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元春, 호는 秋史· 阮堂· 禮堂· 詩庵· 老果· 農丈人· 天竺古先生 등 503여 종에 이른다.
생애
조선조의 훈척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魯敬과 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노경이 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學藝와 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활동사항
(1) 학문: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北學派의 일인자인 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翁方綱·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의 연경 학계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종래 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金石學·사학·문자학·음운학·天算學·지리학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禮堂金石過眼錄』·「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申緯·趙寅永·권돈인·申觀浩·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實事求是說』은
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천산학·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華嚴寺라는 가족의 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白坡와 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影幀의 題辭와 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奉恩寺에 기거하면서 善知識(: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 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2) 예술: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시·서·화 일치 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國書와 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眞蹟(:친필)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서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趙孟?·蘇東坡·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漢·魏시대의 여러 隷書體에 서도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創出한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는 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蘇軾·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시도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시선제가총론(詩選諸家總論)』에서 시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畵風은 대체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書卷氣와 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心意를 중시하는 文人?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예서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하고 간결한 筆線으로 心意를 노출하는
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蘭을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 맑고 고결하며 예스럽고 아담하다)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趙熙龍·許維·李昰應·田琦·권돈인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藝苑(:예술가들의 사회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歲寒圖」와 「모질도(??圖)」「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모질도/??圖(추사의 그림 중, 갈필로 그린 그림 중, 다소 해학적이며 희화된/코믹한 묵화이다..)
시·서·화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碑派書道가 낳은 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古印의 印譜(:여러 가지 인발을 모아둔 책)를 얻어서 직접 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自刻風인 秋史刻風을 이룩하여,
졸박청수(拙樸淸瘦: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며 가늘다)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3) 문학: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翰墨(:문한과 필묵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을 이르는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언간(諺簡: 언문 편지라는 뜻으로, 한글로 된 편지)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阮堂尺牘』(2권 2책, 1867년)·『담연재시고(覃?齋詩藁)』(7권 2책, 1867년)·
『완당선생집』(5권 5책, 1868년)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년)은 종현손 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평가와 의의
우리나라 역사상에 藝名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이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였다.
즉,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 왕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추사가(秋史家)의 한글편지들』(김일근, 건국대학교출판부, 1998)
『추사김정희명작전(秋史金正喜名作展)』(예술의 전당, 1992)
『언간(諺簡)의 연구(硏究)』(김일근, 건국대학교출판부, 1986)
『한중관계사연구(韓中關係史硏究)』(전해종, 일주각, 1970)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1934)
「추사실기(秋史實記)」(최완수, 『간송문화』30, 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86)
『淸朝文化東傳の硏究』(藤塚?, 東京 國書刊行會, 197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추사체, 「세한도」에 깃든 문자향 서권기
학문적 지향점을 분명히 하여 조선 학계의 진로를 제시한 김정희의 천재성은
사대부의 교양 필수인 시ㆍ서ㆍ화의 세계에서 한층 두드러지게 발휘된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에 대응하여 이념미를 추구하는 文人畵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글씨에서는 秋史體라는 글씨체를 창안한 것이다.
그는 한송불분론의 기초 위에 세운 학문과 시ㆍ서ㆍ화 겸수의 예술 세계를 통합함으로써
지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학예 일치의 이상적인 인간형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희의 천재성은 모진 시련 속에서 한층 빛을 냈다.
그는 생애의 시련기에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내었다.
당시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기인데,
김정희와 풍양 조씨 趙寅永과 영의정을 역임한 權敦仁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비판하는 인물이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당연히 이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그 결과로 김정희는 두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김정희의 추사체는 1840년부터 48년까지 8년 동안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글씨체이다.
청나라 학자들이 이상으로 삼았으되 미처 이루어 내지 못한 서체로 평가받은 추사체가 아닌가.
기후 풍토가 척박한 유배지의 외롭고 고달픈 유배 생활 중에 추사체를 완성하여
조선 서예사의 한 장을 완결한 것이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조선 학계와 예술계의 수준이 김정희와 같은 천재 탄생의 배토가 되었겠으나,
그 천재는
천재를 도야하기 위한 고통의 세월과 역경을 뛰어넘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제주도의 추사 적거지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소재.
추사체는 유배지 제주의 외롭고 고달픈 생활 중에 완성되었다.
김정희, 「용필법」 26×33.5cm.
한말에 활동한 북학 계열의 많은 인재는 그의 제자이거나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추사의 문하에 삼천 명의 선비가 있다(秋史門下三千士)’라는 시 구절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많은 제자를 키웠는데,
특히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여 중인 출신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 중 李尙迪은 제주에 귀양 사는 김정희와 청나라의 지식인들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감당했다.
이상적은 시문에 능한 당대 최고의 통역관으로 열두 차례나 연행하면서
귀중한 책을 구입하여 제주도의 스승에게 보냄으로써 스승의 학문 정진에 이바지했다.
