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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쉽게 잘 쓰려면 이중 구조에 먼저 눈을 뜹시다
이중구조란 글자 그대로 두 가지 그림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현실의 나와 의식 속의 나, 현재의 나와 과거 미래 또는 추억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거울 속의 나, 현실의 나와 그림 속의 나......등
이중구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재의 이중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즉 어떤 오브제를 갖다놓고 그 소재와 나와의 관계 둘로 보고 시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내가 아예 그 소재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이때 유의할 점은 본문 내용에 절대 그 소재가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 소재가 들어가면 단어를 보는 순간 내가 그 소재라는 환상이 갑자기 확 깨져버립니다.
둘째는 거꾸로 그 소재가 나로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고
이때는 그 반대로 나의 라는 말이나 나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단어를 보는 순간 환상이 확 깨져버립니다.
셋째로는 그 소재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서 떨어져 앉아 대화를 나누며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1
제목을 효과적으로 잘 붙이는 데에도 요령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은 화장실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써 놓고 화장실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방법입니다. 더욱이 시 뿐만 아니라 소설 논문 일반 문서에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 제일 고전적인 방법입니다.
하여 화장실에 관한 내용으로 시를 쓰고 제목을 화장실로 붙여 효과적인 제목이 되려면 다음의 요건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즉 그 화장실이 우리가 전에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특별한 모습의 화장실이거나, 아니면 그 화장실에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새롭게 의미가 창조된 화장실이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내용이어야 그 시를 읽어줄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시 내용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센텐스 키 센텐스를 제목으로 올리되 전체 내용을 아우를 수 있도록 약간 변용해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필자가 이 방법을 개발하게 된 배경은 평소 광고 카피와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을 유심히 살피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즉 기사와 광고 카피의 헤드라인이란 시로 여기면 제목에 해당하는데
이걸 잘 뽑느냐 잘 못 뽑느냐에 따라 그 기사 또는 광고의 첫 인상뿐만 아니라 여운까지 전혀 다르다는 데에 착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드라인이 그 카피, 기사의 핵심을 이우고 있는 내용이다라는 것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시 내용중 가장 근간이 되는 내용의 속성을 가진 엉뚱한 것으로 제목을 붙이는 방법입니다. 위의 내용으로 설명을 하자면 화장실 내용으로 시를 쭉 써놓고 제목을 김영남으로 붙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과 제목을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김영남을 화장실이다 라는 시를 쓴 거가 되는 거죠.
엉뚱하게 제목 붙이는 법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그 수준과 기교가 한결 세련을 요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걸 잘 못 붙이면 시가 난해해져 무엇을 썼는지 독자가 잘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제목을 제대로 찾아 붙이면 매우 뛰어난 시로 금세 둔갑하게 됩니다.
시의 제목과 본문이 기본적으로 메타포 즉 은유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첫 번째는 a는 b이다라는 은유관계가 있는 문장을 가져와 a를 제목으로 올리고 b에 해당하는 내용을 창조해 시를 만드는 방법이고, (상당한 수준을 요하는 방법) 두 번째는 b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써 놓은 다음 a에 해당하는 제목을 발견해 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쉽게 구사할 수 있는 방법)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표현으 새롭고 독특하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뒤집어 생각하고 행동하기입니다. 남들의 시선이 다 한쪽으로 쏠려있을 때 자기는 거꾸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전에 자주 보지 못했던 사고와 행동이니깐 우선 시선을 끌게 되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거죠. 묘사란 그 동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는 인식체계로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구사할 때 유의한 범은 시 전편에 걸쳐서 다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요. 전편에 걸쳐서 구사하면 이것 또한 한쪽 체계의 인식구조로 건락하고 굳어지기 때문에 군데군데 양념치듯 구사해야 되요. 특히 첫연 첫구절에 이걸 효과적으로 구사하면 독자들을 아주 매료시킬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주변 소재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입니다. 즉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또는 풍경 내에 있는 주변 소재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시가 그림처럼 아주 선명하게 되고 초점도 또렷하게 됨을 금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특히 풍물, 풍경시를 쓸때 이 방법은 아주 효과적입니다.
좋은 문장을 만드는 요령
소설가/방 영주
* 항상 국어 사전을 옆에 놓고 정확한 단어를 골라 써야 한다.
