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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튼 분류에 의한 현대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강의가 연속되고 있는데, 연속되는 아래의 글들은 정통 분류와의 거리를 연결시켜 주는 글이다. Something and nothing은 코튼 분류의 "중요한 것, 하찮은 것"과 결론이 거의 일치해서 연결해 본다. 이 somthing & nothing의 내용들도 이전의 강의에서 대충적으로 언급이 다 되었던 내용인데, 비교적 정확한 문장으로 깊게 설명을 한 글이다. 이전부터 이런 글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대부분 내용들이 한 번 이상 언급이 되어 글을 보더라도 그리 생소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다.
■ 사진에서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는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규정되는가.
앨런 세큘라(Allen Sekula)는 사진의 의미란 그 시대 문화가 규정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문화는 의사소통 행위와 관련된 각 부분들을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작동시키기 때문에 사진의 의미, 가치 혹은 내용과 담론은 그 시대 문화로부터 발생하는 정보교류의 우선순위에서 매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앨런 세큘라의 말을 확장하면 우리가 어떤 사진이 더 시대가 호명하는 사진이고, 또 어떤 사진이 현대사진으로서 시대적 가치와 비중을 가진 사진인가를 따진다고 한다면 그것의 판단과 기준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일상적 삶에서 중요하다고 인식한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우선순위이다. 사진에서 의미는 시대와 문화적 감각 안에 있으며, 또 그 시대 문화적 경험과 학습으로부터 발원하는 현대성의 상징과 이해 속에 있다. 사진의 의미는 일상으로부터 공유된 시대성과 현대성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다.
확실히 사진은 어떤 특별한 것을 찍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상식으로부터 “누군가(how's)”의 의미로서 찍는 것이다. 사진의 일상성은 이것이다. 보편적인 통념과 상식이 작용하는 현실의 삶에 있다. 일상의 오브제들은 이러한 현실로부터 “어떤 의미작용(something contexts)”의 대상이 되고 “어떤 가치(something values)”의 내용이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일상의 오브제들 간에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미리 선택되고 미리 선점되는 오브제도 없다.
사진의 범위는 포괄적이고 방대하다. 버릴 오브제가 없고, 버려져야 할 오브제도 없고, 배제될 오브제도 없다. 사물의 의미는 중심도 주변도 없듯이 빛나지 않은 소재, 의미 없는 대상이은 없다. “시각적 상징주의(visual symbolism)”는 그 점에서 무의미를 의미화 하는 이즘(ism)이다. 19세기 문학의 상징주의가 정형화된 객관주의에 반대하고 의미 분석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여 대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종합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던 것처럼 시각적 상징주의도 정형화되어 있는 예술적 대상주의에 반대하여 하찮은 일상 이미지에서 시대의 의미, 현대성의 의미를 끌어내려는 상징주의 모습이다.
때문에 현대사진이 어떤 주제, 소재, 대상으로부터 사진적 의미를 갖는가, 못 갖는가의 판단은 사진가들의 영역이 아니다. 사진가들은 그저 찍을 것인가, 말 것인가만 결정할 뿐이다. 사진의 내용, 의미, 가치는 시대와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에 있고 커뮤니케이션 체계와 소통구조에 있다. 현대사진은 “아름다운 사진(a beautiful picture)”이 아니다. 현대사진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찍을만한 대상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따진다. 판단의 잣대는 무엇 때문인가. 어떤 선지각적 경험과 의식 혹은 교육과 학습이 “적당하고(something good)”, “적당하지 않다(nothing good)”는 인식에 작용하는가. 사회적 통념인가, 선척적으로 “아름다움(beauty)”에 대한 무의식적 작용인가.
대상을 취하고 선택하려는 의지는 절대적으로 사진가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사진에 찍히지 못할 대상(unphotographed object)”, “사진에 찍히기에 부적합한 주제(unphotographable subject)” 에 대한 판단은 사진가의 영역이 아니다. 현대사진은 이런 문제에 더욱 민감하다. 가치와 효용성의 문제는 사진가도의 몫도, 제도의 몫도, 아카데미의 몫도, 우리의 관념적인 인식의 틀도 아니다. 현대사진의 주제, 소재, 대상은 시대의 의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 일상적 오브제는 어느 순간 중요한 의미와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하는가.
