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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y of Israel and Palestine – 4,000 years of history in 2,500 words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 2,500 단어로 표현하는 4,000년의 역사
The land at the heart of the Middle Eastern crisis is at the centre of world attention again. For those whose grasp on the history behind the situation is hazy, Graham Tomlin offers a brief survey.
중동 위기의 중심에 있는 땅이 다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역사적 배경이 잘 이해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 그레이엄 톰린은 간략한 개론적 설명을 제공합니다.
Graham Tomlin
Graham is the Director of the Centre for Cultural Witness and a former Bishop of Kensington
필자: 그레이엄 톰린(문화증언센터 센터장, 前 켄싱턴 주교)
번역: 시대문화와 선교 연구소 번역팀 / 감수: 허범 신부, 이경래 신부
The story begins around 1800 BC, in the middle/late Bronze Age. According to the bible, a nomadic tribal chief called Abraham received a mysterious call from God – known by the name of YHWH – not another tribal god among many, but the Creator God above all the gods. He was to move from his home in Ur in Mesopotamia, in modern day Iraq, to travel to Canaan in the west - a fertile strip of land bordering Mediterranean Sea, a land inhabited at the rime by various tribes known as Canaanites and ruled by the Egyptian Pharaohs.
이야기는 기원전 1800년경, 청동기 시대 중후반부터 시작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이라는 유목민족 부족장은 하느님의 신비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신은 여러 다른 부족 신들 가운데 또다른 신이 아니라 야훼(YHWH) 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모든 신들을 능가하는 창조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날의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우르에 있던 그의 집을 떠나 서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 비옥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당시 가나안에는 가나안 족속이라고 불리던 다양한 부족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Biblical texts report that somewhere around 1400 BC, the small tribe which understood itself to be the descendants of Abraham migrated further to Egypt. There, they experienced severe hardship, and sought to escape back into the land of the Canaanites, through a miraculous event known as the Exodus in around 1250 BC.
성경에 따르면, 기원전 1400년경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인식했던 작은 부족이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혹독한 고난을 겪었고 기원전 1250년경에 '출애굽' 이라는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다시 가나안 땅으로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Over the coming centuries they began to settle in the land. The biblical stories depict this as a largely violent conquest, although the archaeological evidence suggests gradual assimilation into the land. It may have been a mixture of the two.
수 세기에 걸쳐 그들은 이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대체로 폭력적인 정복으로 묘사하지만,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그들은 점진적으로 이 땅에 동화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둘 다 섞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The growing kingdom
확장하는 왕국
Around 1000 BC, the people now known as Israel, after one of Abraham's descendants, chose a king for the first time, called Saul, but it was his successor David who expanded the Israelite kingdom, capturing the ancient Jebusite stronghold of Jerusalem, making it the capital of the new nation. His son Solomon later built a Temple in the city, dedicated to YHWH, the God of the Israelites.
기원전 1000년경, 아브라함의 후손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초대 왕으로 사울을 선택했는데, 그의 후계자 다윗은 고대 여부스의 견고한 요새였던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이를 새로운 국가의 수도로 삼으며 이스라엘 왕국을 확장시켰습니다. 이후에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의 신 야훼에게 봉헌했습니다.
Infighting within the nation resulted in a division into two kingdoms,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nd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In 722 BC, Israel was overrun by the Assyrians to the north, and in 587, Judah fell to the Babylonian king, Nebuchadnezzar, who destroyed Solomon’s Temple.
내부 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점령당했고, 남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왕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당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Most of the Israelites were taken into exile, some scattered into Syria, many taken away to the dominant empire of Babylon. In 538 BC, by which time the Persians had taken over as the dominant empire in the region, Cyrus, the Persian king, gave permission to the descendants of the exiles to return to their ancestral land. In around 520 BC the Temple was rebuilt, even though it was a mere shadow of the former building. Around 445 BC, Nehemiah, against much opposition, tried to rebuild the walls of Jerusalem, to make it a fortified city.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는데, 일부는 시리아로 흩어졌고, 많은 이들이 당시 주도 제국이었던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습니다. 기원전 538년, 이 지역의 지배적인 제국으로 자리 잡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포로들의 자손들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기원전 520년경에는 비록 예전 건물의 흐릿한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성전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느헤미야는 기원전 445년경에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요새 도시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In 333 BC, the remarkable young Greek warrior, Alexander the Great, conquered the land. When he died in 323, two empires emerged from the territories that he ruled – the Ptolemaic and the Seleucid empires. These empires took it in turns to rule over the land until the Maccabees, a radical Jewish group, revolted against the Seleucids and formed a Jewish kingdom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exile. This was the Hasmonean kingdom which lasted from 142 BC until it was overrun by the expanding Roman Emperor, with Pompey conquering Jerusalem in 63 BC.
