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사상』, 2023년 겨울호
【김현경의 회고담 19】
김수영 시 읽기 (9)
일시 : 2023년 10월 26일. 11월 11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오늘 읽어볼 작품은 「장시 1」에요. 『자유문학』 1963년 2월호에 발표되었네요. 이 작품에 “채귀(債鬼)”라는 단어가 나와요. 악착같이 빚 갚기를 채근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인데, 김수영 시인이 무척 싫어했는가 봐요.
김현경 : 그렇지요. 우리 집에 땅 주인, 신문 대금 받으러 오는 사람, 수도세 받으러 오는 사람, 야경비를 받으러 오는 사람 등이 있었지요. 그러니 큰 빚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중에서 야경비는 애매한 데가 있어요. 우리 집은 동네와 떨어진 밭 가운데에 있어 한 번도 야경을 돈 적이 없는데도 야경비를 받으러 왔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허름하지만 양옥인 데다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하니 잘사는 줄 알고 악착같이 받으러 왔는지도 몰라요. 도둑이 든 것도 그렇구요. 김 시인은 그 사람들이 오면 피하고 나한테 모두 미루었어요. (웃음)
맹문재 : 이 작품에는 “겨자씨같이 조그맣게 살면 돼/복숭아 가지나 아가위 가지에 앉은/배부른 흰 새 모양으로/잠깐 앉았다가 떨어지면 돼”라는 구절과 함께 “장시(長詩)만 장시만 안 쓰려면 돼”라는 대조적인 구절이 나와요. 김수영 시인은 왜 장시를 안 쓰면 된다고 했을까요?
김현경 : 넋두리 같은 시를 쓰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시시한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에요. 김 시인은 시시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대단한 긍지를 가졌어요. 그러면서도 동네에 나가서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했어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인데도 김 시인은 자세를 낮추었어요.
맹문재 :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작은 일이나 자질구레한 일과 시시한 일은 다른 것 같네요. 김수영 시인은 작은 일이 아니라 시시한 일을 하지 않은 것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작은 일을 소중히 여겼어요. 작은 일도 열심히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잔소리 날 때는 슬쩍 피하면 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두 분이 부부싸움을 하셨는지요?
김현경 : 그런 일은 없었어요. 우리 사이에는 생활 얘기 같은 것은 화제의 대상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 것보다는 영화를 보고 와서 공감대가 맞아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종교가 없었지요. 그런데 “성당으로 가듯이”라는 비유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성당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종교가 없었어요. 종교라기보다는 집안의 어른을 따라 남묘에 가 절을 올린 적은 있지요. 사람들이 남묘에 가서 재수굿을 했어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했어요. 그 당시 장사를 하는 중산층 이상인 집에서는 대부분 재수굿을 올렸어요. 동묘에서도 했고, 북묘에서도 했어요. 북묘는 세검정 쪽에 있었어요. 세검정 옆에서는 나라굿도 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장시 2」에요. “시금치밭에 거름을 뿌려서 파리가 들끓고”라는 구절로 시작되고 있어요.
김현경 : 김 시인과 나 사이에, 다시 말해 한 10년 사이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김 시인이 자라날 때는 왕십리 같은 시궁창은 물론이고 가정에서 개수대 찌꺼기를 길바닥에 버려 아주 지저분했어요. 그런데 내가 자라날 때는 하수도가 설치되어 그전보다는 깨끗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머리가 누렇게 까진 땅주인은 어디로 갔나/여름 저녁을 어울리지 않는 지팡이를 들고/이방인처럼 산책하던 땅주인은”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구수동 집에 찾아오던 땅 주인의 모습 같네요.
김현경 : 똑같아요. 머리가 까지고 지팡이를 짚고 왔어요. 이북 사람으로 월남했는데 크리스천이었어요. 어떤 때는 부인하고 같이 왔는데, 글쎄 그 땅 주인이 부인을 엄청나게 위해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한참 바라보기도 했어요. 부인은 서울 사람인데 사람이 점잖고 괜찮았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시대의 숙명이여/숙명의 초현실이여/나의 생활의 정수(定數)는 어디에 있나”라는 구절이 나와요. 시대의 숙명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김현경 : 민주주의, 자유 그런 것이겠지요. 어느 시대나 괴롭힘이 있었지만, 김 시인은 정말 많은 핍박을 받았어요. 의용군에 붙들려 갔다가 왔다고 빨갱이로 몰고, 정치적인 시를 쓴다고 이어령 씨의 논쟁에서 보듯이 김 시인을 시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그래도 『동아일보』가 원고료도 많이 주고 김 시인을 인정해주었어요.
맹문재 : 이와 같은 차원에서 “대시간(大時間)은 결국 쉬는 시간”이라는 구절은 정신적인 피곤함을 호소하는 것으로도 보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이 늘 피곤을 가지고 있었어요. 노동자 이상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번역도 피를 흘릴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그런 데다가 시대에 대한 고민이 있었으니까 정신적으로 피곤했지요.
맹문재 : 이러한 면에서 보면 “나에게 방황할 시간을 다오/불만족의 물상(物像)을 다오”라는 요구는 시대에 저항하는 모습으로도 읽히네요.
김현경 : 그렇지요. 혼탁한 세상이라도 진리는 보였어요. 오히려 혼탁한 세상에서 진리가 더 빛났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만용에게」예요. 이 작품에 대한 말씀은 여섯 번째 대담에서 ‘순자’와 함께 집중적으로 들어 『푸른사상』 2018년 가을호에 수록되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간단하게 읽으려고 해요. 되돌아보니 ‘만용’이는 어떤 점이 좋았는지요?
김현경 : 말이 없고 꾸준해요. 담양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우리가 양계를 그만두게 되어 시어머니가 계신 도봉동으로 보냈어요. 그곳에서 양계 일을 도왔지요. 도봉동의 집이 아주 컸기에 마당만 쓸어도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또한 우리 시누이, 즉 송자의 남편인 홍영식이 소아과를 운영했는데, 병원이 아주 잘 되었어요. 그러한 일에도 심부름을 했구요. 우리 시어머니가 만용이를 식구처럼 여기고 잘 보살펴주었어요. 우리 두 아들하고도 잘 지내었어요. 만용이의 졸업 사진에 우리 아들하고 같이 찍은 것 보셨지요. 한동안 순자하고 함께 있기도 했어요. 만용이는 양계장 쪽 바깥방에서 자고, 순자는 집안 건넌방에서 잤어요. 그런데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만용이가 도봉동 집에서 나가게 되었어요. 지금 나타나면 김 시인의 상징적인 증인이 되어 여기저기서 우대받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아요.
