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祠堂에서 情事를
하북(河北)의 정현과 인접해 있는 오령(五嶺)이란 곳에 냉검상과 설청하가 도착한 것은 바로 능천위와 설진후가 약속한 하루 전날이었다.
오령은 본래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정금산장의 위명 때문에 더불어 알려진 곳이었고, 다섯 개의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분지에 위치해 있기에 수려절경함은 물론이고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가 자랑인 곳이었다.
정금산장은 오령에서도 약간 북쪽으로 위치해 있었고, 수십 개의 전각을 거느린 거대한 규모로 건축되어 있어, 과연 강북 제일의 거상다운 풍모가 풍겼고, 그 위세만 보아도 호랑이가 엎드린, 즉 와호(臥虎)의 기세를 풍겼다.
그러나 설진후는 냉검상과 설청하가 오령에 도착해 있
는 것을 모르는 채 간이 바짝바짝 오그라드는 심정이었다.
요즘 들어 하루하루가 뼈가 타고 살이 마르는 나날들이었다. 능천위와의 약속 날짜가 다가오는데 운자량과 설청하의 연락은 없고, 바로 며칠 전 혁련검호각에서 보내온 전서구에 따르면 이유가 불분명하게 갈 수가 없다는 정중한 사과문이 도착한 것이었다. 혁련검호각에 대한 기대를 잔뜩 걸고 있던 설진후로서는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요즘들어 너무 상권에만 개입하고 무예연마를 경시한 자신의 태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내일이면 능천위가 들이 닥칠 일을 생각하니 앞이 아득할 뿐이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묘안이 없을까 고민고민하고 있을 때 설진후는 장원 무사로부터 설청하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설진후는 먼 여행에서 무사히 딸이 돌아왔다는 자체만도 반가와 거의 맨발로 뛰어나갔다.
한데, 운자량과 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설청하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어울리지도 않게 호랑이 가죽 옷을 입은 산도적 같은 냉검상과 나란히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딸과 동행한 냉검상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재빠르게 부친의 눈치를 파악한 설청하는 일단 냉검상을 인사시켰다. 그리고 부친이 묻는 여러가지 물음에 간단하게 대답하고, 냉검상을 특별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피곤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거처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설진후에게 설청하는 간단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모든 것은 저이가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설진후는 곤혹스러웠다. 이 산적두목 같은 자가 뭘 알고 뭘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더욱 더 곤혹스러운 것은 설청하가 냉검상을 호칭한 말이었다. 평소 남자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던 딸이 냉검상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저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저이라니......?)
설진후는 어색하게 냉검상을 안내하면서 여러 차례 곁눈질로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무식한 산도적 이상은 느낄 수 없었다. 딸과 산도적 같은 냉검상의 관계가 무엇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는 설진후였다. 그러나 일단은 냉검상은 정금산장의 귀한 손님임에는 틀림없었다. 딸의 뜻을 의아해 하면서도 설진후는 총관을 시켜 최고의 귀빈 대접을 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설진후는 새로운 문제에 골치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설청하는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가 일단은 목욕부터 했다. 향유와 약재가 풍성하게 들어가고 알맞게 데워진 탕 속에 들어가 그녀는 오랫동안 잃어 버렸던 자신을 되찾은
듯 마음껏 수욕의 안락함과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리고 화장대에 앉아서 한 시진에 걸쳐 정성껏 화장을 하고, 시비를 시켜 가장 화려한 저녁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그 저녁식사에 초대된 냉검상은 그만 약간 기가 죽고 말았다. 도대체 음식을 먹는 것인지 보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금산장에 대한 이야기를 설청하에게 따갑도록 들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다.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아무튼 모든 것이 최고급이었다.
미타현의 갑부 악노붕은 발가락 사이에 낀 때처럼 보일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너무도 화려한 정금산장의 모습에 내검상은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다음날 아침,
너무도 푹신한 침상에서 잠을 자 오히려 허리가 뻐근한 상태로 일어난 냉검상에게 설청하는 직접 찾아왔다. 그녀는 생글거리며 알맞게 향이 오른 차 한 잔을 냉검상에 권하며 말했다.
"어제는 경황 중이었지만...... 오늘은 아침식사를 부모님과 함께 해야 하니 어서 준비하세요."
