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헤어진 뒤 그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일요일, 그녀가 한참 자고 있을 시간인 아침 10시에 그의 전화가 울렸다. 전해줄 것이 있다며 새벽 3시까지 아이들 중간고사 보충을 하고 온 그녀의 단잠을 그가 깨운 것이다. 약속장소에는 그가 먼저 와 있었다. 밖에 오래 있으면 축 처진 어깨가 닳아버린 건전지처럼 힘없어 보이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는 손으로 메뉴판을 만지작거리는 그가 키치조지의 검은 고양이보다 멀어보였다. 이제 말없이 앉아서 창문만 바라보며 침묵을 사용하기엔 그와 그녀는 너무 어색한 사이였다. 그녀는 자신이 길들여버린 그가 그녀를 잊은 지 오래라고, 또박또박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렇게라도 네 눈을 바라보고 말하고 싶었어. 받지 않는 전화기를 들고 있는 것도 지겨워서.”
“낮엔 어떤 전화도 받기가 힘들어. 시간표가 빡빡해서. 그리고 울 짠돌이 원장이 CCTV까지 설치해서 강의를 감독한다구. 새벽엔 자기 바쁘니깐 완벽한 생활인이야. 이제 아침에 수영도 다시 다닐 생각이니깐 더욱 전화완 멀어지겠지. 시간을 쪼개고 쪼개는 중이야.”
“언제나처럼 넌 널 위해서만 사는구나. 조금도 남을 위해 널 나누어 줄 생각은 없는거야? 그렇게 살다가 지쳐서 뒤돌아보면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니.”
“난 나름대로 새로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고, 그들 못지않게 옛 친구와의 관계도 이어가고 있어. 단지 ‘사랑’하지 않고 있다해서 그런 식으로 날 몰아세우는 건 옳지 않아. 우린 3년간이나 떨어져 있었다구.”
그녀는 피곤이 밀려왔다. 새로 칠한 하늘색 매니큐어를 그가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차차 다시 널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싶어.”
그는 예전에 그녀가 철석같이 믿었던 것을 믿고 있다고 하고 있다. 변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지. 난 이대로가 좋아. 다시 우리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이라 믿는 거니?”
그가 이번엔 렌즈로 인해 벌겋게 충혈된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안쓰러워...” 그녀가 알기론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간섭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건 ‘그’였으니까. 그 후에도 그녀는 ‘내분신♥’이란 지정벨이 울릴 때마다 베터리를 분리하며 알 수 없는 승리감에 젖어들었다.
#9. 사라진 사슴이 그려진 습작노트(자작시 삽입)
“안선생, 등단 축하해. 매일 같이 야근했는데 언제 그런 얌체같은 짓을 했대. 원장이 신나하던데.......” 군소리없이 칼보충을 해서 원장의 총애를 받는 영어1 김선생이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큰 기쁨도 큰 절망도 없는 건조한 그녀의 생활에 불현듯 ‘문학동네신인상 시부문 당선’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졌다. 물론 4년 전 그녀는 소설이 막힐 때면 시를 끄적대면서 언제 나에게도 뮤즈가 강림할 것인가 한탄하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대학 졸업 후 그녀는 그 어떤 문학상에도 응모해본 적이 없다. 5권의 습작노트와 12권의 일기장만이 퇴역한 군인의 훈장처럼 그녀의 방 책장 구석에 처박혀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도 모르게 그녀는 등단을 해 버렸다. 이름도 안희은, 이메일 주소와 집주소도 그녀의 것이었다.
‘정말 내가 쓴 시일까. 아, 요새 모든 기억이 뒤섞이고 있어’
그녀는 아무래도 집에 있는 습작노트들을 뒤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도둑고양이처럼 글문이 막힐 때마다 펼쳐보던 습작노트들의 존재여부를 확인하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다.
어쨌든 학원에서 그녀의 직위는 ‘국어쌤’에서 ‘글쓰기쌤’으로 바꿔져 있었다. 원장은 논술교육의 붐을 타고 대대적으로 1층의 바지락칼국수집을 인수해서 ‘박학천논술교실’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논술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실들을 새로 만들었다. 돈은 없고 야망만 큰 원장은 ‘다수의 문학상을 탄 S대출신의 글쓰기 강사’인 그녀를 위해 새로 명함을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문창과 출신 선생님들과 함께 토요일에는 본사에 가서 논술교육을 받고 주중엔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들까지의 콧물 묻은 논설문과 감상문을 몇 백장씩 읽어야만 했다. 휴일에도 달리 할 일이 없으면 주중에 일을 줄이기 위해 학원에 나가서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달라진 건 그녀에게 가끔씩 비아냥거리며 “안선생, 이제 시는 안쓰나봐. 소설 하나 더 써서 대박 내봐. 또 알아. 월급이 2배로 오를지. 허허”라고 쏟는 동료들의 시기어린 말들뿐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초등논술 선생님과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책만 읽고 글만 쓰다보면 알 수 없는 언어장애가 오지 않아요?” 문창과를 나오고 논술 학원일을 하면서 상담을 하려면 화술이 중요해요. 근데 저도 처음에 너무 버벅대기만 해서 학부모들이 절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 후 전 잠시 글쓰는 걸 쉬고 있어요. 그래야 거짓말까지 술술 나온다니깐. 후후. 국어쌤은 본격적으로 글을 쓰려면 이 일 그만두는게 좋을거에요.“ 그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 속에만 파묻혀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반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녀도 그 균형을 맞추기가 가장 힘들었다. 사랑의 타이밍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학부모들과의 대화에서 뱀같이 유연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말 잘하는’ 인간이 되었다.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11. 숨어 피우는 담배
그녀가 대학 시절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 중 하나가 여자화장실 안에 담배꽁초였다. 왜 숨어서 뻐끔거려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문과대 앞에서 또는 학생식당 앞에서 당당히 피면서 지나가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즐겼다. 그들의 경멸하듯 동경하는 이중적인 시선이 좋았다. 그가 유일하게 그녀에게 간섭한 것도 그것이었다.