맹문재 : 저도 만나 뵙고 싶네요. 만용이는 국민대학을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대학의 학비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김현경 : 만용이의 학비는 제때 마련해서 내었어요. 김 시인도 기꺼이 동의했어요. 그때는 양계보다 내가 바느질을 해서 돈을 잘 벌었어요. 돈을 양말에 넣어 보관했다가 학비에 썼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피아노」에요. 이 작품에 대해서도 여덟 번째 회고담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어요. 『푸른사상』 2019년 봄호에 수록되어 있어요. 「피아노」는 1963년 4월호 『현대문학』에 발표한 작품이에요. 김수영 시인은 피아노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값비싼 것이기에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김현경 : 소음에 민감한 김 시인이 피아노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아무 잔소리도 못 했어요. 아들 공부를 잘 시키기 위해서, 또 처제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참은 것이지요. 현락 아우는 서강대학교 생물학과로 진학해 자신이 부족한 영어와 수학을 따라가려고 서서 공부를 했어요. 졸음을 참으려고 한밤중에 피아노를 친 것이지요. 동생은 집중력이 굉장했어요. 서강대 생물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동생이 제대로 레슨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로 치는 곡이 「소녀의 기도」를 비롯해 몇 곡이 안 되었어요. 나의 바로 아래 동생인 현소가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합격했는데 입학하지 않고 한국은행에 입사했어요. 그 동생이 사준 피아노에요. 김 시인이 “값비싼 피아노가 값비싸게 울린다/돈이 울린다 돈이 울린다”라고 표현한 것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빈정거림으로 볼 수 있지요.
맹문재 : “동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누이”는 누구일까요?
김현경 : 송자 시누이 같아요. 이화여대 약대에 들어가 공부를 잘해 화이자 지사장의 비서로 들어갔어요. 그 시누이가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했을 것이에요.
맹문재 : 다음으로 “잡지사에 다니는/영화를 좋아하는 누이”는 누구인지요?
김현경 : 수명 시누이지요. 현대문학사에 취직해서 다녔어요. 아주 인정받는 편집장이었어요.
맹문재 : “식모살이를 하는 조카”도 있었는가 봐요?
김현경 : 우리 시어머니가 세 자매인데, 막내 이모님이 차중락 가수의 어머니예요. 둘째 이모님한테는 딸이 있었는데, 차중락의 집에 가서 일을 거들어주었어요. 그를 말하는 것 같네요. 차중락의 아버지는 신당동에서 ‘신흥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돈을 아주 잘 벌었어요. 신당동에 궁전 같은 기와집을 지어 살았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맹문재 : 제가 얼마 전에 망우리 공원묘지에서 박인환 시인과 이중섭 화가에 대해 답사와 강연을 했는데, 그곳에 차중락 가수의 묘소도 있는 것을 보았어요.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니 동네 사람들이 잘산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김현경 : 그럼요. 비록 엉터리 양옥집이었지만 피아노 소리까지 들리니 도둑이 들 만도 했지요. (웃음) 그 당시 피아노는 정말 상류층 집에만 있을 정도로 값비싼 것이었어요. 나한테 옷을 맞추러 오는 사람들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김 시인은 그 돈 냄새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었지요. 김 시인은 돈이 궁하면 한국은행에 근무하는 처제한테 빌리려 가기도 했는데, 당연히 동생이 싫어했지요. 그러면서도 김 시인은 처제들을 아주 이뻐했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깨꽃」이에요. 이 작품에 대해서 아홉 번째 회고담에서 들려주셨어요. 『푸른사상』 2020년 봄호에 수록되어 있어요.
김현경 : 마포 구수동에 살 때 쓴 작품이지요. 참깨꽃은 참으로 이뻐요. 깨알의 질서가 대단해요. 자연의 질서를 당할 수가 없어요. 6․25전쟁 때 경기도 화성의 사량리로 피란 가서 참깨 농사를 지은 적이 있어요. 박토여서 참깨의 키가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작은 참깨에서 신비하게도 알들이 열렸어요. 그래서 농사는 손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깨는 다 여물기 전에 베어요. 바닥에 자리를 깔고 그 위에 파란 참깨를 세워 놓으면 말라요. 그러면 터는 것이지요.
사량리에서 농사를 지을 때 동생들의 나이가 10살 내외였어요. 어린 나이인데도 열심히 농사를 지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탄복했어요. 고구마도 심고, 열무도 심고 해서 양식을 마련했어요. 고구마가 얼마나 맛있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보리밥 숭늉으로 열무김치를 담근 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다시 먹고 싶어요.
맹문재 : 언제 보리밥을 드시러 가요. 보리밥집에 가면 열무김치가 나오겠지요. 이 작품에는 “깨꽃같이 작은 자질구레한 일/자꾸자꾸 자질구레해지는 일”을 “성장(成長)의 일”이라고 보고 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작은 일을 무시하지 않았어요. 소중하게 생각했어요. 시시한 일은 하지 않았지만,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은 열심히 했어요. 내가 흘린 잉크를 닦는 데 사용하시라고 수건을 만들어 드렸더니 아주 고맙게 여겼어요. 조그만 서랍에 넣고 소중하게 사용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시시한 일과 자질구레한 일을 잘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음 읽어볼 작품이 「너…… 세찬 에네르기」에요. 1963년 6월 1일 『한국일보』에 발표한 것으로 파도를 보고 쓴 작품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이 강릉에 살고 있는 둘째 시누이 수련의 집에 갔다가 온 다음에 쓴 작품이에요. 시누이의 남편이 채헌덕인데 내과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었었어요.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병원이 잘되었어요. 의자에 오래 앉아야 하니 내의에 삭은 냄새가 밸 정도라고 해서 내가 내의를 인조견으로 헐렁하게 만들어 보낸 적이 있었어요. 그것이 고마운지 2등 차표까지 끊어 보내고 자꾸 놀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이틀 밤을 자고 왔어요. 시누이가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돈도 잘 썼어요. 바닷가에 가서 회를 먹고 오징어도 몇 축을 선물로 사주었어요. 시누이가 사준 보따리를 들고 창동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도봉동 시댁에 들러 나누어 드렸어요. 그 당시 창동에 버스터미널이 있었어요. 시어머니의 댁은 버스터미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어요. 그래서 시댁을 창동 집이라고도 하고 도봉동 집이라고도 했어요. 시누이는 남편과 금실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요. 그런데 1969년 칼(KAL)기 납북사건으로 집안이 무너졌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요.