1960년대 중반 개념미술, 후기 미니멀 조각(post-Minimal sculpture)은 전통적 “예술대상성주의(art objectivism)”에 반기를 들었다. 인간이 예술을 규정하고 이러이러한 주제, 소재, 대상이 예술일 수 있다고 예술대상성주의의 어떤 조건화(conditions)를 부정한다. 대신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으며 즉흥적인 생각(ideas)까지도 예술의 조건이 못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세기 초 마르셀 뒤샹의 이끈 아방가르드 정신이 재인식, 재구축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개념미술이고 미니멀 조각이다. 이들 예술은 뒤샹처럼 예술의 조건이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발생하는 순간”에 있음을 자각한다. 뒤샹의 <변기>가 예술의 소재성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의미의 소재성에서 온 것이었음을 자각하며, 또 어떤 것의 “의미 있음(something)”, “의미 없음(Nothing)”의 판단이 고정된 제도, 인식, 의식, 학습, 경험, 통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개념미술과 미니멀 조각이 전통적 예술 대상성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는 갤러리, 아틀리에(혹은 스튜디오), 세계(the world)를 해체하는 데 있었다. 즉 이들은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세계가 아틀리에(스튜디오)이고, 곧 갤러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기성품(ready-made object)이 작품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미술관이 되고, 일상이 예술이 되고, 기성품이 작품이 되었다. 일상의 재현물은 언제든지 시대성과 현대성 앞에서 “의미체(significant thingness)”가 되었다. 뒤샹의 아방가르드 정신이 개념미술과 미니멀 조각에 미친 강력한 영향은 이것이었다.
■ 현대사진은 Something-Nothing의 경계선을 일상에서 어떻게 인식하는가.
현대사진은 80년대 초반부터 “Something-Nothing”의 경계선에 고민한다. 이 시기부터 사진은 미리 정해진 어떤 예술의 주제, 소재, 대상에 대해, 그리고 미리 전제된 예술의 형식과 조건들에 회의한다. 그러면서 점점 시대성과 현대성이 예술의 대상성을 규정하고, 의미와 가치를 발생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런 태도 변화의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한 작가가 신디 셔먼 이다. 신디 셔먼을 위시한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진가들, 또는 샌디 스코글런드 와 같은 뉴 웨이브 사진가들은 오브제에 대한 이전 생각들을 변화시켰으며, 그것들의 의미화 방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80년대를 지나면서 일상성의 특징들은 더욱 진부함(unsophisticated thingness), 모호함(ambiguity thingness), 가벼움(unweighted thingness), 상투성(ordinary thingness), 일시성(temporary thingness), 유희성(joyfulness)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성의 모습들이 자연스런 문화풍경으로 되면서 사진도 이런 주제, 소재, 대상들이 현대성을 설명하고(to explain), 해석하고(to interpret), 인식시키는(to recognize) 상징적인 오브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현대사진은 보다 새롭게 일상으로부터 다양한 의미 기표들을 건져 올린다. 영화 이미지, 신문잡지 이미지, 광고 이미지, 상표 이미지, 상품 이미지 등 물신과 욕망, 소비주의와 상업주의에 이용된 진부, 모호, 가벼움, 상투성, 일시성의 기표들에 주목하고, 또 그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하기 위해 리메이킹, 리바이블, 재생산 구조(reinvented structure)를 향한다.
현대사진이 삶의 스펙트럼을 주목한 것도 이 지점이다. 일상의 구조가 현대성의 구조라는 것을 인식한다. 쇼핑물, 백화점, 대형마트와 같은 소비시스템의 구조에 천착한 것도 이 때문이고, 관광지, 유원지, 테마파크, 놀이공원, 박물관, 미술관, 극장의 여가시스템에 천착한 것도 이 때문이고, 의상, 의복,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등의 정체성의 재현구조에 천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신문, 잡지, 간판, 가판대, 전봇대, TV의 상업광고 및 카피문구의 욕망 자극 시스템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고, 명품 브랜드, VIP 자동차, 로얄 아파트, 고급 레스토랑의 위계 시스템을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사진은 90년대 중반부터 더욱 더 일상적인, 일상에서 생산되고, 재현되고, 소통되는 신호와 코드들에 주목하면서 일상과 문화를 가장 중요한 현대성의 코드로 인식한다. 티나 바니, 마틴 파, 야나기 미 와의 사진이 바로 그런 사진들이다.
■ Something-Nothing을 의미화 하는 현대사진의 코드는 어떤 모습인가.
“Something”은 일상을 새롭게 의미화 하는 맥락이다.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일상적 삶에 다가서고,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읽는 코드이다. 이는 곧 “Nothing”으로 생각했던 어떤 모습(진부한 일상)이 어느 순간 “Something”으로 자리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일상으로부터 극적인 무대의 연출자가 되고 연기자가 되고 관객이 된다. 또 거리에서, 하이웨이에서, 가정과 공공장소에서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연극보다 더 진지한 드라마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는 일상보다 더 생생하고, 실제적인 환상, 환각, 환영의 드라마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백화점 10% 바겐세일을 위하여 비싼 기름을 길에 쏟아 부기도 하고, 휴식을 위해 나섰다가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기도 한다.