"무슨 준비를?"
설청하는 예쁘게 눈을 흘겼다.
"그런 모습으로 부모님을 뵐 거예요?"
냉검상은 우측에 달려 있는 동경(銅鏡)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가관이었다. 너무 피곤해 목욕을 하지 않아 이곳까지 오면서 더러워진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졌다.
"음......"
"일단 목욕부터 하세요. 아이들을 시켜 욕탕에 이미 따뜻한 물을 준비해 놓았어요. 빨리해야 돼요. 나는 여기서 당신이 목욕을 끝낼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마치 떠밀 듯이 하는 설청하에게 밀려 냉검상은 욕탕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설청하는 부산하게 움직이며 냉검상의 옷을 준비하고, 자신은 아침 화장을 시작했다.
냉검상은 근 반 시진 동안 목욕을 했다. 천애령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하는 목욕이어서, 그야말로 때를 빼고 온몸에 광을 낸 현상이었다.
냉검상이 욕탕에서 나오자 설청하는 일단 속옷을 갈아입게 하고, 향수를 뿌려 준다 머리를 빗겨 준다 온갖 치장을 해주는 것이었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냉검상은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일단 머리가 정돈되자 그녀는 냉검상에게 최고급의 비단으로 된 검은 장삼을 걸쳐 주었다. 등에는 금빛수실로 쌍룡(雙龍)이 수놓아져 있어 고귀한 가운데 강한 분위기를 풍겨주는 옷이었다.
이어 허리에는 황금에 수십 개의 보석을 박은 요대를 채워 주고, 신발은 수달피 가죽으로 만든 진귀한 것을...... 손에는 학(鶴)의 깃털로 만들어진 섭선을 쥐어 주니, 실로 인간 중에 용(龍)이요, 군계일학이라고 할 수 있는 뛰어난 모습의 냉검상이 새롭게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검은 빛의 영웅건을 씌어준 설청하는 만족한 듯 물러서서 냉검상을 보았다.
"됐어요...... 아! 정말 너무 멋있어요......"
다행히 천애령에 있을 때 이런 장삼을 입는 것이 조금은 숙달되어 냉검상은 어색하진 않았다. 설청하는 냉검상의 모습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냉검상은 자신의 모습이 궁금한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실로 준수했다. 마치 반안이나 송옥 같은 역사의 미남자가 창피해서 변장을 할 정도로 멋있었다. 그러나 냉검상은 야성적인 멋에 습관이 되어 있는 사내였다.
너무도 준수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자신의 모습에 내심 혀를 끌끌 찼다.
(이건 너무했군...... 위엄 있는 푸른 번개신의 아들이며 천산의 지배자인 내 모습을 찾을 수 없고, 마치 계집이 남장을 한 듯 기생오라비 같은 모습이 아닌가?)
냉검상은 쓴 웃음을 지었다.
가꾸어서 만들어진 것보다 자연 그대로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차림이었다. 설청하는 냉검상의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아, 아니 됐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설청하는 분명 더 기생오라비처럼 치장해 줄 것이 빤해 냉검상은 좋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자 설청하는 그의 한쪽 팔을 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설청하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냉검상은 언제나 기분이 유쾌해졌다.
냉검상은 자연스럽게 설청하의 허리를 감으며 그녀의 입술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자 설청하는 허리를 비틀면서 살짝 빠져나오며 한 손가락으로 냉검상의 입술을 막았다.
"이러지 말아요. 서로 절제하는 것이 좋아요."
냉검상은 아연해졌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떤 것이 진짜인가?)
설청하의 변화무쌍한 성격을 생각하자 괜히 미소가 흘러나왔다. 설청하는 눈을 흘겼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그래."
"피, 귀엽긴 누가 귀엽단 말이예요?"
냉검상은 좀더 신비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한 가지 비밀을 말해 볼까?"
"뭔데요?"
"청하, 네 무릎 안쪽 한 뼘쯤 위에 있는 네 개의 붉은 점 말이야?"
설청하는 화들짝 놀랐다.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아요?"
냉검상은 놀란 설청하의 귀에 대고 천약당에서 치료한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설청하는 그만 귓불까지 발갛게 물든 채 냉검상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도 모르게 그런 방법으로 치료 하다니...... 당신은 정말......"