맹문재 : 언젠가 말씀해주신 일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참으로 안타까워요.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후란넬 저고리」에요. 표준어는 플란넬(flannel)인데 작품의 제목을 살려서 그래도 읽어보지요. 『푸른사상』 2021년 봄호에 읽은 것이 중복되기도 해요. 그래서 그때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보충하는 방식으로 정리할게요. 선생님께서 저고리를 직접 만드신 것인지요?
김현경 : 후란넬은 겨울 옷감 종류에요. 그때는 미군 구호 물자였어요. 김 시인에게 사다가 입히면 딱 맞았어요. 김 시인이 체격이 커 43사이즈였어요. 세비로(セビロ) 코트로 아주 멋있었어요. 소매 하나 안 고쳐도 되었어요. 김 시인이 체격이 컸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입는 옷이 맞았던 것이에요. 곤색 재킷과 바지를 샀어요. 김 시인이 외출복으로 입었어요. 김 시인은 곤색을 좋아했어요. 이처럼 후란넬 저고리를 내가 만들지는 않았어요. 남대문의 도깨비시장에 가서 사왔어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값이 쌌어요. 그런데 후란넬은 완전한 모직이었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 후줄근해졌어요. 김 시인이 세상을 뜬 뒤 그 옷들을 유정 씨에게 많이 드렸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후란넬 저고리에 물건들을 많이 넣고 다녔는가 봐요. 가령 “물부리와 담배 부스러기”와 “치부책 노릇을 하는 종이쪽”과 “연필” 등을 작품에서 소개했네요. 그런데 “돈은 없다”고 했네요.
김현경 : 그렇지요. 필기도구로 몽당연필은 꼭 넣고 다녔어요. 만년필을 넣고 다니기도 했는데, 잉크가 떨어지면 대용으로 쓰려는 것이었지요. 김 시인은 주머니에 돈이 없었어요. 열심히 번역을 해서 번 돈을 다 나한테 갖다주었어요. 언제든지 나한테 용돈을 타서 썼어요. 그러니 내가 김 시인한테 돈을 못 번다고 탓할 수 없었어요. 한 번도 잔소리를 한 적이 없어요. 되레 내 지갑에는 돈이 있었어요. 그래서 하이데거 전집도 내가 사 드렸어요. 어느 날 충무로 초입에 있는 외국 서점에 함께 갔다가 하이데거 전집이 나온 것을 보고 내 지갑에서 돈을 내어 산 것이에요. 김 시인은 서점 주인이 전집을 묶어준 것을 개선장군처럼 들고 왔어요. 김 시인은 하이데거 전집을 정독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똑같다고 여러 차례 말했어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어요. 내가 도봉동 김수영문학관에 하이데거 전집의 일부를 기증했어요.
맹문재 : 작품을 읽어보면 “왼쪽 안 호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비워두었네요. 그곳에 “휴식의 갈망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하고 있는데, 휴식이 필요했는가 보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은 휴식이 필요했어요. 무위의 생활은 없었어요. 늘 생각하고 고민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여자」예요. 1963년 12월 『사상계』 문예증간호에 발표했어요.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여자를 통해 설움을 알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어요. 제1연에는 “전란도 서러웠지만/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한 면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포로수용소에 간호사로 있던 노 여사가 있었어요. 그런데 노 여사의 남편이 시각 장애인이라잖아요. 휴전된 뒤 서울로 올라와 미도파 백화점에서 장사를 했어요. 김 시인은 긍지가 강한 사람이에요. 그 여자의 손을 한 번도 잡지 않았다고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의 제2연에서는 “과외공부집에서 만난/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에게 느낀 여자”를 보고 “여자의 본성은 에고이스트”라고 진단하고 있어요.
김현경 : 종로구 당주동에서 큰아이가 과외공부를 했어요. 그 상황을 그린 것이에요. 학부형회 여성들이 대단했어요. 여자들은 에고이스트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돈도 벌어야 하고, 아내 역할도 해야 하고, 어머니 노릇도 해야 하는 등 모든 것을 다 해야 했잖아요. 그런데 나는 에고이스트가 아니었어요. (웃음)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돈」이에요. 김수영 시인은 돈에 대한 시를 많이 썼지요. 그 시대는 다들 가난했는데, 소비문화의 속도는 빨라 돈에 대한 갈등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김현경 : 이 작품에 나오는 “30원”은 지금으로 치면 30만 원이 거의 되는 금액이에요. 김 시인은 원고료를 비롯해 돈이 생기면 모두 나에게 주었어요. 돈에 대한 관심이 없었어요. 외출할 때 필요하다고 얘기하면 내가 드렸어요. 그런데 돌아가시는 날에는 신구문화사에서 번역료로 10만 원을 받아서 3만 원을 따로 챙겨 안주머니에 넣었어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어요.
맹문재 : “풀방구리를 드나드는 쥐”의 장면도 나오네요. 풀방구리란 풀을 담아 놓은 질그릇을 말하지요. 따라서 그릇에 담긴 풀을 먹으려고 쥐가 드나드는 것과 같이 누군가 어느 곳을 자주 드나드는 모양을 비유해서 한 말이지요.