“제발 길거리에서 담배 좀 피우지마.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뭐, 어때. 쳐다보는 건 자유야. 길거리 끽연도 내 자유고.”
“사람들이 뭐 부러워서 쳐다보는 줄 알아. 다 널 욕하는 거야.”
“그럼, 자기도 노벨상도 못 탈 돈도 안 되는 그 박사과정 좀 때려치우고 중소기업이라도 취직해. 남들의 시선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몇 년째 그 꾀죄죄한 차림은 모야.”
그와 그녀 모두 서로 변하지 않는 부분을 아플 때까지 밟고 또 밟고 있었다. 빨간 끈을 손에 움켜쥐고.
끈을 놓아버린 그녀는 이제야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물론 누가 하루에 몇 번 화장실에 갔는지까지 아는 말 많은 학원에서도 남자동료들과 맞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숨어 피우는 담배가 편하고 더 달다. 숨어서 즐기는 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이기는 것 따위는 더 이상 그녀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단지 시선을 보내지도 받지도 않을 뿐이다. ‘의식은 무의식의 산물이며 그것은 격렬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읽던 정신분석학 책에서 배운 그녀는 의식함으로써 피곤해진다는 것을 안다.
의식한다는 것은 곧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녀가 책만을 죽도록 읽었던 이유는 남들과 다른 ‘시계’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범하게 사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대학 시절과 달리 그녀는 이제 ‘다르게 사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복잡해지는 생활처럼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는 그녀의 글을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었다.
짝짝짝!!! 이번 글은 첫 번째 글 만큼이나 좋네요~ 자신의 글을 읽고 독자가 공감하고 독자 자신의 이야기와 일치시켜보는 것이 가장 큰 인정이라고 한다면... 님은 성공하셨어요... 제가 그랬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12편과 에필로그 완전 기대됩니다. 두근두근 ^^* (낑낑거리며 읽었더니 수정이 되어있네요 ㅠ.ㅠ) ㅋㅋㅋ
첫댓글 글 보기가..넘 힘들었어요.. ^^;;;;; 아우.. 그녀는.. 쿨~ 하네요........ 부러운 부분이기도 한데.. 왠지 그 쿨한면에서 외로움이 묻어나오는듯 싶기도 하고.. 정말 속시원하는 듯 하는것 같기도 하고.. ^^
모티브 자체가 절망을 낳는다로 끝나는 걸 보면 '그녀'가 쿨한 사랑에 외로워하는 것도 같죠?...음...끝까지 가봐야죠..^^
저겨....에디터를 돌리셨던듯...-_- 눈아플꺼같아요 읽기도전에... 저도 늘 그녀의 습작을 기다리는 열혈독자로서 띄어쓰기 간곡히 부탁드려요
어허 죄송. 다시 수정할게요.
짝짝짝!!! 이번 글은 첫 번째 글 만큼이나 좋네요~ 자신의 글을 읽고 독자가 공감하고 독자 자신의 이야기와 일치시켜보는 것이 가장 큰 인정이라고 한다면... 님은 성공하셨어요... 제가 그랬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12편과 에필로그 완전 기대됩니다. 두근두근 ^^* (낑낑거리며 읽었더니 수정이 되어있네요 ㅠ.ㅠ) ㅋㅋㅋ
그러게. 왜 에디터가 작동되었을까. 조금 뒤에 와서 잠깐 본 저도 눈이 아팠어요^^;;; 분명 대화부분이랑 주요부분 띄어쓰기를 신경써서 올렸는데 말이죠. 음...이제 마지막이네요..저도 아쉬워요. ㅠ
글이 너무 맛있으세요~~~ 계속 기대할게욧~
맛있는 댓글도, 감사해요^^
담 편두 너무 기대되요 ^^ 이번 편도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체리쥬빌레를 좋아했어요. 고등학교때(뜬금없죵?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짠돌이토끼님, 기억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