그러나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냉검상의 입술이 그녀의 말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
다.
설진후와 그의 부인은 식탁 앞에서 깜짝 놀랬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설청하와 함께 들어오는 냉검상의 모습 때문이었다. 산도적 같은 사내와 함께 오겠다는 설청하는 이번에는 너무도 준수한 청년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설진후는 약간 당황한 듯 물었다.
"청하야, 그 분 공자는 또 누구시냐?"
어리둥절해 하는 설진후를 보면서 설청하는 입을 가리고 킥! 웃었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산적두목이예요."
"!"
설진후는 놀람과 걱정의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토록 무식해 보이던 사람이 한 순간에 저토록 헌앙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놀람이었고, 설청하가 냉검상의 인물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설청하는 냉검상의 팔을 낀 채 생글거리고 있었다.
"아버님, 오늘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능천위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 사람이 있는 이상 혼줄이 나서 복우산으로 도망갈 테니까......"
말을 한 설청하는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 설청하는 냉검상을 보며 확인하듯 말했다.
"그렇죠?"
냉검상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설진후를 보면서 담백한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능천위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고민을 깨끗하게 해결해 줄 테니까?"
순간 설청하는 멍해졌다. 또한 설진후는 아연해진 표정으로 그저 냉검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냉검상의 말투는 예의라곤 약에 쓸려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예 반말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 고맙소......"
대충 대답을 한 설진후는 냉검상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냉검상이 한 마디 할 때마다 너무도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 * *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
더욱이 그 자식이 오직 하나 뿐인 딸이라고 생각할 때 아버지의 사랑은 그야말로 지대한 것이다. 외동딸이라면 정말 장중보옥(掌中寶玉)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적룡패의 주인인 능천위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좀더 특별했다. 그는 혓바닥으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딸 능소정을 사랑했다.
적룡패란 거대한 세력을 지닌 능천위는 아직도 은퇴할 시기는 아니었지만 마땅한 후계자가 없었다. 그래서 무남
독녀인 능소정을 아예 후계자로 키우기를 작정하고 일찍이 신비의 불문(佛門)인 천불암(天佛岩)에 고승 해연대사에게 능소정을 보내 무공을 잇게 했으며, 자신의 무공진수를 직접 전수하기도 했다.
능소정은 자신의 나이에서는 가히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한 고수로 변했고, 무림계에서도 돋보이는 후기지수였다. 더욱이 능소정은 남자 못지 않은 강한 개성과 통솔력이 있었고, 지도력까지 겸비해 적룡패를 능히 맡을 수 있다고 능천위는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며칠 전부터 능소정은 평소의 발랄함을 잃고 침묵하고 있었다. 간간이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두 눈은 증오와 복수의 일념으로 이글거리기도 했다. 무섭게 살기를 뿜어내고 독오른 암코양이처럼 있던 능소정은 또한 하늘을 보고 공허한 눈빛이 되어 눈물까지 흘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능천위는 딸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아녀자 납치범을 쫓아가겠다고 사라져 하루 만에 돌아온 딸이 이상해ㅈ다는 것이고, 그 하루의 시간 동안 딸의 신변에 커다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은근히 묻기도 했지만 능소정의 침묵은 견고했다. 그러니 능천위의 가슴은 타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더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개봉부에서 적룡패의 수하들과 합해진 능천위는 정금산
장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시간은 정오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고, 설진후는 바짝 긴장한 채 정금산장의 무사들을 풀어 놓았고, 동시에 능천위를 맞이하기 위해 직접 정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설진후는 아무래도 냉검상을 믿을 수 없었다. 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한편 약간의 손해가 나더라도 능천위와 화해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정금산장에 도착한 능천위 일행은 설진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거대한 별전으로 안내되었다.
아무리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설진후는 매운 생각답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웃음으로 마치 다정한 친구를 맞이하듯 능천위를 안내했다.
별전에는 능천위와 능소정을 중심으로 적룡패의 수뇌급 고수 이십여 명이 자리를 잡았고, 설진후는 딸 설청하와 냉검상, 그리고 몇몇 측근 인물들을 대동하고 마주 앉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 설진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노부는 실로 이번 불미스러운 사건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소이다. 그 동안 우리 정금산장이 일취월장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남의 패자이신 능대협이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셨기 때문이오. 능표의 일은 실로 유감이며 뭐라고 할 말이 없소이다."