김현경 : 우리 둘째가 제 아빠를 닮았어요. 네댓 살 때 용돈을 가져가곤 했어요. 하루는 김 시인이 둘째를 뒤따라가 보았대요. 그랬더니 10원을 가지고 1원어치 풀빵을 사고 9원을 챙겨 만화가게 들어가더래요. 그리고는 새로운 만화책을 골라 엉덩이에 깔고 앉아 읽기 시작하더래요. 그래서 가게 문은 열고 들어갔는데 아는 척도 안 하더래요. 다른 아이들이 네 아빠가 왔다고 해도 꿈쩍 안 하다가 고개를 들고는 나도 다 읽을 수 있다고, 다 안다고 하더래요. 둘째는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만화가게 아주머니한테 물었어요. 만화가게에서 한글을 깨우친 것이에요. 어느 해 겨울에는 나일론 바지를 입고 갔다가 난로에 스쳐 오그라들게 되자 만화가게 아주머니한테 비싼 바지라고 하면서 물어내라고 했대요. (웃음)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반달」이에요.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가시처럼 생각된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어요. 무슨 의미일까요?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 집 앞에 결명자를 키우는 밭이 있었어요. 무나 배추를 심은 채소밭도 있었구요. 결명차 꽃이 참으로 이뻐요. 차밭을 가꾸는 사람은 그 마을에 사는 전문 농사꾼이었고, 밭 주인은 따로 있었어요. 농사꾼은 영감이었는데, 정말 농사를 잘 지었어요. 차밭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고 평화로워졌어요.
맹문재 : 그 밭에 “나는 걸핏하면 개똥을 갖다 파묻는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사실인지요?
김현경 : 그럼요. ‘복실이’라는 개를 집에서 키웠어요. 유정 시인이 우리 집에 갖다 주었어요. 우리가 양계 일을 접은 뒤 그 개를 만용이와 함께 양계하는 도봉동 시댁에 보냈어요. 김 시인은 개똥을 묻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어요. 되레 나도 이런 궂은일을 할 수 있다는 인상을 지었어요.
맹문재 : “우리집 여편네는 이것을 모두/자기 밭이라고 한다 멀쩡한 거짓말이다”라는 표현도 나와요.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요?
김현경 : 사람들이 물어보면 집하고 계사하고 밭하고 다 우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웃음)
맹문재 : “어렸을 때 어머니는/나의 얼굴의 사마귀를 떼주었다/입 밑의 사마귀와 눈 밑의 사마귀”라는 구절과 “그런 사마귀가 나의 아들놈의 눈 아래에” 있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사실인지요?
김현경 : 사실이에요. 나는 보지 못했는데, 시어머니께 들은 것이에요. 김 시인이 어렸을 때 얼굴에 사마귀가 있었대요. 큰아들 눈 아래에도 사마귀가 있었어요. 자라나면서 자연적으로 없어졌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죄와 벌」이에요. 이 작품의 상황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지요. 왜 김수영 시인이 우산대로 아내를 때렸을까요?
김현경 : 안소니 퀸이 출연한 영화 <길>을 둘째 아이와 함께 보고 나오다가 그 일이 있었어요. 이탈리아의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만든 영화에요. 차력사의 조수 노릇을 하면서 그를 사랑하는 한 여성을 그렸지요. 순정의 사랑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녀가 불던 나팔 소리가 떠올라요. 김 시인이 그 영화를 보고 나와 길거리에서 나를 우산대로 때린 이유를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여러 가지 일들이 작용했겠지요. 갑자기 순정에 대한 것이 떠올라 나하고 사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요.
맹문재 : 그날 화해를 하셨는지요? 아니면 언제 화해를 하셨는지요?
김현경 : 오래 가지 않았어요. 그날은 돌아와 각자 방에 들어가 잤어요. 나는 너무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기도 했고 괘씸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다음날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좁쌀로 쑨 미음을 갖다 드렸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우리들의 웃음」이에요. 이 작품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우리나라가 종교국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을 갖는다”라는 구절로 시작되어요. 우리나라는 종교국이 아닌데,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김현경 : 표현 그대로예요. 우리나라는 종교국이 아니더라도 민속 신앙이 있잖아요. 그래서 차례를 지내고 굿도 하잖아요. 우리 아버님도 일 년에 한 번씩 남묘에 가서 재수굿을 올렸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했는데 어떤 아이들일까요? 물론 한국전쟁 전에 서울대 의대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강사로 출강한 사실이 있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우리 집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아 가정교사도 붙이고 이모도 붙이고 했어요. 김 시인이 직접 가르치기도 했어요. 또 김 시인은 한국전쟁 때 부산 피란 시절 선린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적도 있고, 서라벌예대, 연세대, 서울대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선린상업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김현경 : 야간부였어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한 1년 정도 했을 것으로 보여요. 아마 낮에는 다방에서 보내고 저녁에 강의하러 갔을 것이에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참음은」이에요. 김수영 시인은 일상생활에서 이러저러한 일들 겪을 때 참았는지요? 대체로 참는 성격이었는지요?
김현경 : 참는 성격이에요. 그렇지만 술을 먹으면 폭발했어요. 30대에는 심했는데, 40대가 되니 유순해졌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실 즈음에는 시인의 권위를 가지게 되어 잡지사들로부터 온 청탁서가 밀려 있었어요. 일간지에서도 신년시를 청탁했을 정도였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 “말죽거리”가 나오는데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김현경 : “말죽거리”에 김 시인의 외갓집이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동생이 장마철에 집이 무너졌다고 찾아왔기에 금비녀를 빼주었대요. 그 외삼촌은 나중에 차중락 가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신흥인쇄소를 맡게 되어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차중락의 어머니가 김 시인의 이모가 되는데, 우리 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인물이 좋았어요.
맹문재 : 다음에 읽어볼 작품이 「거대한 뿌리」에요. 1964년 5월호 『사상계』에 발표했어요. 이 작품은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고, 저도 여러 차례 공부한 적이 있어요. 특히 “김병욱” 시인에 대해서는 이전의 대담에서 자세하게 들려주셨어요. 저는 2013년 「김병욱의 시에 나타난 세계 인식 고찰」이란 논문을 학회지(『한국문학이론과 비평』)에 발표한 적도 있어요. 이 작품에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가 나오는데, 아마도 김수영 시인이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었다고 보여요. 그런데 이 책은 1994년 이인화 소설가가 번역해서 ‘살림’ 출판사에서 처음 간행되어요. 그러므로 번역되기 이전의 책을 읽은 것이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영어로 된 책을 보았는지, 일본어로 된 것도 보았는지, 좀 헷갈리네요. 김 시인이 아주 재미있게 읽고 나서 나에게 보라고 건네주기도 했어요. 김 시인은 좋은 책은 꼭 나에게 읽어보라고 권했어요. 출판사에서 얻어왔는지 책이 낡았던 것 같아요. 김 시인은 이 작품에서 나타냈듯이 우리의 전통을 아끼려고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같은 구절이 나와요.