(어휘력 증가)
* 애매한 표현은 삼가고 확실한 표현을 해야 한다.
* 문장은 되도록 짧게 써야 한다.
* 첫 문장은 더욱 짧게 써야 한다.
* 비약이 없고 논리적으로 이어지게 써야 한다
* 그래서 문장 자체는 단순, 정확, 명확해야 하다.
* 한 번 쓴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쓴 것을 몇 번이고 고쳐 써야 한다.
(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친 글이 좋은 글이다)
* 완성된 글은 버리지 말고 보관해뒀다가 나중에 다시 확인하며
추고(첨가 하고 빼는 작업)의 과정을 거치는 게 좋다.
* 다른 사람이 쓴 좋은 글을 보면서 좋은 말이나 표현은 자신의 것으로 바 꿔 응용하는 습관을 갖는 게 좋다.
무릇 모든 창작 행위는 처음에는 모 방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지나면 자신의 것이 자연스 럽게 만들어지는 까닭에서이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위해 다음 여섯 가지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1. 글을 쓰는 능력은 사고하는 능력이다.
창의적,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면 참신한 아이디어나 설득력을 가진 글을 쓸 수 없다.
좋은 글을 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서 생각이란 밖에서 주어진 문제를 당연히 받아 들이고 답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주장이든 그것을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그 문제의 답을 찾으려는 태도다.
또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때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놓고
다른 사람이 나의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그 문제에 답을 하려는 태도다.
2. 글쓰기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읽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글은 무의미하다.
독자가 글을 읽을 때 글의 흐름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항상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한다.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습관이
읽기 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다.
3. 논리적인 글을 쓰려면 글을 쓰기 전에 글의 구조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글의 구조란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의 연관 관계다.
자신의 글이나 다른 사람의 글을 요약하는 연습이 논리적인 글의 구조를 파악하는데도움을 준다.
4.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좋은 글을 단순히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적은 양의 글을 꼼꼼히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읽는 게 중요하다.
또 읽으면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면 사전이나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거나 답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문의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5.글을 쓰고 난 뒤에 그 글을 반복해 읽으면서 고치는 습관이 필요하다.
좋은 글은 반복된 수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주장과 근거가 참신성과 설득력을 가지는지, 문장과 문장 또는 단락과 단락 간의
연결이 자연스러운지, 문장이 문장으로서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긴 문장을 자주 사용하는지,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는지, 구어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 또는
다짐의 표현을 사용하는지, 무관한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는지,
한 문장에서 한 가지 생각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지, 반복되거나 중복된 내용이 있는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수정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 도움을 줄 수 있다.
6. 관심과 정성을 가지는 태도가 중요하다.자신이나 타인의 생각과 글에 쏟는 관심,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세우고 수정하는데쏟는 정성으로부터 참신하고 논리적인 생각과 글이 나올 수 있다.
-김준성, 서울대 글쓰기교실 선임연구원
우리는 왜 문학을 갈망하는가 / 이향아 (시인, 호남대교수)
* 글쓰기와 말하기
문학과 생활은 먼 거리에 있지 않다. 인간의 생활, 그 체험을 표현한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나누어 가지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말로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하지만 글로 전하기도 하는데 삶의 체험을 글로 만들어 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우리는 작가라고 한다.
그런데 '말로는 할 수 있어도 글로 쓰지는 못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아마도 글을 쓰는 일에 겁을 먹기 때문일 것이다. 겁을 먹게 되는 것은 글쓰기와 말하기가 전혀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와 말하기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글은 쉬워진다.
* 시는 배워서 무엇하나
공자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하루는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시는 공부해서 무엇합니까? 그러자 공자님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小者 何莫學夫詩 詩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 草木之名
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위의 공자의 말을 통하여 문학을 왜 공부하는가 그 의의를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게 된다.
詩可以興은 시가 가히 흥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흥을 일으킨다는 말은 '흥분', 즉 감정의 충일상태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너무 흥분하는 모습도 세련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흥분을 잘 하는 사람치고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우리는 무감동한 사람의 모습을 비인간적이라고 하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을 목석같다고 한다. 감동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며 무감동한 것은 비정적인 것이다.