설진후는 극히 정중한 태도였다. 그러나 능천위는 찬바람이 일어날 정도로 냉정했다.
"이제와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능표는 나의 조카이고, 그는 바로 당신의 대제자인 위개악에게 죽음을 당했소. 나는 당신에게 다른 어떤 것을 원하지 않소. 오직 위개악이란 건방진 젊은 애송이만 내게 넘겨 주면 되는 것이오."
설진후는 차분하게 말했다.
"위개악은 지금 본 장원에 없소이다."
"그럼?"
"고향에 가 있소이다."
"설장주는 지금 이 능모와 말장난을 하겠다는 뜻이오? 이 능모의 경고를 무시하겠다는 태도요?"
두 사람의 회합은 서두부터가 빗나가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소?"
황급히 능천위를 안정시키려는 설진후는 후회가 막급했다.
(애초 혁련검호각에 너무 기대를 건 것이 실수였다. 차라리 구파일방의 친분 있는 고수들에게 부탁해야 했거늘......)
능천위는 탁자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노부는 당장 위개악을 이 자리에 내놓지 않으면 실력행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하오."
"능대협, 너무 그러지 마시고 다른 방법을......"
"천만에. 위개악을 내놓지 않으면 당신의 수급으로 조
카의 죽음을 보상받을 것이오."
말인 즉은 설진후의 목을 베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설청하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흥, 적룡패가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도 말을 들으니 염라사자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군요?"
"!"
능천위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설청하와 그 옆에 앉아 있는 냉검상을 보더니 미묘하게 웃었다. 마치 설청하의 태도가 자신을 위해서는 더 좋다는 듯이...... 그러나 능천위는 냉검상을 알아보지 못했다. 몸을 빼앗긴 능소정조차 한 순간에 변해 버린 냉검상을 몰라볼 정도였다. 단지 기분상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친 사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뿐, 조금은 우습기도 한 일이었다.
능천위는 설청하를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소저의 뜻은 무엇인가?"
"능대협의 태도가 너무도 안하무인격이라 눈꼴이 시어 볼 수가 없다는 뜻이예요."
능천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회색빛의 긴 눈썹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무섭게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설진후는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이고...... 저 계집애가 일을 아예 망치려고 작정을 했구나......)
능천위는 강호상의 거두답게 분노를 삭히면서 물었다.
"소저는 설장주의 딸인가?"
"그래요."
설청하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기야 냉검상이 옆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흐흐흐...... 아비가 교육을 못 시켜 딸자식이 망종이로군. 내 너의 아비를 대신해서 버릇을 좀 가르쳐 주겠다."
능천위는 설진후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으면서 좌측에 있는 적룡패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두 명의 고수가 탁자를 사이에 둔 공간을 격해왔다. 그러나 냉검상은 예의 신비로운 미소를 흘리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이......)
설청하는 당황했다. 그녀가 큰 소리를 땅땅 친 것은 오직 냉검상이란 배경이 아니었던가? 한데 그 순간,
두 마리의 맹룡처럼 설청하를 덮쳐오던 적룡패의 두 고수는 무형의 장벽에 튕겨진 듯이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악!"
"크윽......"
순간 능천위는 벌떡 일어나며 냉검상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다른 사람은 무엇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혀 몰랐지만, 오직 그만이 냉검상이 손을 쓴 것을 본 것이었다. 냉검상의 오른손이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설진후! 어째 믿는 구석이 있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놀라운 고수를 초청해 놓으셨군."
설진후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는 냉검상이 오른 손을 쓰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능천위는 설진후와 냉검상을 번갈아 보면서 외쳤다.
"우리 적룡패와 한 번 겨루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능, 능대협......"
설진후는 당황하여 어쩔줄 몰랐다. 이때 냉검상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가 바로 능천위란 인물인가?"
"으응?"
능천위는 기가 막혔다. 나이도 자신의 아들 뻘밖에 되지 않는 냉검상이 벌떡 일어나 한다는 말이 마치 아랫사람 부리는 듯한 반말이 아닌가?