김현경 : 인경전은 보신각을 달리 부르는 말이에요. 인경전 소리는 일종의 통행금지 신호 소리예요. 대궐에 있는 수문장들이 인경을 치면 대문이 닫혔어요. 사직동에서 가까운 대문이 자하문이지요. 자하문 밖으로 내려가 우측에 강 씨 집안이 있었어요. 현진건 소설가의 집도 있었는데, 양계장을 했어요. 우리 친할머니가 강 씨에요. 친할머니의 친척 중에 강 상궁이라고 서답방(궁중의 ‘빨래터’)에 있다가 궁이 망하니 우리 집에 와 빨래 등 집안일을 했어요. 바느질 솜씨가 대단했어요. 우리 할머니는 키가 아주 컸어요. 선비인 할아버지는 서울 남자로 키가 작고 이쁘게 생겼어요. 그런데 낮잠을 자도 한 이불에서 잘 정도로 금실이 좋았어요. 강 씨 할머니는 두 딸을 두었는데, 큰고모가 최남선 씨의 형인 최홍선 씨 집으로 시집을 갔어요. 최홍선 씨는 을지로 4가에서 <홍제약국>을 운영했어요. 큰고모는 키가 아주 컸어요. 민 씨네 집으로 간 작은고모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미인이었어요. 얼마나 얘기를 재미있게 하시는지 우리가 넋을 잃고 들었어요. 민 씨네 집은 전매국을 했어요. 내가 거기에서 나온 칼표 담뱃갑을 우리 집의 광에서 본 적이 있어요. 빨간색이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맹문재 : 그 당시 청계천에 사람들이 빨래할 정도로 물이 많았는지요?
김현경 : 그 정도는 되었지요. 청계천은 길가 평지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길 아래로 내려가야 했어요. 돌로 빨래판을 다 만들어 놓았어요. 종로구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청계천에서 빨래했어요. 박인환 시인의 집 쪽에서도 개천이 흐르고 있었어요.
맹문재 : 박인환 시인이 살던 광화문 집에 가보셨는지요?
김현경 : 박인환 시인이 이정숙과 결혼한 뒤에는 가보지 않았어요. 이정숙이 박인환과 결혼했다는 얘기는 한참 뒤에 들었어요. 이정숙이 진명여고에 다닐 때 나와 같은 반이었어요. 점심시간 때 도시락을 함께 먹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광화문 집에도 가봤어요. 집은 크지 않더라구요.
맹문재 : “이북 친구들”이 나오는데 누구일까요?
김현경 : 김이석 소설가, 유정 시인, 박태진 시인, 김규동 시인 등이 떠오르네요.
맹문재 : “제3인도교”는 어디일까요?
김현경 : 제3한강교는 지금의 한남대교이지요. 따라서 “제3인도교”는 그 아래에 놓인 것이지요. 제3한강교는 혜은이라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 유명해졌지요. 혜은이하고 친한 내 친구가 있었어요. 혜은이가 집에 들어갈 때 핸드백을 맡기고 갔을 정도였대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비속어를 사용했는데, 평소에 김수영 시인이 비속어를 쓰셨는지요?
김현경 :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았어요. 시에만 쓴 것이에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시」에요. 작품을 소개해볼게요.
신앙이 동하지 않는 건지 동하지 않는 게
신앙인지 모르겠다
나비야 우리 방으로 가자
어제의 시를 다시 쓰러 가자
―「시」 전문
김현경 : 정말 너무 훌륭한 시인과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거위 소리」예요. 역시 작품을 소개해볼게요. 이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 쓴 것인지요? 마포 구수동 집에 거위를 키우셨는지요? 아니면 구수동 동네에 거위를 키우는 집이 있었는지요?
거위의 울음소리는
밤에도 여자의 호마색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게 하고
강물이 흐르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웃는 얼굴을 더 웃게 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
―「거위 소리」 전문
김현경 : 우리 집에서 거위를 키우지는 않았어요. 구수동 동네에도 없었어요. 사직동에서 조금 내려오면 양옥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거위 두 마리를 길렀어요. 가까이 가면 꺼억꺼억 짖어 아주 무서웠어요. 개처럼 집을 지켜주었어요.
맹문재 : 작품에 나오는 일본식 한자어인 “호마색(縞瑪色)”은 한국식 한자어인 “호마노색”이네요.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여러 가지 빛깔이 겹겹이 줄이 져 있는 석영과 단백석, 옥수의 혼합물”이라고 정의되어 있네요. 이 작품에서 “호마색 원피스”가 나오는데 어떤 인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요.
김현경 : 나에게 하덕인이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에게 플레어스커트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올해(2023년) 10월 2일에 세상을 떠났어요. 옷 색깔이 호박색이었어요. 그 친구가 곧잘 살 때였는데, 나에게 옷 하나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옷감 중에 몇 년 묵은 것이 있어 돈은 주거나 말거나 해 입혀야겠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너무너무 이뻤어요. 벨트는 가죽으로 해 옷 색깔과 맞았어요. 친구가 그 옷을 입고 우리 집에 왔어요. 그랬더니 김 시인이 아주 멋지다고 칭찬했어요. 내가 만든 줄 모르고 그랬던 것이지요. (웃음) 플레어스커트는 넓고 주름이 저절로 떨어지는 옷이에요. 김 시인이 친구의 그 옷을 보고 쓴 작품이에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강가에서」에요. 이 작품에는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저이는 우리 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라고 시작하고 있어요. 이 작품에 나오는 “저이”는 누구인지요?