또한 그는 글씨 연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청나라의 금석문 자료를 입수하여 스승에게 전하고
스승의 글씨를 청의 예원에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멀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 제주도에까지 스승을 찾아뵈었다.
유명한 「歲寒圖」는
김정희가 1844년(헌종 10년) 제자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기 위해 그려 준 그림이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공자의 명언을 주제로 삼아
겨울 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청청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荒寒과 寂寞 속에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고고하게 서 있고,
그 사이로 초옥 한 채가 인적 없이 들어앉아 있다.
그 이외에는 텅 빈 공간이다. 거기에는 쓸쓸함과 비움의 미학이 있고, 추사의 심정이 살아 있다.
전통 시대 선비는 벼슬길에 나가 사대부라는 학자 관료의 길을 가다가
뜻에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사직하고 다시 선비의 위치로 돌아갔고,
귀양살이를 하더라도 세속에 얽매여 소홀히 했던 학문 연마에 몰두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취지는 뒤에 붙은 小序에 잘 나타나 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공자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 하였으니,
그대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節操)가 아닐까.
이 한 폭의 그림에는 지조와 의리를 중히 여기는 전통 시대 지성들의 선비 정신이 깃들어 있고,
한 시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그림과 글씨의 어우러짐이 있고,
사대부 스승에서 중인 출신 제자에게 계승되는 문화의 흐름이 암시되고 있어서 보면 볼수록 감개 무량해진다.
김정희, 『세한도』 1844년, 종이에 수묵, 23.7×69.2cm, 개인 소장.
유배 시절에 제주까지 찾아 준 제자인 역관 출신 문인 이상적의 의리에 보답하여 그려 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제주에 귀양간 김정희와 청나라 지식인을 계속 이어준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과 글씨는 서권기(書卷氣)1)나 문자향(文字香)2)으로 상징되는
치열한 수련과 작가 정신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한 사무친 고독의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안동 김문의 김정희에 대한 의구심과 견제는 계속 되었다.
김정희는 8년 간의 제주도 유배에서 방면되어 온 지 불과 3년 만에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
남북의 遠惡地에만 유배당하는 쓰라림을 맛본 것이다.
안동 김문은 철종의 처가로서 국정을 전횡했는데,
영의정 권돈인은 안동 김문이 허수아비 다루듯 하는 철종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한 인물이며,
김정희는 권돈인의 배후 이론가로 지목되는 인물이었으니,
타협을 모르고 원칙만 내세우는 김정희를 안동 김문이 용납할 리 없었다.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추운 북쪽 변방으로 가라는 것은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나
김정희의 정신력은 그 고통을 이겨 냈다.
그리고 1년 만에 돌아와 과천에 은거하다가 1856년 7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김정희, 「죽로지실」,
종이에 먹, 30×133.7cm, 호암미술관 소장.
전서의 형체를 살리어 기교를 직접 드러낸 예외적인 작품이다.
김정희, 「부인 예안 이씨께 보낸 편지」 1842년, 22×35cm.
각주
1) 서권기(書卷氣) : 책에서 나오는 기운
실사구시란 중국 청나라 때의 학문방법론으로
<수학호고 실사구시(修學好古 實事求是)>란 말에서 그 연원을 알 수 있듯
실제 사실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영·정조 대의 실학사상으로 전개된 실사구시 사상은
이전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이나 구제도에 대한 반동적 성격의 학문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실사구시의 학풍은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을 통해 실현되었지만
지금의 현실에서 학문과 실천의 반성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실학사상에 있어 실사구시의 문제의식을 확고히 한 이로는 정약용과 김정희를 꼽을 수 있다.
경제학, 과학, 의학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던 정약용은
서학을 받아들여 학문의 과학성과 공정성을 중시하여 실사구시의 학풍을 열었으며
북학파를 계승한 김정희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등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박규수는
실사구시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연암집(燕巖集)』의 저자인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기도 한 그는
이용후생의 학풍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을 수 있었으며
고염무와 정약용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 사상을 전개한다.
이후 實事와 實用을 강조하는 실사구시의 학풍은 개화사상으로 이어진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등 개화파들은 개화당의 기관지였던 <한성순보> 등을 통해
'이용후생과 부국강병의 실사구시'를 역설하고 나선다.
이처럼 실사구시는 내용은 없고 허울 뿐인 구태를 벗어나
실제 생활에서 다시금 출발하자는 자기각성과 자기반성의 근대지향적 사상이며 학풍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 있어서도
근대지향의 한 출발점으로 조선시대 실학사상과 그와 관련된 문학이 주목받고 있다.
(김효석)
첫댓글 추사의 편지글을 읽어 보노라면 어쩜 이렇게 글을 잘쓸까
어쩌어어면 이렇게도 글을 잘쓸까 하고 탄복하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