기원전 333년, 젊고 뛰어난 그리스 장군 알렉산더 대왕이 이 땅을 정복했습니다. 기원전 323년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지배 아래 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두 제국이 탄생했습니다. 이들 제국은 번갈아 가며 이 땅을 지배하다가 포로기 이후 최초로 유대 왕국을 세운 급진파 마카베오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반란을 일으키며 하스모니아 왕조로 넘어갑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기원전 142년부터 강대해지는 로마 황제 폼페이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기원전 63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The Roman and Byzantine empires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들
In 37 BC, Herod the Great, a half Jewish-half Idumean, ambitious yet paranoid man became king of Judaea with the permission of the Romans. He built several remarkable buildings, including a new, grand Temple in Jerusalem, the one present at the time of Jesus. In or around 6 BC, Jesus of Nazareth was born. He lived, taught, and performed miracles around Galilee and eventually journeyed to Jerusalem, where he was crucified by the Romans, after which his followers have always claimed that he rose from the dead, and appeared to many witnesses. The Christian community's presence in the land has shaped it in many ways until recent times as we shall see.
헤롯대왕은 유대인과 이두메인 혼혈로 야심적이지만 편집증적이었는데 기원전 37년 로마의 허락으로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지었던 여러 중요한 건물들 중에 웅장하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존재했습니다. 기원전 6년경, 나사렛 예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는 갈릴리 지방에 살며,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시다가 결국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가 죽었다가 부활하여 많은 증인들에게 나타났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곧 살펴볼 것처럼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는 최근까지 이 땅을 여러 방식으로 형성해왔습니다.
During this time, Judaea remained part of the Roman Empire. In the 60s AD, Jewish rebels revolted against Roman rule, a rebellion which was crushed by the Romans, who proceeded to flatten Herod’s temple. There has never been a Jewish temple on that site since that date.
이 기간 동안 유대는 로마제국의 일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60년대, 로마의 지배에 반기를 든 유대 반군이 일어났으나 로마에 의해서 진압되었고, 로마인들은 헤롯의 성전까지 완전히 파괴합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장소에 유대성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70 years later, the Jews revolted against the Romans again, an uprising known as the Second Jewish Revolt, under Bar Kokhba. Yet again, the rebellion was put down – more severely this time. Much of Jerusalem was destroyed by the emperor Hadrian, who rebuilt it as an entirely new Roman city called Aelia Capitolina, trying to erase Jewish presence to put an end to the successive revolts, and renamed the land Palestina, after the Philistines, a seafaring tribe who had arrived in the land before the time of King David.
70년이 지난 후,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에 반기를 들었는데, 바르 코크바의 주도 아래 일어났던 제2차 유대 반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 역시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진압되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였고, 이 곳에 아엘리아 카피톨리아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새로운 로마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유대인의 존재를 말살하여 연속적인 반란을 종식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 이전에 그 땅에 도착했던 해안 부족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그 땅을 팔레스타인으로 개명했습니다.
In 312, after an internal political and military struggle, Constantine became the first Christian emperor.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Byzantine empire, named after the city of Byzantium, a new capital, chosen to rival Rome. In 326 Constantine authorised the building of Christian churches in the land, including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in Jerusalem, over the site of the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f Christ and the Church of the Nativity in Bethlehem.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내부적인 정치적, 군사적 투쟁 끝에 최초의 기독교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로마와 경쟁 상대로 선택된 비잔티움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비잔틴제국의 막이 올랐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26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장소 위에 성묘 교회 (Holy Sepulchre) 와 베들레헴의 성탄 교회(Church of the Nativity) 등 그 땅에 기독교 교회 건축을 허가했습니다.