김현경 : 김00라는 시인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 얼굴이 잘생겼어요. 꽃가게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김 시인을 아주 좋아했어요. 우리 집에 오면 김 시인이 동네 막걸릿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 문상을 오기도 했어요. 나한테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한테 가서 체비지(替費地)를 좀 부탁해 얻어 꽃가게를 함께하자고 했어요. 그러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거절했어요. 김현옥 서울시장이 김 시인의 무덤을 하얀 국화꽃으로 채울 만큼 관심을 보여주었어요. 우리 집에 쌀 한 가마니를 보내주었고, 무슨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는 연락을 인편으로 보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찾아가질 않았어요. 그때는 신문로에서 하는 바느질이 잘 되기도 했어요.
맹문재 : 작품의 내용이 사실적인 것으로 보이는데요?
김현경 : 김 시인이 그를 만나고 와서 나에게 얘기해준 것이 그대로 그려져 있어요. 김 시인은 그런 사람에게는 술을 안 사요. 또한 언젠가 얘기한 이씨 왕조의 후손이라는 미스터 리(「미스터 리에게」) 같은 사람이 사는 술을 얻어먹지 않으려고 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나는 이렇게도 가련한 놈 어느 사이에/자꾸자꾸 소심해져만 간다/동요도 없이 반성도 없이/자꾸자꾸 소인이 돼간다”라고 자기반성을 하고 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이 호주이고 세대주인데, 제대로 노릇을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있는 것이지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X에서 Y로」이에요. 제목이 특이하네요.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마포구 구수동을 ‘시골’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김현경 : 1960년대 초반 그곳은 시골이었어요. 우리 집이 있고 그 아래에 캐비닛을 만드는 공장이 있었어요. 주인이 자주 바뀌어 다른 공장을 하기도 했어요. 우리 집 아래 한강 쪽으로 초가집이 있었는데, 경북 성주가 고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남편이 아이 하나 데리고 집안에서 살림을 하고, 아내가 참기름을 이고 나가 팔아서 생활했어요. 그런데 그 남편이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보였어요. 집안 살림도 잘했고, 쪼그마한 밭도 잘 가꾸었어요. 그 집 사람들이 가끔 생각나요. 그리고 그 아래 작고 예쁜 양옥이 한 채 있었어요. 타일로 만든 깨끗한 집이었는데, 내가 샀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사서 세를 주었어요. 그런데 신문로에 전세로 이사 와서 그 집과 양계장하며 살던 집을 팔았어요. 시댁의 사업이 잘 안 되어 그랬어요.
그 양옥집 뒤에 조애실이란 시인이 살고 있었어요. 조 시인의 시작품 「곰」이 성북동에 있는 ‘국제 스카이웨이호텔 곰의집 마당’에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어요. 재미있는 시작품이에요. 이름을 ‘鳥哀失’이라고 임의로 써서 김 시인한테 연하장을 보낸 적도 있어요. 조애실은 월남한 시인이었는데, 결혼하지 않고 있었어요. 윤곤강 시인과 모윤숙 시인과 친한 사이였어요. 조애실 시인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모윤숙 시인에 관한 얘기도 들려주었어요. 모윤숙은 유엔 총회 한국 대표였는데, 지부 사무실이 덕수궁 안에 있었어요. 유엔 인도 대표였던 메논(Vengalil Krishnan Krishna Menon)과도 관계가 깊었어요.
맹문재 : 메논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네요.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 결렬되자 유엔에서는 남북한 자유로운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는데, 그때 위원단의 의장이 인도의 대표 메논이었네요. 위원단의 활동이 이북에서는 소련의 반대로 불가능해지자 남한에서만 총선서를 치렀는데, 메논의 역할이 컸어요. 해방 정국의 상황이 좀 더 이해되네요. 마포구 구수동의 상황도 구체적으로 들어오네요.
맹문재 : “은단(銀丹)에서 인단(仁丹)으로”에서 인단은 무엇인지요? 어렸을 때 은단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한약 냄새가 나면서 입안이 얼얼하고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은 것이 기억나네요.
김현경 : 글쎄요. 그전에는 인단이라고 했는데, 은단보다 좀 더 컸던 것으로 생각되네요.
맹문재 :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은단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인단으로 불렸다네요. 고려은단의 창업자 조규철 씨가 1946년 개성에서 구향제(口香劑) 회사를 설립해 인단을 만들면서 이름을 은단으로 바꾸었다네요. 북한에서는 아직도 인단으로 사용한다네요.
맹문재 : 성북동에서 구수동으로 이사 온 얘기를 하는 작품으로 보여요. 이사 올 때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발목이 굵은 여자들이 많이 사는 나의 마을로/지구에서 지구로” “나는 왔다”라는 표현을 보면 구수동으로 이사 온 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소음 나지 않는 집을 원해서 그런 조건의 집을 마련한 것이에요. 김 시인은 이사 오는 날 처음 집을 보았어요.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이사」인데 「X에서 Y로」와 유사한 제재로 보이네요. 작품은 다음과 같아요.
이제 나의 방은 막다른 방
이제 나의 방의 옆방은 자연이다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이
그치는 곳이라고 해도 좋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름이 있고
갯벌에 고인 게으른 물이
벌레가 뜰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고
그것이 보기 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가까운 거리의 부엌문이 있고
아내는 집들이를 한다고
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쑬 것이다
―「이사」 전문
김현경 : 제일 끝에 김 시인의 서재를 만들었어요. 큰 유리문을 달아 방이 밝고 시원했지요. 김 시인의 방은 산언덕이 가까웠기에 자연에 가까운 것이었지요.
맹문재 : 실제로 “집들이를 한다고/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쑤었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팥죽을 쑤어 몇 집에 나누어주었어요. 이사 간 뒤 봄가을에 집을 이리 늘리고 저리 늘리고 했어요. 집을 늘리게 되면 인부들이 와서 작업을 해야 하니 시끄러울 수밖에 없어 김 시인이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양계를 접고 난 뒤에는 방을 연립주택처럼 네 칸 만들었어요. 세 칸은 세를 주었어요. 그런데 1년도 못 되어 땅 주인이 무허가 집이라고 난리를 쳐서 헐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일어볼 작품이 「말」이에요. 이 작품에 나오는 “동계(動悸)”의 뜻은 ‘심장의 고동이 심하여 가슴이 울렁거림’이에요. 이와 같은 말은 김수영 시인이 작품 활동을 하는 시기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는지요?