"방금 전 딸의 교육을 못 시킨 아비를 탓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대 딸 교육이나 잘 시키시지?"
"이, 이놈이......"
능천위는 너무도 분노하여 머리카락이 풀풀 날릴 정도였다. 더욱 당황해 하는 설진후와 달리 설청하는 너무도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능천위는 분기탱천하여 더 이상 가릴 것이 없이 그대로 쌍장을 벼락같이 내뻗었다.
우르르르릉......
마치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별전을 진동하면서 위맹한 장력이 해일처럼 냉검상을 향해 밀려갔다. 냉검상은 차갑게 웃었다. 웃으면서 그는 오른 손 하나만을 빙글 돌리면
서 앞으로 내뻗었다.
순간,
퍼퍼펑!
가죽북이 터지는 듯한 요란한 굉음이 울리면서 능천위는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그에 반해 벽에 날아가 피를 토하고 고꾸라져도 아쉬울 냉검상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능천위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는 누구냐?"
"나 말인가? 후후...... 천산에서는 나를 일컬어 미라파샤, 즉 불을 먹는 지옥의 독수리라고 부르지. 푸른 번개신 가이샤의 아들인 내가 능천위 그대를 상대하기 위해 중원으로 나왔다는 자체가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야......"
아예 냉검상은 능천위 따위를 안중에 두지 않는 태도였다. 설진후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져서 냉검상의 존재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오직 설청하만이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호호...... 능천위. 너는 오늘 개망신이 뻗쳤다.)
냉검상이 말했다.
"능천위! 그만 물러가라. 천산의 위대한 지배자인 나를 상대한다는 것은 너의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다."
"갈! 네놈의 오만방자함을 당장에 꺾어놓겠다!"
분노를 참지 못해 능천위가 몸을 날리려는 순간, 그의 딸 능소정이 앞을 막았다.
"아버님, 흥분하지 마세요. 어찌 소잡는 칼을 닭잡는데 사용하시려 합니까? 저런 건방진 자는 소녀로도 능히 혼내줄 수 있어요."
능소정은 영악했다. 부친의 실수를 교묘하게 만회하면서 냉검상을 우습게 치부해 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다시 한 번 초식을 교환하여 부친이 망신을 당한다면 그야말로 안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능소정은 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능소정의 무공 정도라면 쉽게 패하진 않을 것이고, 두 사람의 대결을 보면서 냉검상의 문파와 무공을 가늠해 본다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조심해라."
능소정은 냉검상쪽을 돌아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너는 내가 상대하겠다!"
냉검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능소정은 이상하게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냉검상은 여전히 싱긋거리고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다.)
냉검상을 보며 능소정은 출수할 채비를 갖추며 외쳤다.
"어서 덤벼라!"
냉검상은 미소가 아닌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역시 독오른 살모사 같은 기세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구나, 영원한 창녀!"
능소정은 어이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온몸
을 격렬하게 떨었다.
(이, 이제보니...... 저, 저놈이 바로!)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얼른 알아보지 못한 것인데, 음성을 듣고 보니 확실히 자신을 강제로, 아니 교묘하게 범한 냉검상이 틀림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냉검상은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찾아가길 그새 못 참아서 이렇게 달려왔단 말인가?"
능소정은 참을 수 없었다. 더욱이 냉검상의 옆에 여자로선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운 설청하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참을 수 없었다.
"야- 아!"
능소정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폭발로 무섭게 냉검상을 덮쳐가며 전력을 다 했다.
쿠쿠쿠우......
괴이한 공지의 진동음과 함께 그녀의 양 손에서는 녹색의 기류가 무섭게 뻗어나왔다. 바로 녹상불기였다. 그러나 냉검상은 여유있게 막아내며 휘청거리는 능소정을 독수리가 토끼를 낚아채듯 완맥을 제압해 버렸다.
능천위는 더욱 경악했다. 능소정이 녹상불기까지 응용해 공격을 했지만 냉검상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이번에는 그 자신조차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 능소정을 옆구리에 낀 냉검상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 노옴!"