The rise of Islam
이슬람의 출현
In the 7th century, Christian Byzantine rule over Jerusalem came to an end. The new faith preached by Muhammad (570-632) inspired determined armies to spread northwards from the Arabian desert. The second Caliph, Omar, accepted the surrender of Jerusalem bringing it under Arab, Muslim rule for the first time, although people of Arab descent had been in the land for a long time before – they are mentioned in the New Testament in the second chapter of the Book of Acts.
7세기에 와서 기독교 비잔틴 제국의 예루살렘 통치는 끝이 납니다. 무함마드(570-632) 가 설파한 새로운 종교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결연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제2대 칼리프 오마르는 아랍에 대한 예루살렘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 그 땅은 최초로 무슬림의 지배아래 놓였습니다. 하지만 아랍계 사람들은 - 신약성경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되었듯이 –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그 땅에 있었습니다.
Since the Roman destruction of the temple in AD70, during the Byzantine period the site of the old Jewish temple had been kept as a dump for rubbish. In around 690, a Muslim ruler, Abd-al-Malik built the Dome of the Rock as a shrine on the site, to mark Muhammad’s reported night journey to heaven, followed soon by the Al Aqsa mosque nearby on the same site. Jerusalem now became a site of Muslim Pilgrimage.
로마 제국이 70년에 성전을 파괴한 이후 비잔틴 시대의 유대교 성전 부지는 쓰레기장이 되었습니다. 690년경 무슬림 통치자 압드 알-말리크는 이 곳에 무함마드의 하늘 여행 전설을 기념하기 위해 바위 돔 신전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알-아크사 모스크도 세웠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이슬람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In the early 11th century, tensions between Muslims and Christians led Caliph Hakim to demolish much of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which was rebuilt shortly afterwards, but in a much less impressive format. In 1099 western Christians, hearing of attacks by Muslims on their holy places, and inspired by the idea of re-taking the Holy Land for Christendom, arrived in Jerusalem as part of the First Crusade. The Second Crusade arrived sometime later, but the Crusader armies were finally beaten by the Muslim leader Salah-ud-din (Saladin) in the battle of Hattin in Galilee in 1187. A third crusade tried to win the land back but was unsuccessful and the last Crusaders were banished back to Europe in 1291.
11세기 초, 무슬림들과 기독교도들 사이의 긴장이 조성되며 칼리프 알-하킴은 성묘 교회 대부분을 파괴했고, 비록 곧바로 재건되었지만 이전의 훌륭함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1099년, 서유럽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이 성지들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독교 세계를 위해 성지를 되찾는다는 열망에 불타서 예루살렘에 도착했는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십자군 원정입니다. 얼마 후 제2차 십자군도 도착했지만, 결국 1187년 갈릴리의 하틴 전투에서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에게 패배했습니다. 제3차 십자군도 땅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마지막 십자군들은 1291년 유럽으로 추방당했습니다.
From the 13th to the 16th century, the land was ruled by the Mamluks, an Egyptian military class of former slaves. Meanwhile, the Byzantine empire came to an end in the mid-C15th when Constantinople fell to the Ottomans, or Turks. This was the beginning of the Ottoman Empire, which ruled over the land of Palestine for 400 years, from 1517 to 1917. In the C16th the Ottoman emperor Suleiman the Magnificent built the famous walls of Jerusalem that are still standing today.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 땅은 이집트 노예군인 맘루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1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함락되면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이후로 오스만 제국은 1517년부터 1917년까지 400년 동안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하게 됩니다.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는 오늘도 여전히 남아있는 예루살렘의 유명한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Throughout this long period, most inhabitants of the land were Arabs, descendants of the early settlers, and remnants of the Arab conquest. They were a mix of Christians and Muslims, while there were a number of Jews who lived in the land.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이 땅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은 초기 정착민들의 후손이자 아랍 정복의 남은 자들인 아랍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혼합 집단이었고,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The rise of Zionism
시온주의의 출현
In the 19th century, the long story of European anti-semitism began to gather pace, manifested for example in the famous Dreyfus affair which took place at the end of the century. The idea grew that Jews needed a homeland, with the first Zionist conference to advance the idea taking place in Basle, Switzerland in 1897. The obvious candidate, for historic reasons, was Palestine. The problem was there was already an Arab population long established in the land.