김현경 : 그렇지 않아요. 김 시인이 기관지가 안 좋아 밤낮으로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었어요. 타구를 청소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맹문재 :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라고 한 것으로 보면 김수영 시인은 평소에 죽음을 의식한 것 같아요. 죽음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이려고 한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없어지는 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슬프고 무서운 일이에요. 공포 의식의 최고라고 생각해요.
맹문재 : “무언의 말”을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라고 했어요.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이고 “만능의 말”이라고도 했어요. 김수영 시인은 무언의 말을 무겁게 인식하고 있어요. 실제로 평소에 말이 없었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번역하고 글 쓰고 생각하느라 말할 시간이 없었어요.
맹문재 : 그래서 평소에는 말씀이 없다가 술을 드시면 많이 하셨는가 보네요.
김현경 : 얼마 전에 고은 시인이 집에 찾아와서 김 시인에 관한 얘기를 했어요. 어느 날 명동의 <동방살롱>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김 시인이 일어나 인민가를 크게 불렀다잖아요. 바깥에서는 순경들이 왔다 갔다 했대요. 그래서 고은 시인이 다급해 김 시인의 입에 주먹을 넣어 막았대요. 김 시인은 술을 마시면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어요. 이채롭고 멋있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현대식 교량」이에요. 『현대문학』 1965년 7월호에 발표한 작품이네요. 이 다리는 1965년에 준공된 제2한강교, 지금의 양화대교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네요. 제1한강교(한강대교)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8년에 준공된 것으로 보아 7년이 지난 상황에서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김현경 : 그렇게 생각되네요.
맹문재 : 이 작품은 “현대식 교량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가 된다”라고 시작하는 것으로 현대와 과거의 대조 혹은 대립을 볼 수 있었어요. 과거란 “식민지의 곤충들”이라는 것에서 일제 강점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물론 현대란 식민지 이후, 즉 우리나라의 광복 이후를 말하겠지요. 그래서 “나이 어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다리가 부자연스러운지를 모른다”라고 했는데, 이 나이 어린 사람들이 반항보다는 “나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했어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젊은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젊은이들이 김 시인을 많이 알아주었어요. 젊은이들이란 대학생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김 시인이 서라벌대, 연세대, 서울대에서 강의했지요. 연세대에서는 인기가 많아 강의를 강당에서 했어요. 학생들로부터 기립 박수까지 받았어요. 김 시인이 연극을 했기 때문에 발성법이나 언어 구사력이 있는 데다가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강의를 참 잘했어요. 전망이 없는 시대에 김 시인의 강의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젊음과 늙음이 엇갈리는 순간”에 “사랑을 배운다”라고 하고 있어요. 현대식 교량에서 구세대와 신세대의 이해와 신뢰와 사랑을 함께하는 것으로 보여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분이셨어요. 그런 분의 강의를 듣는 것이 쉽지 않았지요. 문득 중학교 때 지리와 서양사를 가르쳤던 정갑 선생님이 떠오르네요. 우리나라 역사부터 가르친 분이셨어요. 해방된 뒤 찾아뵈려고 했는데 월북해서 뵙지를 못했어요. 이화여대에 서양사를 가르친 조현경 교수님이 계셨어요. 너무 앞서가는 강의를 하시어 나중에 이화여대에서 해직되었어요. 정지용 시인은 정말 많은 지식을 가진 분이셨어요. 나전어(羅甸語)도 하셨어요. 영어를 영문과 교수보다 더 잘했어요. 『시경』을 강의하셨으니 한문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내가 시경 시간에 판서를 했어요. 돈암동에 사실 때 일주일에 한 번은 찾아뵈었어요. 선생님께서 『백록담』 시집을 주셨는데, 6․25전쟁 때 잃어버렸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65년의 새해」에요. 이 작품은 1965년 1월 1일 『조선일보』에 「너는 여전히 기적일 것이다-새 아침에」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어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처음으로 발표한 신년시예요. 『조선일보』에서 청탁이 왔는데, 내가 청서했어요. 김 시인이 큰 신문사에서 인정을 받고 문단의 위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어요. 김 시인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도 보았어요. 지프차로 원고 뭉치가 와 내가 거들기도 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는 “그때 너는 한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여섯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때 너는 열일곱 살이었다”, “너는 이제 열아홉 살이었다”, “너는 이제 스무 살이다”라는 나이가 나와요. ‘그때’의 나이와 ‘이제’의 나이가 상징하는 것이 다른 것 같아요.
김현경 : 김 시인의 이력이 토대로 된 것 같아요. 김 시인이 태어나 여섯 살 때 계명서당에 다녔고,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때 선린상업학교에 다녔잖아요. 그 얘기를 쓴 것으로 보여요.
맹문재 : 열아홉 살과 스무 살은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보여요. 다시 말해 이 작품을 쓴 1965년은 해방된 지 스무 살이 되는 셈이지요. 그리고 열아홉 살에 회의가 굳어갔다는 것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대일외교 협상에 따른 정치 상황을 담은 것 같네요. 국민이 대일외교 협상을 굴욕 외교라며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자 박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투쟁을 억압했지요. 개인이 민족의 한 구성원이 되기에 개인의 이력이 나라의 역사에 포함될 수 있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38선 안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38선 밖에서 받은 모든 굴욕이/전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제임스 띵」이에요. ‘제임스 띵’은 미국의 영화배우 제임스 딘(James Byron Dean)을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제임스 딘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가 출연한 <에덴의 동쪽>, <이유 없는 반항>, 그리고 <자이언트> 등이 아주 인기였어요. 김 시인은 제임스 딘의 연기, 눈짓, 몸짓 등을 보면서 타고난 배우라고 했어요. 제임스 딘은 반항아의 대명사였어요. 그는 일찍 세상을 떴어요. 우리는 좋은 영화가 상영되면 을지로 2가에 있는 중앙극장이나 충무로에 있는 수도극장에 가서 보았어요. 단성사에 가서 보기도 보았어요. 수도극장에서 좋은 외화를 많이 상영했어요. 1944년 테너인 후지다 스쿠치의 독창회가 있어 보기도 했어요. 내가 그 당시 음악을 무척 좋아했어요. 빅터(Victor) 전축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명전사에서 매킨토시 전축을 사서 내 방에 놓아주셨어요. 엘피(LP)판도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신문 배달부가 신문값을 받으러 왔는데, 김수영 시인이 짜증을 내는 상황을 담고 있어요.