대경한 능천위는 천마(天馬)처럼 머리 위를 날아가는 냉검상을 향해 그대로 일장을 후려갈겼다. 동시에 그의 신형도 허공으로 떠오르며 연속 삼장을 발출하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동시에 오른 손을 뒤집었다 펼치면서 빙글 돌리자, 능소정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서도 녹색의 기류가 금실금실 뻗어나와 능천위의 장세를 맞이해 나가는 것이었다.
꽈꽈- 꽝!
일진의 폭음성과 함께 능천위는 올라갈 때보다 더욱 빠르게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냉검상은 장세의 탄력을 이용해 멋들어진 신법을 구사하며 뒤쪽으로 내려섰다.
능천위는 왈콱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며 경악성을 발했다.
"노, 녹상불기...... 네놈은 해연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냉검상은 차갑게 말했다.
"해연이 뭔지도 난 알지 못한다, 능천위! 딸을 살리고 싶으면 나를 따라와라. 더 이상 이 좁은 공간에서 아웅다웅할 것이 없지 않느냐?"
다음 순간 냉검상은 마치 한 줄기 연기와 같은 절묘한 신법으로 별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능천위는 딸이 인질로 잡혀 있는지라 앞뒤 상황을 가릴 것도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수하들에게 외쳤다.
"놈을 쫓아라!"
능천위와 그의 수하들은 벼락같이 냉검상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든 인물들이 썰물처럼 별전을 빠져나가자 설진후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 냉검상이 능천위를 단 일장에 격패시킬 정도의 고수라고는 생각조차 못한 그였다. 설진후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딸을 얼싸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 청하야......"
그러나 이 순간 설청하는 두 눈을 독살스럽게 뜨고 문쪽을 바라보며 식식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냉검상에게 능천위가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약이 오른 것은 냉검상이 능소정을 끼고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냉검상에게 몸을 허락한 여인이 바로 능소정이란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설청하는 부친의 아연한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냉검상이 사라진 문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번엔 그냥 둘 수 없어!"
정금산장을 벗어난 한 평지에 냉검상과 능천위는 대치하고 있었다. 능천위의 수하들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냉검상을 에워싸고 있었고, 냉검상의 앞에는 능천위가 버티고 있었다.
"이놈! 소정을 내려놔라."
"후후...... 걱정하지 말아라. 결코 해치지는 않는다."
능천위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네놈의 의도는 무엇이냐?"
"간단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정금산장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약속만 해 주면 된다."
"이놈!"
능천위는 그대로 냉검상에게 짓쳐왔다. 냉검상은 차갑게 굳은 얼굴에 조소를 그리며 오른손을 구부려 천괴조(天魁爪)를 펼쳤다.
슈팟!
마치 회오리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천괴조의 환영(幻影)이 능천위를 엄습해 갔고, 능천위는 대경실색을 하여 뒤로 몸을 빼냈지만 그의 장삼 앞자락은 형편없이 찢겨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능천위는 너무도 어이없는 패배가 수치스러웠다. 그는 짐승처럼 어흥! 부르짖으며 다시 냉검상에게 덮쳐들었다.
"어리석군...... 어차피 승부는 불을 보듯 확실한데 굳이 덤벼들다니!"
냉검상은 더 이상 관대하지 않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눈 앞에서 수평으로 세웠다. 그리고 칼면에 새겨진 미인의 입술을 맞추고는 무섭게 덮쳐오는 능천위를 바라보았다.
순간, 번쩍! 하고 한 줄기 흰빛이 폭발하듯 허공에 선을 그었다.
능천위는 그 강렬한 빛선 속에서 사악하리만치 아름다운 미녀가 웃고 있는 모습을 잠깐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가슴은 불로 데인 듯한 격렬한 통증을 느끼고 입
술은 처참한 비명을 토해내야만 했다.
"으아아악......!"
능천위는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곤두박질쳤다. 뭉클뭉클 쏟아져 나오는 핏물이 보기에도 섬뜩할 지경이었다. 냉검상은 쓰러진 능천위를 향해 중얼거렸다.
"당신의 딸을 봐서 손속에 인정을 두었다. 하나 분명히 경고하겠다. 다시 한 번 정금산장에 시비를 걸면 더 이상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 적룡패든 뭐든 모조리 다 날려 버릴 것이다."
냉검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적룡패의 고수들이 분연한 고함을 내지르며 냉검상을 덮쳐왔다. 그러나 냉검상은 여전히 차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죽음을 모르는 불나방들......"