詩可以觀이란 시가 가히 보게 한다는 말이다. 즉 시를 공부함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게 한다는 의미다. '본다'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시각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안다는 말이다. 모른다는 말을 '어둡다', 혹은 '캄캄하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알게 되었다는 말을 '눈을 떴다'느니 '훤하다'느니라고 말하며, 글을 모르는 사람을 '文盲者'라고 하여 소경맹자를 쓰는 것을 보아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본다는 말과 안다는 말을 동일시하고 있다.
可以群은 무리를 지을 수 있게 한다는 말이다. 무리를 짓는다함은 여럿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 수 있다는 말이며 여럿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 수 있으려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양보하면서 타인과 조화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홀로 완전하고 홀로 똑똑하고 홀로 뛰어났다고 자부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단련된 인격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可以怨. 원망할 수 있다함은 감정의 정직한 표현이 가능함을 말한다.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일은 어렵다. 칭찬하기는 오히려 쉽지만 솔직하게 원망하기는 망설여진다. 그러나 시를 알면 투명한 감정표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시인 정서의 자유분방함, 정서 표현을 중시하는 시인의 특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邇之事父 遠之事君.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혈육이다. 혈육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이웃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멀리 인금을 섬긴다는 말은 반드시 왕정시대의 임금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가원수도 되고 위대한 사람에 대한 경의라고 할 수 있다. 국가원수를 존경할 수 있는 국민들은 행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多識於鳥獸 草木之名.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안다는 뜻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관심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의미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내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시를 알면 사랑이 충만해져서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다. 새로 반편성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생님이 내 이름을 알고 있을 때의 그 황홀했던 추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 학기도 넘게 지난 다음에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문득 '야, 네 이름이 뭐지?'라고 물었다면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절망적인 일로 남을 것이다.
공자의 말대로라면 시를 공부하는 일은 사물의 이치를 알게 하고 충일한 정감으로 인간과 사물을 사랑하여 서로 어울리며 살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지 몰라도 살 수는 있다. 오히려 문학을 알고 살면 다정다감함으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 음미하고 유심하게 사물을 대함으로써 같이 지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을 알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에 문학은 필요하다.
* 창작하는 문학, 감상하는 문학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일에는 겁을 먹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감상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시적 표현을 하면서 산다.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겨우 삼류 시인밖에 되지 못한다는 비관의 말이 아니라 삼류일망정 이미 시인의 계열에 올랐다는 말이다. 우리는 보통의 일상생활에서도 시적인 비유와 상징을 즐겨 쓰고 있다. 돌아다보면 우리들 할머니나 어머니가 시적인 표현을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색으로 표현하는 사물.......... 새빨간 거짓말. 까맣게 몰랐다. 보랏빛 꿈. 싹수가 노랗다. 푸른 희망. 회색분자. 검은 거래. 분홍빛 편지. 핑크 무드. 속이 놀놀하다.
신체로 표현하는 감정........... 그녀와의 이별이 가슴 아프다. 그 사람이 잘 되니 배가 아프다. 이제는 손을 씻었다. 미국과 손을 잡았다. 발이 되어 일하다. 너 목이 몇 개냐. 너무 콧대가 높다. 눈이 높아 탈이다. 간덩이가 부었다. 쓸개도 없냐. 귀가 여려 잘 속는다.
동물로 표현하는 감정.......... 쥐새끼 같이 잘 빠져나간다. 까마귀 정신. 개코도 아닌 소리. 호랑이 없는 산에 토끼가 선생. 여우같다. 곰처럼 미련하다. 돼지같이 잘 먹는다. 참새처럼 재잘댄다. 잉꼬부부.
문학을 한다고 하면 창작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직접 창작하는 것도 문학이지만, 남의 작품을 감상할 줄 아는 것도 문학적 능력이다. 전문적으로 남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를 논평하는 사람을 비평가라고 한다. 여러분들이 연속극을 보고서 그 연속극 재미있더라 혹은 재미없더라 느낌을 표현한다면 그 자체가 비평이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이나 미술도 우리는 솔직한 느낌을 표현함으료써 비평적 논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삼류시인일뿐만 아니라 일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게 된다. 비평하는 독자가 우수하면 창작하는 사람이 정신을 차려서 수준 높은 작품을 발표하려고 노력하게 되지만 독자가 그렇지 못하면 작가가 태만해질 수 있다. 특히 현대는 좋은 작가보다 오히려 좋은 독자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누구나 무대로 나가서 연극의 배우로 주인공의 역할을 담당하려고 할 뿐 아무도 관객이 되려고 한다면 결국 연극은 망하게 된다. 독자가 없는 소설가나 독자가 없는 시인은 존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평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작가가 되고 싶어 열렬히 요구한다면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작가가 되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언어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 감각을 키워라.
