늘의 별보기 보다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걸 자기 편리성과 자기 이익을 위주로 합니다. 말로는 효도 하지만 실재는 철저하게 자기 위주로 살지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런 사회 시스템이 과연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인지요?
인간의 이런 무지를 보고 저는 "뭣도 모르고 흔든 깃발"이라는 수필을 썼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미 떠나신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아직은 그늘이 되어 주시는 엄마에게 늘 잘 해야지 하면서 내 앞가림이 바빠 허둥대기 일수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남평 선생님의 수필이 큰 울림을 줍니다.
"한그릇 더 먹어. 그거 먹고 되겠나."
내가 이렇게 살이 무지 찐 이유는 선생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선생님께 얻어먹은 밥 그릇 수만 헤아려봐도 살이 안찔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맛난 음식 좀 사드릴려고 하는데 빨리 기운 내셔서 자리털고 저랑 다니시죠.
"송하야. 오늘은 뭐가 먹고 싶다."
이 말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남평 선생님 글 잘 읽고 갑니다. 제가 뭐라고 말흠 드리기엔 주제 넘은 것 같아 인사만 드립니다. 하루 빨리 건강 회복하셔서 정리정돈 잘 된 양복과 짙은 빨강 머플러 하신 모습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