이어 그는 덮쳐오는 고수들을 향해 칼을 거꾸로 휘둘렀다. 순간, 마치 미인의 풍성한 머리칼이 휘날리듯, 칼잡이에 달려 있는 수실들이 펄럭이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으윽!"
"크으으......"
"어이쿠!"
냉검상은 허공으로 신형을 날리면서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한 마리의 비조처럼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능천위는 가슴을 움켜쥔 채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다. 저 자의 무공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
아니다.)
한 사당 안.
먼지와 거미줄만 뒤집어 쓴 태상노군상만이 두 눈을 흡부릅뜬 그 곳에서 열락에 겨운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아......"
태상노군상의 눈길이 향하고 있는 사당의 중앙에는 지금 한참 한 쌍의 남녀가 뱀처럼 엉켜 있었다. 바로 능소정과 냉검상이었다.
"후후......"
열락에 겨워하는 능소정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냉검상은 그녀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거칠고 부드럽게...... 마치 비파현을 고르는 악공의 능숙함처럼 그는 능소정을 다루고 있었다. 능소정은 몸부림을 치면서 연신 단내가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지만, 냉검상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면서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하...... 제발, 제발 날...... 부서줘요......"
능소정은 가늘고 긴 손가락을 냉검상의 등 속에 파묻기도 하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냉검상의 어깨를 깨물기도 했다. 그러나 냉검상은 기이하게도 그녀의 요구를 얼른 들어주지 않았다.
"미, 미칠 것 같아...... 날......"
"후후...... 너에게 있어 나는 영원한 주인이다. 그럼 나에게 있어 너는 무엇이지?"
능소정은 본능적인 수치 때문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제발......"
그녀의 의지는 대답하길 거부했다. 하지만 육체는 철저한 배신을 하며 그녀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후후...... 넌 미타현의 조향이란 계집보다 더 뛰어나게 선천적으로 타고 난 계집이야. 어서 대답을 해봐. 너는 무엇이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능소정은 냉검상을 끌어안으며 울부짖듯 말했다.
"다, 당신의 영원한 창녀!"
"후후후...... 됐어."
그제서야 만족한 듯 냉검상은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소정은 냉검상의 움직임에 따라 격렬한 흐느낌을 토했고, 사내의 덫 속으로 자꾸만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
* * *
"무슨 소리야! 단지 그 계집을 이용해 능천위를 유인했고, 그리고 다시는 정금산장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을 뿐인데."
정금산장으로 돌아온 냉검상을 재빨리 낚아 채어 자신의 거처로 끌고 온 설청하는 대뜸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흥!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절대 나는 속일 수 없어요."
"뭘?"
"당신은 분명 은밀한 곳으로 가서 그 계집년과 틀림없이 그 짓을 했을 거예요."
냉검상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그 짓이라니?"
설청하는 말문이 막혔다. 노골적으로 남녀의 정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설청하는 그만 분통이 터져 바락 악을 썼다.
"철면피!"
동시에 얼른 눈에 보이는 도자기를 집어 들어 냅다 냉검상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냉검상은 이크 하는 심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여 피했다.
와장창!
도자기가 산산조각 나면서 냉검상은 다시 물건을 던질세라 얼른 설청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술을 점령해 버렸다.
"읍...... 읍읍......"
설청하는 몸부림을 쳤지만 이내 냉검상의 행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냉검상의 손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부드럽게 그녀의 유방을 애무하면서 대담하게 그녀의 몸을 훑어내렸다. 설청하는 여자의 본능 때문에 약간 몸을 움츠렸을 뿐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냉검상은 그녀의 귓불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바보야......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세상에서 오직 너 뿐이야......"
그 말 한 마디에 설청하는 그만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말았다.
설진후와 그의 부인, 그리고 정금산장의 무사들은 기쁨이 넘쳐 하늘로 올라갈 정도였다. 설청하가 데려온 그 신비한 미공자가 능천위를 개패듯 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설진후는 항상 힘의 부족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지만 그로 인해 무예수업을 경안시했고,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힘의 부족을 여러번 느낀 적이 많았다.