19세기에는 오래 지속되어온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말에 일어난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에서 이러한 현상이 드러났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고향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커졌고, 이러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최초의 시온주의 회의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렸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역사적인 이유로 가장 확실한 후보지였습니다.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그 땅에 정착하고 있는 아랍인들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Towards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the Ottoman empire began to break up. The Middle East was divided up into zones ruled by different European powers, with the British taking control of Palestine. The British recognised the gathering momentum for a Jewish homeland in Palestine and declared support for the idea in the Balfour declaration of 1917, while claiming at the same time to acknowledge the rights of the Arab peoples of the land. Before long, Jewish immigration to Palestine began to increase in volume, leading to increasing tension with the existing, predominantly Arab population.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오스만 제국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중동은 여러 구역들로 나뉘어 각기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았고,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통제했습니다. 영국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 운동이 동력을 얻고 있음을 인정하고 1917년 발푸어 선언을 통해 지지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랍인들의 그 땅에 대한 권리도 인정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 이민자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 아랍 정착민들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In Europe, the extermination of six million Jews in the Holocaust gave a radical urgency to the need for a homeland where Jewish people could feel safe. Many European Jews fled to Palestine, hoping to find a home and safety there. The British found themselves increasingly caught in the middle of violent and deadly clashes between Arab and Jewish groups. Underground Jewish militia sometimes targeted the British, such as in the 1946 bombing of the King David Hotel, the British headquarters in Palestine, by the Irgun, a Jewish militant group, which killed 91 people, most of them British soldiers.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하면서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고향 땅에 대한 필요가 절실하다는 인식이 급격히 강화되었습니다. 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집과 안전을 희망하며 팔레스타인으로 피했습니다. 영국은 아랍과 유대 집단 간의 폭력적이고 치명적인 충돌 속에 점점 휘말려 들어간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유대 지하 조직이 영국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1946년 이르군이 팔레스타인 지역 영국 본부였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했는데 91명 사망자들 대부분이 영국군 병사들이었습니다.
Recognising their position was untenable, the British decided to withdraw from Palestine. In November 1947 the United Nations adopted Resolution 181, a proposal to partition the land into Jewish and Arab states of roughly equal size, although the Jewish territory was larger than the Arab one. The Arabs refused to accept the plan, as they felt they were the rightful owners of the land, and the Jews were newcomers.
영국은 더 이상 자신들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철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7년 11월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유대와 아랍 국가로 거의 동일한 크기로 분할하는 결의안 181을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영토는 아랍 영토보다 더 넓었습니다. 이 땅의 정당한 소유주는 자신들이라고 믿었던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이주민들이라고 여기며 결의안을 거부했습니다.
When the British Mandate over Palestine came to an end in 1948, almost immediately, the Jews declared the creation of the State of Israel. Surrounding Arab countries immediately attacked the new state, but Jewish forces resisted successfully, and, under the leadership of David Ben Gurion, Jewish groups started to occupy Arab towns and cities, removing much of the Arab population, who for the most part were forced to leave. When this Arab-Israeli war finished, the new Jewish state held about 75 per cent of the land of Palestine, though with a significant Arab population still present within Israel. Around 700,000 Palestinian former residents became refugees, either in camps within Israel, or in surrounding countries such as Jordan, Syria or Lebanon. This period is known by the Israelis as the War of Independence, but by the Arabs as the Nakba – the catastrophe.
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의 위임 통치가 완료되자마자 유대인들은 곧바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주변 아랍 국가들은 즉시 이 새로운 국가를 공격했지만 유대 군대는 저항에 성공했고, 데이비드 벤 구리온의 지휘 아래 유대인 집단은 아랍 도시들과 마을들을 점령하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아랍 인구를 추방했습니다.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끝났을 때 새로운 유대 국가는 약 75%의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내에는 상당히 많은 아랍 인구가 존재합니다.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은 난민이 되어 이스라엘에 있는 캠프에 머무르거나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과 같은 주변 국가로 피난했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독립 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랍인들에게는 나크바, 즉 재앙이었습니다.