'새빨갛다'와 '시뻘겋다'의 차이를 알아야 되고 '야들야들하다'와 '유들유들하다'의 차이를 아는 것이 언어감각이다. 언어감각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예민하다.
'네가 와 주어야겠어'와 '너라도 와주어야겠어'는 다르다.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각각 달리 말할 수 있다.
많이 생각날 거야.... 늘 생각나겠지.... 못견디게 생각나겠지.... 미치도록 생각나겠지. 죽도록 생각나겠지(그립겠지, 보고 싶겠지)
위의 말은 뒤로 갈수록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아무 대상에게나 '미치도록 생각나겠지'라고 말할 수는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것을 잘 구별하는 것이 언어감각이다.
(2) 가슴에 불씨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불씨라는 것은 사물과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이다. 불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순간 의미 있는 사물을 만났을 때 가슴에 뜨거운 전율과 감동을 느끼게 된다. 가슴의 불씨에 불이 번지는 순간인 것이다. 가슴에 불씨를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는 수시로 감동할 수 있다.
잎이 다진 감나무 가지에 단 한 개 남아 있는 빨간 홍시. 은행잎이 떨어져 쌓인 포도. 저녁나절 남편이 끄는 수레 위에 올라 미소 짖는 배추장수의 아내.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학교에 가는 어린 학생.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껌을 팔고 있는 초라한 노인.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의 가슴 속 남아 있는 불씨에 불을 당길 수 있는 요소다.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간직할 수 있다면 그의 가슴은 풍요롭다고 할 수 있다. 불씨가 꺼지면 눈물도 마르고 감동도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목석에 가까워진다.
3) 언어와 문장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야 한다.
우리가 항용 사용하는 말은 문장상의 말과 다르지 않다. 한 때 문장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바로 고전주의적 사고 방식이 그러했다. 특히 시는 고상하게 다듬어진 아어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잘가노라 닫지 말며 못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긏지 말며 촌음을 아껴스라
가다가 중지곧 하면 아니감만 못하니라
위의 시조에서 '말라', '아껴스라', '중지곧', '아니감만 못하니라' 등은 문장언어다. 일상적 회화에서는 잘 쓰지 않고 문장에서만 쓴다는 말이다. 그러던 것이 낭만주의로 오면서 일상용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가시네야 가시네야
그믐달밤에
귀촉도 우는 영위에 올라
우리 그대로 돌이나 되자
서러워도 서러워도 그믐달밤에
- 김관식 <돌이나 되자> -
위에서는 가시네라고 하는 비어가 그대로 나온다. 고상한 말만 시의 언어가 된다고 했던 옛날의 생각에 크게 위배되는 표현이다.
(4) 과감하게 첫문장을 끌어내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첫문장을 끌어내고 나면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기르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독서와 문장연습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연습은 일기쓰기나 편지쓰기로 할 수가 있다.
* 시(문학)를 가까이 하는 생활
시는 언어를 압축하고 리듬을 맞춘 글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최상의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시라고 한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라는 말은 피아노곡으로 최상의 아름다움을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림도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하면 칭찬이다. 무엇이든지 아름다우면 '그것은 詩야'라고 말한다. 시를 지향하는 마음은 진선미의 상태를 지향하는 상태다.
시의 세계는 군더더기를 다듬어내고 가라앉히고 증류하여 정화한 세계이기 때문에 순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시처럼 아름답지 않다. 문학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이상세계의 표현이다. 있는 세계가 아니라, 있어야 할 세계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문학을 가까이 함으로써 그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문학이 우리로 하여금 제한된 현실의 번잡하고 혼란한 와중에서 떠나게 하며, 무한한 세계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文을 중히 여겨서 정치인을 선발했으며, 시문을 짓게 하여 우수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던 것은 시문의 세계가 선비의 고결한 인격 형성에 큰 영향으로 작용하였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 문학을 끌어들이고 문학을 일상의 생활 속에서 이어가는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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