김현경 : 신문 배달하는 아이들이 사무를 인계할 때 신문값도 매듭을 지어야 했어요. 김 시인은 내가 집에 들어와야 신문값을 내었는지 안 내었는지 알 텐데, 그들이 신문값을 계산해 달라고 하니 짜증스러웠겠지요. 김 시인은 책도 읽고 원고도 써야 하는데 그들이 찾아와 돈 이야기를 하니 그랬던 것이에요. 그때는 신문 배달부나 신문사 보급소 운영인이 영수증을 가지고 일일이 신문을 보는 집을 방문해서 신문값을 받아 갔어요. 내가 밖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눈에 선해요. 집안의 살림을 내가 했으니 김 시인은 가정 경제에 대해서 몰랐어요. 그때 우리 집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구독했어요.
맹문재 : “조그만 눈을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미소를/띄우고 섰”다는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이 그들에게 다음에 오라고 해도 가지 않고 신문값을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이지요. 양옥집인 데다가 피아노 소리도 나니 그들이 보기에 신문값을 줄 형편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맹문재 : “이상한 지방색 공포감”이란 어떤 것일까요?
김현경 : 사투리를 유난히 쓰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지요. 경상도 사람들과 이북에 내려온 사람들이 사투리가 심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김수영 시인은 “내가 주어야 할 것도 신문값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김현경 : “수도세, 야경비, 땅세, 벌금, 전기세”는 물론이고 정부에서 하는 일도 없으면서 국민에게 혈세를 받아 간다고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악정(惡政)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맹문재 “백양궁(白羊宮)의 비약이 없는 날에는” 같은 표현은 비유가 참으로 뛰어나요. 백양궁은 황도 12궁 중에서 가장 첫 번째 궁이지요.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이나 솟아나는 분수를 상징하지요. “불 피우는 소리처럼 다 들리고/재 섞인 연기처럼 다 맡힌다” 같은 표현도 와 닿아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시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밤낮으로 시를 생각하는 분이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 “보꾹”은 의미는 무엇인지요?
김현경 : 천장을 말하는 것이에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미역국」이에요. 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네요. 평소에 미역국을 자주 끓여 드셨어요.
김현경 : 내가 미역국을 자주 끓여드렸어요. 잘 드셨어요. 내가 미역국을 잘 끓이잖아요. 미역국은 간을 조선간장으로 하면 안 되고 젓갈로 해야 되어요. 김 시인은 밥상을 아무렇게나 차리면 안 되었고 항상 반찬이 있어야 했어요. 또 국물이 꼭 있어야 했어요.
맹문재 : 미역국에 대해 “환희인 걸 어떻게 하랴”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것을/결혼의 소리라고 부른다”라고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현경 : 미역국은 보통 산모가 먹잖아요. 그런 이미지일 수 있지요. 김 시인은 먹는 생활을 굉장히 긍정했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적 1」이에요. 1966년 『한국문학』 봄호에 「적」으로 발표되었어요. 김수영 시인은 작품에서 적을 많이 나타내고 있어요. 작품마다 대상이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 적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작품을 소개해볼게요.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 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
―「적 1」 전문
김현경 : 김 시인에게 반동이 되는 사람은 다 적이지요. 그 첫 번째가 여편네인 나를 지칭하지요. (웃음) 내가 살림을 도맡아서 했으니 거북하게 생각한 면도 있겠지요. 그래도 나는 김 시인이 커피를 마실 수 있게끔 구공탄 난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을 정도로 신경을 썼어요.
맹문재 : 그럼요. 그 당시는 어떤 커피를 마셨는지요?
김현경 : 인스턴트 가루 커피였어요. 그때에도 많은 커피 회사의 제품이 나왔어요. 물론 외제도 많았어요. 미국 제품을 팔러 다니는 장사가 있었어요. 노리다케도 그 당시 산 것이지요. 내가 다니던 장관 집에서 분홍색 12인조를 구입하기에 나는 까만색으로 샀어요. 12인조를 사니 두 개를 보너스로 주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라고 마무리되고 있어요. 이러한 면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에요. 다시 말해 생활하는 것이 다르니 아내가 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미워해도 아내를 바꿀 수는 없잖아요. (웃음) 김 시인도 열심히 일했지만, 돈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은 면이 있었어요. 결국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절대적일 수밖에 없으니 동지 같다고 말한 것이지요. 김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늘 긴장하고 있었어요. 느슨하게 뒹굴지 않았어요.
맹문재 : 다음 읽어볼 작품이 「적 2」이에요. 이 작품도 1966년 『한국문학』 봄호에 「적」으로 발표되었어요. 이 작품에서 “제일 피곤할 때 적에 대한다/날이 흐릴 때면 너와 대한다/가장 가까운 적에 대한다/가장 사랑하는 적에 대한다/우연한 싸움에 이겨 보려고”라고 표명하고 있어요. 어떤 상황인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자신을 나타낸 것이지요. 고백한 것이에요. 내가 김 시인이 술을 마시고 왔다고 해서 화를 내나, 돈이 없다고 해서 조르기를 하나,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지요. “쉬지 않는 것은 처와 처들뿐”이라고 했듯이 나는 쉬어보질 않았어요. 김 시인이 그러한 면에 미안해한 것이에요. 가장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김수영 시인의 적은 부정적인 상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김현경 : 그렇지요. 김 시인은 긍지가 대단했어요. 번역 일을 더디게 해도 수작을 못 부리는 사람이었어요. 나쁜 짓을 못했어요. 나는 그러한 정직한 태도를 좋아했어요. 어떤 때는 거룩하게 보이기도 했어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 『먼 곳에서부터』(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
【사진 설명】