Something & Nothing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일상은 전복의 묘미를 선물한다. 어제의 “Something”은 이제 의미 없음의 “Nothing”이다. 거대담론, 공공의 역사, 국가적 이슈와 사건은 더 이상 최우선적 “Something”이 아니다. 국가 주도의 행사, 공공기관과 제도의 권력적 위계, 공공의 복리와 안녕과 질서를 위한 행정적 규율과 규칙, 그리고 지구촌의 전쟁, 재난, 참화들 또한 문화보다 우선한 “Something”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다. 지금은 <대한뉴스>의 시대가 아니다. 미사일보다 수천 배 강한 것이 월드컵이다. 현대사진의 의미는 전횡되지 않는다. 의미가 발생하는 지점과 상황으로부터 가치가 발생한다. 물방울 다이어 사건, 옷로비 사건은 문화 일상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Something-Nothing”은 문화 속에서 순간 전복된다.
■ 팩션(Faction)은 어떤 점에서 현대 사진의 주요 패러다임이 되고 있는가.
“팩션(Faction, Fact + Fiction)”은 Something & Nothing의 경계 그리고 의미의 시대성을 나타내는 현대성의 모습이다. 또 팩션은 현대사진의 주요 패러다임의 하나이다. 오늘날 현대사진은 실재(팩트)와 허구(픽션)을 구분하지 않는다. 영원한 펙트도, 영원한 픽션도 없다. 이것이 현대사진이 바라보는 Something & Nothing의 의미화 맥락이다. 우리는 사진을 보되 사진에서 진실을 찾거나 실재성을 찾지 않는다. 대신 소통의 코드로서, 감각의 코드로서 바라본다. 이미지 시대는 더 이상 팩트와 픽션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시대는 더 이상 팩트에 우선권을 주지 않는다.
오늘날 누구나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다. 누구나 일상으로부터 이미지를 취한다. 카메라는 유희와 놀이도구이다. 시대의 목격자, 진실의 증언자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카메라를 가진 인간은 빌렘 플루서가 말처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이다. 현대성은 이것들이 문화 일상으로부터 발현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 데 있다. 현대사진이 일상을 중요시 하고 팩션을 시대성과 현대성의 패러다임으로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 문화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오늘이다. 더 이상 우리가 오늘을 의미화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우리를 의미화 한다.”
발터 벤야민 은 “예술의 모습은 시대가 결정하고 규정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예술의 대상성과 가치와 의미는 영원불변한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지금의 현재성이 결정하고 판단한다. 어제의 “Something”이 오늘은 “Nothing”이 된다. 반대로 어제의 “Nothing”이 오늘은 “Something”이 된다. 사진의 다이얼로그(Dialog)는 시대 속에서 변한다. 현대사진은 이것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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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알고는 있었지만 "현대사진은 “아름다운 사진(a beautiful picture)”이 아니다. 현대사진이 아름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찍을만한 대상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따진다."라는 구절이 와 닿습니다. ......현대사진의 주제, 소재, 대상은 시대의 의미작용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초반부의 내용이네요.
2.일상적인 오브제에 대해 “의미 있음(something)”, “의미 없음(Nothing)”의 판단은 고정된 제도, 인식, 의식, 학습, 경험, 통념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해야한다 것이 핵심이다. 80년대부터는 사진이 취한 오브제로서의 일상성은 진부함(unsophisticated thingness), 모호함(ambiguity thingness), 가벼움(unweighted thingness), 상투성(ordinary thingness), 일시성(temporary thingness), 유희성(joyfulness)..등의 상징적 특징을 지닌다는 것...... 더하여 일상성이 곧 현대성의 구조라는 것이 90년대 까지 사진예술가들의 공감이었다.
3. 낫씽이 썸씽이 되는 통찰, 즉 낫씽에서 어떤 의미를 구현하고 규정하는...... 일상의 의미화
4. 실제와 허구의 구분이 불분명한 경향으로 현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오늘날 사진의 주요 패러다임이다. "우리는 사진을 보되 사진에서 진실을 찾거나 실재성을 찾지 않는다. 대신 소통의 코드로서, 감각의 코드로서 바라본다. 이미지 시대는 더 이상 팩트와 픽션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시대는 더 이상 팩트에 우선권을 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유희와 놀이도구이다. 시대의 목격자, 진실의 증언자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카메라를 가진 인간은 빌렘 플루서가 말처럼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이다. 현대 문화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오늘이다. 더 이상 우리가 오늘을 의미화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우리를 의미화 한다.”....
오늘이 우리를 의미한다. 그건 곧 “예술의 모습은 시대가 결정하고 규정한다”는 벤야민의 말로 환원될 수 있겠습니다. 현대사진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같은 내용이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