해서, 얼굴도 미남이겠다, 무공도 강한 냉검상을 은근히 사윗감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말투가 마음에 안 들지만 그것은 가르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부에 냉검상의 무공이 가세된다면 천하에서 감히 설진후를 우습게 볼 인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냉검상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는 운자량과 정금산장의 무사들이 장원으로 돌아오면서 일은 묘한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운자량은 능천위가 쫓겨간 지 사흘 만에 돌아왔고, 돌아와서는 냉검상 때문에 정금산장의 위기가 벗어난 것도 알았다. 그러나 운자량은 냉검상이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더하고 곱해서 설진후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냉검상은 천산 일대에서 가장 흉폭한 비적단의 두령이고 무식하며 근본을 알 수 없는 고아이고...... 더욱이 천산의 산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첩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설진후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 강하고 잘 생긴 미공자가......?
설진후의 부인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특히 그녀가 충격을 받은 것은 냉검상이 수십 명에 달하는 첩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딸 가진 어머니로서 첩이 수십 명에 달하는 사내에게 어찌 딸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설진후의 아내는 운자량의 말을 듣는 순간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아무튼, 운자량의 등장으로 정금산장에서 영웅취급을 받던 냉검상은 다시 개망나니처럼 취급받게 되었는데, 당사자인 설청하는 오직 냉검상의 입장을 옹호할 뿐이었다.
다음날 저녁.
설진후와 대제자 위개악, 그리고 운자량과 설청하, 냉검상 등이 참석한 어색한 저녁식사가 끝나고 설진후는 따로 설청하를 불렀다. 그리고 냉검상을 포기하라는 말을 했다.
"아버지, 운사형의 말대로 그는 비적의 두령이고, 무식하고 첩이 많아요. 하지만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이예요. 그리고 그가 첩이 아무리 많아도 나를 첩들처럼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는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건 너의 생각이다. 그 무식한 비적을 어떻게 믿어?"
"아버지는 그의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운사형의 말만 믿고 그를 매도하시는군요?"
"닥쳐! 놈은 고아이고, 더욱이 놈에게는 들개처럼 야성
이 있어 언제고 비적의 기질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더욱이 운자량의 이야기로는 부령에서 살인을 했기에 현상금이 걸린 살인범으로 추적까지 받고 있다더라. 그 뿐이면 말을 않겠다. 그놈이 살인을 한 곳이 바로 계집을 차지하기 위해 유곽에서 벌인 일이 아니냐!"
설청하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저는 그이를 사랑해요. 사랑을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감수할 수 있어요."
"안돼! 그건 절대로 안돼!"
설청하는 울 듯이 외쳤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제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뿐이예요."
"청하야, 너는 이 아비의 하나 뿐인 혈육이다. 감정만으로는 해결할 것이 아니라 집안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신중하게 해결하는 것이야......"
설청하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설진후는 난감한 기색으로 설청하를 달랬다.
이때 두 부녀의 대화를 냉검상은 우연히 창 밖에서 듣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어서 그의 모습은 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우연하게 이야기를 엿듣게 된 냉검상은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득 냉검상은 하늘을 응시했다.
여인의 엉덩이처럼 풍만한 만월이 빛나고 있었다. 그 만월 속에서 웃고 있는 설청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가깝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멀리 있다고 느껴
지는 설청하였다.
(녀석...... 네 마음을 알았으니 나는 괜찮아......)
달 속에 떠올라 있는 설청하는 여전히 냉검상을 향해 감미로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네 말처럼 나도 너를 사랑한다, 청하...... 서로가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지라도.)
냉검상은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네 부친의 말도 일리가 있어...... 나는 무식하고 고아에다, 비적의 두령이지. 하지만...... 그것을 나는 절대 수치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냉검상은 창문쪽을 흘깃 보았다. 설청하는 여전히 울음을 삼키고 있었고, 설진후는 무어라고 설청하를 설득하고 있었다. 잠시 두 부녀의 그림자를 보던 냉검상은 몸을 돌렸다.
(청하...... 우리는 잠시 서로를 진중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분명히 약속하마. 결코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든 하지 않든 간에...... 너를 포기하지는 않는단 말이다......)
냉검상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정금산장을 떠나는 것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렇게 떠나면 안되지... 안돼...
잼 납니다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