Israel as a nation grew and prospered. After a period of increasing tension between Israel and the surrounding Arab states of Egypt, Syria and Jordan, in 1967, to establish a buffer between themselves and their Arab neighbours, Israel issued a series of successful pre-emptive strikes, and after just six days, had occupied the Sinai Peninsula, formerly Egyptian territory, the Golan Heights belonging to Syria, and the West Bank of the river Jordan, including East Jerusalem, which had been under Jordanian rule.
국가가 된 이스라엘은 성장하고 번영했습니다.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주변 아랍 국가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던 1967년, 이스라엘은 그들과 주변국가들 사이에 완충지대를 형성하기 위해 성공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하였고 단지 6일만에 예전 이집트 영토인 시나이 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 강 서안, 요르단의 지배하에 있던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UN Resolution 242 urged Israel to surrender the land that had been occupied. Instead, Israel began to build Jewish settlements in the West Bank and Gaza, enclaves where Jewish people lived within the territories, although these were regarded as illegal under international law. Settlement building has increased in recent years under more recent Israeli governments and remains one of the points of tension - Jewish settlements built on land that could in future become part of a Palestinian state, if one ever came into being.
유엔 결의안 242는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영토를 반환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서안과 가자 지구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정착촌은 그 지역에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고립 지역이며, 국제법상 불법으로 간주됩니다. 최근 이스라엘 정부 정책에 따라 정착촌 건설은 더욱 증가했으며, 지속적인 긴장 요인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만일 팔레스타인 나라가 세워진다면,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미래 팔레스타인 나라에 속할 땅에 집을 지은 것입니다.
In 1973, the boot was on the other foot as Egypt launched a strike on Israel on the festival of Yom Kippur, which, although ultimately beaten back by the Israelis, dented Israel’s sense of invulnerability to attack from their neighbours.
1973년, 입장이 바뀌어 이집트가 욤 키푸르(대속죄일) 명절에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비록 결국에는 격퇴되었지만,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의 공격을 무조건 막아낼 것이라는 무적신화에 금이 갔습니다.
International pressure to resolve the long-running tension began to mount, and in 1978, under the mediation of US President Jimmy Carter, the Camp David accords were signed by Anwar Sadat, President of Egypt and Menachem Begin, Prime Minister of Israel, establishing peace between the two nations. This was seen by militant Muslims as treachery and Sadat was assassinated by Egyptian Islamic Jihad in 1981.
오래 지속되고 있는 긴장을 해소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1978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 하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하였고 두 나라 간의 평화가 성립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무장 단체들은 이것을 배신으로 간주했고, 1981년 사다트는 이집트 이슬람 지하드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Nonetheless, Israel withdrew from Sinai as promised, in 1982. Even though peace was established with Egypt, this did not bring an equivalent sense of harmony within the other occupied territories, particularly the West Bank. In the 1960s and 70s, Palestinian groups had carried out a campaign of attacks on Israel and Israeli targets abroad including the notorious attack on Israeli athletes at the Munich Olympics in 1972, yet these had largely ceased by the late 70s. From 1987 to 1993, a Palestinian uprising against what they saw as Israeli occupation of their land, known as the first intifada increased tension across the region. As a result, secret talks between Israeli and Palestinian officials led to the Oslo Accords of 1993, signed by Yitzhak Rabin and Yasser Arafat, in which Arafat’s Palestinian Liberation Organisation recognised the state of Israel and Israel gave up land in Gaza and the West Bank to the limited control of a Palestinian Authority, although with still some element of Israeli influence and control. Just as Sadat had been assassinated for what was seen as surrender on the Arab side in 1981, Rabin was assassinated by a Jewish extremist in 1995 for what was seen as a betrayal of the Israeli caus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약속대로 1982년 사이나이 반도에서 철수했습니다. 비록 이집트와는 평화가 구축되었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역 같은 다른 점령지들 에서는 불화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팔레스타인 단체들이 해외에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목표로 하는 공격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 중에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육상 선수들에게 행한 악명높은 테러도 있었지만 대부분 70년대말이 되면서 멈추었습니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을 점령한 것으로 보고 대항하며 1차 인티파다 (intifada, 역자주 팔레스타인인의 민중봉기 저항운동)라고 알려진 저항 운동을 일으켜 그 지역 전체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 간의 비밀 회담이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이어졌고,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시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의장이 서명했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는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역에서 비록 부분적으로 여전히 이스라엘의 영향과 제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제한된 자치권을 넘겨준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1981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아랍 진영을 항복시킨 것으로 인식되어 암살당했던 것처럼, 1995년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유대 급진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The 21st century
21세기
What was meant to be a peace process rolled on. The Camp David meeting in 2000, which was expected to bring about further progress for the Palestinian cause failed to do so and triggered the second intifada which lasted until 2005, much more violent and deadly than the first, with Palestinian suicide bombings in Israel and Israeli retaliation in the West Bank and Gaza. To stop incursions from Arabs into Israeli territory, the Israelis proposed building what they called a Security Wall, but as the Wall of Separation by the Palestinians, who felt that the wall was effectively a land grab, as at points, it stretched into land which hitherto had been traditionally part of the West Bank.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습니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회담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진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실패로 끝나면서 1차 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치명적인 2차 인티파다 (intifada)를 촉발하여 200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와 이스라엘의 서안 및 가자 지구 보복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랍이 영토를 침투하지 못하도록 보안 장벽을 세우자고 제안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분리 장벽이었고, 사실상 토지 강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장벽의 어떤 구간은 전통적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일부였던 땅까지 뻗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In 2005, Israeli Prime Minister Ariel Sharon decided to withdraw troops and settlements from Gaza, yet in 2007, the Islamic militant organisation Hamas took over control of Gaza in a brief war with Fatah, the Palestinian party who had held control until this point. Hamas, unlike the PLO or Fatah, remained dedicated to the elimination of Israel and thus became a dangerous neighbour to Israel. In 2014, in a period of rising tension, Hamas rocket attacks into Israel provoked Israeli air strikes and a ground invasion. In this war, around 67 Israelis and around 2000 Palestinians died.
2005년, 이스라엘 수상 아리엘 샤론은 가자 주둔 군대들을 철수하기로 결정했으나 2007년에 이슬람 무장 정파 하마스가 파타와의 짧은 전쟁에서 가자 지역 지배권을 장악했습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나 파타와 달리 이스라엘을 제거하는데 모든 것을 걸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위험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2014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하마스의 이스라엘을 향한 로켓 공격은 이스라엘의 공습과 지상 침공을 유발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약 67명의 이스라엘인들과 2000여명의 팔레스타인들이 사망했습니다.
In 2017, President Donald Trump recognised Jerusalem as the capital of Israel, something which had not happened before as Jerusalem had always been a divided city and claimed by both sides as their capital city.
2017년,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했습니다. 이전에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일입니다. 예루살렘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고, 양측 모두 그들의 수도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입니다.
In recent years Israel has sought to normalise relationships with Arab states, signing the Abrahamic Accords in 2020 with Bahrain, the UAE, and Morocco, with a possible deal with Saudi Arabia tentatively on the way.
최근 몇 년 동안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과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며, 2020년에는 바레인, UAE, 모로코와 아브라함 협정을 맺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가능성 있는 합의도 임시적으로 논의 중입니다.
The Hamas attacks on southern Israel in 2023 and the Israeli response in Gaza will have set back any progress in resolving this long-running tragedy for many years, in what is a familiar pattern of attack and retaliation.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남부 공격과 그에 대한 가자 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의 대응은 수년간 지속되어온 공격과 보복의 반복 패턴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을 해결하는 데 한발짝도 못 나가게 할 것입니다.
The history is tangled, much more complex than outlined in a brief survey like this. Any attempt to understand the present needs to engage with the history of this fertile, fought-over and precious land, home to two great peoples with contested, but deep roots in the land, who we pray will one day be able to live together in peace – the peace brought and taught by the Prince of Peace.
이 역사는 얽히고 설켜 복잡해서 간단한 개론적 설명으로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 땅의 역사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옥하고, 분쟁의 대상이었고, 귀중한 이 땅에 두 위대한 민족이 다투며 살고 있지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 그것은 평화의 왕께서 가져다주시고 가르쳐 주신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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